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시골즈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광현이를 불렀다. 그러자 전화 너머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나는 이렇게 속상한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축 쳐져 있어요"
"아 이광현...."
저거 봐, 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묻는 거. 밉다 이광현!
"광현아 너 못 본 지 3주째야.."
"알아요"
"이번 주에 보면 안 돼?"
"미안해요. 나 진짜 훈련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사실 이번 주도 못 만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연히 훈련을 해야 하는 거고.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 경기 끝나면 진짜 매일 봐요 누나. 응?"
광현이는 내심 미안한 것인지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알면서 괜히 이광현이 기분 풀어주는 거 듣고 싶고.. 이러니까 나 진짜 변태 같네.
"괜찮아, 네 목소리 들었으면 됐다. 다치지나 말고"
"절대 안 다칠게요"
"그래, 훈련 열심히 해 현아"
"네. 잘 자요 누나"
끊긴 전화가 아쉬워 말없이 핸드폰을 바라봤다. 화면에 가득한 광현이의 사진을 보았다. 되게 보고 싶네.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좋겠다. 아 그전에 경기 결과가 꼭 좋았으면 좋겠다. 경기가 잘 풀릴 때마다 활짝 웃던 광현이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웃는 모습만 볼 수 있길.
"뭐? 진짜?"
"네.. 아 진짜 미안해요. 어떡하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 그저께 광현이는 경기가 끝났고, 어제 집으로 돌아와 푹 쉬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나와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광현이 친척분들이.. 수고했다며 광현이를 붙잡고, 고기를 사주겠다며 밤새 술을 먹자고 했단다. 고기 나도 사줄 수 있는데..(울컥)
다른 친구들 약속도 아니고 친척들의 약속이라 더욱 할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왠지 많이 서운했다.
왜냐하면, 이번처럼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얼굴을 못 본 건 처음이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아..근데 뭐 어쩔 수 없잖아. 앞으로 만날 시간 많은데 뭘. 내일 보면 되지"
나는 바보이다. 왜냐하면, 바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또 괜찮은 척 웃어넘겼다. 그래, 내일 보면 되지..
"전화 또 할게요. 미안해요"
"너 미안하다고 그만해! 얼른 가서 고기 먹어"
"알겠어요오...."
말꼬리가 늘어지는 걸 보니 뾰루퉁한 광현이 표정이 안 봐도 훤했다. 에휴. 오늘 뭐 하지. 옷도 다 갈아입었는데 안 나가긴 뭐하고.
"여보세요"
"야, 너 오늘 나 좀 만나줘라"
술이나 먹자.
"뭔데, 나 왜 불렀어."
"왜긴 술 먹자고 부른 거지"
"이광현 때문이라고 들리는데 나는"
"정세운 귀신 같은 새끼"
갑갑한 마음에 부른 정세운은 역시 정세운이다.
날 너무 잘 알아.
"이번엔 뭔데"
"아니 그냥.."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늘 통화 했던 내용을 말해주었다. 정세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만히 내 얘기를 듣다가, 앞에 놓인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광현이가 잘못한 건 아닌데, 속상할 만하네."
"광현이가 뭔 잘못이 있겠어.. 운동 열심히 했을 뿐인데"
"애인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불쌍하네"
"나도 내가 불쌍하다"
"내일 실컷 보면 되지"
"내일 밤까지 안 놓아줄 거다 이광현"
"안 되겠다. 광현이보고 도망치라고 해야지"
마지막 말에, 정세운을 실컷 때리고 술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 맞은 팔을 문지르던 정세운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보고 싶다 이광현' 오늘까지 오억 번째 생각하는 말이다. 내일 무슨 옷 입지, 몇 시에 일어나지, 틴트는 뭘 바를까?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현관문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뭐지?. 가까이 보기 위해 남자에게 더 다가갔다.
"누나!"
"뭐야????"
심한 동공 지진이 왔다. 뭐야 이광현 네가 왜 여기에..?
"누나 보러 왔죠. 왜요, 싫어요?"
"그게 말이야 방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광현이를 괜히 툭 쳤다. 싫을 리가 있나, 나 지금 속으로 오열 중이야..
내 투정을 가만히 받아주던 광현이는, 기분 좋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 보고 싶었죠"
"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나는 좀 많이 보고 싶었는데..."
광현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특유의 햄찌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진짜 이러니까 내가 맨날 놀리지.. 우주 뿌셔 아파트 뿌셔.... 연하 하세요. 세상 사람들..(오열)
"오구 내 새끼 그랬어?"
"아 그거 하지 말라니까"
자기가 애기같이 행동하면서 애 취급받는 거 싫어하는 이광현.. 모순덩어리..
"내 새끼를 내 새끼라 하지 뭐라 그래"
"일루 와요"
광현이는 장난스럽게 힐끗 째려보곤 내 팔을 끌어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지만, 이내 나도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광현이의 손길을 받으며 안겨있었다. 냄새, 포근함, 설렘 이 모든 게 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한 광현이의 숨결이 귓가에 느껴졌다.
"아 좋다"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음색이 듣기 좋았다.
"이해해주고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
"내일"
"...."
"예쁘게 입고 만나요 우리."
.
오늘 밤은 다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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