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하신 바나나 라떼 나왔습니다."
귓가에 울린 너무나 익숙한 낮은 목소리와
브라운 계통의 테이블 위로 놓여지는 하얀 머그잔
"계산은 뽀뽀로 할까요?"
장난스러움을 가득 담아 제 볼을 내밀어오는 그를
슬핏 웃으며 밀어냈다.
장난은. 빨리 앉아.
"근데 어쩐일로 커피가 아니야?"
"어?"
"너 원래 커피만 마시잖아, 단거 싫다고."
그의 턱끝으로 가르켜진 내 앞에 놓여진 머그컵에는
평소와 다르게 짙은 블랙의 아메리카노가 아닌 부드러운 아이보리색을 띈 바나나 라떼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나온게 아닐까 싶었다.
슬쩍 입가에 가져다 맛보니 역시나 지나친 단맛이 썩 좋지 않아
손에 쥐고 컵의 테두리만을 따라 그렸다.
"아, 징어야. 나 전화 한통만."
밧데리가 없어서. 누나가 연락달라고 했거든.
손을 뻗어 내미는 그의 손에 얌전히 핸드폰을 올려주었다.
땡큐-. 하며 장난스레 받아든 내 핸드폰의 화면을 본 그가
금방 표정을 굳혔다가 입을 삐죽거렸다.
"야, 넌 남자친구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배경화면이 기본이 뭐냐, 기본이. 하여간 남자친구 써먹을 줄을 몰라요.
가져간 핸드폰을 몇번 이리저리 만지던 그가 곧 내가 했던 것처럼
내 손에 핸드폰을 올려주었다.
"전화는? 언니가 하라고 했다며."
몰라. 인정없는 여자친구 때문에 빈정 상해서 안해."
괜히 핑계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뒤 홀드를 눌러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어때? 잘 나왔지? 나도 깜짝 놀랐어."
변백이 잘 나왔다 그러면 말 다한거 아냐?
화면 가득 차있는 그의 모습은
콘서트에서 수 많은 팬들을 등지고 서
카메라를 보며 땀 범벅이 된체 익살스레 웃는 모습이였다.
그의 뒤로 펼쳐진 빛들이 꼭 그의 날개 쯤 되는 것이 아니가 싶었다.
그는 곧이라도 올라타 멀리 날아갈듯 했다.
그 그림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는 비상해야 맞는 사람니까.
"아참, 할 말있다며, 뭔데?"
"..."
그래서 나는 그의 날개를
"...징어야?"
온 몸을 다해 지켜주노라 했다.
"..나.."
임신했어.
박찬열
떨리는 숨을 몇번이고 가다듬은 뒤 그의 눈을 마주하고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뭐라고? 뭘 해?
한참의 침묵뒤에야 튀어나온 그의 말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어떠한 떨림도, 당황도 담겨있지 않았다.
분명 많이 놀라고 많이 무서워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를 잘 모르나보다.
"임신했어."
"..."
"병원도 다녀왔고. 4주째래"
분명 오늘 받은 사진인데도 나의 긴장으로 가득찬 매만짐 덕분인지
사진의 모서리는 벌써부터 헐어있었고, 나는 그걸 머그잔 옆으로 천천히 밀었다.
멍하니 바라만 보던 그가 줄곧 움직이지 않던 손을 뻗어 그 사진을 조심히 쥐었다.
그리고는 제 눈앞으로 가져가 한참을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사진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마치 내가 처음 사진을 받았을 때처럼.
선생님이 조심스레 쥐어 주신
어린아이가 낙서한듯 검은색과 흰색만이 난무하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애처롭게도 중얼 거렸다.
"내 아이."
오버랩 되는 그의 입에서 옅게 흘러나온 말과 내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이
귓가를 스침과 동시에 내 주변의 시간은 멈춘듯 했다.
참아왔던 감정이 곧이라도 폭발할듯 심장을 쿵쿵 빠르게 두드렸다.
몇번 축이지도 않은 목인데도 어째서인지 물기가 가득했다.
애써 헛기침을 하며 달랜후 주먹을 꼭 쥐고 입을 열었다.
"수술은 혼자서 할게."
"..뭐?"
"너 곧 활동 다시 시작하잖아."
바쁜데 어떻게 같이 가. 너 기사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걱정마. 나 혼자서 잘 할 수 있어."
형편없게 갈라지는 목소리
"원하던 아이도 아니고, 너도 나도 준비 안됐잖아."
턱끝을 타고 쉴틈없이 떨어지는 눈물
"이게 맞는 거잖아. 찬열아."
끝자락의 오열.
숙인 고개로 부터 허벅지로 떨어지는 눈물이 보였다.
한심했다. 담담하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결국 약한 모습으로 그에게 짐을 안겨주고 말았다.
씩씩하게 웃으며, 나중을 바라자며 웃음을 담던 가면은
눈물에 완전히 지워져 버린 건지, 다시 꺼내 쓸 수가 없었다.
"지울거야. 걱정하지마. 다만 이건.."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얼굴을 쓸어내리면
맞은 편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잖아."
눈에 담긴 건 잔뜩 굳은 얼굴.
"너 아니잖아."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너 낳고 싶잖아."
"아니야. 진짜 아니야, 찬열아. 나는-."
"그럼 너, 왜"
커피 안시켰는데.
아까 먹은 바닐라 라떼의 단맛이 다시금 입안에 돌았다.
"너 왜 커피 안시켰는데."
"..."
"왜 구두도 안신고."
"..."
"더위도 많이 타는 네가."
에어컨 바람을 피해서 외투까지 걸쳤는데.
사실 행복했다.
단 며칠 뿐이였지만, 커피도 안마시고 구두도 안신고 몸도 따뜻하게 하고.
정말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어느 평범한 임산부처럼 생활하는 그 짧은 며칠이
사실 너무나 행복했다.
"말해, 네 입으로."
"..."
"낳자고"
"..."
"책임지라고"
그렇게 말해줘, 나쁜 말 말고. 예쁜 말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