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written SOW.
‥비록 타락은 했지만 위엄 있는 그의 얼굴에는 왕자다운 지혜가 빛난다.
현인처럼 그는 서 있다.
강대한 왕국들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아틀라스의 어깨를 펴고서
밤처럼 침묵이 깔린 가운데 그의 모습은 군중의 시선과 주의를 끌었다.
-밀턴의 <<실낙원>> 中
50. 역시 악마는 화가 많이 났다,
태형의 등장에 나가려던 악마들이 모두 얼었다. 자기 의지로 언 것이 아니라, 태형에 의해서. 순식간에 얼어버린 악마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얼었고, 나머지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들만이 겨우 막곤 공포스러운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을 저를 겁먹은 표정으로 보는 악마들을 향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체제라지만
악마 체면 다 죽인다. 태형은 여주를 데리고 있는 성경에게 손을 뻗었다. 돌려놔, 내꺼. 성경은 태형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여기 네 것이 어딨다고 네 걸 달래.
성경의 말에 여주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는데요, 태형꺼.
여주의 말에 환히 웃은 태형은 생각한다. 아, 내가 참 아가 교육 하나는 잘 시켰다니까. 뭐 거의 세뇌 수준으로 시킨 교육이긴 하다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여주가 제 것이 아니라면 그 누가 제 것이란 말인가. 여주의 말에 기뻐하는 태형의 얼굴을 보며 심기가 언짢아진 성경이 여주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는 순간
여주가 성경의 팔을 쳐내며 말했다. 죄송한데요,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 쪽도 알다시피 지금 그 쪽 친구들 다 얼었잖아요. 여기 더 있으면 그 쪽도 얼 수도
있거든요. 어차피 태형 목적은 나 인거 같으니까 내가 태형 달래서 가볼게요. 아까 가져간 장갑은 돌려주시구요.
분하다는 표정을 지은 성경이 곧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여주에게 장갑을 내밀었다. 미안해, 내가 실례가 많았네. 김태형이 나까지 얼리기 전에 니가 빨리 데리고 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성경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기도 잠시 여주는 성경이 내민 장갑을 작은 가방 안에 넣었다. 태형이 선물해 준 것들 중 제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아가, 그냥 가?"
"빨리 지민 님이랑 전정국 찾아서 가요. 피곤해."
여주가 피곤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짚자마자 태형은 서둘러 여주를 품에 안고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성경 같은 건 상관도 쓰지 않는다는 행동에 여주는 씩 웃었다.
감히, 누가 누굴.
"가자. 집으로. 박지민하고 전정국은 내가 이미 시켜놨어, 찾아오라고."
아. 짧게 탄식을 뱉은 여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자놀이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 아마 무리를 한 듯싶었다. 태형의 품에 안긴 여주는 자신의 일부를 되찾은 듯
안심했다. 분명 태형의 품은 차가웠는데, 왜 자신에게는 그리도 따스했는지 모르겠다. 태형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높게 치솟았다가 다시 밑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제 품에 안긴 여주가 제 가슴팍에 얼굴을 부빗댈 때마다 속도를 멈칫하며 나름 태형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최근 여주와의 접촉이 없었거니와 나풀거리는
드레스 옷깃이 휘날릴 때마다 풍기는 아찔한 향기에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짙게 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향수를 뿌리는 걸 본 적이 없는
태형에겐 이 향의 출처가 매우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뭐 뿌렸어?"
태형의 말에 짧게 고개를 저은 여주가 얼굴을 부빗거리며 태형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쉬었다. 태형은 제게 무슨 냄새라도 나나 싶어 여주의 머리를
감싼 손을 올려 제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태형이 자신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작게 웃은 여주가 태형의 손목을 잡아끌어 제 뒤통수로
다시 가져갔다. 이상한 냄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럼 무슨 냄새가 나는데?"
"…음, 태형 냄새?"
"그게 뭐야."
"있어요, 태형한테만 나는 냄새."
"너도 너한테서 향기나."
"로즈마리향이죠? 나 저번에 입욕제 바꿨어."
"아닌데?"
"에?"
제게 말해달라며 허공에 발을 휘적이는 여주를 내려다보며 마냥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태형은 입 밖으로 그 답을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악마들이 다른 악마를 유혹할 때 내는 향기라고 말 할 순 없지 않은가.
51. 포브러그 참사 上
지민은 인생에서 가장 황당하지만 가슴 아픈 일을 고르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잊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어제 파티장에서 반쯤 실신해 있던 정국의 뒷덜미를
잡아 태형이 보낸 사람과 함께 태형의 집으로 향한 지민은 태형에게 호되게 혼나야 했다. 여주가 옆에서 태형의 팔을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아마 피를 봤을 거다.
여주는 태형의 유일한 친구이자 벗인 지민에게 해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직 태형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이라고 해도 무방했으니.
태형도 그런 여주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태형도 여주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 죽고 못 사는 이들에게 위기가 닥쳐 왔으니.
지민이 생각하는 인생에서 가장 황당하지만 가슴 아픈 일을 태형이 겪는 중이었다. 그렇다. 여주가, 태형을 잊었다.
*
"정말, 기억이 ‥ 안난다고?"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여주를 바라본 태형에게서 절망감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정국과 지민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는 건 사고가 아니고서야
인간들은 그렇게 흔히 겪는 게 아니다. 물론 여주가 인간이라는 건 아니지만 거의 20년간 살아온 여주의 생활 패턴을 살펴보면 정국과 흡사했다. 인간과 신체구조까지
같을 순 없겠지만 대충 그렇다는 거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여주는 태형에게 내일 포브스 -태형이 다스리는 콜카타의 옆 나라라고 생각하면 됨- 에 놀러 가면 안 되냐고
징징대기까지 했다. 그랬던 여주가 하루아침에 기억을, 하필 잊어도 태형에 관한 것만 잊다니. 태형뿐만 아니라 정국과 지민도 절망해야 했다.
여주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태형은 여주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자신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며, 태형은 기필코 이 원인을 찾아내 씨를 말릴 것이니
그 작전에 자신들도 가담해야 할 것을 예측하며 피곤해 했다. 여주가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태형은 저를 잊은 여주를 가만히
보고 있을 악마가 아니었으니.
"정국아, 우리집에 왜 이상한 사람이 있어?"
정국이 숨을 멈추고 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이 와중에 지민은 해맑게도 웃으며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라고 지적해주기까지 했다. 아침을 먹을 여건이 안 되어
집사가 나눠 준 비스킷 조각을 주워 먹던 정국이 한 입 베어 물었던 비스킷을 다시 그릇에 올려놓았다. 태형의 언짢은 표정을 본 순간 이미 아침밥은 날아간 거였다.
기억을 잃었는데도 '악마'라는 개념은 박혀있는 건지 여주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 뭐야, 악마였어? 여주의 가벼워진 말투에 적응이 되진
않았지만 제 또래 여자아이, 그러니까 정국이 살던 인간계의 여자아이 같아 정국은 여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정국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으나
여주는 제 또래가 아니면 모두에게 존댓말을 썼다. 어렸을 적 정국이 가르쳐 준 그대로. 실제로 마계에서 여주 또래는 정국 밖에 없었으니 정국에게만 사용한다고
봐야 했다.
여주의 말투에 적응을 못하는 건 태형과 지민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지민은 그래도 마냥 귀엽다며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곧 지민의 팔을 쳐내는
태형에 제 손을 거두어야 했다. 여기에서만 끝나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좀 달랐다.
"그 쪽이 뭔데 지민 오빠 손을 쳐? ‥요."
저건 대체 무슨 말투인지. 순딩순딩한 원래 성격과는 다르게 앙칼지게 태형에게 쏘아붙이던 여주가 태형의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요'자를 붙였다. 사실 정국은
미치도록 웃겼지만 누구보다도 심각한 태형의 표정에 웃을 수 없었다. 태형이 충격받은 이유는 아마 두 가지 일 것이다. 첫째는 여주가 자신에게 반항을 했다는 것.
둘째는 지민에게 '지민 오빠'라고 했다는 것. 평소의 태형이라면 여주를 제 무릎에 앉히곤 차근차근히 교육-이라 쓰고 세뇌라 읽는다.-를 시켰겠지만 저를 기억 못하는
여주에게 교육할 순 없었다. 그저 속만 부글부글 끓을 뿐. 태형은 마치 승리자인 것 마냥 씩 웃음 짓는 지민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친 뒤 방으로 들어갔다.
태형이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여주가 지민의 뒤통수를 매만지며 "괜찮아?"라고 하자마자 잠시 멈칫거리진 했지만 일단은, 1차전은 끝났다. 완벽한 지민의 승리로.
52. 기회주의자는 언제나
윤기가 태형의 심장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윤기가 여주를 얻기 위해서는 필시 해야 하는 일이다. 솔직히 믿어지진 않지만 아예 확률이 없던 반류였을 때보단 훨씬 가능성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다. 윤기가 아무리 대악마로 직급이 상승되었다 하더라고 수천 년을 대악마로 살아온 태형에게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태형은 '콜카타'라는
마계에서는 꽤 유명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다. 중심지나 다름없는 '콜카타'를 건들게 되면 그 안에 사는 많은 악마들은 물론이고 그의 병력에 맞서 싸울만한 병력이 일단
윤기에게는 없다. 그 말은 즉슨, 일단 다른 이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인데 의외로 태형의 적수가 없더라는 거다. 태형은 대악마치곤 평판이 좋았고 최근엔 마왕까지 무너뜨리면서
제 입지를 견고히 하는 면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지금 태형은 아마 태형의 악마 일생 중 전성기를 겪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초조해하는 윤기에겐 또 다른 패널티가 있었는데,
바로 시간이 지나면 원래 반류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저번 파티장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악마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인지 아니면
윤기의 아버지가 오류를 범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변하는 시간이 규칙적이라는 점이다.
파티장에 다녀온 후, 윤기는 또 하나의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태형의 '강함'을 직접 눈으로 봤다는 것이다. 윤기가 마차를 타기 직전 날아오르려
날개를 꺼내는 태형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때 윤기가 느꼈던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초식동물이 호랑이와 같은 자신과 급이 다른 포식자를 마주할 때 느끼는
그 감정을 윤기도 느꼈다는 말이다. 윤기는 그 장면을 보고 사기가 한껏 떨어졌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자신은 언젠가는 태형과 부딪히게 될 것이며,
결국 여주는 윤기, 혹은 태형 중의 한 명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윤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태형은 없었다. 백색의 캔버스 안에는 오직 자신과 여주뿐이었다.
*
윤기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는 건 바로 아버지의 전 집사 ‥의 아들이었다. 그 인물이 윤기의 예상을 초월하는 인물이라서 처음에 윤기는 혼란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해 폭주하기도 했었다. 불안정한 악마의 작은 소동은 그 인물로 인해 가벼이 멈춰졌다. 아, 그 인물이 누구냐고?
바로 호석이었다. 윤기가 인간계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제 가족만큼이나 가깝게 지냈던 친구.
윤기는 인간계에 있을 때 기억이 자주 끊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사실 호석이 언제부터, 어떠한 계기로 제게 다가왔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와 친하게 지냈던
정국만큼이나 어렸을 적에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호석은 윤기의 아버지를 보필하던 집사의 장남으로, 윤기가 인간계로 보내졌을 때 같이 보내졌다고 한다.
주기적으로 윤기의 상태를 보고했고 윤기가 위험할 때면 온몸을 던져 윤기를 구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호석이 윤기에게 우정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호석에게는 우정보단 사명이 우선이었다. 그 사명은 윤기를 지키는 일 이었고.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김태형의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은 단 하나, 이성경인데…그 이성경이라는 여자가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응, 이성경이 박쥐를 가까이 한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기도 해서 이번에 내가 박쥐로 둔갑을 해봤지, 나 하마터면 김태형 얼음에 죽을 뻔 했잖아."
호석이 악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윤기는 호석의 성격이 약간은 차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호석 역시 윤기와 마찬가지로
일생의 대부분을 인간계에서 보냈다. 즉, 인간계에서 호석이 윤기에게 보여준 성격은 호석 본래의 성격이었고 그건 악마인 호석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다.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얼굴에 양손을 가져다 대는 호석을 보며 윤기는 깊게 생각에 잠겼다. 호석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성경이라는 여자는 윤기에게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여자의 성품이었다. 손을 잡는다고 한들, 그 여자의 목적은 태형과 로맨스를 찍는 게 목표일 테고, 윤기는 태형과 스릴러를
찍는 게 목표니 윤기가 여주를 얻고자 한다면 1차로 태형을 치고, 2차로 연달아 성경을 쳐야 한다는 건데, 그때까지 윤기의 병력이 살아있을리 없고, 성경도 태형과
마찬가지로 태생부터 대악마였으니 윤기와 붙는다고 한들 저가 발릴 것이 분명했다. 아, 이걸 어떡하냐.
"너 지금 머리 아프지?"
"뭐?"
"내가 너에게 희소식을 들고 왔는데, 들을래?"
"‥."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석의 미소에 주춤하기도 잠시 윤기는 몸을 호석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뭔데.
" 『 포브러그 』 라는 주문을 알아?"
"그게 뭔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잊게하는 주문이야. 주문 자체가 복잡하고, 애초에 상급 악마 이상이 할 수 있는데 상급 악마 이상으로는 거의 사랑이 아닌 정략으로
결혼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악마들이 없지. 그런데 '사랑'하니까 누군가 떠오르지 않아?"
"설마."
"이성경이 그 주문을 여주에게 걸었대 김여주가 애지중지하는 그 장갑에."
"‥."
"그리고 여주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형이지. 이제 좀 감이 와? 현재 너와 김태형은 동급이라는 거야 김여주에게."
윤기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주를 만나고 오면 딱 반류가 될, 충분한 시간이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윤기는 기회주의자라고.
.
.
.
.
.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ㅠㅠ 보고 싶었어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