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Does The Fox Say?
W.LIGHTER
"으, 머리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민현은 뒤늦은 숙취로 인해 제 이마를 부여 잡고 있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먹은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웬만해서는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속을 푸는 괜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밤새 ㅇㅇ를 생각하는 것보단 지금의 두통을 겪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어제도 회사를 가지 못했거늘 오늘도 빼먹게 생겼다. 하긴 가서 일에 손도 못 대고선 바보같이 넋놓는 걸 다른 사람한테 보일바엔 아예 안가는 편도 좋겠지. 알람과 시간 스케쥴을 달고 살았던 민현은 한순간에 깨져버린 자신의 생활이 어이없게도 우스워서 그대로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 속으로 뉘이기 시작했다.
-네, 대표님.
"이번주까지만 스케쥴 빼줘요. 다른 약속은 더이상 잡지 말고.
침대 맡 선반에서 핸드폰을 들고 전화할지, 말지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는 그는 결국 또다시 자신의 비서에게 자신의 사정을 주저리 설명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좀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몸이 별로라서. 도대체 이런 부연 설명은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대놓고선 빼먹은 적은, 심지어 하루의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펑크를 낸 적은 더더구나 없어서 민현의 손에 의해서 머리는 엉망이 되고 있었다.
-저 내일 한경물산과 회의 하시는 걸로 잡혀져 있는데 취소할까요?
머리를 이리저리 헝크리고 있던 그의 손이 멎었다. 한경물산이란 단어 하나로도 ㅇㅇ가 생각났다. 애초에 그녀를 다시 붙잡아 보기 위해 되도 않는 거래처 약속까지 잡은 것이었으니 금세 머릿속이 그녀로 가득 차는 것도 예삿일은 아닐 듯싶었다. 민현이 아무것도 못하는 것도, 입에 대지도 않는 술을 마신 이유도, 그의 하루가 엉망이 된 것도 그녀 때문이었는데 그녀가 다니는 회사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어댔다. 내가 미쳤지.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헛웃음과 함께 자신의 볼에 갖다댄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만 같았다. 아니, 혼자 있는 자신의 집과 침실도 모두 허전하고 싸늘했다.
"그냥, 취소해주세요."
민현은 자꾸만 매말라가는 듯한 입술을 축이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리고 한경물산이랑 오갔던 거래는 전면 취소하세요. 그 쪽에서 위약금 원하면 금액대 맞춰서 넘겨주시고요. 끝끝내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것만 같았다. 남은 이 거래마저 끊어내면 저와 ㅇㅇ 사이엔 남는 건 하나도 없겠지. 그녀가 그대로 카페를 뛰쳐 나간 이후로 민현은 간만에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 아닌 여유가 생겼었다. 한동안 사적인 시간을 갖는 것조차 벅찼던 그가 하나씩 돌아보고 생각을 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레 따라오는 ㅇㅇ를 떠올리다 보면 괜히 목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그녀가 제게 했던 말대로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렇게 널 보냈으면 그나마 나았을 걸.
-네, 알겠습니다. 저 그리고 대표님 한경물산 마케팅 부서 옹성우씨께서 메세지를 남기셨는데요.
"마케팅 부서에서 갑자기 무슨 연락이..."
-ㅇㅇㅇ대리 대신 죄송하게 되었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진짜 넌 알다가도 모르겠다. 민현은 결국 제 머리 끝까지 덮었던 이불을 걷어 내었다. 전까지만 해도 아팠던 머리가 순식간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요근래 ㅇㅇ씨가 회사를 나오지 못해서 따로 안부를 전해드릴 수는 없지만 그 때 대표님을 혼자 두고 와서 많이 미안해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혼자 남겨두고 갈거면 매몰차게 가버리던지 하지. 이런 식으로 메세지를 전할 건 또 뭐야. 화장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는 추운 한겨울에 찬물로 세수를 했다. 평소라면 추운 건 죽어도 싫다고 했을 그가 씻는 도중에 서너번을 찬물에 손을 담근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던 그의 집안을 굴러다니는 술병들이 그의 발 끝에 채였다.
"하, 진짜."
이런 건 정말 자신답지 않았는데. 지금 이게 뭐하고 있는 거야. 술병들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던 민현은 결국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녀를 좋아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래서 그녀 때문에 힘든 것도 견뎌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혼자서 힘들어 할 줄 알았다면 그 때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사람의 직감으로 끝이 다가옴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민현의 눈치는 생각외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서 자신과 ㅇㅇ가 이젠 더이상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진즉에 알았을 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질질 끌었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과 가끔씩 마주친 그녀가 너무 좋아서 무시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근데 평생 회사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가 없다고 했던 그녀에게 한 명 뿐이어도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에게 전해 들은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무너지는 듯했더랬지.
-그리고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고 하셨습니다.
급하게 옷을 챙겨입고 문 밖으로 나가는 민현의 발걸음이 빨랐다. 그는 이다지도 여렸다. 그녀에게만큼은 수만번 지고 넘어가 줄 수 있을만큼 약했고 여렸다. 무작정 나서버린지라 그의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미안한만큼 또 많이 고마웠다고.
*
회사에 낸 휴가기간도 이제 다 끝나간다. 애초에 넉넉하게 쉴만큼 휴가를 가질 수도 없어 당장 내일 모레부터 회사에 나갈 생각만 하면 온 몸이 아플 것만 같았다. 가면 뭐라 말을 해야하지. 숱한 소문들이 고작 며칠의 공백으로 사라지지 않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을 또 들어야 할까. 벌써부터 괜한 한숨만 나오는 걸 봐선 그저 집에서 가만히 숨어지내고 싶었다. 다 무시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지내도 괜찮을 거 같았는데. 다니엘이랑 둘이서 조용히 사는 것도 어디에 비할데 없이 좋았는데. 하지만 설사 지금 바로 그와 떠나겠다고 해도 정리할 것들은 정리해야 했다. 이를테면 민현과의 일이라든가.
"전화로 말하는 건 좀 그렇겠지."
막상 다시 얼굴을 봐야한다고 생각하자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니엘을 많이 좋아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 마음이 쉬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 쉽게 넘어가고 사라질 마음이었으면 처음부터 ㅇㅇ, 제가 먼저 그와 함께 떠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민현의 얼굴을 보는 건 두려웠다. 그와 좋지 못한 상황에서 만났을 때에도 불현듯 민현이 울자마자 어쩔 줄 몰라했던 자신이었는데 이번에는 단호하게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하면 민현과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 사이를 정리하는 게 표현할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저 혼자 마음을 정리하는 거라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황민현?"
단호하게 정리하기 위해 그의 번호까지 말끔하게 지웠음에도 핸드폰에 뜨는 숫자 하나만으로 민현임을 알 수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다니엘이 없는 게 이토록 다행일 줄이야. 답지 않게 성운의 고민을 들어주러 가야한다고 잠시 동안 그가 집을 비우기가 무섭게 보고싶었는데 지금은 안도감이 먼저였다. 모든 시작을 할 때는 뒤에 꺼리낄 것들이 없어야 했다. 괜히 제대로 끝맺지 못한 매듭은 또다시 민현과 자신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모르니까. 근데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는 이제서야 전화를 해왔다.
"왜, 전화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이런 말을 좀 그랬나. 구태여 봐도 민현임이 틀림없었고 그가 연락을 한데는 이유가 있었을테니 꺼낸 말이었다지만 괜히 입이 마르는 듯했다. 지금 바빠?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해온 민현의 말에 ㅇㅇ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지금 집이야. 괜찮아. 그녀는 뒷목을 매만지다가 제 옷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해야할 게 있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제가 해야할 일 중에 가장 골치아픈 고민인 사람은 더도 말고 민현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충 위에 걸쳐 입을 아우터를 고르기 위해 ㅇㅇ의 손이 분주하게 옷거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을까 건너편에서 민현이 말을 꺼내왔다.
-나 좀 잠깐 만나. 너네집 앞이야.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이, 울것만 같은 목소리로.
What Does The Fox Say?
Episode 14, fin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다
짬짬이 글을 쓰고 있는데 쓰면서 정말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어요ㅠㅠ
솔직히 아직 몇 화를 기점으로 완결을 내야할지는 어림을 잡지 못하는게 함정이지만 어찌 되었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캐릭터가 발생한다는 점이 영 못내 섭섭하지만요(미녀나미안해..)
아 그리고 이번편에서는 민현이와 다니엘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잘 전달이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민현이는 혼자 밤새 술을 마시는 그 시간에 다니엘이랑 여주는 꽁냥꽁냥 부끄부끄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라는 이야기를 써서 나름대로 지나간 사랑과 현재의 사랑을 아주 단순하게나마 표현해드리고 싶었답니다ㅎㅎ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걸 느끼고 있었을 민현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요ㅠㅠㅠ
무엇보다 13화와 14화 사이에 결코 짧지 않을 사랑타임을 훌쩍 넘어버려서 죄송합니다ㅠㅠ큐ㅠㅠ큐ㅠ 제 손이 똥손이라 송구할 따름이네요;;;;
(나중에 언제가 되었든 완전한 편으로? 독자님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욬ㅋㅋㅋ)
요즘 봄 날씨라고 막 착각해서 얇게 입고 다니다가 저처럼 매달 감기를 달고 살지 몰라요 부디 옷 꼭 잘 챙겨입고 다니고 아프지 말고!
새학기가 시작되느라 다들 바쁘고 힘들텐데(은 저포함) 우리 다같이 힘내보아요!!!!!!!!!!!!!
댓글 남겨주셔서 항상 감사하고 읽어주셔서 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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