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보니까 다들 달달한거 좋아하는구나.
우리도 연애 초반엔 나름 달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의도치 않게 자꾸 옛날 얘기만 꺼내게 되네.
아무튼 유감스럽게도 오늘 또한 옛날 일을 풀어보려고 해.
내가 과외 알바 뛸 때 얘긴데, 그 때가 아마 작년 초? 돈이 되게 급할 때라 이 때 알바를 한 서너개 뛰었었거든.
웬만한 대학교 다니는 나로서는 내 전공 살려서 수업 패턴도 익힐겸, 영어 역사 과목을 과외 해줬었는데
"정찬영, 너 진짜 이럴래?"
"해도 모르겠다니까요."
"일단 해봐. 해보고 말을 해, 왜 하지도 않고 모르겠다고..."
"아아- 몰라몰라. 저랑 밥 먹으러 나갈래요?"
짜증나는게 하나 있었다면 과외하는 학생이 보통 애가 아니었어.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는 학생이었다고 해야하나. 양아치? 날라리? 일진?
내가 봤을땐 누구를 괴롭히거나 그런건 없는 것 같았고 그냥 친구 잘못사겨서 딴 길로 샌 아이 정도.
수업에 제대로 된 집중을 하지도 않고, 맨날 딴짓만 하고, 과외하기 진짜 어려운 스타일의 학생인데
내가 부른 과외비보다 두배는 더 얹은 값을 부르며 잘 부탁한다고 웃어주시던 찬영이 어머니 생각하면 또 쉽게 관둘수도 없는거야.
말했듯이 내가 돈이 진짜 급했던 때라 알바 여러개 구하기도 바빴는데 찬영이네 과외비만 해도 알바 3~4개 값을 받았으니까.
그냥 부담없이 돈벌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자, 라는 마인드로 2개월 정도 했었나?
어느 날은 찬영이가 과외를 자꾸 미루고 미뤄서 겨우 제대로 날 잡고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어.
맨날 애들이랑 약속있다고 과외를 미루고 미루던 녀석때문에 겨우 스케쥴을 맞춘 날이 었단 말이야.
경수한테는 미안하지만 경수와의 저녁 약속을 또 깨면서까지 찬영이를 만났는데
"자, 봐봐. 이런 유형은 내가 뭐라그랬어."
"해석하라고."
"....보기부터 읽어보라고 했잖아."
"아, 아. 맞아, 보기."
".....그래서 보기를 보니까 전체적으로 공통된.... 야."
이 새끼가 보라는 책은 안보고 내 얼굴하고 지 스마트폰만 돌아가면서 들여다보고 있는거야.
요즘 녀석때문에 안그래도 보기힘든 경수 얼굴도 못보고, 그 전날 새벽까지 한 편의점 알바 피로도 고스란히 남아있고.
가만히 있어도 피로가 몰려와 신경이 예민한 상태인데 옆에서 자꾸 거슬리게 하니까 결국 짜증이 난거지.
들고있던 샤프를 던지듯이 내려놓고 정찬영을 쳐다봤어.
보지도 않고 내 질문에 대답을 할거면 맞히기라도 하던가, 틀리기는 죄다 쳐틀리면서 책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화가 나, 안나?
처음으로 정색한 표정으로 정찬영을 야 라고 부르니까 찬영이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을 쳐다보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쳐먹고 고딩을 상대로 왜 그렇게 짜증을 냈는지 모르겠다만
그 때는 진짜 그동안 쌓였던 피로, 스트레스에 버거워서
"이럴거면 너네 엄마한테가서 과외 관두겠다고 말해. 사람 앉혀놓고 너 지금 뭐하니?"
"....."
"친구들이랑 논다는거 다 이해해주고 니 스케쥴에 맞춰서 왔으면 집중하는 척 정도는 해줘야지. 안그래?"
"......"
"....하, 오늘은 그만하고 쉬어. 다음 수업은 문자로 잡자."
분주하게 책 다 챙겨서 나와버렸어.
원래 심성은 착한 애란 말이야. 하면 잘할 것 같기도 한데 시도조차 안하니까 보는 내가 더 답답하고 얼마나 안타깝던지.
물론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 안타까움 따위 금세 잊어버린게 함정이지만.
아무튼 심적으로 육제척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친구한테 맡겨놨던 편의점에 다시 들어가 앉았어.
아마 그 때가 방학이 아니었으면 벌써 몇번은 쓰러지고도 남았을걸
카운터에 앉자마자 다리에 힘이 쫙 빠지고, 그동안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신기할 정도로 몸에 힘이 안들어가는데
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보니까 전화 발신자가 경수인거야.
그 때 한창 내가 알바때문에 약속을 밥 먹듯이 깨고, 얼굴도 자주 못비추고,
알바하는 대신 적당히 하라는 경수의 조건따위 무시한지 오래에다가 심지어 이 날은 또 과외 때문에 저녁 약속까지 깼잖아?
저녁 같이 못먹는다는 문자만 덜렁 보내놨으니 도경수 짜증이 얼마나 솟구쳤을지 예상이 가더라고.
차마 씹을 용기까진 안나고 가만히 전화를 받아서 귀에 조용히 갖다대는데
- 어디야.
"....."
- 밥은 먹고 일해? 편의점? 카페? 과외? 어딘데.
짜증따위 전혀 섞여있지 않고 마냥 다정하기만 한 경수의 목소리가 너무 좋은거야.
이렇게 힘든 마당에 요즘 누가 나한테 이런 걱정을 해줬나 싶고 그런거 있잖아.
슬픈 감정이라기 보단 울컥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동안 쌓아온 감정을 보듬어 주는 것 같아서 긴장이 풀렸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한참 동안 대답도 못하고 숨소리만 색색 내면서 어느새 고인 눈물만 최대한 조용히 닦아내고 있는데 또 경수가
- 울지 좀 말고.
"......"
- 울고싶은건 난데 왜 너가 울어.
"경수야 보고싶어ㅠㅠ"
특유의 저음으로 지 딴에는 장난기 좀 섞어서 날 달래는거야.
우는건 또 귀신같이 알아내서는 울지말라고 달래주는데 달래주니까 눈물이 더 나는 것 같고ㅋㅋㅋㅋㅋㅋㅋ
이왕 들킨거 대놓고 울 생각으로 훌쩍거리면서 보고싶다고 찡찡대니까
- 보고싶다는 사람이 약속을 밥 먹듯이 깨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말이야. 울음 그쳤으면 그만하고 얼른 일 해.
그새 또 언제 다정했냐는 듯이 단호하게 일하라더라, 매정한 놈....
덕분에 마음이 진정되긴 했는데 진짜 새삼 너무 보고싶어서 미치겠더라고. 물론 만날 방법같은게 없어 문제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고 마포를 들어 청소를 시작했어.
몸의 피로는 그대로였지만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들은 조금이나마 덜해진 것 같아서 조금은 가볍게 마포질을 하는데
마포질에 몰입할만하니까 또 뒤에서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는거야.
한숨을 안들리게 쉬며 마포를 냅다 던져놓고 손님 받으러 진열대를 돌고돌아 카운터 쪽으로 향하니
나 참, 거기에 누가 서있었는줄알아? 도경수? ㅋㅋㅋㅋㅋ틀렸어.
"쌤, 죄송해요."
"......"
"이거 풀어왔는데,"
"....."
찬영이가 문제집을 핀 상태로 들고 서있는거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끔 시간이 바쁘면 우리 편의점에서 과외를 하기도 했었거든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곤 냅다 사과를 하더니 문제를 풀어왔다면서 나한테 문제집을 건네는데 거기서 더 웃긴건 틀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상황에 어떤 선생이 틀렸으니까 꺼지라고 문전박대를 해?ㅋㅋㅋㅋㅋㅋ해왔다는게 이뻐죽겠구만ㅋㅋㅋㅋㅋ
그렇게 신경이 쓰일 정도로 내가 화를 내고 왔나 싶어서 미안하기도 하더라고.
그냥 답답함에 급급해서 무작정 화부터 내고 나오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다는게 너무 이쁘잖아.
"잘했어. 고마워."
"....죄송해요."
"알면 됐어. 호되게 혼나고 나니까 아주, 정신을 바짝 차리는구만? 자주 화 좀 내야겠어, 어?"
머리를 막 헝크러뜨리면서 이쁘다고 폭풍 칭찬을 해줬지
내가 이 맛에 교사를 하고싶어 하는거고, 과외도 할만 했던거거든.
비록 불같은 성질로써 얻어낸 성과지만 그게 어디야? 내 학생이 뭔갈 깨닫고 무언가 해왔으면 됐지. 그치?ㅋㅋㅋㅋㅋ
"어떻게 문제를 풀어올 생각을 했어?"
"....그냥요."
"기특한 놈. 다 틀려도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면 너무 행복하겠어."
"......"
"뭐 사줄까? 먹고싶은거 있어?"
"없어요."
"아 왜-."
찬영이를 카운터 의자에 앉혀놓고 혼자 들떠선 쫑알쫑알 떠들고 있었어.
편의점에서 맛있는거라고 한들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그래도 내 기꺼이 사비까지 털어서 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건만,
새끼가 애 취급하는게 그렇게 싫은지 툴툴 거리면서 고개를 젓더라고.
"일이나 하세요. 안혼나요, 맨날 이렇게 놀기만 하면?"
심지어 본인이 나보다 오빠인 양 카운터 위의 내 짐들을 막 정리해주는데
꼴랑 키 하나 나보다 크다고 그러는게 웃겨서 한대 쥐어박으려다가 또 '딸랑' 하는 소리에 얼른 벌떡 일어났어.
그리고 곧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보고 놀라, 눈이 쥐었던 주먹만하게 커졌지.
"보고싶다고 울어제끼길래 왔더니."
"....도경수."
기쁘다 경수 오셨네.
정찬영 때문에 차마 방방 뛰면서 환영하지는 못하고 그냥 멀뚱히 서서 경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째 못본사이 더 잘생겨진 것 같더라고.
옆에 어정쩡하게 앉아 우리 눈치보면서 나를 툭툭 건드리는 찬영이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어.
알바를 본격적으로 3개씩 뛰면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경수를 생각지도 못한 때에 만나니까 머리가 멍해지는거야.
"알바 언제 끝나."
"....과외는 끝났어. 얜 나 과외하는 학생, 잘생겼지."
"그러네."
"안녕하세요."
근데 바닥에 있던 마포를 잡고 어느새 바닥을 닦고있는 본인한테 인사하는 찬영이를 경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표정보니까 뭔가 마음에 안들어하는 표정 같길래, 뻘쭘했을 찬영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들어가라고 말했어.
다음 수업은 문자로 잡자고 최대한 조용히 속닥거리면서 잘가라고 소심하게 손을 흔드는데 또 마포 물을 격하게 짜던 경수가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
"나 괜히 온거면 가고."
"안녕히계세...."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정도를 지나치면 얘 내가 과외 그만두게 할거야."
"....."
"쟤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 안나오게 해. 듣는 사람 가슴 찢어져, 새끼야."
가겠다는 찬영이 얼굴에대고 무섭게 혼을 내는데 이 미친놈이 내 학생한테 무슨 짓인가 싶었어ㅋㅋㅋㅋㅋㅋ
듣다보니 대충 남친 노릇하는 말이긴 했는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들어도 진짜 지리도록 무서웠단 말이야.
정찬영이 뭐 그렇게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러면.... 내가 뭐가 되는건지... 생각 좀.....
아무튼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찬영이가 나가자마자 얼른 카운터 밖으로 나와 경수 옆에 섰어.
"왜그래. 애한테."
"고2가 애냐? 다컸지 뭘."
"....."
"맨날 골치 아프게 한다는 놈 붙잡아둬서 이쁘다이쁘다하면 이뻐진대?"
그리고 안쓰러운 찬영이 얘기를 슬쩍 꺼내는데 경수 표정이 또 미묘하게 일그러지더라고.
그제서야 아, 했지. 그동안 내가 경수랑 통화하면서 찬영이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
이름은 직접적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과외하는 애가 공부를 너무 안한다, 힘들다, 어떡해야 할까, 라는 식으로 얘기를 자주 했었는데
지 딴에 그게 많이 거슬렸던 모양이야.
난 그냥 투정부리듯 한 말인데 앤 무슨 지 애인을 못살게 구는 사회악 수준으로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힘들면 관둬, 제발."
"....."
"몸 상한거 다 보여. 급한 돈 빌려달란 말 한마디 못하고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 바보도 아니고. 내가 폼이야?"
"....."
"알바도 니 친구말고 나한테 대신 봐달라고 하면 되잖아."
"......"
"미련해. 미련하기론 일등이야. 알아?"
마포질을 벅벅 해대면서 투덜투덜 잔소리를 늘어놓더라.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는 듣기도 좋은 법ㅋㅋㅋㅋㅋㅋㅋ가만히 앉아서 기분좋게 모두 수긍했지ㅋㅋㅋㅋㅋㅋ
찬영이한테는 진짜 맛있는걸 사줘서라도 사과를 할 생각이었고, 그토록 보고싶던 경수를 보니까 마냥 좋았어.
듣는 사람 가슴이 찢어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오글거리지만 설렌단 말이지
내가 통화하면서 부린 투정에 경수도 마음고생 많이 했겠구나 싶기도 했고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오죽했으면 그랬겠니, 오죽했으면.
이 때 내가 알바를 진짜 사람이 아니므니다 소리 들을 정도로 뛰었고, 말리지 못한 경수도 지 입장에서 많이 피곤했을거야.
이런 생활 계속하다가 결국 한번 과로로 쓰려져서 병원 신세 한번 진 뒤로 알바는 다 끊었지만...
나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ㅋㅋㅋㅋㅋㅋㅋㅋ
병원 신세하니까 병원 얘기 생각난다.
생긴건 코끼리마냥 튼튼하게 생겼어도 내가 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라...
기억이 더 자세하게 나면 다음썰은 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얘기 들고올게
다들 잘자, 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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