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하 "
" ... "
" 세자저하 "
" ...왜 그러느냐 "
" 용안이 안좋아보이십니다. 오늘 쉬시고 내일 출궁하심이- "
" 아니, 괜찮으니 오늘 출발할것이다 "
" 하지만 저하 "
" 어서 나가 출궁할 채비를 하거라 "
" 예, 저하 "
새하얀 피부, 계집같이 고운 눈망울과 장미를 입에 머금은 듯한 입술에 언뜻보면 방에서 책만읽는 샌님처럼 보이지만, 쭉뻗은 콧대와 남자답게 벌어진 굳건한 어깨, 그리고 손에 보이는 무수한 물집이 터지고 남은 상처들이 그가 결코 비리비리한 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게 누구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볼듯한 눈빛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맑고 푸르러 아름다운 것들만 담은듯했던 소년 정국의 눈동자에는, 더이상은 제 어미를 볼때의 따뜻함도, 어린소녀를 보던 사랑스러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호위무사를 보내고 홀로 남은 정국은, 낮의 일을 회상했다. 지금 주상의 처지는 딱 이빨빠진 호랑이, 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생과 사를 오락가락하며 겨우겨우 외줄타기를 한지도 수년이 되었고, 어떤날은 제정신이었다가 어떤날은 반쯤 정신을 잃었다가, 저를 알아보고 세자, 하고 불렀다가 못알아보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가. 요즘들어 제정신인 날이 10번중에 1번도 꼽히지 않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방문하는 날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지경이었다. 오늘은 왠일로 제정신이 돌아와 자신을 세자, 라고 불러 오늘은 평탄하겠구나, 했지만 뒤이어진 말이 정국을 더욱 심란하게 하였다.
세자,
예, 주상전하.
원아.
...예.
원아, 부디 내가 저세상으로 가거든 열성을 다해 너의 어머니를 보필해드려야 하느니라.
주상전하, 무슨 그런 말씀을-
너의 어미가 독해 보여도 험난한 생을 살아온 불쌍한 여인이니라. 꼭 잘보살펴드리겠다고 약속해주겠느냐?
...예, 저하.
아버지.
...예, 아버지.
자기 자식도 못알아보는 주제에 아버지노릇이라니, 참으로 어리석다. 따지고 보면 주상이 나의 아버지가 맞긴 하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은 애초에 내 머릿속에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고, 핏줄상 아버지라는 자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몰랐으니 나에게 주상은 그저 빨리 없어져줬으면 하는 존재였다. 이 원, 내 쌍둥이형이라는 자의 이름. 그리고 내가 평생을 달고다녀야 하는 이름이었다. 전정국이라 불러줄 이는 세상과 하직한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들어본 지 몇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그 이름을 새기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단 하루도 그 이름을 불러줬던 소중한 이들을 잊은적이 없었다.
아, 궁에 딱 한명이 있었네,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 나를 낳아주었으나, 그 인간을 어머니라고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쌍생아중 동생이었던 나를 태어나자마자 버렸으면서 형이 문둥병에 걸리고 나서야 나를 궁으로 데리고 온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이었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인 사악한 인간, 아니 인간이라는 칭호마저 아까운 짐승같은 존재.
천하를 호령할 군주가 될때까지, 그때까지만 참자. 때가 된다면 왕후부터 사약을 내려 그 시체를 찢어 호랑이 동굴에 던져주리라.
다시 한번 복수를 되새기며 탁한 눈빛을 하던 정국은, 이내 일어서 단촐한 청록색의 외출복을 입고 갓의 끈을 동여매고는 호위무사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과 풍채는 여느때와 같이 감히 올려다 보지도 못할 위압감이 흘러나왔으며, 문을 열던 궁녀들은 정국이 지나간 후에도 고개를 조아리고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청순아 "
" 예, 대모님 "
" 김진사 나으리께서 오셨다 "
" ...가겠습니다 "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연지를 조심히 찍어 입술에 펴바르던 어여쁜 여인네는 저를 부르는 대모님의 목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고, 이내 가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봄날 화사하게 핀 개나리보다도 더 고운 빛깔의 노란색 저고리와, 그 저고리와 마치 한쌍인듯 잘 어울리는 연분홍의 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갈수록 시끄러워지는 복도들을 나비처럼 사뿐사뿐하게, 하지만 우아하게 걸어갔으며 익숙한 문앞에 멈춰섰다. 잠깐을 망설이던 여인은 이내 조용히 문을열고 들어갔다.
" 안녕, 청순이 "
" 안녕하시옵니까 "
" 너도 말 놓으라니까, 말 참 안듣네 "
" 기생신분이 나으리께 어찌 감히 말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 - "
" 아, 알았어 알았어! 얼른와서 앉아 "
" ...예 "
청순이, 라고 불리는 어여쁜 아가씨는 기생신분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수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는 한양 제일가는 기생이었다. 물론 청순이 그녀의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듣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음률과 더불어 때로는 우아한 백조를, 때로는 나비를 연상케하는 가무로 양반들을 매혹시켰으며, 글재주또한 만만치않아 학식있는 자들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였으니, 청순을 찾는 양반들은 더욱더 늘어만 갔다. 또한 성접대는 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굳건한 의지에 양반들이 당장이라도 첩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줄을 서는 정도였으니, 한양제일의 기생이라는 호칭이 결코 그녀에게 과한 호칭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근래 청순을 찾는 양반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그 이유는 청순을 불러낸 이 남자 때문일것이다. 현재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김씨가문의 차기 가주 태형이 청순을 찍었기 때문에, 감히 그 어떤 양반도 청순을 불러낼 수가 없었다. 태형은 두뇌가 비상해 청순을 만나기 위해 양반들이 어떤 꼼수를 써도 태형에게 들킬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청순을 방문하는 건 오로지 태형 뿐이었고, 전에 멋모르고 청순을 불러달라던 이름모를 양반은 태형에 의해 파직을 당했다. 그만큼 태형의 사랑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 근데, 왜 오늘도 안달았어? "
"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며칠전에 왔을때 준 노리개 말이야, 왜 안했어? "
" 저에게 그런 사치스러운 치장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 내 그럴줄 알았어. 그래서 오늘 내가 직접 달아주려고 사왔지! "
" 나으리, 이러시면- "
" 대모를 불러 큰소리 좀 내볼까? 그걸 원하는 거야? "
" ...아닙니다. 달아주십시오 "
" 내가 직접 골라왔으니, 어울릴거야 "
꽃을 수놓은듯한 은은한 색의 노리개는 여자라면 누구나 달고 싶어할만큼 아름다웠으나, 청순은 태형이 달아주는 동안에도 껄끄러운 표정을 지어보였고, 곧이어 잘어울린다며 활짝 웃어오는 태형에 표정을 지우고 고맙다는 인사로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태형이 준 선물은 이미 방의 서랍에 넘쳐났고, 단 한번도 달지 않은것 투성이였다. 아마 이 노리개도 어디 한구석에 박혀 잊혀지게 되겠지.
" 청순아 오늘은 말이야, 오랜만에 시를 써주라 "
" 예. 나으리께서 주제를 정해주시지요 "
" 사랑! 어때? "
사랑이라, 그 단어를 듣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19년을 살아온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세월동안에도 그리워하며 살아갈 나의 정인이자 낭군. 아직도 4년전의 그 날이 생생하기만 하다. 내게 청혼이라는 달콤한 말을 해오며 더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던 그날이. 순수한 사랑만이 가득했던 너와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하고 있었다. 너는 기생이 된 나를 보면 어떤 말을 해올까. 아니, 그전에 너는 살아있기는 한걸까. 살아서 훗날 마주친다면 제발 나를 못알아보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이런 초라한 나를 제발.
" 청순아? "
" 아, 송구하옵니다. "
" 괜찮으니, 천천히 써 "
최대한 너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보는이까지 황홀하게 만드는 사랑의 시를 쓰고싶었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써지는 건 이별의 시였다. 임과 만나지 못해 한이 서린, 그런 구슬픈 시를.
" ... 나으리, 다시 쓰겠습니다. "
" 왜? "
" 엉망이옵니다. 새로 써서 올리겠습니다. "
" 됐어, 한번 줘봐 "
" 나으리! "
청순이 쓴 시를 찬찬히 읽어가던 태형의 입꼬리는 순식간에 내려갔고, 혼란스러움과 더불어 타는듯한 투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시에서 눈을 떼 청순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피하던 청순은 태형의 손에 들린 시를 뺏어들고는, 송구하옵니다, 새로 쓰겠사옵니다. 하고는 빳빳한 한지위에 붓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청순을 바라보던 태형은 눈을 세게 감고 침을 한번 삼키더니, 쿵,쿵거리는 발소리로 방을 빠져나갔다.
하찮은 기생따위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제가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청순은 태형이 도망치듯이 나간 문쪽을 바라보며 속삭이듯이 말했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이 쓴 시를 소중히 안아들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七月七日長生殿;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
" 저하, 잠시. "
" 왜 그러느냐? "
" ...방금 지나간 저자가 영의정 김종훈의 아들입니다. "
" 그렇다면, 잘 찾아왔군 "
" 아무래도 저 안엔 저 혼자 들어가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 저곳이 정말 그들의 본거지라면 위험할 수도- "
" 앞장서거라. "
" ...예, 저하 "
항상 영의정을 의심해왔지만, 요즘들어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곧 주상이 서거할 것 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그들은 아마도 반역을 도모하고 있을 것이다. 버젓이 있는 세자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려 하다니, 괘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용히 사람을 심어 그들의 행적을 파헤치는 도중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김씨가문의 차남 김태형. 그가 며칠간격으로 이 기방에 왔다갔다하는 것을 나의 수하가 목격했고, 떠도는 소문을 들어본 결과 한양내에서 유명한 청순이라는 기생을 반복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 출궁을 할 일이 있기에, 그 일과 더불어 이 백합원과 기생을 보러 온것이었다.
" 어서오십시오, "
" 여기 청순이라는 기생이 있는가. "
" 청순이를 원하신다면 불러드릴 수는 있사오나,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 이 분이 어떤분이신 줄 알고, "
" 됐다. 괜찮으니 어서 불러주거라. "
" 예, 그럼 방으로 뫼시겠습니다. "
시끄러운 긴 복도를 지나 한 방으로 들어섰고,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으며 방안을 살피었다. 딱히 무엇인가 잡힐만한 것은 없었던지,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잠자코 청순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들어가겠사옵니다, 하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열렸다.
"" 안녕하시옵니까, 청순이라 하옵니다. "
들어선 어여쁜 여인과 눈이 마주친 정국의 날이서린 눈빛은 금세 풀어졌고, 어떠한 생각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으며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릴 수 밖에는 없었다. 청순이라 소개한 그 여인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리웠던 자신의 정인, ㅇㅇ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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