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지 않은 방안에는 자그마한 창이 나있었고, 장식품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도 아니요, 온 벽에 그림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방을 환하게 비춰주는 몇개의 호롱불들이 꺼져 어둠만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면 감히 살아있는 어떤 것도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이 방안의 공기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때문일것이라. 여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순간부터 두 남녀는 세상에 서로밖에는 없다는 듯 그렇게 미동도 없이, 한없이 눈에 담았으며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내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것이다.
...단 한눈에 알아보았다.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하루전 만나 사랑을 나눴던 연인처럼 그렇게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를 보고,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빛을 띄던 정국의 눈에 가장먼저 드러난 감정은, ' 벅참 ' 이었다. 말그대로, 정국은 그동안 그녀를 그리며 느꼈던 사무치는 그리움들과, 자신때문에 죽었다는 죄스러움과, 그녀에게 했던 백년가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 그리고 오만가지 감정들이 섞여 저 깊은곳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어떻게 절제해야 하는지를 몰라 지긋이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나 좋아했던 사랑스러웠던 그 두눈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했고, 내 감정도 조금씩 추스러졌으며, 그제서야 내 감정에 두 눈이 가려 보지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그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던 그녀가, 많이 달라져있었다. 고운 머리카락들은 잘 빗어져 머리위에 가채를 얹고 있었고, 보기만해도 떨려오는 오밀조밀한 입술은 붉게 연지가 발라져 있는것이, 그래, 딱 제가 궁중행사때 보던 기생의 모습이었다. 온갖 치장을 해 화려했던 행색의 그들과는 다르게 그녀에게서는 우아함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생의 행색인 것이 확실했다. 정신이 돌아온 나는 이곳이 술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으며, 그녀가 들어오면서 자신을 청순이라 소개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ㅇㅇ가 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길이 없지만... 기생이 되었구나.
기생이... 되었구나.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더욱더 생생히 그려지는 그녀의 눈빛이, 맑고 영롱한 빛을 띄웠던 그 눈빛이, 나처럼 탁한 색을 띄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과 그녀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라고, 내가 아니었으면 여느 집 여인처럼 아름답게 자랐을 거라고, 죄책감을 잊지 말라고, 평생 사죄하며 살아가라고. 그렇게 매질해왔을 때 보다 그녀가 살아서 기생이 되어 나와 똑같은 눈빛을 하며 내 앞에 있는 지금이 수십배는 더 아팠다. 눈을 뜨면 그 눈빛을 한 그녀가 내 앞에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도저히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니, ㅇㅇ야.
결국 꼴사납게 눈을 감은채로 손으로 더듬거리고 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질 뻔 하기도 하며 그 방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복도의 시끄러운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줄어들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 ㅇㅇ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동시에 꽉막혀 답답한 가슴팍을 치며 다시한번 눈을 감았다.
이 모든게 꿈이었으면. 눈을 뜨면 열다섯의 너와 내가 마주보고 있었으면.
--
그가 나가고, 그의 나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다시는 뜨고 싶지 않다는 듯 질끈 감은 두 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문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는데, 새까만 의복과는 확연히 다른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낯선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눈을 피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애써 땅을 지탱하며 일어서는데, 한차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휩쓸고간 내 미천한 몸을 떨리는 다리는 온전히 버텨내지 못했고, 다시 주저앉을 뻔 하였다. 근데 족히 세발자국은 멀리 있던 검은 의복의 남자가 내 한쪽팔을 잡아주었고, 온전히 일어날 때까지 잡아주었다. 겨우 잘 일어나 남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목례를 해보였고, 남자는 묵묵히 그런 나를 보다가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아까 처음 들어왔을때 그의 뒤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호위무사 같은걸까.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혼자 헛웃음을 짓고는 내 방으로 향했다.
김진사 나으리께서 나가신지 얼마 되지않아 대모님께서 다시 부르셔서 한숨을 쉬었는데 다른양반이라는 소리에 적잖이 놀랐다. 그 손님이 누구시던 간에 김진사 나으리께 들키지 말았으면, 생각하며 빨리 돌려보내야 겠다고 다짐하며 손님이 계신 방의 문을 열었다.
...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 손끝,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아있겠지, 살아서 나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야, 원래 없는 사람이었다는 듯 한순간 사라진 그가 잘 살고있기를 매일 밤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 그것이 이루어 질 줄이야. 그리고, 그가 내 눈앞에 있을 줄이야. 믿기지가 않았다. 몇년간 커져왔던 그리움으로 인해 환영을 본 줄 로만 알았고, 이내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사를 알 수 없는 오라비, 그와 함께 사라진 그의 어머니가 머리에 스쳐 지나갔고, 지난 4년간 주위 사람들을 잃고 죽고싶도록 힘들었던 일들을 그에게 하소연하며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그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어렸을때, 그때처럼.
겨우 눈물을 참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그의 맞은편에 가 쓰러지듯이 앉았고, 계속해서 눈을 마주쳤다. 근데, 그가 알 수 없는 눈빛을 하더니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고, 내가 바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났다. 초라한 기생인 저를 못알아보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랬었다. 그의 복식을 살피니 딱봐도 비단으로 수놓아진 값나가는 의복이었고, 그의 낯빛또한 고결한 것이, 귀한 대접을 받아가며 살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 반해 나는, 이런 하찮은 기생이 되었다.
그래, 겨우 어렸을때 했던 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질 리가 없지. 잘 살아온 니가, 이런 나를 그리며 살아왔을 리가 없지.
감았던 눈을 뜨지 않은채로 방밖으로 도망치듯 나가는 그를 보며, 나는 내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는 이미 나같은것 따윈 잊고 살았을 것이라고.
--
" 어머니! ㅇㅇ야!! "
몇십번의 탈출시도 끝에 겨우 왕후의 감시망을 벗어나 궐 바깥으로 탈출 할 수 있었고, 정신없이 말을 타고 우리가 살던 그곳으로 향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왕후가 한 말을 믿지 않았고, 왕후가 자신은 그게 무슨 일이던 자신이 벌인 일이 들킬 빌미가 보이는 것은 싹을 잘라버린다고, 설마 나를 알고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살려두겠냐고, 내 사람들의 죽음을 믿지 않는 내게 소름끼치게 얘기했을 때도 믿지 않으려 애썼다. 그곳으로 가면 ㅇㅇ가와 ㅇㅇ의 가족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나를 반겨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꼬박 하루를 걸려 온 나의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나의 집과 ㅇㅇ의 집은 불에 타 재만 남아 있었으며, 아닐거야, 하면서 미친듯이 재투성이인 우리 집을 손으로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불에 타버린 하얀 유골들이 보였고, 믿을 수가 없어 ㅇㅇ가네 집이 타들어가고 남은 그 재투성이 사이를 헤집어 보았고, 역시나 같은 것이 보였다. 이 꽉꽉 막힌 것 같은 가슴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는 것으로는 풀리지 않는 이 슬픔은 어떻게 풀어내야할까. 그저 가슴을 치고,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바탕 감정의 폭풍이 지나가고, 하얀 뼈가루를 손에 담아 바람결을 따라 강에 흩뿌렸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그대들의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하고 이 생을 마감할 것이니 편하게 그곳에서 쉬고 있기를. 그리고 ㅇㅇ야, 약속할게. 내 생에 정인은 단 한사람 뿐이라는거, 절대 곁에 다른사람을 두지 않을거라는 걸.
" 세자저하, 이만 가시지요. "
내가 궐을 탈출하자마자 왕후는 바로 내 뒤를 쫓으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중간에 데리고 오지 말라고, 스스로 알아서 올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 원한다면 가줄것이다. 훗날 왕후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것이다, 기필코.
--
" ... 아버지 "
" 어, 김진사. 무슨 일이더냐 "
" 세자가 백합원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습니다. "
" ...세자가? "
" 예. 제 뒤를 밟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
" 당분간은 되도록이면 외출을 금하거라. 어린주제에 능구렁이 같은 놈이다. 각별히 조심하거라 "
" ...예 "
아무리 신분이 세자라 해도 제 소유인 청순이를 만난것의 대가는 치러야 할겁니다, 세자저하.
ㅣ
ㅣ
ㅣ
후.... 오늘 꺼 쓰는데 감정소비가 너무 많았어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너네ㅠㅠ 왜ㅠㅠ
♥오매불망 암호닉♥
[나비]
[망개떡]
[잔디]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