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인사 04 |
초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지호는 침대 위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지훈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비볐다. 분명 꿈인 줄로 알았다. 자는 중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과 발열에 끙끙 앓던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지훈의 모습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그게 현실로 다가오자 지호는 먹먹함과 함께 무서운 공포심이 몰려들었다. 자꾸만 자꾸만 무서워졌다. 자신이 있을 곳은 이 세상을 통틀어 채 한 뼘도 안 되는 공간뿐인 것만 같은. 언젠가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도 무너져버리고 제 몸뚱이는 어둠속에 처박히게 될까봐서, 자신의 혈액 속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훈에게까지 옮아갈까봐서. 그렇게 지훈마저 저주받은 공간으로 타락하게 만들까봐, 지호는 공포심에 손이 덜덜 떨렸다. 안돼- 안돼...-. 소리 없는 지호의 절규가 퍼져나갔다.
꿈에서라도 그 손길을 거부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이마를 쓸어주려던 너의 그 다정한 손길을. 나를 바라보던 걱정스런 눈빛을. 외면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제대로 뜨는 것조차 힘겹던 그 때에, 마치 꿈인 것처럼 너에게 몸을 맡겼다면, 그리고 나를 기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호는 발끝에서부터 엄습하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아마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자신에게로 뻗어져 오는 그 손길은 마치 구원과도 같아서, 아이처럼 엉엉 울며 매달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숨긴 비밀을 고해성사인 것 마냥 털어놓고, 갖고 있는 선택지는 한가지 밖에 없는 지훈을 향해 사랑을 면죄부 삼아 곁에 있게 해달라고 떼를 썼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는 지호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지훈의 곁에서 멀어져야 그가 안전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에, 불가피한 지훈과의 접촉이 있을 때면 항상 조심스러웠다. 손끝이 마주칠 때, 얼굴을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지호의 심장은 밑으로 꺼질듯 덜컹거렸지만 이기적이게 굴자면 솔직히 그것마저도 좋았다. 지훈의 얼굴을 더 긴 시간 마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고,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힌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지호는 지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지훈의 고백에 응답해 줄 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알아버렸다. 더 이상 지훈의 곁으로 다가갈 수 없는, 오히려 멀어져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서야 지호는 지훈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리고 지훈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까슬하게 수염이 자라난 지훈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다가가 손을 내밀어 다정히 볼을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저에겐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 여기며 지호는 슬며시 손을 거두었다. 지훈에게서 등을 돌려 바닥에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했다. 하루 종일 시체처럼 잠만 잤던 탓인지 뒤늦게 지호의 배꼽시계가 울렸다. 간만에 뭔가가 먹고 싶어 졌다는 생각을 했다. 뭘 먹지-싶어 돌아본 주방에는 어젯밤 이후로 손대지 않은 지훈의 김치찌개가 보였다. 지훈이 나간 뒤로 반이 넘게 남아있던 지호의 밥그릇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끙- 소리를 내며 이불을 정리해 놓은 지호는 남아있던 그릇도, 식탁위도 정리하며 행주로 깨끗이 닦아냈다. 지훈의 정성이 들어있을 김치찌개를 다시 가스레인지 불 위에 올려놓고 그릇에 밥을 담았다. 이윽고 찌개가 다 데워지자 식탁위로 냄비를 옮겨 놓곤 의자에 앉았다.
냄비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집 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그 냄새를 음미하던 지호는 문득 혼자서 요리를 한다고 낑낑댔을 지훈의 모습이 상상되어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젠 모처럼 둘이 함께하는 식사였지만, 그만큼 조심해야한다는 부담감도 없잖아 있어서 그 맛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비록 혼자서 먹는 저녁이었지만 따뜻했다. 따뜻하고 행복했다. 밥을 먹는데 꼭 지훈의 사랑을 먹는 기분이었다. 지훈의 관심과 걱정 사랑이 저의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가 그동안 텅 비어버린 자신을 꼭꼭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함에 지호는 밥을 먹다가도 울컥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행여 잠이 든 지훈이 깰세라 조용히 입에 든 밥을 꼭꼭 씹으며 삼켰다.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지호는 행복했다.
***
“요즘은 어떠세요? 많이 안 좋습니까?”
‘아뇨. 요즘은 약을 먹어서인지 조금 나은 것 같아요. 토하는 일도 전보단 덜하고, 코피도 잘 안나요. 두통이나 발열은 여전히 좀 있긴 한데 심하진 않은 것 같아요.’ 또박또박 답하는 지호의 얼굴을 의사는 더욱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저를 심하게 괴롭히던 통증도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고, 밥을 먹고 토하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때로 밤중에 열에 시달려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지만, 그것 또한 전에 비해선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지호는 기대했었다. 검사 결과가 오진이 아니었을까. 혹은, 에이즈 환자가 맞더라도 나을 수 있는 병인 것은 아닐까. 한줄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저에게 주어진다면 지호는 그것만이라도 감사했다. 기대를 하고 찾은 병원이었건만 오히려 의사는 전보다 더 심각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씩, 여태껏 보였던 증상들은 완화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증상들이 사라졌다 싶을 때에 제 2기인 무증상 잠복기가 찾아옵니다. 기간은 확신할 수 없어요. 짧다면 수개월에서 3년이 채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길면 10년 이상도 갈 수 있습니다.’ 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잠시나마 희망어린 말을 기대했던 지호의 심장은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졌다. ‘그, 그럼요...? 그 다음에는요...?’ 되묻는 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아무 증상이 없는 2기가 지나간 뒤에 제 3기, HIV의 대표적 증상인 후천성 면역결핍증을 보이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몸에 있는 면역세포인 CD4 양성 T-림프구가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어 파괴되므로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각종 감염성 질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지호의 눈동자가 떨렸다. 순간이나마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치만, 최근에는 HIV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치료제도 발달이 되어있고, 완치는 불가능하더라도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면역력을 적절히 유지할 수…….”
. . .
의사의 말대로라면 정말 이건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할 병이었다. 완벽한 치료제도, 치료방법도 없는, 하다못해 수술로도 떼어낼 수가 없는 저주받은 병. 끔찍했다. 평생을 달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평생을 이 병속에 갇혀 죽어가는 것이다. 치료제로 인해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랬다. 사람들은 저를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고, 저를 피해 뒤에서 수근댈 것이다. 에이즈환자를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호는 두려웠다. 차가운 세상에 모진 겨울바람을 맞으며 혼자 나동그라진 기분이었다. 몸을 숨길 곳도, 그렇다고 제 몸을 가릴 것도 하나 없이 외딴곳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지훈도 그럴 테지. 내 병명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섭다. 무섭다. 저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지훈에게마저 끔찍한 괴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호는 몸을 떨었다. 차라리, 전염성이라도 없는 병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설령 그것마저 불치병이라 하더라도, 제게 허락된 시간동안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다 떠날 수 있을 텐데. 지호의 먼발치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욱-!”
순간 머리가 핑글-돌면서 치미는 구역질에 냅다 병원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칸막이를 열어젖히자마자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는 지호를 보며 사람들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이봐요, 괜찮아요?’ 라던가 ‘저런 저런- 많이 안 좋은가 보네.’ 대답을 못할 정도로 구역질을 해대는 지호를 향해 말없이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걸 안다면 이렇게 살갑게 대해줄런지, 지호는 자조적인 쓴 웃음을 지었다. 찬물에 입을 헹구곤 거울을 쳐다보았다. 토악질을 하느라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인지 발개진 눈가엔 눈물이 차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게 비참했다. 보기 싫었다. 괜한 눈에 화풀이를 하듯 찬물을 끼얹어 벅벅 문질러 세수를 했다. 한 겨울에 찬물로 세수를 하려니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더러운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지호였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다시금 거울을 응시했다. 지호는 멍하게 풀려버린 두 눈을 부릅뜨고 소매로 물기를 닦아냈다. 침을 꿀꺽 삼키니 위액마저 몽땅 토해버린 지호의 입이 썼다. 참으로 쓰디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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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그럼 25엔 안돼요?”
“아이고- 안 돼 총각. 요즘에 그렇게 싸게 내놓는 집 이 근방엔 없어. 30이하로는 안되겠으니까 다른데 한번 알아봐. 한번 찾아보고, 25에 쳐주는 집 없으면 우리 집으로 오구…….”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지호는 머플러를 칭칭 동여맸다. 이번 달 안으로 나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집도 구해놓지 않은 상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에 작은 옥탑 방이라도 좋으니 월세를 알아보려 발품을 팔았다. 몸이 안 좋아지고부터 그동안 하고 있던 알바도 관두게 되고 통장에 남은 돈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런 처지에 아무 집이나 덜컥 계약 할 수가 없었다. 처방받은 약이 떨어질 때마다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고 다시 약을 처방받고 하는 일에도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했다. 월세 25만원은 너무 싸다며 손사래를 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서 지호는 계단을 내려왔다. 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욱신거린다. 주먹을 쥐고 통통- 소리가 나게 무릎을 두드리며 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여기도 아니고.’ 지호의 손에 들린 수첩에 빨갛게 엑스표시가 그려졌다. 이번 달 안으로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지도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간다. 제가 집을 나가려고 한다면 뜯어말릴 지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에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매일 매일 조금씩 지훈의 방 안에 남겨진 자신의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 . .
지훈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자신이 만들어낸 흔적들을 주워 담았다. 겨울 오후의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환하게 부서졌다. 머리 위를 덮은 밝은 빛이 반사되어 지호의 갈색 머리가 반짝거린다. 분주히 책상 위를 정리하던 지호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지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나뭇결의 네모난 액자. 액자 속 비치는 모습엔 졸업식인 듯 교복을 입고 함박웃음을 짓는 지호와 지훈이 있었다. 나란히 서서 꽃다발을 든 지훈과 졸업장을 든 지호가 어깨동무를 하고……. 그랬다. 세상 어느 것도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함께 있다면 그걸로 좋고 별것이 아닌 일에도 신이 나고 즐거웠던 나날들이었다. 한번은 그랬던 적도 있었지. 보충수업을 째고 담을 넘어 PC방에 갔던 여름방학의 어느 날, 결국은 단속을 나온 담임에게 붙들려 학교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마저도 함께라 좋았다. 아- 그래. 언제였더라. 3학년이 되던 어느 날이었던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무엇을 이유로 그렇게 싸웠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운동장에서 피가 터져라 치고 박았던 적도 있었다. 그날엔 나란히 교무실 앞에 꿇어앉아 반성문을 썼더랬지. -생각하며 지호는 문득 웃음이 났다.
그래. 그랬던 적도 있더랬지…….
지훈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호의 거의 모든 추억에는 지훈이 있었다. 유리위로 지훈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지호의 손길이 애잔했다. 흰 손끝으로 지훈의 머리며, 활짝 웃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젠 감히 손대기가 두려워진 지훈의 머리칼, 곱게 휘어진 눈과 미소 짓는 입술. 그리고 사진 속 제 어깨에 얹어진 지훈의 손.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하는 듯 지호는 긴 시간동안 하염없이 사진 속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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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조금 분량이 짧다 싶은가요?ㅠㅠ
폭풍 연재 대신에 분량이 조금 줄어들어버렸네요
이해해주세요 ㅠㅠㅠㅠㅎㅎㅎ
아 그리고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