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 우리 연애 할까요?
다이나믹 듀오- 날개뼈
(부제: 놀랍고도 미묘한)
01
-그러니까, 실수한 거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면서, 너도 이참에 연애를 좀 해 보라는 말이지, 딸.
"엄마, 연애가 밥 먹여 줘? 연애가 집 사 줘? 한 번 놓쳤음 됐지 왜 그렇게 안달이야? 세상 남자가 무슨 도씬지 동씬지 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너 마지막으로 집에 남자친구 데려 온 게 벌써 10년 전이야, 결혼은 안 하니?
"어, 안 해, 안 해!"
미치겠다 정말.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입만 열면 결혼 결혼. 요즘은 20대 물 건너 가서 결혼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렇게 독촉을 하는 건지. 내 나이가 어때서, 스물 여덟. 새파랗게 어리지도 숨죽은 콩나물마냥 시들시들하지도 않은 알맞게 올곧은 나이인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세면대로 향해 손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집에 남자친구 데려온 게 벌써 10년 전…' 물결이 손을 스치는 순간에도 엄마의 말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콕콕 찔렀다. 문득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예전만큼의 빛은 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서류를 한아름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힐을 잘도 신고 다니네.' 그 날 이후로는 회사에 일부러 힐을 신고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내 차림은 편한 운동화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차림은 대개 '빨리 좀 부탁해.' 하는 김대리의 말이 떠오를 때 도움이 되곤 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던 나는 앞에 오던 사내를 미처 보지 못 한 채로 직진을 했고, 갈색 머리의 남자와 팍. 어깨가 부딪혔다. 아야야, 인상을 쓰며 어깨를 어루만졌고, 엉덩방아를 찧은 나와는 다르게 남자는 쭈그려 앉아 내가 놓쳐 버린 터라 너울너울 날아가고 있던 서류를 한 둘 줍기 시작했다. 나도 말이 없이 서류를 빠르게 줍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재수 없는 일이 이렇게 중첩되는 재수 없는 인간은 나밖에 없으리라. 한숨을 쉬며 서류를 모아 탁탁 바닥에 쳐 가지런히 정리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절반의 서류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지그시 주시하다가, 이내 목에 걸린 사원증을 훑었다. 청산뷰티 강남 지사 도경수. 마케팅 1팀 대리. 에이, 설마. 하는 마음과 동시에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나를 휩싸고 돌았다. 나는 이미 일어 서서 나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 보던 남자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한 달 전에 선 자리 있으셨나요?"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내려다 봤다. 마치 당신이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이.
"저…, 상대편 여자였는데… , 그 날 다른 분을 도경수씨로 착각하고…."
"ㅇㅇㅇ씨?"
"예…."
남자는 작지만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 난감한 채로 주저 앉아 있는 나를 위한 배려인 듯 했다.
"그 때도 이렇게 왈가닥이었나요?"
이사님, 우리 연애 할까요?
"예, 그런데 도대리님을 김이사님으로 착각한 거였지 뭐에요, 그 날 집에 들어가서 엄마께서 제 등짝을 그냥…."
도대리는 내가 사소하게 지껄이는 말 한 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웃어보였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개그 프로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라도 된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젓갈질을 멈추고 입으로 까득까득 씹기만 했다. 그렇게 내가 오물오물거리며 괜히 하하 어색한 웃음을 자아내자 그 때서야 내게 묻는 도대리다.
"ㅇㅇ씨 김이사님이 청산전자 사장님 아드님인 건 알아요?"
"네?"
나는 경직 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말도 안 돼. 정말 가지가지로 매번 나를 놀래킨다. 1억 2억 그 말을 입에 담을 때 부터 알아 봤어야 했는 건데…. 해찬 홀딩스 딸과의 선자리,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의 그. 모든 게 다 맞아 떨어졌다. 한동안 그렇게 김이사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며 나오지 못 했다. 다음 번엔 대체 뭘로 나를 놀래킬까. 이젠 기대되기까지 하는 군. 그렇게 넋 놓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ㅇㅇ씨, 듣고 있어요? 하는 도대리에 말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럼, 입사한지는 지금 한 달 차?"
"네, 한 달 됐어요."
"뭐 힘든 건 없구요?"
"네, 괜찮아요."
라고 말하지만 이미 내 속마음은 김이사!!! 김이사!!!!! 하고 외치고 있다. 당신이란 인간이 제일 알기 어렵고 힘들어! 이젠 하다하다가 집안까지 알아 버렸는데, 그 사실의 무게가 너무나도 커서, 이젠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조차 모르겠다. 그렇게 속으론 아우성을 치면서도 겉으론 호호 점잖은 숙녀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모르겠다. 시집가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나 그냥 독거노인으로 살래, 엄마.
"김이사님이랑은 무슨 대화 했어요?"
솔직히 떠오르는 건 '변태자식아!' 하고 외치며 물을 부어버린 내 자신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더라. 내가 김이사의 싸가지에 한 번 놀라고…, 직책에 두 번 놀라고…, 집에 가서 그 사람이 도경수가 아니란 사실에 세 번 놀라고, 내가 했던 짓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네 번 놀랐던 것 밖에 없다. 그래, 그 날은 그냥 거짓말같은 날이었다. 내 재수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날.
"그냥…, 이런 저런 얘기 했어요."
이런 저런 얘기. 가볍고 유치한 일상의 잔잔함따위를 물어가는 대화가 아니라, 싸가지 없고, 무뚝뚝하고, 이상하고, 짜증 잔뜩 나는 그런 대화.
"그래? 나는 그 날 내가 퇴짜 맞은 줄 알고 상처 받았는데. 그게 아니면 됐죠 뭐."
도대리는 헤실헤실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웃는게 헤프면서도 정말 예쁜 사람이었다. 무언가에 물들지 않은 그런 순수한 미소. 흰백색따위로 물들었다고 할 수도 없을만큼 투명한 무(武)의 미소. 여기 뭐 묻었다. 도대리는 내 입가를 닦아주며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리고 그런 도대리의 행동에 나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사님, 우리 연애 할까요?
"케이터링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나을 겁니다. 요즘 아무나 입맛으로는 그 깐깐한 양반들 눈에 찰 수가 없거든."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향수케이스 디자인은 누가 한 겁니까?"
"그건..., ㅇ사원이..."
"우린 조금 더 우아하고 세련 된 분위기를 원합니다. 이런 나 생기만 넘치는 소녀에요, 말고. 내가 말 안 해도 이정도는 걸러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넋나간 사람처럼 최부장과 심각하게 구성 조율을 하는 김이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진짜 칼같다 칼. 어떻게 내가 아이디어 스케치만 해도 1주가 넘게 걸린 걸 단칼에 잘라 버릴 수가 있는가. 나는 머리를 탈탈 털며 책상에 턱을 괴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이게 우아하고 세련되지 않다는 거지? 모니터를 빤히 주시하다가, 또 김이사를 주시하다가.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낸 결론은, 분명 김이사는 차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
"이사님,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런데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이사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다가, 이내 내 책상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건 최대한 최부장님께 물어보기로 약속 합시다, 우리."
바쁘다는 듯 한숨을 쉬는 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대체 어딜 봐서 우아하고 세련되지 않다는 건가요?"
그는 내게 뭐라고? 하고 되묻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 이런게 바로 권력남용의 온상이라고. 어디다 찍어뒀다가 올려놔야 되는 데.
"납득이 가게 설명 시켜주세요. 키위 주스 부작용이어서 그런가 자꾸 피해의식때문에 죽겠네요."
김이사는 한숨을 쉬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을 뒤로 쓱 젖혀 컴퓨터 만질 공간을 만들어주었는데도 내 젖힌 몸을 세우고는 마우스를 포개어 잡았다. 덕분에 김이사와 완전히 얼굴쪽이 밀착되기 직전의 꼴이 되었고, 나는 그런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가슴이 또 뛰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잘 보십시오. 자. 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며 움직이는데 내 눈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향이 내 샴푸 냄새와 오묘하게 섞여서 코를 움켜잡았다. 이 요정의 다리를 조금만 더 길게 뻗어 놓으면 성숙된 숙녀의 모습이 드러나겠죠. 그런 업무상의 말들을 내뱉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무언가가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계속해서 그의 음성을 듣는 동안 심장 부근이 뜨뜨무리하게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다. 자극제는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빠르게 무언가를 해내며 내게 보고 있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바보처럼 대답했다. 예, 예. 대답하는 기계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내 제품을 수정해 다른 제품으로 보일만큼 근사하게 만들어놓은 그는 내 머리를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퉁겨 건들인다.
"이사님, 잠깐만요, 저 궁금한 거 하나 더."
"뭡니까."
"제가 아까 비아냥 거렸는데도 화 안 내시네요?"
"나도 비아냥 거리니까."
그의 대답은 쉬웠다. 입을 삐쭉 내밀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도 비아냥거리니까. 하는 게 다였다. 그는 그렇게 내 넋나간 눈빛에 맞서다가, 도움 요청이 쏟아지는 사원들의 자리로 발을 옮기려 뒤를 돌아섰다. 그리고 그 때였다. 내가 절박하게 그를 붙잡은 순간.
"진짜 마지막으로 묻고싶은 게 있습니다."
"…."
"저."
"뭔데."
"오늘 야근 아니죠?"
그는 열이 오른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내가 진짜 묻고싶은 건 이게 아니었는데…. 알고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질문을 해야할지 도통 감도 잡히지 않는다. 대체 그 엉덩이와 쇄골은 뭐였으며, 그 큰 액수는 뭐였는지.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를 볼 때 마다 기분이 미묘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하나 둘 들을 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진짜 대단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