' 오빠, 제발... '
저, 저기! 나 화, 화장실 한번만!
정연을 훑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그녀는 큰 볼일이라며 화장실 제일 안 쪽 칸으로 가서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1교시 종이 울릴 애매한 시간, 부디 정국이 받기를 바라고 간절히 빌며 입술을 곱씹었다. 비록 큰 볼일을 본다고 했지만, 시간 지체를 하면 할 수록 인내심이 없고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따지는 여학생은 감히 본인을 기다리게 했다며 화장실에 들이닥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거는 정연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녀를 눕히고... 끔찍했다, 무서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국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 아니고 무슨 일 있어? 라고 묻는 정국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 끝을 세게 물고, 눈을 부릅 뜨는 정연은 최대한 빠르게 할 말을 전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아니, 집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늦을 테니 먼저 자라고. 그리고 이 이상으로 정국의 목소리를 들으면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도움을 청할 것만 같아서 무작정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화장실을 나오는 정연은 두 눈을 벅벅 비비고 제 발로 여학생 무리가 있는 체육관 창고로 향했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을 부르면 되지만, 정연은 스스로 여학생 무리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선생님을 부르면, 정국에게 연락이 간다. 공부하랴, 정연을 보살피랴. 안 그래도 힘든 정국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맞으면 아프고, 맞으면 티가 나고, 그러면 선생님은 정연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겠지만, 넘어졌다고 하면 된다. 멍청하게 앞도 안 보고 걷다가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면 된다. 자신이 조금만 참고 견디면 정국이 상처를 입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가 정국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체육관 창고에 도착을 한 정연,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피며 뿌연 담배 연기 속을 헤쳐 나가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여학생 무리의 앞으로 천천히 걷는다. 그러자 여학생 무리 중 한 명이 교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학생을 툭, 치며 정연의 등장을 알린다. 그러면 담배 끝을 잘근, 씹던 여학생이 끝이 빨간 꽁초를 툭, 하고 바닥에 버린다. 조금만 늦었으면 내가 가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는 죽었겠지? 그렇게 말을 하고 씨익, 양 입꼬리를 올리는 여학생은 여유롭게 치마를 털고 일어나 정연의 앞으로 얼굴을 쭉 내뺀다.
"오늘도 안 알려줄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 오빠 전화 번호."
그녀가 정국에게 할 수 있는,
"응..."
유일한 보답이었다.
-
"인테그랄..."
수학 기호를 작게 읊조리며 현란하게 펜을 움직이는 정국, 정국은 복잡한 감정이 본인을 억누를 때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공부를 하곤 했다. 순탄치 못한 가파른 삶을 살며, 정국이 스스로 터득을 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기계적으로 펜을 잡고, 깨끗한 종이 위로 수학 공식을 반듯이 적다 보면 본인의 머릿 속을 어지럽히던 수십 가지 생각을 잠시나마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약 효력이 떨어지 듯, 정국이 책을 덮으면 억지로 잠재운 생각이 한꺼번에 찾아 들어 다시금 그를 괴롭혔다.
"전정국."
한편, 그런 정국을 잘 아는 윤기는 미칠 노릇이었다. 시험이 코 앞이어서 그렇겠거니, 했더니 아니었다. 정국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잡다한 것으로 가득 찬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정리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근 깨물고 있는 입술과, 문제를 향한 떨리는 동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정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참았다, 본인과 정국이 학생들의 구경 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기에. 그래서 점심 시간 종이 칠 때까지 기다렸다.
윤기의 부름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정국, 문제집 한 면을 모두 풀었는지 빨간 색연필과 답안지를 든다. 한 쪽 눈썹을 올리며 윤기가 정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보니, 작은 귀마개를 귀에 꼽고 있었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집중력이 좋은 정국이 귀마개를 꼈다는 것은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고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 발짝 물러서는 윤기는 그가 채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삭, 사삭- 16번 문제와 17번 문제에 거침 없이 원을 그리던 정국이 18번 문제에서 움찔했다. 그리고 정국은 느릿한 동작으로 작대기를 그었다. 하지만 19번 문제도, 20번 문제도 전부 작대기 표시였다. 15/2. 상단에 15문제 중 2문제를 맞혔다는 표시를 하고, 이를 끝으로 채점을 마친 정국의 손아귀 안에서 색연필이 가차 없이 두 동강이 났다. 당황스러운 윤기가 정국의 손 안에서 반으로 잘린 것으로 모자라 짓이겨지고 있는 색연필을 보고 황급히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야... 전정..."
"뭐야, 너희 밥 안 먹어?"
정국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탄소였다. 오늘 아침, 우울한 정국을 위해 분위기를 띄우고자 오랜만에 셋이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을 했던 그녀는 정국과 윤기에게 신관과 식당을 잇는 통로의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동의를 얻은 탄소는 4교시가 끝나자 그녀가 같이 다니는 무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로 난간에 기대어 정국과 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10분이 넘도록 오지 않은 두 남자로 인해 탄소는 정국과 윤기의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을 한 교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 "오, 오빠! 나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갈게." ]
[ "아, 아니다. 그, 뭐냐. 들어갈 수도 있어!" ]
[ "그런데, 들어가도 늦을 거니까 먼저 자! 알았지?" ]
[ "그럼 끊는다!" ]
수화기를 통해 정연이 전한 대사가 정국이 멍하니 보는 문제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1교시 종이 울릴 무렵, 정국의 등을 떠밀던 정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면 종이 칠 것이 분명했지만 정국은 개의치 않고 휴대폰 스피커를 귀로 가져갔다. 그리고 정연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믿는다고 했지만, 정연의 등굣길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자꾸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올라와 정국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정연은 절대 모르도록 정국은 틈이 나면 그녀의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연은 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정연의 담임 선생님은 그녀는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정국을 안심 시켰다. 하지만 전혀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계속 전화를 하기에는 담임 선생님의 일상에 방해가 될 테고, 그렇다고 정연의 학교로 가는 섣부른 선택을 하기에는 그녀에게도 정국 자신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길한 감정을 없애기 위하여 정국은 결국 공부를 택했다.
하지만 아무리 문제를 풀고, 풀어도 부질 없는 짓이었다.
-
"정연아, 매번 힘들게 왜 이래."
"..."
"번호만 읊으면, 게임 종료인데 왜 말을 안 해."
해가 저물고 정연은 체육관 창고가 아닌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 한 가운데에 있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정연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길을 걷던 학생 주임 선생님이 컨테이너 박스 위로 피어 오르던 담배 연기를 보고 때마침 그녀를 때리려던 여학생 무리를 본 것이다. 그래서 정연은 다행히도 멀쩡한 차림으로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 마다 그녀를 살피고 떠나는 담임 선생님을 보며 정연은 확신을 했다. 정국이 정연을 걱정 하여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라고.
그래서 정연은 일부러 학생이 잔뜩 몰려 있는 사이에 끼어 있는 척, 미소까지 지으며 담임 선생님과 정국을 완벽하게 속였다. 점심 시간 종이 치고 나서야 담임 선생님은 정연을 찾지 않았고, 마치 대기 순번처럼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풀려난 여학생 무리가 정연을 찾았다. 그리고 여학생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이 나면 공터 부근에 있는 골목길로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고. 그 결과, 정연은 여학생의 앞에 서 있고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언니가, 너네 오빠를? 좋아한대..."
"..."
"씨발, 그것도 존나 좋대..."
여학생의 언니에 대한 소문은 정연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날개를 떼고 온 천사. 그것이 여학생의 언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국이 다니는 하늘 고등학교의 천사는, 정연의 눈 앞에서 이를 갈고 있는 여학생과 일란성 쌍둥이 자매다. 원래 여학생도 하늘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쉬쉬 할 만큼 커다란 사고를 일으켜 조용히 강제 전학 처분을 받고 구름 고등학교에 전학을 온 것이다, 하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지 한 달 만에.
그리고 여학생은 전학을 오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정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그녀를 때리고 짓밟으며, 그 끝에는 그녀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정연은 가만히 맞을 수 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여학생은 정연과 같은 출신의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에도 여학생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일진 무리의 한 명이었고, 정연은 비록 지금은 홀로 생활을 하지만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중학교를 다닐 적에는 여학생도 정연에게 일절의 관심도 없었고, 정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 하지만 하늘 고등학교에서 본교로 전학을 오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연을 밑도 끝도 없이 깔아 뭉갰다. 그리고 죽도록 맞은 대가로 알게 된 여학생이 정연에게 저지른 만행의 이유, 바로 정국이었다. 그러니까 여학생의 언니가 정국을 좋아하는데, 그녀 대신에 정국의 번호를 알아서 그녀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연은 절대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 피가 쏠려 죽는 한이 있어도, 정국의 번호를 여학생에게 말할 마음은 눈곱 만큼도 없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의 번호를 주면 정국에게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않을 것이라고. 무엇보다도 번호만 알면 된다면, 번호를 줄 수 있냐고 요구를 하면 될 것을 이토록 폭력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 알고 싶으면 하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형편이 되는 것 같으니, 윗사람에게 돈을 먹여 알든 말든 스스로 해결을 하란 말이다.
그렇게 문맥이 맞지 않는 모순 덩어리 같은 여학생의 진술에 정연은 결심을 한다. 차라리 여학생이 지칠 때까지 맞아서라도 정국의 번호를 주지 않겠다고. 그리고 정연의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가 더 있었다. 매번 쌍둥이 언니를 거듭 강조하며 번호를 물을 때마다 여학생은 마치 목이 찢어질 것처럼 악에 바쳐 있었다, 원망이 잔뜩 어린 살의 담긴 눈으로. 바로 지금처럼.
"안 알려줘...? 어? 이 씨발... 야."
"..."
"야, 야... 야! 안 알려주냐고, 이 좆같은 년아!!!!"
저 정도 높이에서 뺨을 때리면, 분명 흉이 남을 것이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며 얼굴을 막기에는 이미 늦은 듯 했다. 정연의 멱살을 붙잡아 손을 높게 치켜 드는 여학생, 지금껏 증거를 없애려는 듯 겉으로 보이는 곳은 때리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눈을 뒤집어 까고, 이를 까득, 가는 여학생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했다.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자려고 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정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역시나."
여학생도, 정연도, 정연을 때리든 말든 뒷담화를 하느라 바빴던 여학생 무리도, 일제히 누군가의 손에 붙잡힌 여학생의 손목을 향해 눈동자를 굴린다. 정연은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에 실루엣만 간신히 보이는 인영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영의 정체를 알기 위해 눈을 찌푸리면, 곧 정연의 눈은 서서히 커다랗게 키워진다. 짧은 단발 머리, 구름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토록 부러워 하는 하늘 고등학교의 교복, 그리고 어두운 배경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강인한 두 눈동자. 분명 탄소였다.
"너, 지은서지?"
지은서, 여학생의 이름. 탄소가 은서의 이름을 알고 있다, 정연을 괴롭힌 가해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정연은 그녀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안도감은 뒷전이었다. 탄소가 정국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서 그가 상처를 받을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정국에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와 가장 친한 두 명의 친구 중 한 명에게 들키고 말았다. 무덤까지 안고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지소희 쌍둥이 동생."
완벽한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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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헤르츠52 입니다.
과거편을 시작하고, 끝을 내고, 다시 본편으로 가는 과정이 마냥 쉬울 줄 알았는데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내용을 고치고 고쳐도 재미가 없어서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저에게 늘 힘을 주시는 독자님들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재미있는 글로 찾아 뵙는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당찬 포부와 다르게 어렵기만 하더군요, 막막하고 힘들고 답답했습니다.
본편을 쓸 때 독자님들께서 재미 없다고 하시면 어떡하나, 하고 댓글을 쉽사리 읽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편, 그것도 겨우 1편을 올렸는데 댓글을 읽지 못하는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처음 글을 쓰는 것인지라 슬럼프가 오는 횟수가 이상하리만치 많은 듯 합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것도 제가 해결을 해야 할 난제 중 하나이니, 더이상 말 없이 잠적을 하는 경우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아무 공지도 없이 잠수를 탔기에, 많은 분량으로 찾아 뵙고 싶었지만 그것 조차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번 past B편은 지극히 짧지만, 다음 past C편은 더 많은 분량을 채워 담아 오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과 죄송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