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종인아, 배고픈데 뭐라도 좀 먹고 타자…. 응?"
경수의 애절한 목소리가 열댓번이나 더 반복되고 나서야 종인이 슬쩍 경수를 내려다보았다. 경수는 아틀란티스를 탄 뒤로 뾰루지는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인지 볼을 가리지도 않은 채 당당히 종인을 마주했다. 그 뾰루지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종인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점심 때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그럼 빨리 먹자! 뭐 먹지? 밥은 내가 살게."
메뉴를 고르는 시간조차 아까운 건지 종인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돈까스 집으로 경수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결국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마구잡이로 끌려온 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별들아….
"무슨 돈까스 먹을래?"
그냥 너랑 똑같은 걸로 시켜. 지친 경수가 무릎을 두드리며 자리에 앉았다. 아, 나도 이제 진짜 늙었나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을 하러가는 종인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젊은 게 좋은거야, 하는 아련한 생각을 한다. 아. 왜 눈물이 흐르지…?
잠시 후 주문서와 영수증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종인이 경수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힘들어? 경수의 표정이 안 좋은 걸 이제야 눈치챘는지 조금 걱정하는 듯하는 눈치였다.
"아니. 하나두 안 힘들어. 재밌다. 하하."
"그래? 다행이다. 우리 다음엔 바이킹 타자."
"그, 그래…!"
그래. 내가 먼저 같이 오고 싶어서 예매고 뭐고 다 해놓고 분위기 초 치면 안 되지!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눈물이 흐르지?
아니, 설마설마했다. 정말 먹자마자 소화시킬 새도 없이 바이킹을 탈 줄이야.
"우, 욱…!"
"괜찮아? 아, 어떡해. 괜히 타자고 해서."
바이킹 줄을 서는 내내 얼굴이 새하얗더니만 결국 기구가 멈추자마자 사람들을 밀치고 뛰어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종인이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구역질을 하는 경수가 걱정되는지 종인이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 좀 열어봐!"
"으, 아니야. 더러워. 그냥 밖에 있어."
"빨리 열어. 나 화나기 전에."
응. 경수는 바로 화장실 칸의 문을 열었다. 화난 표정의 종인이 바로 칸으로 들어왔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곤 경수의 등을 토닥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속을 게워낸 경수에게 종인이 휴지를 내밀었다. 입 닦아. 종인이 건낸 휴지로 입을 닦은 경수가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너가 뭘 미안해. 내가 자꾸 놀이기구 타자고 하고…. 이것 봐. 열 나잖아. 집 갈까?"
경수는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는 종인의 손을 치우고 자신의 손을 대보았다. 조금 뜨겁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괜찮아. 좀만 더 타다 가자. 이제 뭐 타지."
얼굴도 새빨개져서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면서 괜찮다고 하는 경수를 보는 종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경수는 그런 종인을 무시하고 화장실 칸 안에서 나왔다. 세면대에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추는 종인의 표정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뭘 괜찮아. 이렇게 열 나고 토까지 하는데. 얼른 집 가는 길에 약 사서 가자."
"아까워서 어떻게 가. 너 더 놀고 싶잖아. 안 돼. 좀만 더 타다 가, 응?"
"싫어."
"그래, 그럼 나 혼자 막 다닐거야. 따로 다니던가 그럼."
씨발, 진짜. 알았어. 대신 내가 정해주는 거 딱 두 개만 더 타고 집으로 가.
결국 둘은 합의를 봤고, 그 두 개의 놀이기구 중 하나는…. 회전목마였다. 이게 뭐라고 다들 이 긴 줄을 서가며 타는건지. 회전목마에 탑승하기 직전까지도 종인은 궁시렁 궁시렁 대며 혼잣말을 해댔다. 돈 주고 이걸 왜 타는 거야?
"자, 이제 출발합니다~"
앙증맞게 볼을 한껏 부풀리고 온갖 귀여운 척은 다 해대며 셀카를 찍는 상큼이들 사이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앉아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 하나와 몹시 화가 났는지 사람 하나 팰 것만 같이 온 인상을 찌푸린 사내의 모습은 가히 언밸런스했다. 회전목마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은 행여나 종인과 눈을 마주칠까 싶어 부러 눈을 피했다. 느린 속도로 빙글빙글 몇 바퀴를 돌던 목마가 드디어 멈췄고 내려온 종인이 경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마지막 하나 타고 바로 집 가는거야.
종인이 경수를 데리고 온 곳은 관람차였다. 놀이공원 내에 워낙 커플이 많았으며, 남자 둘끼리 온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쯤은 이미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이야. 종인과 경수의 앞앞 줄 일가족을 제외하고는 죄다 커플들뿐이었다. 하기야 재미도 더럽게 없는 관람차를 타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겠지.
종인은 제 딴에는 아픈 경수를 위해 배려한답시고 최대한 느리고 재미없는 그런 류의 기구들만을 선발한 것이었다. 그런 종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수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하필 관람차야! 커플들 사이에 낑겨서 이런 어색한 분위기로 관람차에 탑승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김종인은 또 뭐가 그리 화가 나는건지 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사실 종인은 어색해서 그랬다-.
그렇게 십 여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종인과 경수의 차례였다. 둘을 들여보내는 알바생의 눈초리에서 왠지 의문스러움을 느꼈지만 둘은 본 체도 하지 않고 기구에 탑승했다. 종인과 경수는 아무 말 없이 맞은 편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밖의 광경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곧 아주 느린 속도로 관람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아, 이 지긋지긋한 침묵.
"……."
종인이 유리창 밖을 쳐다보던 눈을 흘깃 돌려 몰래 경수를 쳐다봤다. 아직도 아픈지 볼은 발그레해져선 밖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 아직도 많이 아프냐고 물어볼까. 그게 좋겠지…? 침을 꿀꺽 삼킨 종인이 경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떼려고 한 순간이었다.
"조, 종인아."
"……."
경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종인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멀뚱히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종인의 옆으로 와 종인의 옆에 붙어 앉았다.
뭐, 뭐야. 왜, 왜 온거야. 당황한 종인은 혼자 머릿 속으로 이게 무슨 상황일지에 대한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나한테 뭘 하려고? 대체 왜? 이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뻣뻣하게 얼어붙은 종인의 손을 경수가 갑자기 덥석 붙잡았다.
"뭐, 뭐? 뭐야."
"고맙다고."
나 걱정해 준 거잖아. 그렇게 놀이기구 타는 거 좋아하면서 나 아프니까 집에 가자고 그러면서 화내는 거잖아, 지금. 경수의 나긋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긴장하고 있던 종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방언이 터지듯 말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병신아.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내가 피곤해서 그런거야. 내일 학교도 가야 되고, 어. 또, 그리고 지금 왠만한 거는 다 타서 더 이상 탈 것도 없고."
아, 그런가? 경수는 순간 민망해 졌는지 잡은 손을 떼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분위기는 급격히 다운됐다. 존나 느려터진 관람차가 드디어 끝나고 종인은 괜히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그렇지 내 성격에 너 걱정해서 그랬다는 낯간지런 소릴 어케하냐고! 저렇게 말하면 그냥 알아 듣지…. 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근데 또 손 잡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은 뛰었지? 내가 미쳤나? 요즘 귀찮아서 여자애들 안 만났더니 고새 내 취향이 변한건가? 아아. 말도 안돼. 설마? 저 아저씨는-경수를 몰래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눈을 피해버렸다.- 나보다 8살이나 나이가 많아…. 아, 아냐! 너무 높은 데에 올라가서 무서워서 그랬던 거겠지. 아, 맞아. 나 고소공포증 있었어. 맞아, 맞아.
종인은 끝까지 안쓰러운 자기 위안을 하며 놀이공원을 벗어났다. 안녕, 빠이, 사요나라! 나중에 또 올게!
* * *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경수가 끙끙 앓았다. 버스에서 한숨 자고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중간에 약국에 들려서 약을 먹었는데도 열은 내릴 줄을 몰랐다. 지하철에서 피곤했는지 입까지 벌리고 잠든 경수를 보고 종인은 사진을 찍어둘까 했다가 포기했다. 아픈 사람 두고 뭐 하는 짓인지 양심에 조금 찔렸기 때문이었다. 갈 곳 잃은 경수의 머리가 흔들흔들 자꾸만 흔들렸다. 저러다 목 꺾이겠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기대와는 달리 종인이는 아무런 조치-어깨에 기대게 해 준다던가 하는 그런…-를 취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한 번 쓰윽 쳐다보았다. 아직도 얼굴이 새빨갰다. 조용히 귀기울여 보면 색색 대며 숨을 뱉는 것이 다 들렸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마를 만져보니까 확실히 아까보단 열이 조금 내린거 같았다. 이러니까 애 키우는 엄마 마음 된 거 같다. 자기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우스웠는지 조그맣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경수를 쳐다봤다. 볼에 난 뾰루지가 '안녕~' 하고 제게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왠지 그 자태에 홀려 만지려고 손가락을 올렸다가 흠칫했다. 또 깨물면 어떡해, 시발. 전에도 술 취해서 종인의 손가락을 잘려나갈 정도로 세게 깨물었던 전적이 있었기에 바로 손을 떼버린 종인이 앞으로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어찌저찌해서 겨우 도착했다. 이제 십 분 정도만 걸으면 집인데, 경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헤롱대고 있었다. 많이 힘든지 걷는 속도도 현저하게 느려져 마치 좀비가 걷는 것 같았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걸음을 맞춰주느라 느리게 걸었다. 이래가지고는 밤 다 돼야 집 도착하겠네. 답답해진 종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경수를 쳐다봤다.
"많이 힘들어?"
"아니. 걸을 만 해…."
"웃기네. 업혀."
종인이 쪼그려 앉아 자신의 등을 툭툭 쳤다. 뭐? 놀란 경수가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얼마나 무거운데. 미쳤어?
"빨랑 업혀라."
"야, 너 힘들어서 쓰러져. 나 보기엔 가벼워 보여도 되게 무거워…. 근육이 좀 많거든."
"근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안 업히면 들쳐메고 갈거야. 좋은 말로 업히라고 할 때 업혀."
사실 경수도 몇 발자국만 더 걷다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머리도 너무 아팠고 온 몸에 힘도 없었다. 자존심에 스크래치는 가겠지만 지금 힘들어 쓰러질 것만 같은데 뭘 어째. 결국 종인의 등짝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무, 무겁지…."
"어. 존나. 강철돼지 같애."
"아, 내릴래. 빨리 멈춰!"
퍽! 종인이 경수의 허벅지를 내리치자 경수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해졌다.
"좋은 말로 업히라고 할 때 업히랬지."
무…, 무서워! 경수는 조금만 더 반항했다간 정말 환자고 뭐고 막 팰 것만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있었으면 난 정말 쪽팔려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장가는 다 갔네, 다 갔어.
분명 십 분 거리였는데 삼십 분은 걸린 것 같았다. 경수는 한 대 맞고서는 잠이 들었는지 온 몸에 힘을 쫙 뺀 탓에 더욱 무거워졌다. 괜히 업어준다고 미친 소리를 한 걸까, 사실은 오는 내내 조금 후회도 했다. 땀에 절어 뻘뻘대며 도착한 집 앞에서 도어락을 두 번은 틀리고 겨우 들어갔다. 신발을 대충 벗고 헥헥대며 경수의 방 문을 열고 경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후, 종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 옆 바닥에 철푸덕 앉아 양말을 벗어 던졌다. 씨발! 존나 힘들어. 새근새근 잘만 쳐 자는 얄미운 경수의 얼굴을 한 번 노려보고 일어나 방을 나와버렸다. 대체 누구 좋자고 간 놀이공원인지. 종인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씻어야 되는데…. 머릿 속으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에이, 내일 씻지 뭐. 내일…. 지금은 너무 피곤했고 충분히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