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t, too Much 04
"석진이랑 무슨 사이야?"
교복을 입고 있던 여자아이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석진이랑 무슨 사이냐고. 나는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우리 관계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 것 같다. 그러게, 우리는 무슨 사이지. 여자 아이가 되물었다. 네가 모르면 어떡해. 하지만 진짜 모르겠다. 나와 그 아이는 지금 사귀고 있는 걸까. 사귀지 않는다면 우리가 호기심에 했던 것들은 다 뭐였지. 장난질?
"친구인가봐."
그냥 가까운 사이가 맞지. 굳이 정의하자면 우린 친구다. 어쩌면 남들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지도 모를 단어. 대답을 확실하게 못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미안하기도 하고.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장르도 아니었기에. 내가 석진이와 로맨스를 찍는다면 고백한 이후가 될 것이지, 서로가 아무 말 않는 사이에 연인이라고 멋대로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그랬을 터였다.
어린 날에는 단순히 애매한 관계를 정의내리지 않고 얼버무려도 넘어가는 일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을 어린 사람으로 있을 수 없었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천천히 달라지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기심, 관심. 그리고 지어낸 이야기와 소문.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성숙해지고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성인이기에. 성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남녀의 성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를 진하게 갖기 시작했고 향한 관심은 소설로 만들어져 다시 태어나길 반복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친구라는 말을 뱉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수긍이 아니었다더라.
"너는 친구로 안 보잖아."
남자로 보지. 아마도 그 여자애는 석진이를 좋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얼 하든 그 아이의 스케줄에 내가 존재하니까.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궁금하기도 했을 거고, 또 그 궁금증은 의심을 피워 불안으로 완성됐을 것이다. 나는 또 알게 되었다. 나와 그 아이의 관계가 이젠 친구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아니라 말한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나 빼고 다 아는 그런 것들로 말이다. 서로 좋아해야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두 남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니, 나는 그 자리에서 고민을 관두기로 했다. 그래.
"남자로 보이나봐."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놀러 가고. 어쩔 때는 둘이 술을 마시기도 하며, 혼자 있을 때는 데리러 오거나 전화를 하는. 그러다 그 아이가 군대에 가고 전역했을 순간에도 다시 함께 집을 구해 동거를 시작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 그게 너희들에게 연인으로 정의된다면 더 이상 친구라는 단어는 무기가 될 수 없었다. 남 주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내가 갖기에는 그렇다 말하기 껄끄러웠던 사이.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사이. 그러나 이 관계를 정정하고 바꾸기엔 싫었던, 마음.
사이를 부정하지 않으니 더 이상 관계에 대한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사람들의 의심을 거절하고 회피해 봤자 느는 건 피곤함이라고 석진이도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누가 물어보면'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자.
근데 왜 굳이 우린 연애하지 않는 걸까.
잘 어울린다는데. 서로를 그렇게 찾으면서 연애는 안 해. 석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물어보지 그랬느냐고.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서먹해지면 관계를 정정해버려야 하기에. 이기적이게도 그건 싫었으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지낸 유일한 친구인데. 별로 어색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도 딱히 뭐라고 안 하는 관계가 됐으니, 우리가 편한 거라면 이걸로 된 거지 뭐. 공유할 게 많은 사람인 채로 괜찮을 테지.
복잡한 생각은 사라졌다. 관계를 깊게 생각해 봐서 뭐 해. 이제는 귀찮아질 지경인데. 편하게 생각하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시간은 또 흘렀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니 앞에는 내 오랜 고등학교 친구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 보이는 서로의 얼굴. 언제 뿌린 건지 새로 바뀐 향수 냄새가 코 끝에 닿았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
그러게
진짜 왜 여기서.
도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알아봤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않아줬으면 했다. 그가 왜 여기 있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냥 날 못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역시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지. 태연하게 지나가면 알아봐도 못본 척 하지 않을까. 나는 머리를 앞으로 내려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맥주만 빨리 마시고 일어나자. 맥주만.
그러고 보니 이전 편의점 앞에서도 만난 걸 보면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인 듯 싶었다. 긴장된 손으로 꽉 쥔 맥주캔이 벌벌 떨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이 남자를 피하고 싶어 하느냐고? 딱히 이렇게 신경을 쓸 만큼 무섭거나 싫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샤워만 하고 나온 상태였던지라 민낯에 트레이닝의 차림을 저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 사람은 저렇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나는 이렇게 추레한 차림이라니. 커피를 흘렸어도 이전처럼 화장을 하고 있는 편이 나을 터였다. 다음부터는 공원에 와도 탁 트인 자리에 가서 앉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꽤 많은 양의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따끔거리는 목. 결국 쉬지 않고 급하게 들이키던 나는 사레가 걸려 소리나게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아. 도망가자.
기침을 하느라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일어섰다. 빈 맥주캔은 다른 손에 꽉 쥔 채였다. 보지 않아도 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발 알아보지 마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남자가 있던 벤치를 지나쳐 걸었다.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다.
부디 거기서 멈춰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대는 그걸 바라지 않았나 보다.
자리는 피했지만 담배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불은 꺼진 듯했지만, 남자를 감싸고 있는 게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게 무얼 뜻하냐고. 구석의 벤치는 이미 한참을 지나왔다. 맥주캔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공원 안에서 나는 배회중이고, 남자는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알아봤다. 아니면 알아보기 직전인가. 그래도 그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따라오는 거지. 두려움보다도 의문이 앞선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자신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놀랍게도 이게 우연히 겹친 길이길 바라면서.
"저기요."
그치, 그럴 일은 잘 없지.
다 망했다 싶었지만 나를 콕 집어 불렀으니 어떻게 모른 척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돌아야지. 어떡해. 결국 입을 가리던 손을 떼어내고 몸을 돌렸다. 저요? 다른 사람이길 바랐지만 틀림없는 그 타투이스트 남자가 정면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친 시선. 그리고 타이밍 좋게 울린 진동. 잠시만요. 나는 고개를 확 숙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직도 공원에 있어?]
석진이의 문자. 나는 있지도 않은 그를 향해 고개 끄덕이며 답장을 보냈다.
[응, 이제 갈 거야.]
[거기 있어, 데리러 갈게.]
[아니야, 집 갈게.]
[공원 근처야.]
지금은 제발 오지 말아주라. 다급하게 답장을 보내고 천천히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고, 부디 어두운 탓에 내 얼굴이 불투명하게 보이길 바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전에 저 보신 적 있으시죠?"
기억력 되게 좋네.
"그, 이거…"
"누나."
…누나?
앞에서 들려야 할 남자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리더랬다.
"뭐 해요?"
Tat, too Much 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