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written SOW.
‥비록 타락은 했지만 위엄 있는 그의 얼굴에는 왕자다운 지혜가 빛난다.
현인처럼 그는 서 있다.
강대한 왕국들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아틀라스의 어깨를 펴고서
밤처럼 침묵이 깔린 가운데 그의 모습은 군중의 시선과 주의를 끌었다.
-밀턴의 <<실낙원>> 中
53. 포브러그 참사 下
누구든지 만족의 상태로 장시간 있을 경우 소유욕의 정당화가 나타나고, 쓸데 없는 느긋함이 생긴다. 바로 태형의 경우가 그러했다. 여주가 태형의 곁에 있는 건
당연할지도 몰랐지만 결코 당연하진 않았다. 태형이 당연하다고 생각만 한 것이지 애초에 여주의 몸과 마음은 모두 태형의 것이 아니었다. 태형은 그저 여주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안전을 보장해 주었을 뿐. 비록 주문에 의해서 여주가 태형을 멀리한 것이라 할 지라도 태형에게 이 상황은 오지 않길 바란 상황 중 하나였다.
여주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
이것만큼 태형이 끔찍하게 여기는 건 없었다. 여주에게 혹여 다른 짝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걸 반대하는 건 여주의 마음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여주의 마음에 들어가서 자신보다 커지게 되면 ‥ 자신이 여주에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서였다.
태형은 방에 들어와서 줄곧 바지에 대고 손바닥을 문지른다거나 팔이나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했다. 은은하게 켜져있는 향초의 향이 짙게 느껴지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냄새에 민감해졌다. 자꾸 근육은 씰룩대어 안 그래도 날카로운 태형의 심기를 거들었다. 밖에서 들리는 여주와 지민의 웃음소리에 억지스러운 미소를
입에 달았다. 아무리 싫어도, 여주의 웃음 소리는 좋았으니까.
향초의 향이 태형의 몸에 배여 태형이 이대로면 질식할 수도 있겠다 싶을 때쯤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덩달아 느껴지는 심장의 고통은
여주가 인간계에 있었을 때 태형이 윤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잔가지 같은 고통과 흡사했으나 그 때완 조금 달랐다. 그 때보다 훨씬 더 아렸다. 태형이 맨 윗단추를
푸르고 밖으로 나갔을 때, 태형은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이거 참 오랜만이네요."
여주는 태형은 기억 못하면서 윤기는 기억하는 듯 싶었다. 애초에 포브러그는 원래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감정을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주문.
설마, 그 상대가 ‥ 윤기는 아니겠지. 태형은 경련이 일어나는 안면 근육을 이완 시키며 편한 얼굴로 둔갑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여유로운, 누가 보면
승자가 짓는 웃음을. 하지만 곧 여주가 윤기에게 안기자 그 모든 일은 허사가 되고 만다. 태형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여주는 웃음만으로도 태형의 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윤기야, 너 저 사람 알아?"
"뭐?"
"지민 오빠가 그러는데, 나랑 저 남자랑 아는 사이였대. 넌 알아?"
"‥어."
윤기의 몸 전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자기 과신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나 윤기는 지금, 처음으로 여주의 눈이 자기를 향했다는 사실에 태형에게
자비라도 베풀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으로 온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 첫사랑과는 다른 뭔가가 여주에겐 있었다. 태형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를
바라보다가도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윤기는 태형이 조금이라도 말하는 게 싫었다. 여주가 태형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
가만히 있어도 뒤쳐 지는 느낌이었다.
여주는 윤기가 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랜만에 만난 10년지기 친구를 맞이하는 것 마냥 여주가 윤기에게 차를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고 분위기가 싸해질 것을 예감한 지민과 정국은 그런 여주를 지켜봐야겠다며 따라갔다. 윤기는 멍하니 서 있는 태형을 무시하고 소파에 편히
몸을 뉘였다. 완전히 승리한 기분, 알 수 없는 성취감. 그 모든 것들이 윤기의 털 끝부터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여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던 공주님과의 사랑을
천민이 이룬 듯한 느낌.
"안 나가냐?"
"여주 데리고 나갈건데요."
"포브러그 주문 한 새끼 누구야. 넌 알지."
"알아도 못 풀잖아요. 그 주문, 걸린 사람의 의지로 풀지 못하면 절대 못 푸는 거 잊으셨나?"
이 잡종새끼가. 태형이 윤기에게 해를 가하려던 순간 태형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절대적인 악마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제 앞에서 쓰러지니 당황한 건 오히려
윤기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차를 내어오던 여주가 찻잔을 정국에게 안기곤 거실로 뛰어왔다. 쓰러져있는 태형, 하얗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기.
윤기는 자신이 먼저 쓰러져야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주가 달려간 사람은 ‥ 당연하다는 듯이 태형이었으니까.
*
"아무 이상 없을 거야. 그냥 ‥ 심장에 무리가 간 것 뿐이야."
여주와 정국은 안도의 한숨을, 윤기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여주에게 시선을 박았다. 여주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여주의 모습마냥 자꾸 눈 앞이 흐려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승리했다는 쾌감에 사로잡혀 손까지 잘게 떨었던 윤기였는데 이제는 불안에 떨었다.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태형에게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
"김여주, 나 봐."
"어?"
"다음에 만날 땐, 나 감히 너한테 말도 못 걸 정도로 죄를 진 상태일지도 몰라. 악마가 되었다는 핑계로 사죄 받을 생각도 없으니까 나 마음대로 미워해.
너한테 주는 내 마지막 선물."
"뭐? 윤기야, 뭐라는 거야."
"무방비한 김태형 죽이지 않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윤기야."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몸이 데워졌다. 여주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은 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온도보다도 뜨겁게 윤기를 데웠다. 윤기는 저를 바라보는
지민과 정국에게 짧게 고개를 꾸벅인 다음 어느 새 눈물이 가득 고인 여주의 팔을 잡았다. 윤기가 악마로서의 마력이 약해지기까지 대략 3시간, 태형은 다른
부위도 아닌 심장에 무리가 갔으니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터. 지금이 기회였다. 말하지 않았는가, 윤기는 기회주의자라고.
윤기의 등 뒤로 큰 날개가 솟았다. 악마가 된 지 얼마 안 된 윤기임에도 불구하고 태형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날개가 펼쳐졌다. 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느껴지는 생소한, 살이 찢기는 느낌이 이토록 좋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윤기는 느리게 여주를 제 품에 넣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제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말릴 생각은 딱히 없는데, 여주 다치면 너 죽어. 그리고, 되돌려 놔. 여주뿐만 아니라 김태형도. 너도 연관되어 있는 거, 맞지?"
윤기는 말 없이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제일 큰 태형의 방이여서 다행이었다. 윤기가 곧 날아갈 태세를 보이자 화들짝 놀란 정국이 발을 삐끗하며 윤기가 날아갈 수 있을 만큼 큰 창문을 열었다. 멍하니 안겨 있던 여주는 가슴 한 켠이 쎄했다. 지금 잡고 있는 윤기가 이젠 다시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윤기가 저를 닮은 흰 날개를 펼치자 여주는 입술을 앙 다물고 윤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입을 열면 입 밖으로 수많은 물음이 삐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주의 침묵에 윤기가 나지막히 고마워- 라고 말한 것도 같았다.
54. Tell Me DIE.
윤기가 여주를 데리고 간 곳은 윤기가 얼마 전에 호석에게 부탁해 급히 사들인 작은 별장이었다. 인간계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모조리 여기에 있기 때문에 윤기에겐
가장 친숙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이 지역이 콜카타에 존속되어 있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태형이 쉽사리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곧 여주를 태형의 집으로 데려가야 했지만.
"나 안 물어볼꺼야."
"뭘?"
"네가 아까 말한 거, 안 물어 볼꺼라고."
"‥왜?"
"네가 안 그러길 바라니까."
"‥."
"지금까지, 태형하고 내가 목숨을 위협 받은 게 몇 번이라고 생각 해?"
"‥뭐?"
여주는 포브러그 주문에 걸린 게 아니였나? 여주를 내려놓은 윤기가 여주의 눈동자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악마가 악惡해질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라고도 한다. 윤기네 가문은 그 분야에 특출난 가문이였고, 윤기는 여느 때 처럼 여주의 눈 속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주의 눈 안을 들여다 보자 마자 몰려오는 깨름칙한 고통에 아까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던 태형처럼 주저 앉았다.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주문이 풀린 건 널 보자마자였어. 그 이후론 연기 좀 했지. 태형을 놀릴 수 있는 게 흔하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거든."
"근데 왜, 왜 날 따라왔어?"
"왜냐니, 그야 ‥."
"내가 좋아?"
태형의 집엔 큰 연못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마계의 독이 가득해서 여주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곳, 나머지 하나는 여주를 위해 태형이 석진에게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탁을 해가면서까지 만든 곳. 어렸을 때 여주는 그 연못에서 자주 놀았더랬다. 정국의 옷을 흠뻑 적셔가면서. 정국이 자신에게 물을 뿌리지 못한 다는 사실을 알아채고선 더 했다.
그건 정국이 마계에 온지 딱 1년 째 되는 날이었다. 1년 동안 여주가 뭣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걸 알아챈 정국은 원래 그들이 놀았던 연못이 아닌 마계에 독이 가득 든 연못으로 여주를 빠뜨렸다. 보통 인간이 노출되면 당연히 죽겠지만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지민이 겨우 여주를 바로 빼낸 덕에 여주는 일주일간 기절 뿐인 고통만 겪을 수 있었다. 지금 여주는 그 연못에 빠졌던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숨통을 단숨에라도 끊어놓을 것 같았던 마계의 독기. 윤기의 질문과 동시에 그 독기가 다시 몸 안에 차오른 기분이었다.
"싫진 않지?"
"‥응."
"그럼 됐어."
"윤기야."
"나 그러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될까?"
"소원?"
"지금 나보고 죽으라고 좀 말해줄래."
마계의 독기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 서서히 조여오는 숨통에 숨 쉬기가 곤란해 질 때 즈음 여주는 겨우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거절의 표시였다. 윤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잡고 있던 여주의 손을 살짝 놓았다. 여주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었는데, 이걸 안타깝다고 해야할 지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윤기는 그래도 웃었다. 마지막은 웃음으로 장식하고 싶었다.
"지금 네가 말 안 하면, 난 김태형 죽여야 해."
"왜, 왜 ‥ 그러는 건데. 윤기야, 제발."
"넌 내 운명이었지만, 이건 내 숙명이자 사명이야."
운명이 꼭 이루어지진 않아도 난 널 운명이라고 칭할래. 그건 나 선물로 줘라, 여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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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예고,
前夜
오랜만에 와서 죄송합니다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