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인 세 개를 세기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참을 인 자를 세기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아야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
"아직도 안봐?"
"메일도 안열어봤어요."
그리고 요 며칠새 그 스트레스를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반존대 연하남이 설레는 이유
03
w. 갈색머리 아가씨
"너무 조급해하지 마요, 선배."
"..."
"아직 기간은 많이 남아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너무 급하게 생각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따듯한 물을 내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따듯한 차 한 잔이 제일 좋았다.
너는 오늘도 딸기 바나나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카페에 오래 있을 생각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이기는 하지만 워낙 구석에 있고 가게 규모가 작은지라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너와 나 둘만 있었다. 대부분 테이크 아웃을 하는 손님들이었다.
오랜만에 책이나 읽을까.
카페 한 쪽에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과제에, 알바에 시달리느라 막상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책 읽고 싶어서 문창과 들어왔는데 글 쓰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단 말이야.
하긴.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은 아이러니한 일 투성이였다.
그저 같이 과제를 하는 후배에 불과했던 사람이
"어? 선배 그 책 읽어요?"
"이 작가 좋아해서."
"나도 온다리쿠 좋아하는데."
이렇게 책에 대해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꽤나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
"난 이거도 좋아하는데 밤의 피크닉이 더 좋아요."
"밤의 피크닉?"
"분위기도 잔잔하니 좋잖아요. 너무 극적이지도 않고."
"이 작가는 그 맛이잖아."
원래 안하던 짓 하는 게 더 멋있어보이는 거에요.
네가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런가. 괜히 책장을 만지작거리며 책 표지를 보았다.
일본 특유의 세라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책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그런 법이지. 평소랑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눈에 들어오고 신경이 쓰이고 그리고 그게 취향에 맞으면 좋아하게 되는 거고.
아마 너에게 '밤의 피크닉'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너에게 눈길이 가는 것처럼.
"주인공 성격이 제일 좋았어요."
"다카코?"
"남자애는 여자애 신경 쓸 거는 다 쓰고 있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대응하는 것이 좋았어요."
"..."
"결과적으로 먼저 말을 건 사람도 여자애였고."
"흐음..."
솔직히 말하면 의외였다.
이런 말을 하기에 조금 미안하지만 너는 뭐랄까... 책과는 담을 쌓게 생겼달까.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외모랄까. 내가 너의 외모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사실이잖아.
이쯤되면 정말 불공평하다 라는 말이 나오지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잖아. 새삼스럽게 뭘...
어쨌든 대학에 온 뒤로 누군가와 책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처음이었다.
수업시간에 다루는 것은 제외. 수업시간에 나오는 건 그저 논평에 불과했다.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대한 평가만 하는 그런 시간.
"선배랑 비슷한 거 같아요."
"나?"
"네. 선배요."
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말을 할 때는 저렇게 눈을 마주치면서 말을 해야하는 구나. 생각보다 눈맞춤이라는 것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생기거든.
너는 이 역시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좋아요."
"..."
"다카코가."
그래도 이런식으로 들어오는 것은 조금 반칙이었다.
-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너는 지금 나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고 그것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호감이 조금은 버거워 애써 너의 표현들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네 호감이 버거웠다. 아니. 무서웠다.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외모와 겉모습때문인지 지금까지 나에게 다가왔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나를 '정복'하려 했었다.
자신이 나보다 위에 있으려고 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통보'를 내렸고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내 뒤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내가 세상 모든 남자들을 만난 것은 아니었기에 함부로 일반화를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런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이 다 그랬으니까.
한 사람의 세계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다지 넓지 않았다. 특히 나같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쉽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미안한데..."
"알아요."
"뭘?"
"지금 내가 이러는 거 선배한테 부담스럽다는 거."
"알면 그만하지."
"그만두면 안되죠."
"..."
"선배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부담스러워하는 건 괜찮은데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밀어내는 건 너무 이르잖아요.
확실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은 매일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뭘까.
어찌보면 중증일 수도 있었다.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오는 중증.
"그래서 나 이제 대놓고 말할 거에요."
"뭘?"
"선배 좋아한다고."
"무슨..."
"지금은 호감에 가깝지만 확실하거든요."
"..."
"나 앞으로 선배 좋아할 거라는 거."
아예 몰랐다면 거짓말이지. 본인 딴에서는 숨겼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티가 났는데 왜 모르겠어.
눈치고자가 아니고서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모른 척 하면서 지내는 것이지.
막말로 나는 너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였다.
나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긴 하지만 너역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것이다.
호감이라는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처럼 한순간이었다.
"각오해요."
"각오까지 해야해?"
"하면 좋고."
"..."
"그런 의미에서 알바 언제 끝나요?"
"왜?"
"데려다주게."
"혼자 잘만 가."
"에이. 그래도."
"자꾸 그러면 번호고 뭐고 그냥 차단해버릴거야."
"선배 못그럴텐데?"
"..."
"우리 조별과제 해야하잖아요."
역시 네가 마냥 호구는 아닐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었다.
너는 호구가 아니라 그냥 바보같을 정도로 단순한 성격일 뿐이었다. ... 그게 그건가.
-
"근데 넌 안짜증나?"
"뭐가요?"
"지금 이 상황."
"난 좋아요."
"..."
"선배랑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호구가 맞는 건가.
"농담이지?"
"진담인데?"
"..."
"애매하고 의욕없는 사람하고 하면 오히려 질질 늘어지기만 하잖아요."
"그럼 네가 한 일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하잖아."
"그쵸."
"네가 만든 점수에 다른 사람이 숟가락 올리는 게 안억울해?"
"음...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어차피 이 과제 자체가 다음 기말을 위한 거잖아요. 나는 공부를 했고 그 둘은 아무것도 안했고.
지금 당장 중간 결과가 좋아도 기말에 안좋으면 학점은 또 말짱 꽝이고. 그래서 막 억울하지는 않아요.
자업자득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는 말이었다.
앞으로 저 두 사람은 기말고사에서 지금 주제와 관련한 문제가 나오면 답을 쓰지 못할 것이다.
학점이라는 것은 중간과 기말을 합쳐서 내는 것이니 당연히 학점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네가 하는 말이 구구절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보면 가장 이상적이고 마음 편한 결론일수도 있었다.
근데 말이지.
나는 그렇게 너처럼 마냥 좋게좋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거든.
"그래도 난 싫어."
"그래요?"
"아무것도 안하면서 숟가락 올려서 점수 받아가는 거 싫어."
"..."
"나는 내가 피해보는 걸 가장 싫어해서."
"그래서."
"응?"
그래서 선배가 좋아요. 나는.
...
어쩌면 너는 너와 내가 서로 반대라서 나에게 눈길이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와 나는 많이 달랐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 사람을 대할 때 하는 생각도.
-
〈암호닉>
짱요 / 응 / 뿜뿜이 / 책상이 / 너우리
우리 민현이 그냥 호구 아니에요...ㅎㅎ
그리고 괜히 '들이대는' 이라는 말을 사용한 게 아니랍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들이대는 스토리' 시작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