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그럴까요?"
생긋 웃는 성규와 눈이 마주친 동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해맑게도 웃는 성규.
"난 김성규. 보다시피 M이에요. 놀라지 말아요." "괜찮아요. 방금 다 밝혀졌지만, 나도 소에족인걸요. 이름은 장동우에요. 얜 이호원이고 그냥 사람." 호원은 여전히 명수가 들어간 후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동우가 조금 세게 호원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후문을 노려보던 시선을 동우에게로 옮긴 호원의 눈이 샐쭉하게 늘어졌다.
"야- 그만해."
동우의 작은 귓속말에 눈을 몇번 깜박이던 호원이 그제서야 날카로운 신경을 죽였다. 동시에 꽉 잡고있던 성규의 손을 놓은 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난 남우현이고, 나도 그냥 사람이야. 자세히 말하면 엄마 연구원."
"엄마?" "성규형 말이야." "아. 근데 남우현씨는 왜 초면에 말을 놓는거죠?" 야 이호원! 계속 틱틱거리는 호원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호원 덕에 괜히 성규와 우현에게 미안해진 동우가 다시 한번 호원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나,
"이게 바로 형님의 친화력 아니겠냐-"
"남우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줄래?" 이상한 포인트에서 자존심이 불타오른 우현이 호원의 미끼를 덥썩 물었다. 당황한 성규가 괜히 우현의 가운자락을 쥐어잡았다.
"아니 형님이라니. 당신 몇살입니까?"
"스물두살이다. 적어도 너보단 밥 몇끼는 더 먹었어 새꺄!" "하는 짓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요." "뭐? 그러는 넌 몇살인데?" "아니 보자보자하니까, 자꾸 그렇게 반토막질이네. 열아홉이다 어쩔래! 불타는 청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성규와 동우가 슬그머니 각자의 파트너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쳤다. 시선은 여전히 우현에게 둔 채로 성규가 중얼거렸다.
"동우씨."
"네에?" "3초 세고 같이 후문으로 뛰어들어가요." "왜요?" "동우씨도 같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쪽팔려서요. 옷에 바보냄새 베일 것 같아요." "아하-" 하나, 둘,
"셋!"
여전히 침을 튀겨가며 말싸움을 하고있는 우현과 호원의 옆으로, 작은 두 손을 꽉 잡은 두개의 인영이 스쳐지나갔다. 조잘대던 입을 잠시 닫고 5초간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의 포효소리가 소각장 가득 울려퍼졌다.
"엄마! 같이가!!!"
"야! 장동우!!!" -
동우의 손을 잡고 2층까지 쏜살같이 달려온 성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출산을 앞두고 조금 무리를 한건지, 약간 현기증이 났다. 그대로 침대에 편안하게 걸터앉은 성규와 달리, 동우는 멍하니 방 안을 훑어보기만 했다. 더럽고 먼지쌓인 전쟁터에 익숙해진 동우에게- 이질적일 정도로 하얀 M센터는 낯설기만 했다. 멀뚱거리며 어쩔줄 모르는 동우를 빤히 바라보던 성규가 벌떡 일어섰다. 잠깐 잊고있었던 동우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나저나 이 상처들, 다 뭐에요!"
"아.. 여기까지 전쟁터를 뚫고 왔거든요. 지나가면서 조금 다친거에요. 괜찮아요." "이게 조금 다친거라고요? 뭐가 괜찮아요. 당신들은 괜찮아도 내가 안괜찮아요." 전 피를 정말 혐오하거든요- 꿍얼거리며 몇마디 잔소리를 더 붙인 성규가 작은 방에서 응급 치료용품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 앉아요-"
한손에는 구급상자를 쥐고, 침대를 팡팡 내려치는 성규에게 동우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에?" "더러워지잖아요. 저 지금 완전 지저분하거든요. 여기있는 물건들은 다 너무 하얘서 조금만 스쳐도 때탈거에요. 안돼요." 하얗고 깨끗한 성규에 반해, 더럽고 꼬질꼬질한 자신의 모습에 풀이 죽은 동우가 고개를 폭 숙였다. 그런 동우의 손을 다시금 잡아끌어, 기어코 침대에 앉히는 성규였지만. 침대에 앉고 나서도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불편해하던 동우가, 조금은 서툰 솜씨로 동우의 크고 작은 생채기에 소독약을 바르는 성규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기만 하던 손에 까맣게 때가 묻었다. 동우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저.. 죄송한데.."
"뭐가 또 죄송해요. 자꾸 풀죽어있으면 내 기분이 더 안좋아요. 어깨 펴고! 왜 그렇게 당당하질 못해요. 죄 지은것도 아닌데-" "아..." 상처를 확인하느라 동우의 옷을 들추던 성규의 손이 더 지저분해졌다. 속이 타들어가는지, 동우가 급히 성규의 손을 밀어냈다.
"저... 먼저 씻으면 안될까요?"
"네?" "원래 상처는 씻고나서 약발라야하는데..." "상처에 물데이면 아프잖아요. 그냥 약 바르면 안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흐엉..." 동우의 시선을 따라간 성규의 눈에 보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손.
다시 고개를 든 성규가 동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웅얼거리고 있는 동우가 왠지 안타까워 등을 토닥였다. "이거때문이구나."
"...네" "동우씨는 왜이렇게 바보스러울만큼 착해요- 난 괜찮아." "그래도... 그래도요..." "알았어요. 배려 못해줘서 미안해요. 우현이 오면 숙소건물 가서 씻고와요. 옷도 깨끗한걸로 입고." "감사합니다아-" 이제야 맘이 좀 편해졌는지 동우가 예쁜 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였다.
호원의 어깨에 팔을 올린 우현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성규는 그 어이없는 광경을 애써 외면했지만. "내가 서열 정리 좀 한다고 늦었다- 어때 이 형님의 능력!"
"남우현 제발..." "거기있는 동우씨도 저보고 형님이라고 해요, 형님!" "이봐요, 형씨. 동우는 안건드리면 어디 탈이납니까? 가만둬도 착한애니까 그러지마요." 등을 돌린 성규와 달리 말똥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동우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호원에게로 뛰어가 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호원의 손이 동우의 등에 안착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띄워졌다.
"호워나..."
"야.. 야 왜그래?" "흐엉.. 그냥.. 보고싶었어..." 동우와 호원이 감동적인 재회를 하는 사이, 성규가 조용히 우현을 불러들였다. 동우가 앉았던 하얀 이불에 때가 묻었다. 슬쩍 웃었다.
"남우현... 제발 그 입 다물고... 숙소 가서 얘네 좀 씻겨."
"왜?" "왜긴 왜야. 내가 시키면 해." "어엉." "근데 진짜. 동운가 저애는 엄청 착해. 믿어도 되겠다." "호원인가 쟤도 착해. 애가 우직한게 믿을만하더라."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두쌍의 커플. 열린 문 틈새로 그들을 지켜보던 명수가 조용히 발걸음을 돌린다.
연구원들의 눈을 피해 겨우겨우 숙소에 도착한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호원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옆으로 헤실거리는 동우가 지나갔다. "우와아... 여기는 안 하얗네요?"
"그렇지. 센터는 막 하얗기만 해서 징그럽지 않냐? 몇달동안 저기 있으니까 정신병걸릴 것 같아." 동우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우현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명수를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명수는 없었다.
호원은 또 한번 늙은이같은 한숨을 뱉는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없어서. 아까 그 재수없는 자식 말이야." "없으면 편하죠 뭐. 싸가지고 재수고 다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야 그래도. 걔가 우리 중에서는 제일 브레인이란 말이야." 아- 성종꼬마가 있었구나! 알수없는 말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우현에게서 떨어진 호원의 시선이 동우에게로 돌아갔다.
"우와... 호원아 이것봐!"
베란다 문에 장착된 멀티 스크린이 그저 신기했는지, 아이처럼 맑은 감탄사를 뱉는 동우다. 몇번 눈을 꿈뻑거리던 호원이 곧 동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신기하지 않아?"
"...그렇네." "완전 다른 세계에 온 것 같다!" "..."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우현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손을 옮길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에 깜짝깜짝 놀라느라 정신이 없는 동우와 호원에게 길게 소리쳤다.
"야! 씻으러 들어와!"
"잠, 잠깐만요~" "빨리 오라니까. 그런거 처음봐? 새삼스레 왜 그래. 촌닭들처럼-" "처음보는데..." "어? 그런건 집집마다 다 있는거 아니야? 아, 아닌가..." "..." 깨끗하고 안전한 서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끝내 최상의 과학기술의 본거지인 M센터에 자리잡았던 우현이 바깥세상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 바깥세상, 호원과 동우가 자신들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던 그 세상은 위험하고 척박한 전쟁터였다. 바깥 세상은 첨단 과학기술의 손이 닿지 않은 그야말로 미개척지. 동우와 호원. 그리고 우현을 비롯한 명수, 성규, 성종. 그들은 너무 다른 곳에서 살아왔다. 이 세상의 극과 극. 그 엄청난 갭에 동우의 정신이 아찔해져왔다.
"야. 촌닭이라고 놀려서 삐졌냐?"
"아니거등요!!" 도도도도- 짧은 보폭으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동우의 뒤를 호원이 천천히 따라갔다. 호원도 동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라는.
"이리와. 이 형아가 씻겨줄게!"
"됐어요! 저 호원이랑 씻을거에요!" 느릿거리며 걸어오는 호원의 팔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팔을 걷어붙이고 설쳐대는 우현을 밖으로 밀어낸 동우다.
철컥-
"야!!! 너네 다 큰 남자애 둘이 화장실에서 뭐하려고!!"
"좀 조용히해요! 씻을거거든요!" 목소리는 들떠있었지만, 동우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짧은 고요 끝에- 밖이 잠잠해지자 동우가 입을 열었다.
"너도 나랑 같은생각했지?"
"그런 것 같다." 씻는 내내 감도는 어색한 기운은 뿌연 수증기 속에서도 가려지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따뜻한 물로 씻어봤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호원아. 저 사람들이 우리 말에 공감해줄수 있을까?"
"음..." "생각했던거랑... 너무 달라. 물론 저 사람들도 정부에 관한 화가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생각했던거와 너무 달라. 여기는." "다 잘될거야. 깨끗한 M센터든, 더러운 전쟁터든." "..." "정부가 준 고통은 다를게 없잖아." 쏴아아- 맑게 떨어지는 물이 동우의 몸을 지나 검게 물들었다. 성규의 새하얀 모습이 떠올라 괜히 울적해진 기분에 동우는 더 박박거리며 몸을 씻었다.
분명 열등감은 아니였다. 질투도 아니였다. 동우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얗게 김이 낀 거울을 문질러 닦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동우가 아니었다.
"엄마."
예쁘게 웃고있는 엄마의 모습. 물과 섞인 동우의 눈물이 끝없는 아래로 추락했다.
"... 장동우, 너 우냐?"
축축하게 젖은 호원이 다른 의미로 축 젖어버린 동우를 껴안았다. 몸속 가득히 풍겨오는 호원의 향기에 동우는 안정을 찾아갔다.
"엄마... 엄마 아들 동우가. 엄마랑 했던 약속 꼭 지킬테니까, 엄마는 하늘에서 지켜봐주세요."
"..." "제발 도와주세요." 야 너네 정말 뭐하냐! 멀리서 들려오는 우현의 외침이 갑갑한 공기를 시원하게 걷어냈다.
"곧 나가요! 잠깐만요!"
동우가 고개를 들었을때, 거울속에는 엄마 대신 장동우가 있었다. 그리고 이호원이 있었다.
-
"씻겨놓으니까 반질반질하고 하얀게 이쁘네, 동우!"
"이제 좀 사람같네요." 깨끗한 가운 차림으로 다시 돌아온 성규의 방에는 명수가 있었다. 흠칫- 하면서도 동우를 슬쩍 뒤로 숨기는 호원의 모습이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명수다.
"왜 그래요. 저 지금 총 없거든요. 엄마한테 뺏겼어요."
태연하게 말하는 말투가 아직도 건방지다.
겨우 올려놓았던 동우의 기분이 다시 저 바닥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시 불타오르는 열을 잠재우는 호원이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허튼생각일랑 시도도 하지 마요"
"와- 이러다가 멀쩡한 사람 살인자로 만들겠네?" 자꾸 유치하게 신경전할래? 따끔한 성규의 한마디에 으르렁거리던 호원과 명수가 조용히 물러났다.
"우리 동우는 저렇게 성격 안좋은 애가 대체 어디가 좋은거야?"
"네? 느..으엉.." "야, 왜 대답을 못해!" "소리지르지 마시죠. 머리아픕니다." 호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이상은 못참겠다는 식으로 명수의 멱살을 잡아챘다.
"말로 안되니까 무식하게 힘으로 이러기입니까?"
"그렇다면 어쩔래 새끼야. 그런식으로 기분 더럽게 말하지 말라고-" "호원아..." 호원의 팔을 잡아내리는 동우, 급히 명수를 떼어내는 우현. 여전히 씩씩거리는 호원과 명수. 여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호원아 니가 참아, 응?"
"김명수 그만해." 둘을 겨우 잡아앉힌 뒤에도 살벌한 기류는 끊기질 않았다. 성규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올라왔다.
"너네 계속 그럴래?"
"...아뇨" "..." 성규는 아무 말 없이 딴청을 피우는 명수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내심 기대하고있었다. 함께 세상을 바꾸자는 낯선 이들의 말에.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 우현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우현의 고백을 듣고 난 후로 성규는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곤 했다. 지금 명수의 행동은 그런 성규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거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 남은게 서로 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성규와 명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침울하게 처진 성규의 어깨를 누군가 살짝 건드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성규가 구급상자를 들고 예쁘게 웃는 동우를 바라보았다. "저어... 약 좀 발라주세요오..."
"아, 그래-" 동우 덕분에 조금은 풀어진 분위기. 화를 가라앉히는 호원, 성규의 눈치를 보는 우현, 따갑다며 엄살을 피우는 동우, 잔뜩 집중한 채 동우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성규. 그리고 그들을 쭉 훑어보며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명수.
"그래서. 왜 모인거야 엄마. 소에족을 경멸하는 겁쟁이인 나까지 부르고."
다시 일어나려 하는 호원의 팔을 재빠르게 낚아채는 동우다. 한숨을 꾹 눌러참은 성규가 입을 열었다.
"호원이랑 동우 이야기 들으려고 모인거야. 자신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우릴 설득하려고 했겠지."
"근데 난 왜 불렀," "듣기싫으면 지금 나가, 김명수." "..." "싫으면 나가라고. 나가기 싫으면 닥치고 누워있던가. 안들어도 괜찮아." 망설이던 명수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럴 줄 알았다며 빈정거리는 성규의 말에 다시 미간을 구겼지만.
"그래. 호원이랑 동우, 말해봐. 무슨 작정으로 여기까지 온건지." "아까 말한거 그대로에요. 이 더러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고요." "근데 왜 하필이면 여길 선택한거야? 이 서울의 깊숙한 곳까지." "확신했거든요. M센터면 되겠다, 라고." "...왜?" "제가 예전에 하룻동안 여기 보초를 서 본적이 있어요. 그때 들었거든요. 같이 서있던 사람한테. 정부에서 여기를 얼마나 핍박하는지, M들이 어떤 삶을 살고있는지. 그래서 이 센터 사람들도 그 나름의 고통이랑 슬픔, 그런거 심했다는거 잘 알아요.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정부에게 복수하려는 이유를 센터 내에서만 찾기는 너무 협소하다는 것도 알죠. 하지만, 우리에겐 사람들이 너무나 간절해요. 함께 목숨걸고 이 세상을 바꿔줄 수 있는 진실된 사람들. 이제 우리가 위험까지 무릅쓰고 찾아온 이유를 알겠죠. 우리만큼이나 절박한 당신들을 찾아온거에요." 제가 바를게요- 순순히 동우에게 약을 넘겨준 성규가 다시 호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근데 잠시동안 여기 있으면서 느꼈어요. 당신들을 설득하는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걸. 왜 당신들이 이때까지 그 모든 고통을 참고 견뎌야만 했는지 알았거든요."
"..." "당신들은 바깥의 이야기들을 몰라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고작 일부밖에 모르고 있었던거죠." "바깥... 이야기?" "우리는 외부인이에요. 동우 같은 경우에는 3년이 넘는 시간을 바깥세상에서 헤메고 살았고 저는 군인이었어요.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누구보다 가까이 겪었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어야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요. 어린아이,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정부군의 횡포에 목숨을 잃어요. 아무 죄없는 소에족도 세상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비참히 죽어나가고요." "... 정말이야?" "그곳에서는 센터같이 첨단 과학의 혜택, 그런거 누리지 못해요. 깨끗한 물도 없고 편안하게 누워서 잘 수 있는 잠자리조차도 찾기 힘든게 바깥세상이에요." 조용히 앉아 약을 바르던 동우가 말을 이었다.
"여기 오는 길에도, 전쟁터를 지났어요. 자기들이 도대체 왜 싸우는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불에 타고 총에 맞아 죽는 전쟁터를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어요. 그들에 맞서 싸우는 소에족 또한 죄가 없고요. 사람들을, 그리고 이 나라를, 이 세상을 망치는 이 전쟁을 끝내야해요. 그리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정부를 부수는 것. 그리고 새 세상을 여는 것. 모두가 웃으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 말이에요. 우리는 힘들고 고달픈만큼 생각할 수 있었어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워왔고요."
"아..." "하지만 M센터는, 편안하고 아늑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에요.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데 어느 바보가 세상을 바꾸자는 미친 생각을 하겠어요. 그래서 참고 견딜 수 밖에 없었던거에요. 형들과 센터 사람들은. 그 누구도 위태로운 유리성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숨죽여 살 수 밖에 없었던 거라고요." "..." "그 유리성 밖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을거에요. 조금 멀어서 힘겹게 걸어가야만 도착하겠지만, 분명 새로운 세상은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모두가 갇혀있는 유리성을 깨기 위해 나타난게 우리에요.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당신들을 데리러 온거라구요." 전쟁. 온 세계가 전쟁 중이라는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저 정도로 비참한지는 몰랐다. 성규는 눈을 깜박였다.
좁았던 성규의 세상이 커지고있었다. 연구소를 넘어선, 서울을 넘어선 바깥세상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우현과 성규, 그리고 성규를 꼭 빼닮은 아이들이 웃고 있는 세상. "나도, 나도 상상은 했었어. 특히 우현이를 만난 뒤로 자주. 내가 낳은 아이들을 예쁘게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과 편안하게 사는 그런 상상. 더 이상 아프게 울지않는 상상. 그 상상속의 세상을 이미 발견한 사람들이 있을줄은 정말 몰랐어."
"성규형. 우린 만들 수 있어요. 그런 세상. 믿어줘요." "믿어. 믿을 수 있어. 정부 몰래 쌓아왔던 그 아픔들을, 속에 넣어두기만 했지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어. 우리 M들은. 그 이유, 너희 말을 들으니까 알게되더라. 이토록 답답하고 순순했던 이유 말이야.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다른 세상의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니까. 이 하얀 방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가. 그래서 그랬던거야." "..." "내 이야기... 들어줄래?" 동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는 다른 약을 집어들어 솜에 묻혔다. 그리고 호원의 팔을 살며시 무릎에 올렸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한 기계라고 알고있어. 하지만 우린 다 알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어쨌든, 다 알고있다는거지. 정부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했던 짓을. 그리고 빼앗긴 우리의 아기들을. 내가 성숙체 M이 되어 아기를 낳은게 4년이야. 난 그 4년동안 내 품에서 떠났던 아기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연구원들의 손으로 전해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보이던 작고 빨간 형체뿐이지만, 단 한명도 잊을 수 없어. 난 그 아기들의 엄마니까. 내가 배 아파 낳은 내 아기들이니까. 우린 M이란 이유로 정부에 분노를 느끼는게 아니야. 다들 알고있어. 우리는 M이라는 사실. 심지어 자부심도 가지고있지. 한국의 미래를 보장할거란, 그런 자부심.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분노하는건 우리가 낳은 아기들을 조금의 자비도 없이 빼앗아버리는 잔인한 정부 그 자체야."
"...M들도 우리만큼이나 힘들었네요. 그동안." "응. 나 이제 확신할 수 있겠다. 너희가 우리 M들을 구해줄 수 있을거라고. 아니, 그토록 바라던 예쁜 세상으로 함께 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줄거라고. 난 너희에게서 '진실'을 보았으니까." 성규의 눈가가 빨갛게 부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굳은 결심을 보여주려는 탓이었을까.
어느샌가 우현도 성규의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런 우현에게 동우가 살짝 눈치를 주었다. "그... 우현이형은 어때요?"
"나야 당연히 찬성이지. 너네 완전 감동이다." "에... 무슨... 성규형 따라서 그러는거죠?" "응. 근데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맹목적인건 아니라고. 난 엄마한테 항상이 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항상 엄마와 같아야지. 안그래?" 참 논리적이고 잘났네요. 호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동우가 말을 꺼냈다.
"지금은 좀 힘들지만 언젠가는 말해줄게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형들보다 힘들었다고 하지는 않을게요. 형들에겐 형들의 일이 가장 힘들었고 저한텐 제 일이 가장 슬펐으니까요. 하지만 딱 하나는 분명해요. 모든게 정부의 책임이라는 거 말이에요. 정부의 독재와 횡포를 막아야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그래-" "우리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분노와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켜요. 함께 가 주실거죠?" "당연하지." "나도!" "..." 모두의 시선이 명수에게로 돌아갔다. 집중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깜박이던 눈이 그 시선들을 외면한다.
"김명수. 넌?"
"... 난 아직 잘 모르겠어. 믿지도 않고 믿고싶지도 않고 그래." "넌 정말..." "근데 엄마가 그런식으로 나오니까, 혼란스럽다." 뒷머리를 마구 흩트리는 명수. 성규는 알 수 있었다. 명수는 정말로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을.
"...성규형은 정부에게 아기를 뺏겼고, 호원이는 동료들을 뺏겼어요. 그리고 전,"
"..." "가족을 뺏겼고요. 제 눈앞에서요." 이게 다 정부때문이 아닌가요. 호소하는 듯 간절한 동우의 말에 오히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명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가족? 난 그런거 키우는 취미가 없어서 말이야. 공감이 안되네."
괜히 박사와 창민, 성열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아득하게 공중으로 퍼지는 성열의 환영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명수가 멈췄다. 남들이 보기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명수의 눈에는 하얗게 웃고있는 성열이 보였다. 상황에 맞지 않게 히죽거리며 웃었다. 성열이 보이는게 좋아서.
"애인이라면 모를까."
명수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성규의 눈에도 흐릿하게 성열의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명수가 해이해진 틈을 타, 설득해보려고 일어선 성규. 그러나. "가족을 잃는다는건 없다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슬픈겁니다. 하지만 애인을 잃는건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또 끔찍하게도 슬픈거죠.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가족과 애인의 빈자리는. 괜히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시비걸지 마시죠."
그보다 호원이 빨랐다. 뒤늦게 호원의 입을 막아보는 성규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입을 다문 명수가 속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지켜주지 못했다.... 애인을 지켜주지 못했다- 라..."
명수의 풀린 눈이 호원을 응시했다. 아니, 허공을 떠도는 성열의 환영을 응시했다.
"그래 지켜주지 못했지... 평생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지만 허무하게 뺏기고 말았지..."
"..." "어? 나도 뺏긴게 있네. 동우씨 우리 하이파이브나 한번 칠래요?" 비틀거리며 동우에게 다가간 명수가 동우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호원의 눈에 쌍심지가 섰다.
"뭐하는 짓입니까?"
동우의 손을 잡은채로 고개를 돌려 호원과 마주치는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날카로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주제에, 어디서 사랑을 운운하냐."
"무시하지 마십시오." "닥쳐. 너가 정말 애인을 지켜주지 못해서 떠나보내기라도 해봤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동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명수가 그대로 호원의 멱살을 올려붙였다. 호원이 피식거리며 비린 웃음을 흘렸다.
"그럼 김명수씨는 그렇게 떠나보낸 애인이 있나보죠?"
툭- 무언가 핀트가 엇나간 듯. 명수의 손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 씨발 이성열."
명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라 호원이 느긋하게 걸어나갔다.
"성규형. 저 혼내지 마요. 저가 벌인 일이니까 알아서 해결하고 올게요."
"..." "믿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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