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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PPED

Written by. 하 린(HARIN)

 

 

 

 

[EXO/백도] FLIPPED 中 | 인스티즈

 

 

 

경수는 막내였다. 위로 형이 하나 있는데, 공부도 잘 하고 성격도 좋아서 경수를 많이 챙겨주었다. 아침에 등교하기 전에는 늘 옷 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해주었고, 항상 같이 등교했다. 정말 평범한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나 받을 사랑은 다 받으면서 살아 온 그런 경수였는데, 언제부터 남자를, 아니 백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만났을 때 때 없이 깨끗하고 순진한 그 눈에 빠졌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수도권이지만 서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깡촌도, 도시도 아닌 곳에서 깨끗하고 잘 생긴 도시 아이는. 경수를 흔들어 놓았다.

 

처음으로 절망감이라는 걸 맛 봤다. 왜 나는 여자를 좋아할 수 없는 건지, 몇 번이고 생각 해보았다. 하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부정할수록 선명해지는 백현이 경수를 괴롭혔다. 귀를 막고, 눈을 닫아버려도 똑같았다. 그리고 그걸 겪고 나자, 경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더러워 보였다. 백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남자인 경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울까. 나도 더러운데.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보고 싶지 않다고 부정해도 보고 싶고, 그래서 쳐다보면 욕심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백현을 좋아한다 정의를 내리고 나자 점점 더 좋아졌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고,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런 경수를 알아챈건지 백현은 경수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 없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그래서 백현의 옆에 남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쪽을 선택했다. 다른 반이 된 백현의 뒷 모습을 쫓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며 즐거워 하는 것. 그게 감당할 수 없어 넘쳐 흐르는 자신의 마음을 꽁꽁 감추는 것보단 나았다. 비록, 백현이 경수를 싫어하더라도. 아니, 싫어하는 게 당연한가.

 


"도경수. 여기 있었어?"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민석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비참한 기분이 흘린 눈물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옆에서 경수를 응원해주고 바라봐주는 친구라지만, 지금 경수는 혼자있고 싶었다. 나 봐봐. 재촉하는 목소리에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눈을 마주했더니, 역시나 미안한 표정이다. 니가 뭐가 미안한데? 민석은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한 건 나지. 경수가 따끔따끔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게…진작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미안해하지마."

 


속으로 울음을 삼켜서 인가, 되게 듣기 싫은 목소리가 경수의 귓전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 민석은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얼마나 힘든거냐? 낮게 깔린 그 목소리가 지금도 민석이 많이 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이 보였다. 사실 민석아. 죽을 것 같다, 나. 진짜 너무 힘들어서 미치겠어. 내가 그 애를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게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어? 응? 차마 입으로 내지 못 한 말들이 맴돌았다.

 


"나 지금. 변백현 존나 때리고 싶어."
"…응."
"그런데 너 때문에 참는다. 또 울까봐."

 


이런 친구가 어디 있을 정도로 민석은 믿음직스러웠다. 백현처럼 등을 보이지도 않았고, 경수가 건낸 음료수를 제자리에서 다 마시고는 고맙다며 웃어주고. 화가 나는 데도 나를 위해 참고. 이런 게, 친구구나. 도경수 친구 하난 잘 뒀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작게 중얼이듯 꺼낸 말에 어깨를 잡으며 일어난다. "좀 쉬다 와. 아프다고 말해둘게. 간다." 손을 두어번 저어보이고 옥상 문을 연 민석이 금방 경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민석이 가자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경수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있잖아, 백현아,

 


저런 게 친구라면. 난 평생 너의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

 


열이 솟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엔 이미 온 몸이 뜨거웠다. 경수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부엌으로 들어가 약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늦게 집에 오실 터였고, 형은 올해 스무살이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경수는 지금 혼자였다. 지금 당장은 경수가 아프다고 호들갑을 떨며 죽을 만들고, 약을 사 올 사람이 없었다. 민석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걱정을 또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까 흘렸던 눈물 때문인가. 빨갛게 충혈된 눈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와 진짜 도경수 못 났다. 부은 눈과, 충혈된 눈동자. 그리고 변백현. 경수는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아마 오늘이, 경수가 겪은 나날 중 최악의 날이라고.

나른하게 풀린 눈꺼풀이 무겁게 깜박였다. 초저녁인데도 밖은 어두컴컴했다. 곧 비가 올 예정인지 구름도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 같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구름을 마주한 경수가 생각했다. 그리고 올라오는 열을 참지 못 한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경수가 잠에서 깼을 땐 주위가 꽤나 시끄러웠다. 뭔가 싶어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울상을 짓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 얼마나 가라앉은 건지 목소리가 말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경수의 엄마는 경수와 눈을 맞췄다. 침대가 딱딱하고 주위가 환한 걸 보니 병원인듯 했다. "나 왜 여기 있어?" 물음에 엄마는 열이 39도까지 올랐었다며, 왜 얘기를 하지 않았냐고 추궁한다. 경수는 39도가 얼마인지 알 수 없어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링겔만 다 맞고 가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빠."
"이 녀석.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

 


미안한 거 알면 얼른 나으라고 말하는 아빠에 경수는 힘겹게 웃었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인가 보다. 살면서 잘 와본적 없는 병원 구경까지 했다. 음료수, 눈물, 감기, 병원. 그런데 왜 이 모든 건 변백현하고 관련이 있는거지? 지금 자신이 아프고, 괴로운 이유는 오로지 백현 때문이었다. …아. 아니다. 그건 순전히 경수 자신 때문이다.

 


"그나저나 뭘 했길래 이렇게 아픈거야, 우리 경수."

 


땀으로 젖은 머리를 넘겨주는 엄마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경수는 내심. 자신을 감싸주는 가족이 있다는 거에 정말 큰 감사함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며. 그냥 내 년에 아플 거 올해에 다 아픈가 보다고. 그렇게 웃어넘겼다. 미세하게 떨리는 두 눈가가 느껴졌지만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경수의 엄마는 눈을 감겨주며 커튼을 쳤다. 잘자. 감긴 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

 


"그게…진작 말을 했어야 하는건데."
"미안해하지마."

 


보기 싫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난처로 선택한 곳이 옥상이었는데, 하필이면 경수가 있었을 줄이야. 백현은 문고리를 잡은 손의 힘을 뺐다. 천천히 문 옆 벽에 기대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찬열에게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이상하게 찬열이 경수를 욕할 때면 묘한 감정이 피어났다. 백현 자신은 그렇게 잘도 경수를 욕하면서. 왜 다른 사람이 경수 욕을 하면 짜증이 나는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머리를 헝클였다.

 


"도대체 얼마나 힘든거냐?"

 


민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화난 티가 절로 묻어났다. 도경수 친구 하난 잘 뒀네. 사람을 힘들게 해놓고 드는 생각은 이딴 거라니. 변백현 진짜 한심하다. 백현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후, 한숨을 쉬었다. 왜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는거지? 혹시 나, 도경수한테 미안해하고 있는건가. 백현이 잇새로 헛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변백현 개새끼네. 이제와서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상처는 니가 줬잖아. 다 알면서, 도경수가 너 좋아하는 거 알면서.

 


"나 지금. 변백현 존나 때리고 싶어."
"…응."

 


차라리, 지금 민석이 당장 뛰쳐나와 백현을 때려줬으면 했다. 한 대 맞으면 이런 거지 같은 기분도 사라질 것만 같으니까. 상처를 줘놓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너 때문에 참는다. 또 울까봐."
"……."
"좀 쉬다 와. 아프다고 말해둘게. 간다."

 


민석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제 자리에 멈춰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란한 표정으로 걸어나오던 민석이 서있던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맞닿은 시선이 차가웠다. 정말 도경수 때문에 참는 건지, 꽉 쥔 주먹을 바지에 넣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분명히 중학교 때까지는 민석과 친구였던 것 같다. 경수와 민석, 백현. 이렇게 셋이서 같이 다니며 서로의 집에도 놀러가고, 매일 웃고 떠들던 날들. 희미하게 그려지는 어린 날이, 그리웠다. 따뜻한 햇살 아래 웃던 셋이 그리웠다.

 


"경수야…."

 


중학교 때 이후로 한번도 먼저 부르지 않은 이름. 그렇게 경수를 부를 때마다 경수가 웃던 게 기억났다. 활짝, 자신이 좋아하는 햇살보다 더 밝게 웃어보이던 하얀 얼굴이 떠오르자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눈이 백현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부담스러웠다. 경수와 평생, 친구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경수는 좋은 아이였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빌려주고, 맛있는 걸 해준다며 집으로 초대하고. 밝았고, 재미있었다. 그런 친구가 자신을 좋아한다…라. 존경하는 친구를 정말. 정말로 잃기 싫었다. 그 것 뿐이었는데. 이렇게 멀어졌다.

 


"…미안."

 


세뇌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경수에게서 그저 조금만, 멀어지려고 했던 거였다. 경수가 착각한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언제부터인지 닿아오는 시선들이 무서워졌다. 옛날에는 많이 감정을 숨겼는데 이젠 대놓고 티를 냈다. 나는 너를 좋아해. 경수의 눈을 마주할 때나, 시선이 닿아올 때면 느껴졌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그렇게 눈이 외치는 것만 같아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던 건 이게 아니야.

 

그 날 이후로 아예 피해 다니게 되었다. 마침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른 반이 되었고, 백현은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으니까. 셋이 함께하던 하굣길엔 백현이 항상 빠지게 되었다. 앞으론 반 친구들이랑 갈게. 자신을 바라보는 경수와 민석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하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얼굴이 굳어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민석에 비해, 경수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찬열의 무리와 다니면서부터 소위 말하는 노는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백현은 싸움을 하지도, 담배를 피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았으나 그냥 선배들이 예뻐한다는 이유였다. 잘생긴 일학년이 세명이나 들어왔다며 속 보이는 웃음을 짓는 선배들이 짜증이 났다. 그리고 찬열도, 세훈도 자신의 타입은 아니었다. 민석과 경수와는 다르게 음담패설을 잔뜩 늘어놓고, 난잡한 욕을 해대며 얘기를 했다. 그런 아이들과 놀아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복도를 거닐다 차가운 시선의 민석을 마주했을 때 말이다. 항상 웃어서 몰랐는데,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인사를 하려 손을 들고 어색하게 웃었지만 무시를 당했다. 3년 동안 친하게 정 붙이던 친구가, 저를 무시했다.

 


"새끼, 서운하게…."

 


그 때는 미처 생각 못 했지만, 서운했을 건 백현이 아니라 경수와 민석이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손을 내렸다.

 


-

 


그 날 이후 경수는 학교에 나와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열심히 수업을 들으며 집중을 하고, 필기를 하고, 쉬는 시간엔 민석과 매점을 다녀왔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으러 내려가서 밥까지 먹었다. 그런데, 빠진 게 있었다. 운동장에서 백현이 축구 하는 걸 지켜보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었다. 백현이 체육 수업을 할 때면 창문을 통해 보던 걸 관두었다. 게다가 선생님께 부탁을 해 자리까지 바꾸었다. 이렇게 해야만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백현은 이제 경수, 민석과 함께 다니질 않으니 조용히 피해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백현이 좀 데려오라는 엄마의 말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오늘 끝나고 너네 집 가자. 나 도쉐프표 볶음밥 먹고 싶다."
"공짜 아닌데."
"야아. 그런게 어디 있어!"

 


굳게 마음을 먹은 경수를 위해 민석은 그 날 이후로 경수를 위로한다던가 하지 않았다. 모른 척, 넘어가주는 모습에 또 새삼 감격스러웠다. 그래, 변백현 없어도 괜찮을 거야. 난 나를 감싸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경수는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아 그럼 내가 매점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럼 만들어 주는거지?"
"지금 당장 사주면."
"개 치사해, 도경수."

 


자 갑시다. 민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경수가 걸음을 옮겼다. 매점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웬일로 지갑이 두툼한 민석에 우유며, 빵, 초콜릿까지 싹 다 집어들었다. "와 완전 거저먹기네. 볶음밥이랑 그 많은 걸?" 기겁하며 놀라는 민석이었지만 이미 돈은 아저씨에게 건낸 후였다. 맛있는 걸 잔뜩 손에 들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나아지고 있었다. 나오던 길에 백현과 그의 친구들이 얘기하고 있는 걸 듣지 않았더라면.

 


"와- 드디어 물러나셨다. 우리 도경수님."
"말 좀 작게 해, 미친 놈아."
"시발, 야 넌 안 기쁘냐? 난 존나 기뻐. 난 내 친구 호모 되는 꼴 안 봐서 좋다고!"

 


진짜 기쁜지 입가에 웃음을 단 찬열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되게 피곤해보였다. 오랜만에 백현을 보는 것 같자 기분이 묘했다.

 


"뭐야. 너 그새 호모에게 빠진거야? 아니지?"
"…뭐래."
"야, 안 돼. 진짜 안 된다. 나 그럼 더러워서 너랑 친구 안 해."

 


진심인듯 웃음을 달고 있던 표정이 싹 지워졌다. 그 눈빛을 보자 경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미쳤냐. 더러워." 뒤에 들려오는 말에 경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더럽다. 내가…더럽다. 사실이었다. 경수는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렇게 아무의 입에서나 굴러 다녀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변백현이 나의 마음을 무시했다. 그것도, 다른 애들한테 말을 했다. 내 소중한 마음을. 감당 할 수 없어 꺼내 놓았던 도경수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

 


어제 올랐던 열이 또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에 쥐어진 먹을 것들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뒤 따라나온 민석을 뒤로 한 채 교실로 먼저 들어 온 경수는 간식 거리들을 가방에 싹 다 밀어넣고 책상에 엎드렸다. 기분이 또 바닥으로 추락했다. 며칠 동안 백현을 안 보고, 민석과 놀다보니 괜찮아 졌었는데, 그런 척 할라 그랬는데. 엎드린 채 눈을 떴다. 눈에 아슬하게 걸려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진짜 좆 같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요새 괜찮더니…또 왜 그래?"
"몰라."
"……경수야. 울어?"

 


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안 되겠는지 민석이 경수의 짝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위에 자신의 마이를 덮어주고는 어깨를 한번 잡았다 놓는다. 잘 이겨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같이 가자던 민석은 오늘은 안 되겠다며 경수를 혼자 보냈다. 약속이 있다는 건 핑계고, 경수의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배려 해준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원래라면 민석과 같이 했을 하굣길이 혼자라 그런지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다음엔 꼭 맛있는 거 많이 해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 경수야!"
"……?"

 


땅을 시선을 박은 채 걷던 경수의 고개가 들렸다. 자르지 못 해 조금 긴 머리가 시야를 조금 가렸지만 분명히 백현의 엄마였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늘 경수를 잘 대해주시는 백현의 엄마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좀 불쾌했다. 백현의 일 때문에 괜한 사람들에게 악감정이 생긴다. 특히, 백현과 똑 닮아있는 백현의 엄마는 더더욱이. 백현만 떠올려도 비참해지는 제가 너무 짜증이 났다. 그런 경수의 표정은 읽지 못 한 건지 백현의 엄마는 경수를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며, 왜 이렇게 안 놀러오냐고 추궁하는 듯한 목소리는 공기 중에서 분해되는지 머릿 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죄송하다고 하고 지나치려는데, 백현 엄마의 억센 손이 하얀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렸다 가. 바쁘진 않지?"
"아…아줌마 그게요!"
"아이, 변명은 안 통해. 오늘은 꼭 있다 가."

 


이 상황에서 백현을 마주할 수 없었다. 끝까지 경수를 짓밟은 그 깨끗한 눈을 보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경수는 끌려가고 있었다. 경수에겐 지옥이나 다름없는 백현의 집으로.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굉장히 낯설었다. 경수는 복잡한 마음을 가라 앉히며 가방을 내려 놓았다. 얼른 뭐라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백현 엄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마른 등마저 닮은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 보이던 두 눈, 마른 등, 땀이 나던 손바닥. 아른거리는 그 잔상에 짜증이 났다. 경수는 분명 나락으로 떨어졌다. 누구 때문에? 변백현 때문에.

 

백현은 저의 마음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다. 싫어하더라도, 백현만 싫어해야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마음을 알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모잘라 경수가 있는 데도 모욕하다니. 정정해야겠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 경수의 최악의 날이었다.

 


-

 


"엄마 나 왔…"
"어, 백현아 왔어? 경수 와있다."
"……."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들어오던 백현은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 커진 두 눈은 백현 엄마의 말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시선은 거두어 지지 않았다. 경수는 어딘가 모르게 힘겨워 보였다. 분명, 경수가 자의적으로 들어 온 건 아닐 터였다. 집에 가던 경수를 끌고 들어왔을 엄마를 생각하자 쪽이 다 팔렸다. 아까 점심시간에 찬열이 한 얘기에 더럽다고 답한 것이 괜히 마음에 걸렸었다. 경수는 듣지 못 했겠지만, 백현은 너무 미안했다. 의심하는 듯한 눈빛에 욱해 말을 그렇게 내뱉다니.

 


"엄만 왜 애를 끌고 들어와."
"경수 오랜만이잖아. 너가 안 데려오는데 그럼 어떡해."
"아 진짜! 주책 부리지 좀 마."


엄마한테 하는 말버릇 좀 봐.

 

찰싹 소리가 나게 백현의 팔을 친 백현의 엄마는 옷이나 갈아 입고 오라며 백현을 밀어냈다. 투덜대며 부엌에서 빠져나오자 아직도 불편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는 경수가 보였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하지만 최근에 자신을 피하던 경수가 생각이 나 입을 다물었다.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을 벗었다. 불편하던 천 쪼가리들을 벗고 나니 드는 해방감에 좀 살 것 같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른 나왔다. 불편해보이는 경수를 내보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벌써 저녁을 다 차린 백현의 엄마는 경수를 데려다 앉혔고, 맞은 편에 백현이 앉았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진짜 오늘따라 이상하네.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네 왜 이렇게 어색해?"
"얘 아프대. 그래서 그래."
"그러니? 어머, 내가 몰랐네."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목소리에도 작게 네 하고 대답만 할 뿐, 경수는 말을 아꼈다. 아래를 보느라 내려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밥을 먹자며 분위기를 띄어오는 백현 엄마에 경수는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깨작깨작 먹는 모습이 많이 안타까운지 백현 엄마는 이것저것을 경수 밥 위에 올려주었다. 군소리 않고 다 받아먹는 경수가 안쓰러웠다. 힐끗, 그런 경수를 보며 백현이 밥을 잔뜩 퍼먹었다.

 

백현이 밥을 다 먹고 나서 10분 뒤에 경수도 밥을 다 먹었다. 억지로 먹었는지 딱 봐도 안 좋은 얼굴의 경수를 걱정하며 백현 엄마는 백현을 툭 밀었다. 왜. 짜증이 솟은 대꾸에 태연하게 경수 데려다 주고 와. 그 말을 뱉은 백현 엄마는 조심히 가라고 경수에게 얘기한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씨. 머리를 마구 헝클이자 무표정한 얼굴이 힐긋 시선을 줬다 다시 가져간다. 작은 손이 가방을 들어 멘다. 할 수 없다 싶어 나가는 경수를 따라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는 동안 도경수는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분이 왜 이러지. 항상 듣던 목소리를 못 들으니 조금 어색했다.

 


"……."

 


진짜 한 마디도 없다. 곧은 시선으로 앞만 보고 걷는 경수의 옆에 섰다. 뭐냐는 듯이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져 엄마 때문이라며 대충 핑계를 댔다. 그러자 다시 스윽 앞으로 옮겨지는 눈, 게다가 걸음이 빨라졌다.

 


"…이젠 나한테 말 안 걸게?"
"……."
"도경수."

 


니가 이러니까 진짜 어색하잖아. 백현은 그 말을 하고 금새 후회했다. 생각을 해보니 또 이기적인 말을 했다. 아니, 쳐낸 건 난데. 왜 내가 아쉬워 하고 있지? 그 말에 경수가 걸음을 멈췄다. 복잡한 얼굴로 백현을 마주한다.

 


"니가. 나 더럽다고 하는 거 들었어."
"…뭐?"
"박찬열한테 나 더럽다고 하는 거 들었다고."

 


그 동안 더러운 거 피하느라 고생 많았어.


입술을 꼭 깨문 경수가 그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제 자리에 박힌 듯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들었다니. 그걸…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현은 눈을 질끔 감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고생 많았다고 하면…걱정되잖아 도경수.

 

 

 

 

*

 

하 린(HARIN) 입니다. 두개 다 같은 이름이에요.

중 편이 나왔습니다. 미리 써놨던 부분이라 바로 업데이트 할 수 있었네요. 상 편에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오늘은 경수가 들은 그 말 때문에 틀어지는 둘의 사이가 관점 포인트! 과연 어떻게 될지‥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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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완전재밌어요ㅠㅠ다음편기대할께요^^!
11년 전
독자1
으아ㅠㅠㅠㅠㅠㅠㅠ 몰입해서읽었더니너무슬프네요ㅠㅠㅠ짝사랑의아련함 저도알죠......ㅠㅠㅠ작가님 암호닉신청할게요수목금이요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암호닉 길쭈기요!아 마음이 아프네요ㅠㅠㅠㅠㅠㅠㅠ백현이가빨리 친구로서랃ᆞㄷ 돌아왓으며뉴ㅠ
11년 전
독자2
아ㅜㅜㅜㅜㅜㅜ대박이에요ㅜㅜㅜ이거만기다렷어요ㅜㅜ백현아빨리너의마음을깨달으렴ㅜㅜ
11년 전
독자2
백도는 아련한게 제맛이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멍멍이예요ㅠㅠㅠㅠㅠ아 경수 얼마나 상처받았을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울지마 경수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3
경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4
엉ㅜㅜㅜ사마귀 이자식이ㅜㅜㅡ자꾸 아ㅜㅜㅜ어뜩해
11년 전
독자5
대박이다배갑ㅇㅁ닒ㄴ량먼ㅇ개아련아련아련ㄹ아련아이거꼭챙겨볼게여 ㅠㅠ슈비아사랑합니당.ㅁㄴ,ㄻㄴ룬ㅇㄻ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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