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내 말 놀라지 말고 들어."
"나 여자 친구랑 영화 예매 해놨어. 중요한 얘기 아니면 오늘 밤에 우리 집에 와서 해."
"중요한 얘기야.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 내가."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긁적이며 트레이닝 바람으로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평소와는 다르게 말쑥한 김민석의 모습에 나는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애꿎은 커피 스틱만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야, 뭔 얘기 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얘기해.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소리나게 깨물며 재촉하던 김민석은 급기야 아메리카노가 반쯤 담긴 컵을 들고 일어섰고 그럼에도 내 입술은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민석은 어느새 나보다 네 뼘은 더 커버린 키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내 마음은 꿰뚫려버린 듯 부끄러웠고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학창시절부터 근 수 십년을 이어진 인연으로 옆집에 살게 된 우리들의 부모님 덕에 김민석과 나는 엄마의 탯줄을 잡고 있었던 그 때부터 친구의 연 또한 잡게 되었다.
아장아장 걷던 때부터, 한글을 익히던 때, 힘들었던 사춘기와 고3, 그리고 스물 셋, 지금까지 김민석과 나의 인연은 질기고 질겼다.
그 인연의 고리를 우리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끊었어야했다.
그 날, 그 때는 끊었어야 했다.
* 3 개월 전 *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 했거늘 이런 일에 울어서 널 어디다 써."
불알친구 김민석의 제대일이였고 꼭 잔디인형 같던 머리가 좀 푸릇해진 민간인 김민석이 된 것을 축하해주는 자리였다.
김민석은 흔히들 말하는 이말 상초를 버티지 못하고 상병 때 헤어졌다는 여자 친구 얘기를 하며 아프게도 눈 주위를 긁어댔다.
사나이의 눈물에 젖어간 티슈가 어느새 식탁 한 구석을 가득 메워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김민석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찌질하게 울고 있는 김민석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술인 것 같아 잔이 비워질 때 마다 소주를 부었다.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또 부어라 마셔라.
옛 어른들 말씀 하나 틀린 것 없고 옛 어른들 말이 다 옳다고 했던 것 이제야 인정한다.
술이 원수였다.
"너 술 너무 많이 마셨다. 지금 얼굴 완전 맛 갔어."
"사돈 남 말 하네. 야, ㅇㅇㅇ. 네가 더 많이 마셨어."
"혀도 다 꼬여서는. 이제 군인 아니다 이거지. 확 다시 군대 보내버릴라."
“꿈에라도 재입대 할까봐 무서우니까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좀 넣어둬라. 사실 체력으로 보나 얼굴로 보나 군대 체질은 너지.”
“까분다 또. 여자 친구 생각에 질질 짜는 놈이랑 같이 술 먹어 준 친구를 위한 대접을 이런 식으로 하냐.”
"오케이, 내가 너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이렇게 마셔준다. 내 소중한 친구 ㅇㅇㅇ을 위해서 이 김민석이 마셔준다. 콜?"
"콜. 우선 남자친구나 만들고 그런 애기 하자."
이 대화를 끝으로 연신 술을 더 퍼먹은 우리는 비틀비틀 서로를 의지하며 정신을 잃었다.
중간에 나무를 부여잡고 몇 번 속을 비워 낸 기억은 있지만 그 뒤 기억은 전무했다.
눈을 떴을 때 본 건 낯선 천장, 놀란 김민석, 알몸인 우리.
이불 속의 서로의 알몸을 보고 할 말을 잃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그 전의 만났던 남자가 두 명 있었지만 한 번도 끝까지 가 본 적이 없던 나였다.
짧은 기간 만난 이유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그런 쪽으로도 흘러갈라 치면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깨버리는 내 탓이 컸다.
근데 이런 식으로 김민석에게 내 처음을.
김민석과 내가. 김민석과 내가?
"우리가 좀 술을 과하게 했나보다."
낮게 잠긴 김민석의 한마디 말을 끝으로 우린 그 길로 서로를 등지고 조용히 헤어졌다.
오늘 일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니였던 것 같으니 없던 일로 하자는 김민석의 메세지에 나도 알았다, 하고 대답했다.
신께 맹세할 만큼, 진심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 준 김민석에게 감사함을 느낄 만큼 그 당시엔 난 정말 그 날 밤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불알친구였던 김민석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고 생각조차 나지 않는 그 날 밤의 일을 내 처음으로 새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김민석과 난 여느 때와 같이 행동했다.
이따금씩 바로 옆집인 서로의 집을 드나들기도 했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가끔씩 예전의 없던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정적이 맴도는 순간들이 생기기고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알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 잘 지내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버렸다.
두 달 째 생리가 없었다.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았어. 할 말 없으면 간다."
신발 앞 코를 땅에 찧으며 내 입만 바라보던 김민석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고 돌아섰고 멀어지려는 김민석의 등에 토하듯 뱉어낸 내 말에 김민석의 휴대폰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땅으로 추락했다.
"나 임신했대."
바닥을 나뒹구는 휴대폰을 한동안 집을 생각조차 못하고 혼이 나간 표정으로 돌아 본 김민석의 눈을 난 차마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내 앞에 다시 앉아 장난이지, 하고 물어보는 김민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니잖아, 아니잖아 하고 몇 번을 되물으며 내 눈치를 보던 김민석은 이내 큰 소리를 내며 팔로 테이블을 내리쳤고 고개를 파묻었다.
테이블이 흔들리는 소리에 놀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에 나도 김민석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리게 떨고 있는 김민석의 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아보였다.
“아니라고 해. 제발.”
"알아, 너 당황스러운 거. 나도 지금 이렇게 말한다고 담담하거나 그런 거 절대 아냐. 나도 너처럼 당황스럽고 너처럼 무서워."
"실수였어."
"그래, 한 밤의 불장난도 아니였고 술에 취해 해버린 실수야. 근데 우린 너무 큰 실수를 해 버렸어.“
“정말 실수였는데, 실수였는데.”
“우리의 실수의 대가가 너무 커.”
평소의 우리였다면 상상조차 못해 본 대화였다.
23년 평생, 김민석과 나 사이에 이렇게 진지한 대화가 있었던가.
컵에 꽂혀있던 빨대를 빼 거칠게 목을 적신 김민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몇 분전의 나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김민석을 앞에 두고 나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낙태에 대해 불가항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였는데 그게 내 신념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는데.
막상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되고 내 앞에 마주하자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널 보니 난 더 자신이 없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한숨만 내쉬던 김민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가지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까지 날려버린 가차 없는 발언이였다.
"이런 말 들으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음 좋겠다."
"말해."
"그 애…… 내 아이 맞아?"
누군가 내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친 기분이였다.
이건 뭐,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는데 지금 내가 딱 그 짝 이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에 코웃음을 치며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나를 김민석은 붙잡지도 않았다.
카페를 나오고서야 아차, 싶었다.
김민석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 걸.
그것도 아니면 얼음이 가득 담긴 물 잔을 뿌려버릴 걸.
규칙적이던 생리가 두 달째 나오지 않던 날 혹시 몰라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끼고 동네 앞 약국에서 구입한 임신 테스트기가 뚜렷한 두 줄을 띄었을 때 뱃속의 아기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도 기쁜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날 붙잡고 통곡을 할 우리 부모님, 당황스러워 할 김민석의 표정, 뒷목을 잡고 쓰러질 김민석의 부모님, 놀랄 친구들.
하루에도 백 번, 아니 천 번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았지만 내 아이가 맞냐고 물어오는 김민석은 정말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23년간 알아왔던 친구로서 내가 알던 김민석과는 다른 김민석의 단호한 말투와 표정에 목 끝이 씁쓸했다.
"김민석, 나쁘다 진짜."
김민석에게 실망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 화가 잔뜩 담긴 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버스정류장에 앉아 지갑의 카페 영수증을 꺼내 찢어댔다.
찢겨 나간 영수증 조각을 보다 영수증이 무슨 죄가 있나 싶어 다시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넣는 그 순간 든 임산부는 마음을 곱게 써야한다는 말이 떠올라버리는 내가 참 바보 같아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타 창밖을 보는데 곧 복할 할 모교의 정문을 지나친다.
이 아이 낳아버리면 내 꿈 포기해야 되는 거지?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어루만지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아, 너무 피곤하다.
"팔자 꼬였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화사한 분홍색 앞치마를 입은 엄마가 뒤집개를 들고 날 맞았고 그런 엄마를 본 순간 울컥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엄마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지 못하고 그저 요리를 하는 엄마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생선 냄새 밴다며 주방에서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엄마를 그냥 꽉 껴안았다.
엄마, 미안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버렸어. 난 불효녀야. 나 많이 미워해.
내 마음 속 독백이 엄마의 마음에 닿길 바라며.
"엄마, 혹시 내가 갑자기 결혼해버리면 엄마는 어떨 것 같아?“
“누가 너 데려나 간다니. 그런 남자 있거든 니 방 꼬라지를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해. 왜? 누가 결혼하자고 해?”
"아니, 그냥 해 본말이지. 그리고 나 데려고 간다는 남자가 줄을 섰어. 왜 이래."
"지나가던 개가 웃어."
"엄마, 내가 곧……아기 낳는다고 하면 어떡할거야? 그냥 드라마 보다가 생각나서."
"얘가 오늘 왜 이렇게 실 없는 소리를 해 너 답지 않게. 말이 씨 된댔어. 오늘 이상해, 너. 내일 개강이라며? 밥이나 먹고 내일 학교 갈 준비나 해."
미간에 주름까지 만들고서 핀잔을 주는 엄마의 반응에 괜히 움찔해 시선을 밥에만 집중했다.
천천히 먹으라며 체한다는 엄마의 걱정에도 엄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꾸역꾸역 맨 밥을 입으로 넣었다.
밥그릇 위로 둥실 떠오르는 김민석의 얼굴에 숟가락을 밥에 푹푹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