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도 켜지지 않은 푸르스름한 연습장에 홀로 앉아 손끝으로 물을 튕기던 그의 손가락이 이내 멈췄다. 마지막 올림픽이 될지도 모르는 1,500m 경기가
다시금 머리속에 떠오르며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종목이 아닌 경기에 4위를 한 건 훌륭한 성적이었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기운 빠지게 했다.
"차갑다..."
오랜 시간을 늘 함께 한 물인데..손끝에 닿는 느낌이 서늘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순간들이 눈앞으로 스쳐지나가며 그의 머리속을 온통 헤집어놓는다. 힘든 순간들..기뻤던 순간들..아팠던 순간들..행복했던 순간들.......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한곳만 보며 달려왔는데..모든 경기가 끝난 지금 그에게 남은 건 허탈감 뿐이다.
툭-
갑작스럽게 눈에서 떨어져내린 눈물 방울이 물에 맞닿아 사라지는 걸 빤히 보던 그의 입술에서 흡..하는 소리와 함께 꾸역 꾸역 삼키려던 울음이 새어나왔다.
"Park...?"
어두운 연습장에 홀로 앉아 숨죽여 눈물을 삼키고 있는 한 남자.
멀리서도 보이는 떨리는 어깨.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던 그의 단단한 등이 오늘만은 한없이 작게 보인다. 소리 죽여 그에게 천천히 다가서자 멀리서는 듣지 못한 그의 눈물이...아픔이 들려왔다.
그의 코치에게 물어 물어 겨우 그를 찾아냈는데..그는 여기서 혼자 울고 있다.
이를 어쩌나..다가가서 그를 위로해줘야 하나..아니면 이대로 모른척을 해줘야 하나..쑨양은 그대로 멈춰서서 가늘게 떨리는 그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아...사내대장부가..! 쪽팔리게 눈물은..후아.."
겨우 겨우 잦아든 눈물을 삼키며 태환은 가슴을 넓게 펴 심호흡을 해봤다. 그래도 시원하게 울고 나니 가슴 한켠이 뻥-뚫리는 기분이다.
아무도 못봤으니 괜찮겠지. 이 눈물을 마지막으로 이제 다시는 울지 말자. 다부지게 입술을 앙 다물며 그는 그렇게 힘을 내어 가슴을 팡팡 쳐댔다.
풍덩-
갑작스런 소리에 흠칫 놀란 태환이 가슴을 쳐대던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푸르스름하다 못해 까만 물살이 넘실거리며 누군가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하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자신의 앞에서 물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사람.
아...
"쑨..양..?"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는 태환을 향해 씨-익 웃음을 지어주는 그.
태환의 발치까지 다가온 그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하얗고 긴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키는데...
아차! 나 울었지?
조금만 울어도 퉁퉁부어서 티가 많이 나는데 붉어진 눈을 그에게 들킨 모양이다.
"Park..."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이름을 부르는 순간 태환은 급하게 양손 가득히 물을 떠올려 자신의 얼굴에 냅다 뿌려버렸다.
"아앗!! 차거 차거!!"
상의에 그대로 흘러버려 축축해진 티를 펄럭이며 당황하는 태환을 보던 그가 킥킥-웃어버린다.
울고 있었던 건 이미 알고 있는데 애써 감추려 허둥지둥 하는 태환의 행동이 귀엽기만 하다.
"괜찮아요?"
서툰 영어로 물어오는 그에게 손으로 오케이~오케이~표시를 하며 이미 젖어버린 상의를 위로 끌어올려 벗어버렸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이런 바보같은 방법이라니. 태환은 아직까지도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쑨양을 힐끔 바라보고는 티셔츠를 꾹- 짜냈다.
"한참 찾았어요."
"에..?"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그의 말에 태환은 동그란 두눈만 꿈벅거렸다.
경기도 모두 끝났고 이제 서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만 남겨둔 이 시점에 그는 왜 나를 찾아 다닌 것일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누군가를 찾아다니기엔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인데...
태환은 그의 다음말을 기다리며 그대로 시선을 맞췄다.
"같이 수영해요. 힘든 연습 말고..그냥 노는거. 같이 해요."
자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는지 여전히 눈만 꿈벅거리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사랑스럽다.
그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물에 담겨진 그의 발을 끌어당겨 그대로 물속으로 입수시켰다. 커다란 손에 담겨진 작은 발. 내 발에 비하면 정말 작디 작은 발.
그는 이 발로 오랜 시간을 수영하면서 보이지 않는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그런 그가 존경스러웠다. 남들보다 작은 몸으로 몇배를 노력해 올라간 정상의 자리.
난 늘 그가 존경스럽고..그래서 닮고 싶었다.
"어푸-학! 켁---"
갑작스런 입수에 잔뜩 물을 먹었는지 콜록 거리며 그가 나를 황당해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재밌자고 한건데 너무 갑작스러웠나..? 화난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양손 가득히 퍼담아진 물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해보자는 거죠? 콜!!!!!!"
알아듣기 힘든 한국말로 뭐라 뭐라 하더니 콜?! 쿨?! 읭??
확실한 건 언제 울었냐는 듯 그의 얼굴에 피어난 장난끼 가득한 웃음에 좋은 뜻이라고만 느껴질뿐이다.
그가 외친 콜인지 쿨인지 그 단어를 마지막으로 쑨양의 얼굴에 엄청난 물 세례가 쏟아졌다.
쑨양도 이에 질세라 커다란 손 가득히 물을 퍼담아 그에게 뿌리며 싸움을 시작했다.
걷기 힘든 물속에서 이리 저리 몸을 움직여가며 두 남자의 살벌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물싸움이 계속 되었다.
서로 장난스럽게 어깨를 밀며 넘어뜨리기도 했고 레일을 밟고 올라서 서로의 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들 마냥 한참을 깔깔거리며 놀던 태환이 체력이 다했는지 쑨양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풀 밖으로 몸을 이끌었다.
"하아..하아...아이고 죽겠네."
"...?..."
거친 숨을 내쉬며 풀 밖에 걸터앉은 태환의 입에서 나온 말이 궁금한지 그를 빤히 바라보는 쑨양에게 태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힘들다고요~"
짧게 영어로 얘기해주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옆에 올라와 앉는다.
얼마만에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 놀아본 것일까. 친구들과도 이렇게 놀아본 적이 없는데 쑨양 선수와 물싸움이라니...이거 기자가 봤으면 특종감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고마운 일이었다. 좀전까지 질질 짜던 나를 웃게 해줬으니.
태환은 옆에 앉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땡큐-라고 인사를 건넸고 그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태환."
두 남자가 흐트러놓은 풀장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갈 때 쯤 늘 Park 이라 부르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는 안정적인 발음. 생각지도 못한 이름 공격에 태환의 입에서 오? 라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 부르는거 처음이예요. 발음 좋네."
"한번은 불러보고 싶었어요. 이름으로."
장난기 가득하던 웃음은 사라지고 그는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태환을 바라보고 있다.
"늘 동경했어요. 당신이 내 우상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이제는 나보다 더 앞서 나가 아시아 수영계를 이끌어갈 그가 날 아직 우상이라 얘기해주다니 고마운 일이다. 괜시레 그의 말에 태환은 코끝이 시큰해져왔다.
"이제 당신이 다른 누군가의 우상이 되어줘요. 그리고...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태환은 다부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쑨양은 한참을 말없이 태환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마주 잡았다.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온기..... 그의 온도가 내게로 스며든다.
"아!"
쑨양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놓인 의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위에 놓인 옷에서 뭔가를 뒤적 뒤적 하더니 커다란 손안에 뭔가를 감춰들고 다시 태환에게로 돌아왔다.
퐁-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간 쑨양은 태환을 마주보고 그의 앞에 섰다.
쑨양의 손안에 감춰진 물건도 궁금했지만 꼼짝없이 그의 시선에 가둬진 이 상황이 뻘쭘해 태환은 머리를 긁적여보았다.
뭔 사내끼리 이런 끈적한 눈빛을.
말없이 바라만보는 그의 눈을 피해 어디다가 시선을 둬야 할지 두리번거리던 그의 머리위로 쑨양이 손이 움직였고 차가운 무언가가 태환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저녁 달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무언가가.
"아......"
"선물이예요."
나지막이 건네오는 그의 말에 살며시 눈을 마주치고는 가슴께에 흔들거리던 팬던트를 집어 들었다.
동전크기의 금메달 모양의 동그란 팬던트.
그 뒤에 'P' 라는 이니셜까지 적혀있다.
"태환.."
"......."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금메달리스트예요. 힘내요."
사랑고백보다 더 짜릿한 그의 감동적인 멘트에 태환의 두 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진다.
더 이상은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이런 선물을 받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감정이 메마른 사람일거라고 마음속으로 우기며
태환은 뜨거운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힘겨운 울음을 토하는 그의 입술이 쑨양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온다.
늘 나보다 어른스러운...그래서 강해보였던 그가 이렇게 한없이 약하게 느껴지다니...
쑨양은 그를 안아주는 대신 그의 목에 걸린 팬던트를 집어 들어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의 까맣고 동그란 눈을 마주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그의 말과 동시에 태환은 팔을 들어 그의 단단한 목을 감싸안고 고마움과 서러움이 담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울음이..까만 눈동자에 그렁 그렁 매달린 눈물이..
이따금씩 내 어깨에 닿아 오는 그의 숨결이 너무 뜨거워서 나조차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쑨양은..그리고 태환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밤을 오래도록 기억할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이 힘이 되어 그들은 더욱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것이다.
태환의 눈물이 마를때까지 쑨양은 한없이 그를 안고 다정한 손길로 토닥였다. 지금 그의 마음을 모두 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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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양-"
연습용 수영장에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응시했다.
손목에 시계를 가리키며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외치는 코치님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난 밤 그가 앉아서 울던 자리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꿈같은 그 시간이 현실이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아쉬움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도 이미 떠났겠지.
긴 다리를 구부려 쪼그리고 앉아 그가 있던 자리를 살며시 쓰다듬어본다.
이미 그의 온기는 사라졌지만..나의 기억은 남아있다.
"쑨양-!"
다시 그를 부르는 소리에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런던에서의 잊지 못할 그와의 추억의 장소를 뒤로 하며 그는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항가기 전에 점심 먹고 출발하자. 너 좋아하는 비빔밥 어때?"
코치님이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그가 좋아하는 메뉴를 이야기한다.
그러죠 뭐- 라고 대답을 하려던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콜..!" 이라고 대답했다. 콜? 뭔가 재밌는 말이다. 긴 말 대신 이 한글자면 뜻이 통하는 것이니.
그게 무슨 뜻이냐며 묻는 코치님에게 피식-웃으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알려줄 수 없다.
밝은 목소리로 붉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소리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나만 알고 싶다.
남들에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콜'을 반복해 웅얼거리던 그는 연습장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직전 다시 뒤돌아 그곳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태환...어제 그 밤을...그리고 나를..잊지 마세요.]
****예전에 적어놨던 글인데 정회원이 이제야 되어서 슬쩍 올려봅니다. 다른분들에 비하면 훌륭한 글은 아니지만 ㅠㅠ 재밌게 읽어주세요...................
막상 올리고보니 자신이....자신이 없네요....처음 올려서 뭔가 어설픕니다..넓고 깊은 이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