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실은 눈 먼 연기 하면 타고난 사람인데 내 이야기 좀 들어 보실라우?
어릴 적에는 광대패를 처음 보고는 그 장단에 눈이 멀고
광대가 되어서는 어느 광대 놈과 짝 맞춰 노는 것에 눈이 멀고
그러다가 얼떨결에 궁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눈이 멀고,
그렇게 눈이 멀어서는 볼 것을 못 보고 어느 잡 놈이 그 놈 마음 훔쳐 가는 것을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못 보고...
- 다시 태어나면 왕으로도 싫다. 양반도 싫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될 것이다.
- 이 놈.. 목숨 놓고 광대 짓 하다가 죽게 생겼으면서, 또 광대냐!
- 그러는 네 년은 다시 태어나면 무어가 되고프냐?
- 나야 두말 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 영화 '왕의 남자' 中
날이 제법 따스했다. 햇발이 낭창하게 내리쬐는 군정 아래 연못에는, 투명하리 밝은 비늘을 가진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학연의 곤룡포가 땅에 스치듯 흘러간다. 그 끝자락이, 가을 단풍잎 마냥 참으로 붉었다.
바람결에 자유로이 흩날리는 학연의 머리칼이 서서히 멎을 즈음, 그의 입술이 찬찬히 열렸다.
" 김 내관. "
" 예. "
" 연못 가장자리에, 꽃을 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 꽃.. 말씀이십니까? "
" 아무것도 없으니, 무언가 쓸쓸하지 않습니까. "
태양의 말에 김 내관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주인은, 이렇듯 아름다움을 중요시 여기곤 했다.
한참을 땅만 바라보고 있던 김 내관이, 불현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뜨거이 내리쬐는 태양이, 아직도 머리맡에 있었다.
" 태양. "
" 왜 그러십니까? "
" ... 대신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 무엇 때문에? "
" ... 그것이. "
말을 주저하는 김 내관에 학연이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아-. 그것 때문인가.
" 무려 대신들께서 정사는 저 뒤로 미루고, 한낱 어린 군주의 정실 부인 문제에 대해 걱정을 해 주니 참으로 고맙기 그지 없소. "
" ... "
" 내, 아직 부인을 들이고 싶지는 않은데. 김 내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
" ... "
" 한 여인의 운명을, 고작 사내의 씨받이로 전락 시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지. "
김 내관에게서 살짝, 한숨이 쏟아졌다.
정실은 고사하고 하물며 후궁 한 첩도 들이지 않은 학연의 고집은 실로 대단했다.
그런 학연의 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조정 대신들은, 대를 잇기 위한 정실이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냐며 들으란 듯이 떠벌리곤 했다.
아무리 태양의 권력이 세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과 더 이상 마찰을 빚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걱정스런 표정의 신하와는 달리, 학연은 아이 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허리의 고통이 급작스레 찾아들었다.
황금실로 수 놓아진 이불보를 걷고 몸을 일으킨 택운이, 윽-. 하며 다시 무너졌다.
눈가에 살짝 물이 맺힐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 내 이름은 이홍빈이고, 호는 청하이다. '
쓰러지다싶이 누운 택운의 귓가에 간질이듯 속삭인 홍빈이라는 사내는, 역시나 곁에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내와 몸을 섞었다.
그런데 왜, 몸의 고통보다.. 텅 빈 옆 자리에 이 마음이 더 공허 해 지는 것인가.
자신을 느리게 훑던 짙은 시선이 자꾸만 뇌리에 선명히 새겨진다.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자신의 생각에 택운이 고개를 거세게 도리질쳤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홍빈의 말을 거역 할 수 없다는 것.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문득,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 * *
" 인사 드리옵니다, 태양."
" .. 오, 청하. "
" 햇발이 아주, 따사롭습니다. "
" 그렇군. "
" 어젯 밤, 저의 궁 정원에 꽃 한 송이를 들였습니다. "
" 꽃 말인가? "
홍빈의 입 언저리에 볼우물이 패였다.
꽃은 꽃인데.. 온통 새하얗고, 두 발이 달리고, 바알간 입술을 가진 꽃이라고 하면 아시려나.
" 아주 아름답고, 향기가 짙은 꽃이옵니다. "
" 그런가..? 내, 일정이 된다면 한 번 구경을 가 봐도 되겠는가? "
마침 나도 꽃을 심고 싶었는데 말이지.
" 예, 태양. "
고개를 숙였다 올린 홍빈과, 그를 바라보던 학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키었다.
아주, 미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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