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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鳶) 

w. 레이니무드 


 

  

  

  


 


 

  

  

 

 초여름 더위가 한가득 내려앉을 날 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센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가야할 거리에 한, 반쯤 걸었을 무렵 제훈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뭇잎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서 날고있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멈춰있던 제훈은 다시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센터는 백색의 건물이었다. 그 뒤로 펼쳐진 녹음이 꽤나 잘 어울리는 배경이 되었다. 다시 올려다 본 하늘에 연이 없었다. 제훈은 고개를 떨구고 센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누구에게 말을 붙여하나 망설이며 제훈은 사무실 앞을 잠시 서성거린다. 인기척을 느낀 여성분이 제훈에게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는다. 제훈은 머뭇거리다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아! 여성분께서 이해했다는 작은 탄성을 내보인 뒤 들어와 잠시 앉자 계시라고 말한다. 여성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제훈은 쭈뼛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두번째 방문이라 아직 낯설기만한 주위를 잠시 둘러본 뒤 제훈은 구석에 놓인 의자를 살짝 끌어다 앉는다.  

 몇 분 가량을 그렇게 앉아있던 제훈에게 아까의 여성분이 다시 다가왔다. 여성분은 원장님께 얘기들었다고 말하며 종이를 건넨다. 제훈은 종이를 받은 뒤 가만히 그것을 훑어보았다. 그리 많지 않은 아이들의 사진이 붙어있고, 그 옆으로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다. 제훈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천천히 바라보며 눈에 담았다. 

  

 "제훈씨, 아니, 제훈선생님께서 가르치실 아이들이에요." 

 "아, 네." 

 "아이들 얼굴이나 이름은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몇명 안되지만, 다 착하고 순수한 애들이에요." 

  

 그래보여요. 대답은 속으로 삼키며 제훈은 다시 아이들의 얼굴을 차근차근 바라봤다. 잠시 사라졌던 여성분이 손에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들며 제훈이 말했다. 잠시 눈에서 보고있던 종이를 뗀 뒤 제훈이 묻는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훈의 말에 여성은 김우림이라고 말한다.  

  

 "좀 있으면 아이들 하교시간이니까 곧 올거예요." 

  

 제훈은 우림에게 교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우림은 1층 오른쪽 복도 끝 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커피, 고맙습니다. 제훈은 우림에게 목례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은 3층에 있었기에 제훈은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1층에 도착한 후 우림의 말대로 오른쪽 복도 끝으로 걸어간다. 도착한 복도끝에는 갈색 나무문 하나가 있었다. 제훈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린다. 문안 속 교실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의해 꽤 밝았다. 제훈의 눈에 양쪽으로 3개씩 마주보게 붙어있는 책상과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제훈은 책상에 가까이 다가가 화이트보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화이트보드 옆 창문 밖으로 아까 지나온 마당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던 커피가 식어가는것도 모른 채 제훈은 교실을 돌며 아이들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누구세요? 벽에 붙어있는 종이 속 색칠된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훈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낯이 익은 얼굴. 아까 우림이 건넨 사진에서 본 아이였다. 아이는 제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책상으로 걸어간다. 제훈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제훈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형형하다. 호기심일 수도 있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의 의미일 수도 있었다. 

  

 "어... 저는, 새로운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이요?" 

 "그러니까..." 

  

 제훈은 날듯말듯한 기억을 되새기며 아까 보았던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곧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곤 말한다.  

  

 "승훈이랑, 다른 친구들한테 재밌는 얘기도 들려주고 공부도 가르쳐 줄 선생님이야." 

  

 선생님이요? 승훈의 말에 제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승훈은 메고 있던 가방을 벗은 뒤 책상 위에 올린다. 제훈의 눈에 아까 올려놓았던 커피가 보인다. 승훈 역시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제훈은 성큼성큼 걸어가 커피를 손에 들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승훈이 묻는다. 제훈은 차게 식은 커피를 전부 들이킨 뒤 종이컵을 버리러 교실 뒤쪽으로 향한다.  

  

 "선생님은 똑똑하니까." 

  

 친화를 위한 제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농담이었다. 하긴, 선생님들은 다 똑똑하다고 할머니가 그랬어요. 승훈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순진한 아이를 도리어 놀리게 되버린 제훈은 멋쩍은듯 마른 기침을 한다. 열린 문으로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조용하던 교실이 일순간에 떠들석해진다. 승훈과 달리 다른 아이들은 제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이름표는 붙어있지 않지만 아마 암묵적으로 정해진듯한 자신들의 자리로 가 앉는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이어간다. 제훈은 어영부영 계속 서 있느니 자신을 소개하려는 심산으로 화이트보드를 향해 걸어간다. 화이트보드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아이들은 제훈의 존재를 인식한듯 했다.  

  

 "안녕 얘들아.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여러가지를 할 선생님이야." 

 "선생님이요?" 

  

 꽃이 달린 머리끈으로 길게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묻는다.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공부도 알려주신데. 승훈이 제훈을 대신해 말했다. 제훈은 벌써 승훈과의 유대감이 생긴듯해 마음이 조금 들떴다. 오늘은 뭐해요? 사진으로 봤던 또 다른 아이인 형준이 묻는다. 벌어진 입사이로 빠진 이 자리가 보였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선생님이랑 처음 만나는 날 이잖아? 그래서 선생님 이야기 하나를 준비해왔는데, 들어볼래?" 

 "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릴적 할머니가 살고있는 시골에 놀러가 잠이 들기전 할머니가 해주시던 얘기가,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고 어설프긴 했지만 그땐 왜 그렇게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지. 그리고 얘기를 듣는 제훈을 보며 할머니게 왜 그렇게 즐거워 하셨는지. 제훈은 준비해온 이야기가 담긴 공책을 꺼내들며 아이들을 바라본 지금에서야 어렴풋 하게라도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제훈은 노트의 표지를 손으로 한번 훑는다. 그리고 공책을 편다. 어젯밤 빼곡하게 적은 글이 보인다. 제훈은 목을 가다듬은 뒤 글을 읽어 나간다.  

  

 옛날 어느 마을에 톰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톰은 키가 작았고 머리가 갈색이었으며,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어요. 동네아이들이 톰을 보면 딸기라고 놀려댔지만 톰은 신경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톰은 자신의 주근깨가 바닷가에 있는 반짝이는 모래알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래알은 아름답게 반짝거리니까요. 하루는 톰의 아버지가 톰에게 연을 만들어 주었어요. 톰은 신이나 연을 들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톰은 천천히 연을 손에서 놓았고,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아요. 톰은 연과 연결된 줄을 잡고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연을 올려다 봤어요. 

  

 "우리도 얼마전에 연 만들었어요!" 

  

 말을 하며 형준은 손으로 연을 날리는 시늉을 해보인다. 제훈은 형준에게 웃어보인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목에 맨 머플러가 까슬거렸다. 지금은 4월이었고 왜 따뜻한 날에 머플러를 해야만 했는지는 어젯밤 엄마의 물음이 원인이었다. 엄마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제훈에게 선물한 머플러였는데, 원체 머플러는 커녕 목도리도 하고 다닌적이 없는 제훈이라 받은 그대로 옷장속에 넣어놓고 까맣게 잊고있었다. 거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엄마가 서랍장위에 놓인, 역시 작년 크리스마스에 꺼내놓아 아직도 놓여있는 산타클로스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제훈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훈아, 엄마가 사준 머플러 잘하고 다니니? 본 기억이 없는데. 엄마의 물음에 결국 제훈은 다음날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어쩔 수 없이 머플러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몰래 제훈의 방을 뒤져서라도 포장도 안 뜯은 머플러를 찾아내리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머플러를 풀어 가방에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선물 받은 머플러를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어 구겨지게 만들만큼 모진 사람은 못됐기에 제훈은 그냥 불편해도 참았다. 강의실에 들어서 둘러보니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수업시간에 딱 맞춰서 온 결과였다. 제훈은 두리번거리다 눈에 먼저 띈 가장 왼편 중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앉아있던 미정이 돌아서더니 말했다.  

  

 "우와, 선배님 그거뭐예요?" 

  

 미정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남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것이 깊지 않은 옅은 호기심에 불과하다는 걸 제훈은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가끔씩 많은 사람들 있는데, 미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 자신을 가리킬때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훈은 주목받는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 그냥. 제훈은 얼버무리며 상황을 넘어가려 했다. 다행히 미정은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제훈은 가방을 책상옆에 건 뒤 책을 꺼냈다. 머플러때문인지 목뒤가 자꾸만 간질거렸다. 제훈은 머플러를 풀기 위해 목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언가 손을 스쳤다. 머플러의 감촉이 아니였다. 뒤를 돌아보니 허공에 손 하나가 멈춰 있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따. 제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쪽손으로 머플러를 잡아 당겨 완전히 풀어냈다. 그런 뒤, 머플러를 가지런히 접어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은 교탁앞에 멈춰섰다. 손에 들고 온 출석부를 펼치더니 말했다. 

  

 "첫 수업 때 말했는대도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늘부터는 수업 시작할 때 한번. 끝날 때 한번. 두 번 출석 부를 거니까 중간에 도망가면 얄짤없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잠시,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자 옅은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이제훈.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제훈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출석부가 넘어갔다. 언제부턴가 처음보는 얼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 인기있는 수업은 아니였다. 사람이 많아지게된 이유는 지레 짐작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박보검." 

 "네." 


 

 목소리의 울림이 바로 뒤에서 전해졌다. 동시에 교실 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제훈의 뒤로 향했다. 제훈은 그 시선들이 자신을 향한게 아니라는걸 알았고 자신이 장애물이 된다는 것도 알았기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리고 한 데 모였던 시선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름 호명이 끝이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제훈은 필통에서 검은색 볼펜을 꺼내 손에 쥐었다. 미세한 떨림이 볼펜에 전해졌다.  

 강의가 끝이나자 교수님을 선두로 학생들이 앞다투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제훈은 문으로 줄지어선 행렬이 다 사라지고 평화롭게 강의실을 나갈 생각이었다. 꺼낸 책을 가방에 다시 넣고 지퍼를 잠글 때 머플러가 눈에 들어왔다. 지퍼를 마저 잠그고 머플러를 손에 들었다. 창문에 자신을 비추며 제훈은 목에 머플러를 둘렀다. 뿌연 창문으로 넘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머플러의 모양이 부자연스러웠다. 둘렀던 머플러를 다시 푼 뒤 이리저리 걸쳤지만 한번 신경쓰이기 시작하니까 계속 이상하게만 보였다.  


 

 "저 잠시만." 


 

 머플러를 손에 들고 있을 때 였다. 울림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보검이 서 있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창문에 자신을 이리저리 비추는 꼴을 보검이 봤을거란 생각에 제훈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다 나간 줄 알았는데. 보검이 제훈에게 다가갔다. 제훈의 손에서 머플러를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가져갔다. 한 발짝, 보검이 더 다가왔다. 제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너무 가까워. 갑작스럽게 다가온 보검에 제훈은 목이 간질거렸다. 숨소리 마저 크게 들릴 것 같았다. 자신의 목에 머플러를 두르는 보검의 손이 보였다. 내려다 보이는, 머플러를 묶는 보검의 손이 앙셀줄만 알았는데 단단해 보였다. 이윽고 머플러에서 보검의 손이 떠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제훈은 올려두었던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조금 따가운 봄 햇살 아래를 도망치듯 계속 걸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가라 앉질 않았다. 제훈은 계속 걸었다. 발길이 가는 데로 걷다보니 점점 하얘졌던 머릿속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도착한 곳은 동아리방이었다. 떨어져 나간 팻말이 붙어있던 자리에 남은 못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제훈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작은 종이 달린 열쇠로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딸랑이는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자 갇혀있던 퀴퀴한 냄새가 일었다. 제훈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꾹 눌렀다. 다행히 불은 아직 들어오는 듯 했다. 제훈아, 동아리 꼭 계속 해야 돼. 졸업식 날 열쇠를 자신의 손에 쥐어주며 말하던 은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적막이 흐르는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훈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낡은 책상 밑 바닥에 놓인 종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몸을 굽혀 주운 종이에는 자신이 썼던 글이 적혀있었다.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적고, 더나아가 그걸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했던 1년전의 제훈이 쓴 글이었다. 제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주변이 어두웠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마지막 힘을 짜낸건지, 전구가 수명을 다 한 듯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뿜어져 나온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제훈은 동아리실 문을 잠근 뒤 계단으로 향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며 모퉁이를 돌자 갑작스럽게 사람이 튀어나왔다. 떨어져 나간 쪽은 제훈이었다.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제훈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참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고개를 드니 손을 내민 보검이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시 마주하게 된 보검에 제훈은 순간 가슴 한 편이 저릿해 오는 걸 느꼈다. 제훈은 최대한 덤덤하게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보검이 내민 손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정중한 사과에 제훈은 대답했다. 보검이 숙였던 머리를 들지 않고 허리를 조금 더 굽혔다. 그리고 금방 똑바로 선 보검의 손에 열쇠가 들려있었다. 익숙한 작은 종이 달린 열쇠가.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는 보검의 손에서 제훈은 거칠게 열쇠를 뺏었다. 보검이 당황한 표정을 해보였다. 제훈 역시 갑작스럽게 해버린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혹시, 박은범이라는 사람... 아세요?" 


 

 사과를 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보검의 입에서 들려온 이름에 제훈은 힘없이 손을 떨궜다. 희미한 종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울려퍼졌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건지에 대한 궁금은 다시 흘러나온 낮은 울림에 의해 너무나도 손쉽게 풀렸다. 


 

 ".....저희 형이에요." 


 

 보검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꺼낸 것은 핸드폰이었다. 제훈에 눈에는 가장 먼저 보였다. 핸드폰에 걸려있는, 파란 줄에 달려 있는 종. 제훈의 열쇠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먼저 앉아있는 제훈 옆으로 보검이 앉으며 음료수를 건넸다. 제훈은 음료수를 받아 손에 가만히 쥐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시작해도 결국 민감해질 대화였다. 보검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가 될 것이라는 확신만 들 뿐이었다. 제훈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음료수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오셨었나요... 장례식." 


 

 응. 제훈이 대답했다. 먼 발치에서 보고 갔지만. 뒷말은 목으로 삼켰다. 덤덤하게 묻는 보검과 달리 단 한 글자의 대답을 한 제훈의 목이 멨다. 반년도 지나지 않은 생생한 기억이었다. 피어오르는 향연기 위로 놓여있던 사진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잊고 있던 기억에 왈칵 눈물이 터져버리면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서였다.  


 

 "형이 방학 때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갔다와서 저한테 선물이라고 준게 이거였어요. 근데 형이 똑같은 걸 하나 더 사왔길래, 누구한테 줄거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대학 생활했을 때를 기억하면 가장 생각날 사람한테 줄 거라고. 제훈은 눈에 힘을 주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보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보검아." 

 "그렇게, 누구냐고 물어봐도... 안 알려주더니... 결국 들켰네요." 


 

 꾹꾹 눌러가며 뱉던 말을 마지막으로 보검은 고개를 숙였다. 어둠속에 가려진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훈은 말없이 보검의 등을 토닥거렸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아직 슬픔이 채 가시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제훈은 알지못해 서툴기만 한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제훈은 보검을 배웅했다. 꾸벅이며 인사한 뒤 돌아서 멀어지는 보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냥 빛나고 행복할 것 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됐던 보검이었다. 이제  다시 보니 그 뒷모습이 왜 이렇게 지쳐 보이는 건지. 스스로가 씌웠던 장막을 걷어내고 비로소 보게 된 모습이었다. 

 다음날 제훈은 보검을 동아리방으로 데려갔다. 먼지덮힌 상자속에서 은범이 썼던 공책들을 보검에게 건넸다. 오는 길에 샀던 전구도 갈아끼웠다. 조심하세요. 전구를 처음껴보는 제훈의 어설픈 모습에 불안했는지 보검이 연신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스위치를 누르자 다행히 알맞게 끼운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제훈과 보감은 마주앉아 은범의 공책들 중 하나를 펼쳤다. 형 글씨체다. 보검이 중얼거렸다. 집중해서 글을 읽으며 움직이는 보검의 눈썹이 은범과 닮아 있었다. 넋 놓고 보검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보검이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제훈은 황급히 눈을 돌려 공책을 쳐다봤다.  


 

 "형이 읽었던 책은 어떤거예요?" 


 

 1년 전, 적은 인원이었지만 각자가 정해진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서로 공유하며 보냈던 시절을 제훈은 잠시 떠올렸다. 제훈은 보검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렵지 않게 책을 찾아냈다. 데미안. 책을 보자 보검이 익숙한 이름이라고 말했다. 제훈 역시 익숙했던 책이지만 대학생이 되고서야 읽어본 건 처음이었다. 다시 동아리방으로 돌아왔을 때 보검은 상자속에서 잊고있던 팻말을 꺼냈다.  


 

 "B612... 어린 왕자가 살 던 별 이름이네요.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형이 저한테 읽어 줬던 책 이거든요. 어린 왕자." 


 

 

 그리고 나서 보검은 팻말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방 돌아온 보검은 어디서 구했는지 손에 망치와 못을 들고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쪼개질지도 몰라. 제훈의 말에 보검은 팻말을 잠시 들여다보곤 수긍했는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에 본드를 들고 나타났다. 보검은 조심스럽게 팻말에 본드를 바른 뒤 못자국 위에 팻말을 붙였다. B612. 제훈은 낯설게 느껴지는 익숙한 단어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더니 줄이 끊어졌어요. 연이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갔어요. 톰은 손을 뻗었지만 연에는 닿질 않았어요. 그런데 그 때 나타난 누군가 말했어요.  


 

"어서 나를 붙잡아! 연을 잡으러 가자!"  


 

뒤를 돌아보니 노란머리의 어린 남자아이가 서 있었어요.  


 

"너는 누구니?"  


 

톰이 물었어요.  


 

"나는 어린 왕자야."  


 

어린 왕자의 몸에는 풍선이 엄청 많이 달려 있었어요.  


 

"어서! 이러다 놓치겠어. 톰은 어린 왕자의 손을 잡았어요."  


 

그리고 톰의 몸이 점점 땅과 멀어졌어요. 톰이 살고있는 집이 점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곧 주변이 어두워졌어요. 사방에 무수하게 많은 점과 같은 것들이 반짝거렸어요.  


 

"어린 왕자야 저것들은 뭐야?"  


 

톰이 물었어요.  


 

"저건 별이야."  


 

어린 왕자가 대답했어요.  


 

"별이 뭐야?"  


 

톰이 다시 물었어요.  


 

"별은 아름다운 거야. 톰, 너의 얼굴에도 아름다운 별이 있구나. 반짝거려."  


 

어린 왕자의 말에 톰은 기분이 좋아졌어요.  


 

"어린 왕자야 너도 별에 살아?" 


 

톰이 물었어요. 


 

"응. 나는 B612라는 별에 살아." 


 

어린 왕자가 말했어요. 


 

"왜 이름이 B612야?" 


 

톰이 다시 물었어요. 


 

"모르겠어. 어른들은 제멋대로 하는 걸 좋아해. 이름도 어른들이 붙였어. 톰! 저길 봐 연이야." 


 

어린 왕자가 가리킨 곳에 톰의 연이 있었어요. 톰은 팔을 있는 힘껏 뻗었어요. 드디어 톰은 다시 연을 손에 잡았어요.  


 

"어린 왕자야 고마워. 덕분에 연을 다시 찾을 수 있었어. " 


 

톰의 말에 어린 왕자는 웃었어요.  


 

"톰, 네가 연을 날릴 때 하늘을 보고 웃어죠. 그럼 하늘 어딘가에서 나는 웃는 너를 보고 기뻐할거야. " 


 

톰은 어린 왕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럼 이제 안녕. 톰. 나는 언제나 너를 지켜볼 수 있어. 너도 그렇고. " 


 

톰과 어린왕자는 손을 놓았어요. 톰은 다시 연을 날렸던 언덕으로 돌아왔어요. 톰은 집으로 달려갔어요. 아버지에게 연이 끊어졌다고 말했어요. 톰의 아버지는 좀 더 튼튼한 줄을 다시 매달아 주었어요. 톰은 다시 언덕을 올라갔어요. 밤이 되었고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 했어요. 톰은 다시 연을 날렸어요. 그리고 어린 왕자의 말처럼 하늘을 보며 웃었어요. 톰의 얼굴에도 별이 가득 빛났어요.  


 

 벤치에 앉은 제훈은 마당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웃으며 바라봤다. 곧 누군가 넘어짐과 동시에 제훈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다행히 아이가 아무일 없다는 다시 뛰어놀자 제훈은 잠시 아이를 주시하다가 도로 자리에 앉는다. 무심코 읽어줬던 동화가 다시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했다. 제훈은 애꿎은 손끝을 꾹꾹 누른다. 승훈이 곁에 다가와 앉는다. 승훈은 품에 연을 안고있다.  


 

 "선생님." 

 "응."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어린 왕자랑 톰은 다시 못 만나는 건가요?" 


 

 제훈은 가만히 승훈을 내려다 보며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해? 승훈은 가만히 연을 만지작 거린다. 


 

 "왜냐면, 너무 멀잖아요." 

 "그렇네... 너무 멀구나." 


 

 제훈의 대답에 승훈은 자꾸만 연을 만지작 거리며 안타까운 감정을 대신했다. 제훈은 뾰로통한 듯 삐죽나온 승훈의 입을 보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그렇지만, 톰이 또 연을 놓치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왕자는 톰을 계속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럼. 톰 역시 그렇고" 


 

 제훈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승훈은 웃음을 보인다. 승훈은 품에 안고있던 연을 손에 든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마당을 뛰어가며 승훈은 손에 든 연을 바람에 실어 날린다. 제훈은 연이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걸 가만히 바라본다. 해가 점점 밤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배웅하고 나서야 제훈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기다렸다는듯 우림이 다가온다. 오늘 어땠어요? 우림이 묻는다. 즐거웠어요. 말을 하며 제훈은 창밖으로 텅 빈 마당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다행이네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우림이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한다. 제훈은 우림에게 목례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이 뛰돌았던 마당을 가로질러 제훈은 정문에 도달했다. 유달리 저녁노을이 난만했다. 제훈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냥 과하게 의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길을 걸을 때나 복도를 지날 때 학교 내 어딘가를 거닐 때도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의식하고 두리번거려도 평범하게 자신을 지나쳐가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제훈은 자신이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던 시선들이, 우연치 않게 엿들은 대화를 통해 확실시되었다. 예민한 게 아니라 예리한 거였다는 걸.  

 강의 중간에 주어진 쉬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부터 어쩐지 목덜미가 뻐근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옅은 오한이 몸으로 퍼져갔다. 방학을 앞두고 곧 시험인 이런 시기에 앓아 누울 수는 없어, 제훈은 따뜻한 음료라도 마시기 위해 매점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화장실 옆을 지나고 있는데 들려온 목소리가 제훈의 발목을 붙잡았다. 멈춰 서자 더 선명하게 자신의 이름과 보검의 이름이 연달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려왔다. 제훈은 등줄기에 척척하게 들러붙은 눅눅한 습기가 일순간 차게 식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이루어고 있는 대화가, 어쩌면 제훈이 여태껏 알게 모르게 느꼈던 시선들이 모두 자신과 보검을 음해하고 있던 것 이란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근 한 달간 보검과 부쩍 가깝게 지내며 잊고 있었다. 보검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빛나고 주목받는 사람인 걸. 그런 사람 곁에 있는 사람 역시 덩달아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제훈인데, 무언가에 홀린 듯 너무나 간단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 제훈은 목전에 보이는 매점을 뒤로 하고 돌아왔던 길로 빠르게 걸었다.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 모두 자신을 눅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곧장 강의실로 돌아가 책과 가방을 아무렇게나 손에 들고는 시선들로부터 도망쳤다. 결국 도착한 곳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동아리방 문 앞이었다. 젖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또 나약해진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고만 싶은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무기력했다. 애써 잊으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한편에 감춰놓은 기억을 더듬었다. 보송보송한 뺨에 부끄러운 듯발그레 붉어진 볼을 한 어린 시절의 제훈이 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해 많이 읽었던 제훈이지만 남들 앞에서 읽은 책에 대해 자신이 받은 느낌을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린 제훈은 열심히 글을 적었고, 발표를 할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이 제훈의 이름을 부른다. 제훈은 자리에 서 일어선 뒤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본다.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나간다. 그저 눈앞에 놓인 글을 열심히 읽어나간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제훈의 말이 멈춘다. 제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박수는 나오지 않는다. 발표를 시킨 선생님도 당황했는지 제훈을 자리에 앉힌다. 가만히 내려다보이는 책상이 자신을 가려주기에 너무 작아보여 제훈은 책상에 엎드려 소리없는 울음을 터트린다.  


 

 "언제오... 왜 다 젖었어요? 우산 안 가져오셨어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을 열고 나온 보검이 제훈을 발견했다. 흠뻑젖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제훈을 보고 놀란 보검이 물었다. 보검아. 나지막한 음성으로 보검을 불렀다. 네. 대답하는 보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제훈의 눈이 붉어졌다. 


 

 "너는 나처럼 되지마... 비참한 사람이 되지마. 툭하면... 도망치는 사람도." 


 

 너랑은 하나도 안 어울려. 울음섞인 웃음이 터졌다. 제훈을 보던 보검의 얼굴이 보란듯이 굳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제훈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젖은 옷이 자꾸만 달라붙으며 방해했다. 제훈은 열쇠를 꺼냈다. 은범이 준 종이 달린 열쇠를 보검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만하고 싶어." 


 

 차라리 눈이 부셔서, 아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태양이 되길. 제훈은 보검에게서 멀어져 갔다.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으로 한없이 떨어졌다.  

 극단적인 기분에 사로잡힌 채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지냈다. 고등학교 때 책을 읽는다는 말도 안 되는 꼬투리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묵묵히 버텼던 제훈인지라, 갑작스러운 제훈의 이러한 행동에 제훈의 엄마는 어쩔 줄 몰라 문 앞을 서성이며 눈물을 흘렸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방문이 다시 열린 건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제훈아! 움푹 팬 뺨 위로 그늘진 얼굴의 제훈이 방문을 열자, 달려온 엄마가 제훈은 꽉 끌어안았다. 엄마. 오랫동안 닫혀있던 목에서 나온 두 글자의 말이 힘없게 흩어졌다. 나 할머니 댁으로 갈래요. 지겨워요 엄마. 지겨워... 전부 다. 내려다보이는 엄마의 굽은 등이 너무나도 측은했다. 도망치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남에게 상처까지 주고만 자신에게도 제훈은 지쳐있었다.  

 과묵했던 할머니도 제훈의 몰골을 보자 비통한 듯 말없이 제훈을 끌어안았다. 시골에 내려가고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제훈은 마당에 발을 내딛였다. 두 달이 지날 무렵에는 집 근처를 맴돌았고, 여러 달이 지나 할머니와 함께 시장을 나갔다. 그리고 하루는 할머니가 방에 있는 제훈을 불렀다. 나가보니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있었다. 제훈은 곁에 다가가 앉았다. 할머니는 제훈에게 팸플릿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팸플릿을 받아들며 제훈이 물었다. 제훈아, 내는 우리 제훈이가 어렸을 때 내가 해준 얘기에 뭐가 좋은지 그렇게 웃는걸 보면 참 맴이 좋았어. 할머니가 제훈의 손을 어루만졌다. 뭐든지 찬찬히, 조급 안 하게 하면 괜찮을거여.    


 


 


 


 


 

 "저 왔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제훈이 말한다. 부엌에 있던 할머니가 몸을 반쯤 내밀고 제훈을 반긴다. 배고프겄다. 어여 밥묵자. 네. 대답하며 제훈은 방으로 들어간다. 메고있던 가방을 조그마한 책상옆에 내려둔다. 전등밑으로 나방 한마리가 날아든다. 방안에 생기는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제훈아. 할머니의 부름에 제훈은 방을 빠져나간다.  

 다음 날, 버스정류장에 막 내렸을 때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였다. 제훈은 망설이다가 수신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이제훈 학생 핸드폰 맞나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 이름 뒤로 딸려 나온다.  


 

 "네. 맞는데요." 

 "여기 학과사무실인데요. 동아리방 좀 비워주셔야 될 거 같은데요. 열쇠가 없어서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요." 

 "동아리방...이요?" 

 "네. B612 팻말 붙어있는 방, 리스트 보니까 보인 제훈 학생 이름이 대표로 올라와 있길래 찾았더니 학교를 그만두셨다고... 그래서 전화드렸어요." 

 "아, 근데..." 


 

 말해야만 하는 이름이 입안에 맴돈다. 그냥 몇 글자 말하면 그만인 것을 어쩐지 선뜻 입이 열리지를 않았다. 박보검이라는 학생한테 열쇠가 있어요. 애써 전화기에 속삭이듯 보검의 이름을 말한다. 누구요? 잘 듣지 못한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저희 과 말고,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인... 박보검 학생한테 동아리방 열쇠가 있어요."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지막한 사과를 마지막으로 제훈은 통화 종료 버튼으로 손을 가져간다. 잠시만요! 끊기려던 통화는 흘러나온 다급한 목소리에 멈춰 선다. 네? 제훈이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댄다.  


 

 "박보검 학생, 자퇴했다고 나오는데요?" 

 "네? 그게 무슨..." 

 "검색해보니까 작년 5월에 자퇴했다고 나오는데, 모르고 계셨나 봐요."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아득해져간다. 분명 바로 귀 옆에 대고 있는데, 한없이 멀어진다. 밑에서부터 올라온 무언가 가슴 한편을 쿡 찌른다.  

 도착한 서울은 적어도 제훈의 눈에는 여전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끈끈하게 달라붙는 여름 햇빛도. 모든 게 변하지 않은 채였다. 전화를 받은 날로부터 3일이 지나 주말이 되자마자 제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울에 올라왔다. 어디서부터 보검을 찾아야할지 막막했지만 꼭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보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됐을 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훈은 핸드폰 속 아직 저장되어 있는 번호에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 듣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린다. 미정아. 나야, 이제훈. 


 

 "...제훈 선배? 어쩐 일이세요?" 

 "어, 그게... 오랜만에 전화해서...미안"  

 "박보검이요?" 


 

 묻지도 않은 이름이 너무 쉽게 미정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열려던 제훈의 입이 잠시 닫힌다.  


 

 "선배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갑자기 연달아 자퇴를 해버렸으니... 모를 수가 없죠. 더군다나 두 사람, 자주 붙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말이 돌았는데." 

 "...정말이구나. 자퇴했다는 게." 

 "그리고 나서 얼마나 많은 소문이 돌았는지... 물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지만... 원래 다 그렇잖아요." 


 

 보검이 한테 아무것도 설명해준 게 없는데. 제훈은 주먹을 꽉 쥔다. 과거의 자신이 일방적으로 보검에게 통보하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저도 잘 듣지는 못했어요. 해외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별 말도 안되는 소리가 너무 많아서..." 


 

 그 뒤로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가고 통화는 끝이 났다. 제훈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정이 말한 소문 중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의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삼십분쯤 걸려 도착한 역에 내린 제훈을 출구로 올라갔다. 조금 걸어 목적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분명 도심 속에 있는 골목인데 마치 독립된 하나의 이질적인 공간 같았다. 소음은 사라졌고 한가롭게 흘러가는 시간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마을같았다. 제훈은 특별하게 꾸며진 가게들은 지난다. 분명 서로 다른 가게였지만 하나같은 느낌이 들었다. 곧 제훈은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선다. 네모난 창 안으로 가게가 들여다 보인다. 제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오세요.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남자가 일어서며 말한다. 


 

 "실례지만... 여기는 뭘 하는 곳인가요?" 

 "아, 처음 오신 건가요? 여기는 북카페예요.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는. 커피는 아메리카노 밖에 없긴 하지만." 

  

 제훈은 아무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한적한 분위기의 카페 안, 꽤 많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혹시... 사장님 되시나요?" 

 "저요? 그냥 직원이에요." 


 

 직원이라는 남자가 제훈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는다. 처음 오셨으니까. 남자는 다시 카운터 쪽으로 돌아간다. 아, 책은 아무거나 가져다 읽으시면 돼요. 제훈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자 남자가 말한다. 저, 혹시 사장님은 언제쯤 나오시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제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사뭇 달라진다. 마치 탐색하는 듯 보였다. 제훈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북카페라는 의미가 처음에는 좀 변질됐어요. 사장님은 정말 책을 사랑해서 카페를 열었는데, 오는 손님들이 책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제훈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자 남자가 조금 더 작게 속삭이듯 말한다.   


 

 "처음에는 사장님께서 직접 카페에 계셨어요. 근데... 손님이 남자분이시라 말씀드리는 거지만 사장님이 외모가 출중한 분이세요. 그래서 그런지, 손님들이 북카페에서 책은 안 보고 자꾸 사장님을 귀찮게 해서, 사장님이 저를 뽑으셨죠. 사장님이 점점 카페에 안 계시고 제가 나와있으니까 그런 손님들이 줄어들더라고요. 그래서 손님 수가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지금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분들만 조용히 읽다 가세요."  

 "사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훈이 다급하게 묻는다.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간 몸에 부딪힌 탁자가 흔들린다. 덩달아 놓여있던 커피잔이 흔들리며 커피가 테이블 위에 조금 쏟아진다. 성함요? 남자가 제훈에게 다가와 휴지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성함을 모르고 있었네. 


 

 "근데, 혹여나 사장님 뵈러 오신 거면 포기하세요. 얼마 동안 못 나오신다고, 저한테 맡기고 어디 가셨어요." 


 

 문을 여는 손에 힘이 없다. 보검일 거라고 확신이 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없었다. 제훈은 왔던 길을 내려간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제훈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시골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대문을 조용하게 닫으며 집으로 들어선다. 방으로 들어와 쓰러지듯 바닥에 눕는다. 어두운 방 안 제훈은 한참 동안 뜨고 있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정류장에 내린다. 센터를 향해 걸어간다. 구름에 해가 가려졌다. 잠시 동안 그늘이 생긴다. 제훈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며 센터를 향해 계속 걷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번에는 착각하지 않았다. 연이 날고 있다. 연을 날리고 있을 승훈의 모습을 생각하니 멍하던 제훈의 얼굴에 웃음이 살포시 번진다. 제훈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진다. 센터에 도착했는데 연 날리는 승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제훈은 의아했지만 우선 사무실로 향했다. 센터장님께 인사를 드린 뒤 열었던 문을 닫는다. 우림과 눈으로 가볍게 인사하며 제훈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교실 문 앞에 다다르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승훈의 뒷모습이 보인다. 승훈아. 제훈의 목소리에 승훈이 돌아본다. 승훈의 품에 연이 들려있다. 역시 승훈이가 날렸구나, 연. 제훈이 승훈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선생님. 승훈이 나지막하게 제훈을 바라보며 말한다.  


 

 "연을 날리고 있는데 실수로 줄을 놓쳐버렸어요. 연이 점점 저한테서 멀어졌어요. 너무 슬퍼지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날아가려던 연을 잡아줬어요." 

 "정말? 다행이다." 

 "선생님. 그럼 그 사람도 어린 왕자인 거예요? 연을 찾아줬으니까." 

 "승훈이가 보기엔 어땠어? 그 사람이 어린 왕자 같았어?" 


 

 승훈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그 사람은 어리지 않았어요. 왜냐면 어른이었으니까." 

 "정말 착하신 분이었구나." 

 "어린 왕자가 어른들은 제멋대로라고 그랬는데, 그 사람도 제멋대로일까요?"  


 

 제훈은 몸을 천천히 숙여 승훈과 눈높이를 맞춘다. 승훈의 눈이 깜빡인다.  


 

 "승훈이가 생각하기에 선생님은 제멋대로인 어른이야?" 

 "...아니요." 

 "그럼 그 승훈이의 연을 잡아주신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제멋대로인 사람은 연을 잡아주지 않을테니까." 


 

 제훈이 승훈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곧 다른 친구들도 올 시간인가? 제훈이 묻자 승훈은 아직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승훈아 선생님이랑 같이 연 날릴까? 제훈이 묻자 승훈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 그 아저씨다."  


 

 승훈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킨다. 제훈의 시선이 승훈의 손을 따라 움직인다. 누군가 문 밖에 서 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역광을 만들어낸다. 제훈은 눈을 찌푸린다. 빛은 점점 사라져가고 선명하게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제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승훈아, 먼저 나가 있을래? 금방 따라 나갈게. 승훈이 문을 지나 복도로 사라진다.   


 

 "잘못 알고 있네요. 제멋대로인 어른. 맞는데." 


 

 왜 눈앞에 보고 있는데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건지 제훈은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보검이 다가온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제훈의 몸이 떨린다. 되게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역시 밉네요. 다행이라고 제훈은 생각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보검의 미소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돌아본 창밖, 하늘에 연이 날고 있다. 

 

 

 

 

 

 

 

 

 

 

 

 

 

 

 

 

 

 

 

 

 

 

 

 

 

 

 

제가 최근 가장 인상깊거나 재미있게 본 작품에서 좋아했던 캐릭터들로 한번 이야기를 써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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