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정국이의 심부름이 심해질수록 태형이의 성질도 점점 사나워졌으면 좋겠다.
정국이만 보면 으르렁거리기 바쁘고,
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먼저 도망쳐 피해버리고,
핸드폰 연락도 종종 피하는건지 뭔지 잘 되지 않았으면.
정국이는 연습 시합에 들어가기 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놨으면.
그리고 시합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면서 소리를 지르고,
운동장의 흙먼지가 일어나고,
여러 명의 발이 부산하게 모래를 긁어대며 축구시합을 이어갔으면.
패스받은 공을 받은 정국이가 빠르게 골대를 향해 달려갔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불쑥 들어온 발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 넘어졌으면.
바로 다시 일어나려다 욱신거리는 발목에 주저앉았으면 좋겠다.
시합이 잠깐 멈췄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파스 잘 바르고, 내일 병원도 한 번 가보고.
네.
감독의 말에 정국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면.
부축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혼자 탈의실에 남아 땀에 젖어 온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를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으면.
급한 숨을 뒤늦게 뱉어내면서 부어오른 제 발목을 내려보며 탈의실 안에 있던 스프레이 파스를 뿌렸으면.
늑대 하나 괴롭히고 벌 받았나.
허탈하게 웃으며 정국이는 비틀비틀 수건을 챙겨들고 샤워실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욱씬거리는 발목때문에 평소보다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겨우 몸에 묻었던 흙먼지와 흘러내렸던 땀을 닦아내었으면.
그리고 옷을 챙기고 나서 그제야 겨우 시합이 끝나 우르르 들어오는 축구부의 부원들을 반겼으면 좋겠다.
저를 주장이라고 부르면서 이겼다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에 키득이면서 같이 잘했다고 웃었으면.
몇몇은 정국이의 발목을 걱정하고, 정국이는 먼저 가보겠다면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인사할 사람들에게 겨우 인사를 하고 부축해주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는 부원들의 제안을 거절했으면.
비척비척 혼자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집에 가봤자 부모님은 타지로 장기 출장 중이시니, 아무도 없을 것이 뻔해 귀찮게 약국을 들려야 하나 생각했으면.
그러다가 기울여지는 해가 조금씩 낮을 밀어내고 저녁의 노을로 하늘을 채울 즈음에 태형이가 일하고 있는 유치원 근처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이미 끝난지 오래인지 적막이 흐르는 유치원 내부를 슬쩍 바라봤다가 그대로 지나갔으면.
왜인지 지금 절뚝거리면서 볼품없이 걷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여전히 걸음을 옮기며 제 집으로 향했으면 좋겠다.
가끔 심하게 욱씬거리며 올라오는 발목의 아픔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신경질을 내면서, 손으로 이마를 훔쳐 식은땀을 닦아내었으면.
태형이는 일이 끝나고 핸드폰을 켜 그동안 쌓인 연락들을 살펴봤으면 좋겠다.
몇 없는 연락중에 건방진 고딩이라고 저장된 이름의 문자는 딱 한 통.
[일어났어요?]
뭐야, 오늘은 딱히 시킬 일이 없었나보지?
태형이는 씩 웃으며 오늘은 늦게까지 남은 아이들도 없어서 일찍 퇴근하게 된터라 일이 잘 풀리는 날이라고 중얼거렸으면.
그리고 얼른 퇴근 준비를 끝내고 유치원 밖을 나갔으면 좋겠다.
주황빛이 옅게 내려앉아 밤과 저녁의 가운데에 머물러있는 하늘을 올려봤다가 고개를 돌렸으면.
저 멀리에
발목을 절뚝이며 걸어가는 정국이의 뒷모습을 발견했으면.
다쳤나?
미간을 찡그리며 빤히 그 뒷모습을 보던 태형이가 날 괴롭혀서 벌 받은거라면서 투덜거렸으면.
그러면서도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해 걸어갔으면.
왜인지 절뚝거리는 저 모습에 말을 걸거나 계속 지켜보면서 걸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반대편으로 길게 돌아 집으로 향했으면 좋겠다.
정국아, 너는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은 뒤 부어오른 발목을 빤히 내려봤으면 좋겠다.
계속 알림음이 울려 널 걱정하는 축구부의 연락을 받으면서도,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이 없는 것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정국이 식탁 위에, 편의점 봉투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집 안을 울리는 티비소리조차 정국이가 있는 공간을 모두 채워주지 못 했으면.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오늘따라 크게 다가와서 정국이는 그대로 소파에 길게 누워버렸으면.
그때 누군가가
쿵쿵쿵
문을 두드렸으면.
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의아한 얼굴을 한 정국이가 택배라면 알아서 앞에 두고 가겠지 싶어 무시하려는데,
끊임없이 문이 두드려졌으면 좋겠다.
결국 짜증이 난 정국이가 벌떡 일어나 여전히 절뚝이는 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갔으면.
문을 벌컥 열었을 때 하얀 봉투하나가 바스락거리며 정국이의 얼굴에 닿아왔으면.
... 뭐야?
뭐긴. 약이지.
어, 늑대씨.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알았어요. 그럼 형이라 부르지 뭐. 아저씨라 부를 나이는 아니죠?
씨이, 너랑 몇 살 차이 안나거든?
울컥한 태형이가 이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헛기침을 하고 정국이에게 다시 봉투를 내밀었으면 좋겠다.
나 오늘 빵 먹을 기분 아닌데.
빵 아니거든.
어째 귀 끝이 붉어진 태형이가 용케 시선은 계속 마주한 채로 정국이게 아예 봉투를 안겨주었으면.
얼결에 봉투를 받아든 정국이가 삐뚜름하게 서서 벽에 기댄 채로 봉투를 뒤적여서
진통제,
붕대,
연고,
평소 자주 마시던 음료수 등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나 다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퇴근하다가 너 절뚝거리는 거 봤어.
아.
너는 축구부라는 녀석이 네 몸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냐?
그래서 이거 사다준 거예요? 나 다쳐서? 나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였나봐요?
누가 너 좋대? 전혀 안 좋아하거든.
싫어하지도 않고요?
... 싫어한다, 싫어해! 아씨, 역시 괜히 왔어.
울컥한 태형이가 몸을 돌려 자신의 집 현관 문고리를 잡아서 벌컥 열었으면 좋겠다.
그때 정국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으면 좋겠다.
고마워요, 태형이 형.
태형이의 집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으면 좋겠다.
정국이도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봉투를 계속 뒤적이다 음료수를 꺼내 빤히 바라봤으면 좋겠다.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어버렸으면 좋겠다.
아,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냐.
티비소리로 채워지지 않던 그 공간이, 태형이가 남기고 간 그 짧은 대화와 흰 봉투 하나로 그득히 채워졌으면 좋겠다.
태형이가 사다 준 그 음료수 캔은 냉장고 한 켠에 조심히 자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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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자랑 |
귀여운 그림과 글씨 모두 감사합니다. 하트. |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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