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정석
w. 석원
A
[완전 초비상이니까 일 끝나면 우리 집으로 와]
[꼭 와야 된다]
[꼭]
정호석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대로 식탁 위에 엎어졌다. 2년 만에 제대로 마주친 민윤기는 내 기억 속의 민윤기와 달라진 게 하나 없어서 울컥 차오르는 걸 겨우 참아냈다. 어쩐지 옆집 사람이 너를 너무나도 잘 떠오르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았다. 겨우 잡은 집을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파오는 머리를 쿵쿵 식탁 위에 둔탁한 소리가 나고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너 또 머리 박고 있었지.
"귀신이네. 일 다 끝났어?"
-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10분이면 도착해. 뭔지는 몰라도 머리 그만 박고 있어.
"어. 고맙다."
정호석의 말을 듣고 멍하니 소파에 기대앉아있는데 10분이 훌쩍 지난 시간 임에도 연락이 없는 정호석이 괜히 걱정되어 잠옷 위에 대충 후드집업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신여주."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난간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던 민윤기와 그 옆에 서 있는 정호석이었다. 멍하니 서서 둘을 바라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정호석에 정신을 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눈은 민윤기 손의 담배를 보고 있었다.
"민윤기, 너 이제 담배 안 피우기로 한 거야?"
"어. 보면 모르냐."
"신기해서 그러지. 근데 갑자기 왜?"
"너 담배 냄새 싫어하면서 꾹 참는 거 안 보려고 끊는다, 왜."
추억이란 건, 그와 관련된 사소한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옛날 생각을 물고 늘어지게 만들었다. 습관처럼 담배를 물다가 어느 순간 손에서도, 주머니에서도 담배가 사라졌던 민윤기가 떠올라 멍하니 담배만 보고 있자 내 시선을 따라간 민윤기가 제 손에 들린 담배를 급하게 끄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신여주, 그게 아니라…."
"정호석, 할 말 다 하고 들어와."
바보 같은 민윤기는,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나를 불렀다. 그가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다고 한들, 내가 그에게 뭐라 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호석을 보고서 어둑한 기운이 맴도는 집에 돌아왔다. 정호석을 주려고 끓였던 차는, 이미 바깥의 찬 공기를 잔뜩 머금은 터라 냉기가 돌았다. 새로 차를 내야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손에 든 찻잔에 고요한 파동이 일렁였다. 너를 마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너에 대한 미안함인지, 나의 사랑에 대한 연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낭만의 정석
; 어떤 조우
"울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
"이미 울었냐."
더 불쌍해 보이게 혼자 우냐며 차를 마시는 정호석을 흘기다가 식탁 위에 엎어졌다. 망할 놈, 앞에서 민윤기랑 떠들고 있다고 언질이라도 해줬으면 굳이 나가지도 않았을 거고, 굳이 과거를 떠올리지도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도 굳이 울 일도 없었을 거다. 물론 새벽에, 옆집이 민윤기라는 생각에 또 추억 여행을 하다가 글썽였을 수는 있지만.
"초비상이라길래 짜장면 불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너 나랑 집 바꿀 생각 없냐."
"그런 말에는 대답하는 거 아니랬어."
단호한 새끼. 입술을 비죽이며 정호석을 흘겨보는데 차분하게 차를 마시더니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나를 빤히 보는 그였다. 부담스럽게 뭐 하냐고 고개를 살짝 뒤로 빼니,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리는 정호석이었다.
"완전히 놓든지, 잡든지 하나만 해. 둘 다 무슨 고생이야."
"…."
"나는 너네 둘이 힘들어하는 거 그만 보고 싶거든."
구시렁거리는 정호석이 속으로는 얼마나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고개만 끄덕이려다 눈물도 함께 쏟아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옆으로 와 투박한 손길로 내 등을 토닥이는 정호석의 손길을 받으며 엉엉 울다 눈이 붉어진 채로 겨우 뚝 그치니 그제서야 민망함은 내 몫이 되는 걸 느꼈다.
"결정 잘해. 나도 기다리는 사람 있어서 가봐야 돼."
"어, 고마워."
"네가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며. 친구로 지내든, 아예 연을 끊든 해."
잔인하고 묵직하게 날라오는 팩트에 고개만 끄덕였다. 소파 한 쪽에 제 성격처럼 가지런히 놓인 코트를 입는 정호석을 멍하니 보다 냉기 가득한 차를 입에 적셨다. 욕먹을 걸 알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게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신여주는, 그런 걸 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민윤기랑 자주 연락해? 여기 사는 거 알았어?"
"…철 좀 들어라, 너는."
"아, 왜 때리는데."
"민윤기가 네 생각을 얼마나 하는데."
질문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까보다 매서운 손길로 딱밤을 때리는 정호석에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그를 흘기니 길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 민윤기가 네 생각을 얼마나 하는데, 카키색 목도리를 두르며 혀를 차는 그의 말이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더 묻다간 내일 머리에 큰 혹을 단 채로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냥 이제는 정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선택권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로 지내든 아예 남남처럼 지내든, 이제는 슬슬 결정을 내려야 했다.
/
"윤기야."
"…신여주, 그만해."
"나는 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무서워, 버거워라는 말들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속으로 생각만 했던 말들인데도, 어제 말한 것처럼 울렸다. 눈이 부시도록 따사로운 햇볕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어두운 꿈이었다.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고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 몰골로 출근을 하라고."
멍하니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누가 장난친 건 아닐까, 아니 이 얼굴로 출근을 해야 한다고. 어제 밤새 운 탓에 눈은 붉게 충혈된 것도 모자라 팅팅 부어 있었고, 눈물 자국과 침 자국이 뒤섞인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정도였다. 뽀득 뽀득 소리가 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나서 도수가 없는 안경을 쓰고, 마지막으로 볼캡을 머리에 푹 눌러썼다. 오늘 점심 타임 초등 논술부는 제발 10명 미만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
"…."
"…어디 가냐?"
"어."
"잘 갔다 와."
입춘이 지났다고 한들, 오늘 아무리 햇살이 따사로웠다고 한들, 아직 겨울인 이 시점에 이불을 털고 있는 민윤기와의 어색한 세 번째 만남이었다. 만사가 귀찮았던 애였던 것 같은데, 2년 새에 부지런해졌네. 인사를 하는 얼굴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꽤 밝아 보였다. 걸어가는 내내 이런저런-민윤기-생각을 하다 보니 살갗에 닿아오는 찬 기운을 뒤늦게 느끼고 패딩 자크를 목 끝까지 채웠다.
이렇게 추운데, 민윤기가 이불을 턴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민윤기 코가 평소보다 빨갰던 것 같기도 했다.
"여주 씨, 점심 타임은 저기 태권부 애들 수업이랑도 겹쳐서 조금 어수선할 수도 있어."
"태권 부요?"
"어. 수업이 겹칠 때도 있고, 태권도부 애들이 먼저 끝나면 저기 창문 쪽에서 논술하는 애들 기다리거든."
원장님이 가리키신 것은 수업하는 교실 옆에 크게 붙어 있는 창문이었다. 저학년 초등부 애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을 생각을 하니 귀엽기도 하고, 괜히 소란스러워져서 수업하는데 방해가 되면 어쩌나 고민하는데 원장님께서 태권도는 원장님 남편이 운영하신다고, 시끄러우면 저한테 이르라고 하시더니 사람 좋게 웃으시곤 원장실로 향하셨다. 마주 보는 학원 두 개를 같이 하시다니. 역시 사람은 건물주로 사는 인생이 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고 알바를 하며 가르쳤던 고학년 아이들보다 3~4살 어린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님! 지민이는 놀부가 안 나쁘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민이는 왜 놀부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놀부도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겨우 첫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의 논술책을 읽어보며 도장을 찍고 있는데 오늘 공부한 내용으로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나쁜 캐릭터한테도 사정은 있을 수 있으니까.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집으로 보내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태권 도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태권도랑 논술같이 하는 아이 아버님인가 싶어 급하게 정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아드님 찾으세요?"
"…아드님이요?"
"네. 아까부터 아이 찾으시는 것 같아서요."
"아, 저는 여기 도장에서 사범으로 있는데 새로운 선생님 오신다길래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아, 죄송해요."
어쩐지 아버님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괜히 실수했나 싶어 도복을 입은 남자 눈치만 보는데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웃는 낯이 왠지 익숙해 더 낯선 기분이 들었지만, 단정한 도복에 밝게 웃는 그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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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어서 저는 면목이 없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데 글 쓰는 속도까지 느리다니 (따흑흑
여러분의 오해를 막고자 한 마디 한다면...호석이는 절대 서브가 아닙니다...(큰 스포
앞으로 열심히 삽질할 탄소들과 윤기...ㅎㅎㅎㅎ
그리고 도복 입은 정국이는 예전부터 떠올리던 건데 게임에서 그렇게 등장하다니
저는 심장이 쾅했씁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봬요!
댓글들과 암호닉으로 큰 힘 주셔서 늘 감사해요 ♡ 암호닉 신청은 언제나 받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한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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