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중학교 출신이던 세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한 잡지 표지모델을 장식했다.
높은 판매부수를 올리던 잡지는 아니였지만 세훈은 버스조차 타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동네 여학생들의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동에 살았던 터라 나는 원치 않게도 세훈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난 세훈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였지.
내가 본 세훈은 안하무인에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자기 잘난 맛에 취한 어리광쟁이,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난 세훈에 열광하며 일거수일투족 쫓아다니는 여자 애들을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끌끌 찼다.
그냥 그저 이 모든 게 스쳐지가는 바람과도 같은 일이 되길 기도할 뿐이였다.
세훈을 보러 온 여고생들 때문에 토요일이면 버스 만원사태가 계속 됬고 덕분에 난 제 시간에 하교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열 일곱번째 생일날 마주한 세훈으로 인해 내 인생을 아주 급한 커브길에 들어서버렸다.
내 열 여덟번째 생일날은 치매가 있으셨던 우리 할머니를 찾느라 눈물을 오지게도 뺐던 날이였다.
엄마가 슈퍼에 갔다오는 사이 집에서 사라진 할머니는 그 날 저녁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집으로 돌아올 지 모르는 할머니를 기다리며 경비실 앞에 앉아 아파트 동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골목길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을 뿐 이였다.
제발, 할머니가 아무 일 없이 우리 가족 곁으로 돌아와주길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자주 가시는 공원에 갔는데도 안 계시네."
"경찰서에 방금 실종신고 했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 있어."
"할머니 곧 찾을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 엄마, 삼촌에게 차례로 걸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에 울음이 터지고 터져 말라붙을 시간도 없이 계속 흘러내렸고 숨이 턱 하고 막힐 때 쯤 들린 할머니의 목소리.
"ㅇㅇ아~ 할미가 우리 손녀 선물 사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어 달려간 곳에는 세훈의 등에 업힌 할머니가 손에 학용품 세트를 들고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
손녀 선물 사느라 밖에 나가신 거예요?
할머니를 다그치고 싶었지만 갑자기 풀어진 긴장에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고, 세훈의 등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조용히 날 안아주셨다.
결국 난 할머니 따뜻한 품에서 동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할머니의 품 속에서 힐끔 보이던, 아무 말 없이 날 기다려주던 세훈의 큰 발을 난 5년이 흐른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좀 잊혀지면 이 마음 앓이가 좀 덜하련만.
"……저기 고마워……"
그렇게 한참을 울고서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세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치지 않는 내 울음에 지쳐 가족들은 벌써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간 후 였다.
새삼스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웃겼지만 나는 바보처럼 엉망인 얼굴이 부끄러워 숙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됐어. 그만 울고."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로 돌아서는 세훈의 등을 보며 나는 결국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 날 밤, 세훈이 나오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며 깨달았다.
사랑에 빠진거야.
"좋아해."
"어."
바로 그 다음날 이였다.
툭하고, 고백을 한 내가 나도 놀라웠다.
빵을 먹던 세훈에게 난 무심히 고백했고 세훈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딱히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내 마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세훈과의 연애가 시작되기를 바라던가 세훈의 마음을 얻는다던가 등의 기대 따윈 없었다.
난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그 뿐이였다.
그렇게 세훈과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세훈과 같은 동아리를 가입했고, 세훈의 전역일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렇게 4년 270일이 흘렀다.
스물 둘 봄이 시작됐고 평행선 같던 세훈과의 관계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훈아, 좋아해."
"어."
오늘도 세훈을 향한 고백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몇몇 고학번들은 적응한 상태였지만 처음 본 동아리 신입생들은 눈이 동그래져 그저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날도 그저 여느 날과 같은 날들일 줄 알았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신입생의 난데없는 질문 세례만 받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여느 날과 같았을 지도.
"세훈 선배님은 왜 별 말씀이 없으세요?"
"뭘."
"ㅇㅇ선배님이 고백하셨으면 어, 가 아니라 사귀자, 난 너 싫다 이런 대답 해야하는 거 아니예요?"
"신입생이면 신입생 답게 굴어."
"세훈 선배님 혹시 다른 좋아하는 여자 있으세요?"
"어. 있어."
"어???????"
세훈의 대답에 놀라 쥐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리긴 했지만 빽, 하고 소리를 지른 건 동아리 동기인 백현이였다.
백현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질문 융단 폭격을 날리던 신입생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침묵을 지켰고 고학번 선배들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4년 271일째에 오세훈의 짝사랑을 알게 되다니 나도 참 둔하다 싶어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 변백현. 귀 아파."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어."
"와, 오세훈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나쁜 놈이였네."
"내가?"
"그래. 니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ㅇㅇ 마음 받아주고 그렇게 질질 끌면 안되는 거지."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 같은 소리하네. 오세훈 너 진짜."
백현은 자신의 일인라도 되는 냥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세훈을 몰아부쳤고 그런 백현의 모습에도 세훈은 옅은 미소를 띄울 뿐이였다.
세훈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많았다.
몇 년간 세훈 곁을 맴돌며 사랑을 받는 세훈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세훈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세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좋아해, 라고 고백한다면 난 울까.
고민에 빠진 내 앞으로 세훈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넌 어쩔거야."
"응?"
"니가 좋아하는 내가,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쩔거냐고."
"세훈아."
"어."
"좋아해."
무엇이 그리 흡족스러운 건지 보기 드물게 입꼬리를 올린 세훈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세훈아, 어디 가."
"오늘 우리 과 개강집회 있대서 거기."
"아, 언제쯤 끝나? 술집 앞에서 기다릴게."
"까불지 말고 집에 먼저 가."
"아냐, 기다릴게."
"끝나면 새벽 1시 넘어."
"그래도………."
"가."
"…………."
"세 번 말 안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