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來世)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의 세상
주막은 오후부터 밤까지 주로 바뻤기에 오전에는 오로지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종종 꽃을 따러 간다던가, 뒷산에 산책을 가던가, 시장 구경을 하던가 느긋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아무도 방해를 주지 않는 그 시간을 나는 제일 좋아했다. 누구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 오직 나 혼자만의 세상. 마치 다른 세계에 존재하듯. 누군가는 이 시간을 당연하듯이 누려왔겠지만 나는 이 시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늘은 5일장이 열리는 날 철 날이었기 때문에 시장에 가기로 했다. 5일 장의 첫 번째 날은 다른 날보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볼거리도 많고 물건의 가짓수도 많았다. 시장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고소한 냄새와 흥겹게 들리는 꽹과리 소리에 샐쭉 웃었다. 평화롭다. 지나는 가게마다 다른 제각각의 냄새가 풍겨왔다. 오직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었다. 제 얼굴만 한 가위를 들고 다니는 엿장수의 곁을 지나갈 때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주막을 지나가면 음식 냄새와 묘하게 섞인 술 냄새가, 각종 잡곡을 팔고 있는 곳을 지나가면 은은하게 퍼진 쌉싸름한 냄새가 좋았다. 시장의 중앙쯤 돼보이는 곳에 들어오자 사람들이 무언가를 빙그르르 둘러싸고 있었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가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할까요-?”
태형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능글거리는 그의 말투는 낮고 어두운 그의 목소리와 어울렸다. 하지만 그의 깊은 눈매에 큰 눈과 삼백안은 큰 특징인 날카로운 분위기가 그의 능글거림이 절대 싸 보이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게 했다. 잘생긴 외모 덕에 구경꾼들의 반 이상이 여자였다. 꼬마 아이부터 아줌마 할 것 없이 몰려들어 그의 화려한 언변과 빠른 손놀림에 넋을 놓고 쳐다보기 일쑤였다. 혹여나 방해가 될까 봐 아는 체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을까 대뜸 고개를 드는 그에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만 보고 있으면, 그는 어느새 손을 들어 누군갈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쭉 따라 올라가보니 날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아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 정확히 내 눈과 마주쳤다.
저요?
입을 움직여 뻥긋뻥긋 입모양으로 그에게 물어보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딱.. 기다려?
입을 움직여 기다리라고 말한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주위에 모인 구경꾼들을 쭉 둘러보았다.
“자, 이제 구슬이 들어있는 그릇을- 골라주세요-.”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구경꾼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엽전을 걸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1번 그릇에 모여있는 많은 엽전들에 그가 살풋 웃더니 이내 그릇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쉽게.. 1번 그릇은 아니네요-”
“구슬은... 3번 그릇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와, 나도 1번 아니면 2번 그릇이겠거늘 했는데. 대단하다. 하나둘씩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한 사람들은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의 짐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있는 태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먼저 인사를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짐을 치웠다. 뭐지? 사람 말을 무시하는건가 싶어 미간이 찌푸려졌다. 괜히 상한 마음에 멀뚱멀뚱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자, 짐을 다 정리했는지 커다란 짐보따리를 어깨에 메더니 숙였던 허리를 펴고 눈을 마주친다. 서운함에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내 입술을 집게처럼 잡더니 가볍게 흔든 그가 입을 열었다.
“ 보면 먼저 인사하기로 해놓고, 아는 척도 안 했으면서.”
“...?”
“ 멋대로 삐지기나 하고 말입니다.”
“ 아, 그건..”
“ 됐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 히, 그러게요.”
“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구경이나 합시다.”
그와 같이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엿장수에게 엿도 사서 같이 나눠먹기도 하고, 귀여운 강아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나에게 태형은 어느 순간부터 편안한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능글거리는 장난과 밝은 성격이 한몫한 것 같다. 나는 이모와 최근에 찾아간 의원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이렇게 편안하게 마음껏 웃었던 것은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더욱 신이 났다. 게다가 같은 또래였으니 말이다.
시장 한쪽 구석에서 열리는 판소리판에 얼른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데리고 갔다. 판소리의 주제는 별주부전이었다. 한참을 호응도 해주면서 열심히 듣고 있었을 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보니, 태형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숨죽여 왜요?라고 물어보니 그냥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뭐야.. 흐름이 끊기기 전에 나는 다시 판소리에 집중했다.
어느새 판소리는 토끼가 용왕과 거북이를 속여 거북이의 등껍질에 타고 육지로 향하는 장면이 나왔다. 토끼는 육지에 도착하자 거북이의 등껍질에서 내려욌다. 하얀 모래 위에 서있는 거북이는 초조해 보였다. 그와 반대로 토끼는 천천히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토끼야- 토끼야, 얼른 간을 가져오렴.”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봐.”
“토끼야- 토끼야, 용왕님이 기다리시고 있단다.”
“그래그래 거북아, 분명 이쯤에 내 간을 놓았던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봐.”
“토끼야- 토끼야, 아직 멀었니?”
“...”
“토끼야?”
“거북이 이 멍청아-! 누가 간을 빼고 다니니? 간을 빼면 죽는다고!!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럼 잘 살으렴! 너는 애초부터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됐어.”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자 더욱 눈도 깜빡이지 못하며 집중하고 있었던 나를 누군가 일으켰다.
..?
태형이었다.
“왜요? 뭐 급한 일 있습니까?”
“응, 우리 이제 다른 곳 가자.”
“에?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아니야, 꼭 지금 가야 돼.”
그가 서둘러 날 데려간 곳은 장신구들을 파는 곳이었다. 노리개, 장도, 첩지, 비녀 등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신구들이 놓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비녀 쪽으로 데려간 태형은 한참 동안 비녀를 골랐다. 화려하고 고운 빛깔의 비녀들 중에서 그가 고른 것은 옥색 빛의 비녀였다. 반짝거리지도 않고 화사하지도 않은. 계산해달라며 주인장을 부른 태형은 그 비녀를 보여주었다.
“옥색? 누가 요즘에 그런 비녀를 쓴답니까- 이 아가씨는 피부도 하얘서 다홍빛 꽃이 달린 비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냥 빨리 계산이나 해주세요.”
“큼, 넉 전입니다.”
주인장에 참견에도 제 뜻을 굽히지 않은 태형은 선뜻 제 주머니에서 엽전 꾸러미들을 꺼내 넉전을 건네준 태형이 몸을 돌려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조용히 따라가니,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어느새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춘 태형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자 손을 내밀라는 듯 손을 펴보이기에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아까 샀던 옥비녀를 쥐여주었다.
“...?”
“이건 오늘 나 놀아준 선물-”
“아.. 그치만 전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대신-”
“...?”
“이제 심심할 때마다 나랑 놉시다.”
“예..?”
“말도 놓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마을로 향하는 길을 걷는 태형을 멍히니 쳐다보다가 급하게 뛰어갔다. 당황스러움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어보자,
“ 그, 근데 갑자기 왜... ”
“그냥- 딱 보아하니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로운데 이왕이면 외로운 사람 둘이서 만나서 놀면 더 좋지 않냐?”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 옥비녀를 만지작거리자 태형이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거- 마음에 안 들어?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서운한 것인지 눈꼬리가 쳐져 있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래? 근데 말 놓으라니까”
“아... 근데 저, 저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이 옥비녀.. 왜 옥비녀를 골랐어?”
“화려한 것이 다가 아니잖아. 저 화려한 다른 비녀들은 가볍고 속이 텅텅 비었지만, 이건 묵직하고 속도 꽉 차서 튼튼할 것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하진 않아도 수수하고 단아하니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이런 선물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에, 그리고 그 첫 선물이 바로 옥비녀이기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참으려 바들바들 떨자 깜짝 놀란 태형이 나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려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보자 안절부절 못 하던 태형이 이내 조심스럽게 엄지로 내 눈물을 닦아내었다.
“푸흐- 이런 거에 감동하면 어떡해.”
장난스레 날 달랠려는 태형만의 위로에 일어나 두 손으로 눈물을 닦은 뒤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고마워...
그의 품 속에서 웅얼거리자 그가 나를 더 꽉 안으며 말했다.
“정 고마우면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주던가-”
“그게 뭐야아..”
“아, 지금 배고프지 않아? 가자, 가자.”
그가 품에서 날 떼더니 주막에 가기 시작했다.
“어, 근데 이쪽 주막 내가 사는 곳이에요.”
“아 진짜? 잘 됐네. 자주 찾아가야겠다.”
“나 이모님이 친구 생긴 거 보여주면 완전 좋아하겠다.”
-
어느새 도착한 주막에 이모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가자, 이모가 마중을 나와주다 내 옆에 서있는 태형에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묻고 싶어 하는 이모의 얼굴에 친구라고 답해주더니, 금세 얼굴이 환해지더니 나와 태형을 끌고 작은방 안으로 데려갔다.
“아유, 우리 이름 다 컸어. 친구도 사귀고 말이야..”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그래, 편하게 쉬어-”
이모는 밥, 갖은 반찬들과 술을 가져오더니 편하게 쉬라며 나갔다.
“ ..나 술 처음 먹어보는 건데.”
“ 진짜? 몇 살인데? ”
“ 22살..”
“ 22살? 좀 늦은 편이네, 아 그리고 난 25살이야.”
이 오라버니만 믿고 한 번 마셔봐- 라며 술을 따른 태형은 술잔에 반 정도 술을 따랐다. 으으.. 긴장돼. 술잔을 드니 시공간이 멈추고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이 지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나 저러나 마신다는 거네...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눈을 감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첫맛은 달달하다가 중간에 쎄한 느낌이 들고 마지막에 목넘김을 할 때는 살짝 썼다. 제가 다 긴장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태형이 물어왔다.
“..어때?”
“...오.”
“...오?”
“오... 먹을만한 것 같아..”
-
한 잔, 두 잔 넘어가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깨고 싶지 않아서 더 마시기 시작했다. 점점 어지럽기 시작했고, 제 앞에 있는 사람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야, 성이름 너 취했냐?”
“으응.. 안취해써....”
“취했고만... 처음이라서 그런가 얼마 못 마시네.”
“안...취했다니까..!!”
“그래도 너 여기서 살아서 다행이네.”
“태형... 내가, 내가 비밀 이야기 해주까..?”
“...?”
“대신, 너 이거 알면 쉬이이잇! 해야 돼... 나 버리면 안 돼...”
-
태형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막 이모님께 이름이가 취한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얘기하자 괜찮다며 내 등을 토닥여준 이모님이 앞으로 이름 잘 부탁한다고, 잘 챙겨주라고 부탁한다는 말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내가아.. 내가.. 미래를 봐!”
“손은 이렇게 턱!! 가져다 대면 미래가 보여...”
“내가 원하지 않아도 손을 가져다 대면... 미래가.... 나타나..”
“내가아... 내가아 성이름이다!!! 너네들이 그렇게 그렇게 찾아다니능 내가 바로 성이름이라고!!”
미래를... 미래를 본다라...
-
안녕하세요. 규정입니다.
사실 아직 여주가 정국이를 만나기 전이여서 앞부분은 이렇게 시점이 자주자주 바뀔 것 같아요.. 만나기 전까진..ㅜ.ㅜ
흐름이 끊기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점.........
한가지 보충설명을 해드리자면
처음 정국 호석의 마을 수색때 = 여주와 태형이의 첫만남
전화에 나왔던 정국 호석 지민이의 만남 = 여주 태형이의 두번째 만남
으로 같은 날입니다.
이 외에도 이해 안가시는 점 있으면 물어봐주세요!
[♡암호닉분들♡]
/ 쀼뀨쀼뀨 / / 연꽃 / / ♥옥수수수염차♥ /
/ 열원소 /
/ 두둡칫 / / 화양연화 /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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