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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그러니까 이 부분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잘 모르겠어요."
민형이가 고전 시가에 약하구나. 다른 문제들은 척척 풀어나가다가도 고전 시가 문제만 나오면 멈칫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손에 든 펜으로 한 문장씩 짚어주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시가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설명하면서 슬쩍 눈을 굴려 민형이를 쳐다보니 눈은 문제집에 입은 앙다문 채 내 말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추상의 시간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시가 설명을 다 끝내고는 문제를 푸는 민형이의 옆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약간 곧게 생긴 외모와 무뚝뚝한 성격에 학교에선 어떻게 지낼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친구들도 밝고…… 그러고 보니 아까 친구들이 그랬었다. 전교에서 1,2등을 다투고 있다고. 그만큼 공부를 잘하고 목표가 있으면 끝까지 해내고 마는 무서운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름이 뭐였지? 그러니까…… 아! 그렇게 알려주었던 친구 이름이 아마 제노였던 거 같다. 이름이 특이해서 유독 기억에 남았었지. 제노의 말처럼 민형이는 수업 내내, 수업이라기엔 좀 그런가? 아무튼, 수업 중에 다른 잡담도 일절 하지 않았고 오로지 문제를 풀어나가기 바빴다.
"다 풀었어요."
다 풀었다는 말에 나는 옆에 둔 빨간 색연필을 들었다.
"다 맞았네?"
"네."
그렇게 대답하는 민형이의 표정이 꼭 다 맞을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둘이 나란히 오는 것도 어색할 줄 알았는데. 중간에 편의점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사줬고 그걸 먹으면서 간간이 얘기도 나누고 생각보다 불편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하긴 동생 같은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 불편함에 있어 최고는 정재현이지……. 갑자기 생각나는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내일 또 만나겠네. 얼굴을 어떻게 봐야 되는 걸까.
"저 질문 있어요."
"뭔데?"
"황진이의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황진이 감정?"
황진이의 감정이라…… 이 시가는 임을 기다리는 마음을 주제로 한 연정가였다.
"민형아 너는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 있어?"
"…."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그리운 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
"…."
"그게 시가에서 드러나는 황진이의 감정이 아닐까?"
마지막 말에 민형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윽- 오래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해져 쭈욱 기지개를 폈다. 저번에 술 취해서 들어온 이후로는 두 번째였다. 민형이의 방에 들어온 게. 아주머니는 공부하느라 힘들지? 라며 수업 중간중간에 간식 등을 챙겨주셨다.
"민형아 이거 너야?"
책상 한쪽에 모여져있는 사진들을 눈으로 몰래몰래 더듬었다. 볼살이 포동포동한 아기 때부터 노란색 모자를 쓰고 해맑게 웃고 있는 유치원 때의 민형이,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 때 찍은 것인지 지금보다는 앳된 얼굴로 꽃다발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민형이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있었다. 나랑 있을 땐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문득 민형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민증 사진도 찍었어?"
"네. 저번 주에 찍었어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조금은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했을 민형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사진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음엔 나랑도 같이 사진 찍자."
"네?"
"왜… 싫어?"
내 물음에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놀라는 민형이의 모습에 눈썹이 축 쳐졌다. 그, 그렇게 싫은 티를 내면……(상처)
"아, 아니요."
"진짜? 거짓말 같은데."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 민형이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진짠데, 좋아요. 짧게 떨어지는 음성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좋아요…… 좋아요. 민형이의 방을 나가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 좋다고 말하는 민형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간질였다.
"진짠데, 좋아요."
미쳤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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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민형아 진짜 미안……."
ㅡ 괜찮아요. 학교 앞으로 가면 돼요?
"응응. 진짜 미안해…."
ㅡ 괜찮다니까, 근처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평소에도 덜렁거리는 성격으로 유명한 내가 또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오늘까지 내야되는 과제 파일이 있는데 그걸 깜빡하고 집에다 두고 오는 실수를 저질렀고. 시험 마지막 날은 야자를 빼주는 민형이의 학교의 방침에 민형이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이거다. 근데 그 시간을 내가 빼앗아버리고 만 거지. 진짜 김시민 멍청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야 뭐해?"
"악! 깜짝아!"
"귀신이라도 봤어? 왜 이렇게 놀래."
니가 귀신보다 더 무서워 인마…….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나유타의 허연 얼굴에 심장이 뚝 떨어질 뻔했다. 안 들어가고 학교 앞에서 뭐하냐는 나유타의 질문에 기다릴 사람 있다고 대답하니 같이 기다려주겠다며 나유타의 주특기인 오지랖을 시전하신다. 아니. 시바…… 그런 아량 베푸실 필요 없습니다만? 고개를 휙 돌려 나유타를 째려보니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연다.
"너 전화 온다."
진동으로 해놨는데 왜 안 느껴졌지? 얼른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받았다. 민형이었다.
ㅡ 어디에요?
"나 학교 앞인데…… 어어! 너 보인다 민형아!"
저 멀리 서 있는 민형이의 모습에 나는 손을 들어 좌우로 방방 크게 흔들어댔다. 옆에서 혀를 차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유타의 목소리가 들렸지는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게 유타의 잔소리가 아니야 민형이다 이 말입니다. 짙은 초록색 니트에 청바지까지 저게 진정한 가을 남자 아니고 뭐야! 그렇죠? 여러분? 왠지 처음 보는 민형이의 사복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렇게 입으니까 되게 대학생 같다.
"쟤가 하숙집 아들?"
"어어."
"잘 생겼네."
네가 그렇게 안 말해도 민형이 잘생긴 건 나도 아니까 그 입 다물라! 유타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곤 이쪽으로 다가오는 민형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텐션 높은 내 인사와 달리 민형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게 내밀었다.
"오기 힘들진 않았어? 미안… 진짜."
"가까운데요 뭘. 괜찮다니까."
"그래도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은데."
나는? 와! 나는? 따위 개소리를 지껄이는 유타를 무시하곤 내 신경은 온통 민형이에게로 향했다. 나중이 아니라 당장 오늘 저녁에 사주면 되겠네! 카페 알바도 오늘 일찍 끝나고, 수업도 그렇고. 딱인데?
"민형아 오늘 시간 돼?"
"시간은 괜찮은데."
"그럼 내가 카페 끝나고 연락할게. 알았지?"
"…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긍정의 답을 뱉은 민형이를 보며 바보처럼 헤헤거리다가 수업 곧 시작이라는 유타의 말과 함께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는 강의실로 발에 불이 나게 뛰었다. 물론, 나유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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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ub>〈sup>〈/sup>
"…."
아니 이게 대체 뭐…….
"너가 민형이구나?"
"아, 난 아까 봤지? 안녕 민형아!"
왜 민형이랑 밥 먹는데 정재현과 나유타가 같이…….
"안녕."
게다가 김도영까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카페 알바가 끝나고 민형이에게 연락해서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민형이는 힘겹게 피자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답하기 어려울 일이었던가. 뭐 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집 근처 피자집에 들어와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를 시키고 앉아있었는데. 주문에는 솔직히 약간 내 취향이 가득하긴 했다. 피자는 포테이토지! 그렇게 음료까지 주문시키고 앉아있는데 갑자기 들어오는 저 새끼, 아니 아니 저 3명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어? 뭐야? 김시민?"
"아까 민형이 밥 사준다더니 피자로 했나 봐?"
"옆에 있는 애가 민형이야?"
정재현의 아는 척은 언제 들어도 등골이 오싹했으며 유타의 오지랖은 좀 개나 줘라. 정재현과 유타의 조합은 자주 봐서 익숙한데 왜 거기에 김도영까지 껴있는지 의문이 든다. 자연스럽게 들어온 그 세 명은 정말 자연스럽게 우리와 합석했다. 민형이의 표정을 흘끔 살피니 아무렇지 않은 건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건조한 낯을 하고 있었다.
"저희는 크런치 치즈 스테이크요."
크런치 치즈 같은 소리 하네… 다 꺼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주문한 피자가 나오고 2판이 나올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탁에 못 듣던 한 판이 더 있길래 옆에 앉아 사이다를 쪽쪽 들이키던 유타에게 물으니 정재현이 하나 더 시켰단다. 쟤도 이런 면에 있어선 참 대단해.
"민형아 맛있게 먹어!"
"네. 누나도요."
헉. 누나래. 한층 자연스러워진 누나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질 뻔했다. 물론 같이 앉아있는 저 3인 때문에 티는 내지 못 했지만.
"그렇게 좋냐?"
"그럼 좋지."
입가에 빵 부스러기라도 붙어있었던 건지 제 손으로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떼준 유타가 물었다. 얘는 당연한 걸 묻고 난리래? 당연히 좋지. 히히.
"천천히 먹어. 너 그러다 또 체한다."
"괜찮아. 소화제 집에 챙겨뒀어."
"아프지 않을 생각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또 나왔네. 유타의 잔소리 폭격기. 귀 따갑게 따방따방 발사되는 유타의 말에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유타의 말이 틀린 건 없는지 본래 빨리빨리 먹는 습관 덕에 피자의 빵이 목에 턱하고 걸려버렸다. 캑캑거리는 나를 무슨 거지처럼 보는 유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음료를 마시려는데 아니 언제 또 다 마신 거야? 오늘따라 배속에 거지가 들었나. 아니 뭐 원래 들어있지만 오늘은 한 명이 더 는 것 같기도 하고. 직원 언니분이 돌아봤으면 하는 마음에 눈알을 도르르 굴려 직원 언니들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나를 봐주진 않더라. 갑자기 슬퍼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거."
"… 컥."
"마셔."
나와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자리에 앉은 김도영이 제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목이 점점 더 막혀오는 느낌에 천천히 그 음료를 받고 꼴깍꼴깍 마셔버렸다. 마실 때마다 목울대에 따끔따끔 퍼지는 탄산의 느낌이 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불편하기만 할 줄 알았던 피자집은 나름 유타의 농담과 대화소리도 간간이 흘러가며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조별 과제 때 서로 으르렁거리던 김도영과 정재현은 화해라도 한 건지 둘의 분위기도 괜찮아 보였다. 계산을 하려 카운터에 갔는데 이미 계산이 끝났다는 직원에 말에 고개를 척 들고 밖을 쳐다봤다. 제 카드를 지갑에 넣고 있는 정재현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 피자까지 계산한 모양이다.
"우리 건 계산 안 해줘도 되는데."
"그냥 하는 김에 다 했어."
"아니 그래도…."
"그렇게 신경 쓰이면 다음엔 네가 사. 그럼 됐지?"
그럼 되긴 뭐가 돼……. 결국은 정재현과 저녁 약속을 잡고 말았다. 잡고 싶어서 잡은 게 아니었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정재현과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저녁 약속을 잡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라. 멍청한 김시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올 걸.
그렇게 우리는 피자집 앞에서 모두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옆에서 나란히 걷는 민형이에게 말을 몇 번 걸었지만 민형이는 모두 단답을 해버린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저 멀리 집이 보일 때 쯤 민형이가 입을 열었다.
"저."
"응?"
할 말이라도 있는지 가던 걸음을 뚝 멈추곤 나를 쳐다보는 올곧은 그 시선에 나는 다른데 눈을 돌리지도 못한 채 그 시선에 꼼짝 없이 잡히고 말았다.
"그 형들이랑 많이 친해요?"
"그 형들?"
그 형들이라 함은 아까 그 세명을 말하는 걸까.
"아니야. 한 명 빼곤 다 어색해."
"아."
맞는 말이지 뭐. 정재현이랑도 김도영이랑도 불편한 건 사실이니까.
"옆에 앉아있던 형, 이름이 뭐예요?"
옆에 앉아있던 형은 아마 유타를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유타라는 짧은 내 대답에 민형이는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그런 내 등 뒤로 민형이의 음성이 뚝 꽂힌다.
"남자친구예요?"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렇게 묻기도 전에 비밀번호를 치고 열린 문 사이로 쏙 들어가며 민형이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 형, 착해보였어요."
아니 지금 되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민형아? 해명의 말을 뱉을 새도 없이 민형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어니언's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연휴는 어떻게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
빠르게 올리고 싶어서 아침부터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나온 도영이 슴스테 으악! 역대급 아닙니까?
한동안 또 앓고 있을 제 모습이 눈에 훤하네요 크크.
글을 왼쪽으로 하려다가 가운데로 설정했는데 음음, 아무튼! 잘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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