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다. 달을 세는 단어가 청량하다. 날씨는 딱 봄과 여름의 중간. 이제 간간이 불어 오는 바람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의 운동장에는 흙먼지가 일었다. 남자애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쟤네들은 왜 저렇게 축구에 미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한 마디 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는 마음은 이미 같이 뛰면서 땀흘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전정국.
“골!!!”
“와아아아아!!! 전정국! 전정국!”
골이다. 정국이가 인사이드 킥으로 멋지게 득점했다. 나는 그와 동시에 소리지르며 먼지 이는 운동장에 뛰어들어갔다. 역시 정국이는 못하는게 없다. 공부면 공부,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 이러니 내가 안좋아하고 배기겠냐고. 미리 준비해뒀던 시원한 얼음물을 정국이에게 건네주었다. 정국아 잘했어. 그 말에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얼굴이 나를 하루 종일 행복하게 만든다. 아, 다음에는 아이스박스 한 박스로 준비해야겠다.
연애코치 #1
w. 카모마일
“점심시간에 어디 있었어? 계속 찾았잖아.”
“운동장에서 축구 구경하고 왔어.”
“너 그런거 안좋아하잖아. 왠일이래?”
“그냥 오늘은 왠지 보고싶더라고.”
“아 그래? 전정국이 뛴건 아니고?”
“알면서 뭘 떠봐. 오늘 정국이가 두 골이나 넣었어. 너도 그걸 봤어야 해. 내가 또 반했잖아.”
소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꽤 유명한 편이다. 공부를 잘해서는 아니고 예뻐서는 더더욱 아니다. 유별난 팬심으로 유명하다. 학교 사람들은 나를 ‘전정국 껌딱지’ 혹은 ‘전정국 광팬’ 이라고 부른다. 물론 내 면전에 대고는 아니고, 뒤에서 그렇게 쑥덕인다.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신경쓰이지는 않는다.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니까. 그 타이틀을 얻게 된 역사는 작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험도 끝났겠다 헬렐레 놀고 있던 시기였다. 그 즈음 학교에서 미니콘서트를 했는데, 거기서 정국이가 부장이자 보컬로 있는 밴드부가 첫 공연을 했다. 그 때 정국이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출력되어 내 귀로 들어오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건 바로 이런거구나, 하는걸 그 때 처음으로 느꼈다. 그 후로 나는 밴드부 매니저를 자청하며 정국이를 지겹도록 쫓아다녔다. 전정국은 알면 알수록 진국이었다. 예의바르고, 착하고, 친절하고, 공부도 잘했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쫓아다녔으면 귀찮아 할만도 한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항상 친절하게 대해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예전에 어떤 아이에게 '전정국이 연예인이었으면 너는 사생팬이나 마찬가지야'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사생팬이란 말은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 반성한 후 넘치는 팬심을 자제하려고 노력해온 덕분에 이제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그냥 가끔씩 불쑥불쑥 나타나는 정도. 아까 운동장에서처럼 말이다. 소희는 그게 더 무섭다며 진저리를 친다. 그래도 그렇게 정성껏 들이댄 덕분에 친한 친구 정도는 되었다. 초등학생 때 보았던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던 선배가 딱 정국이다. 뭐든지 완벽했던 선배. 하지만 그런 완벽한 전정국에게 딱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정말 개나 줘버린 눈치라는거다. 정말 심각하게 눈치가 없다.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을, 아직도 정국이만 모른다.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걸.
“김매니저 오늘은 뭐 없나?”
“뭐. 또 뭔데.”
“아 오늘은 뭐 싸왔냐고. 과일이지? 나 딱 하나만 주면 복 받을텐데.”
“또 그런다. 정국이꺼야. 안 돼.”
“진짜 야박하네.. 맨날 부장만 챙겨주고.”
정호석은 안주면 옆에서 끝까지 투덜댈 것이 뻔해 파인애플 하나를 입에 쑤셔넣어주었다. 과일 가져온건 어떻게 알고. 하여간 대단한 눈치다. 그거 좀 정국이한테 나눠주면 참 공평하고 좋을 텐데. 호석이는 밴드부 차장이자 기타 연주를 맡고 있는데, 연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가끔씩 연습할 때 내가 부라보를 외치며 박수을 뻑뻑 쳐 줄 정도다. 정호석은 내가 밴드부에 매니저로 들어가게 해 준 가장 큰 조력자이자 소희만큼 친한 친구이다. 물론 호석이는 특유의 친화력과 사교성 덕분에 나 말고도 모두와 친하긴 하다. 그건 참 부러운 친구다.
“근데 너도 참 해바라기다. 진짜 전정국 와이프도 이렇게는 못해줄걸. 눈치는 코빼기도 없는 녀석. 우리 여주 애잔해서 어떡하냐.”
“조용히 해라. 정국이 와이프 내가 하면 되지.”
“얼씨구, 그건 아니지. 정국이는 잘못한 거 없는데 왜 그러냐."
"...이게 진짜."
"언제까지 그렇게 우렁각시 노릇 해줄건데. 걔는 니가 지 좋아하는거 알지도 못하잖아. 니가 잘해주는 이유에 그냥 아예 관심이 없다고. 그렇게 퍼주다가 빈 깡통돼서 버려지면 어떡하려고. ”
“...”
“그냥 고백해봐. 정국이는 다 받아주잖아.”
“..그러니까 못하는거 너도 알잖아.”
더 이상 듣기 싫어 정호석의 입을 방울토마토로 막아버렸다. 하지만 다 맞는 말이었고,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국이는 나를 그저 좋은 친구, 일 잘 하는 밴드부 매니저 그 정도로 보았고 내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내가 저를 좋아한다는것을 졸업할 때 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달라붙고 티를 내도 모른다. 신이 정국이를 만들 때 실수로 눈치를 빠뜨리신게 틀림 없다. 그럼에도 내가 시원하게 고백할 수 없는 까닭은, 지금 이 관계가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우습지만 그렇다. 전정국은 지금까지 누구든지 고백하면 다 받아줬다. 옆에서 보면 확실히 그게 어장은 아닌데, 애가 바보 같이 착해서 그런건지 뭔지 거절을 안한다. 정국이는 당연히 인기가 많았고, 여자애들은 명단에 이름 적고 차례를 기다리는 것 마냥 한 명씩 순서대로 정국이와 사귀다 헤어지곤 했다. 참 웃긴 시추에이션이지만 웃을 수가 없다. 전정국에게 여자친구라는 개념은 무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 그저 조금 더 친한 이성친구, 그 뿐일까나. 정국이는 여자친구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문제는 누구에게나 그랬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없다는것을 비참하게 느낀 ‘전정국의 여자친구’ 들은 모두 얼마 안가 못견디고 먼저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명단에 내 이름을 적을 수가 있겠어.
“얘들아 나 왔어. 늦어서 미안.”
“..어 왔구나. 이리 와, 내가 과일 싸왔어.”
“우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신기하다. 고마워.”
정적을 깨고 정국이가 밴드부실로 들어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과일을 내밀자 정국이의 얼굴이 밝아진다. 정국이가 좋아하는 과일 정도는 이미 꿰차고 있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정국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물론 음악, 옷, 가수, 영화 까지 다 읊을 수 있는데.
"많이 먹어. 아, 오늘 축구 잘 봤어. 진짜 멋있더라."
"에이 뭘.."
엄지를 들어 칭찬해주니 쑥스러워하면서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엽다. 볼을 꼬집어주고 싶다. 나도 참 답 없는게, 정국이 때문에 울적하다가도 정국이만 보면 스르르 다 풀린다. 이러니 다 퍼주고 빈 깡통 돼도 할 말 없지. 옆에서 호석이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항상 이런식이었으니까. 파인애플을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정국이를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오늘 부장과 차장, 그리고 매니저인 내가 모인 이유를 말했다.
“우리 저번에 미니콘서트 전에 보컬을 한 명 더 영입하기로 했잖아. 기왕이면 지금 빨리 뽑는게 좋을 것 같아서. 어떤 방식으로 뽑을까?”
“일단 오디션을 봐야지.”
“..내가 오늘 마침 그거랑 관련된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정국이가 갑자기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것도 귀여워 미치겠네. 정국이는 제게 몰리는 두 쌍의 눈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내가 봐 둔 친구가 있거든.”
“누군데?”
“너희는 모르는 애야. 아마 내일 알게 될걸.”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올 전학생. 어렸을 때 부터 같이 노래하고 놀면서 알고 지낸 친군데, 영국에 갔다가 이번에 돌아왔어. 목소리 되게 좋아. 노래도 잘 하고. 아마 너희도 마음에 들어 할 걸.”
오지도 않은 전학생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영국에서 왔다니. 정국이한테 그런 글로벌한 소꿈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호석이도 당황한 듯 했다. 반면 정국이는 눈치를 보던 아까와는 달리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어보인다. 알 게 뭐야. 정국이가 좋다는데 그걸로 됐지. 암 그렇고 말고. 분명히 정국이처럼 순하고 귀엽고 반듯한 친구일 것이다. 이미 마음 속으로 그 친구를 받아 들인 나의 옆에서 호석이가 입을 뗐다.
“그래도 오디션은 봐야지. 친구라고 해도 그건 절차니까. 동의하지?”
“당연히 그래야지. 한 번 들어보고 너희가 결정해 봐.”
그래. 그래도 그냥 낙하산은 좀 그렇지. 이 정도면 뭐 캐스팅이라고 해두자. 그 친구는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정국이 목소리에 빠져 지금까지 이렇게 허우적대고 있는데, 정국이가 추천하는 아이라니 기대가 될 수 밖에 없다. 영국에서 왔으니까 영어도 엄청 잘하고 그러려나?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니까 되게 젠틀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근데 어쩌다가 다시 돌아온거지? 여기가 뭐가 좋다고. 한국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건 정말 별로인데. 그래도 영어 잘하면 뭘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겠지. 머릿속으로 계속 이런 저런 쓸 데 없는 생각을 이어갔다.
“영국이면 지구 반대편에서 왔네. 걔랑 많이 친한가봐? 영국에 있는대도 아직까지 연락하는거 보면.”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봐왔으니까.”"좋겠다. 그런 소꿉친구 있어서. 어떤 애야?"
"나랑 잘 맞아서 좋아. 착하고. 근데 좀 특이해."
"특이해? 어떻게?
"그냥.. 장난끼도 많고 활발한데, 가끔씩 이해 안 될 때가 있달까. 겪어보면 알거야. 그게 나쁜건 아니고. 같이 있으면 재밌어."
갑자기 가만히 듣고 있던 호석이가 끼어들었다.
"김여주 너랑 잘 맞겠네. 좀 이상한 애라는거 돌려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 소울메이트 만날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정호석의 입에 키위를 욱여넣어준 후 미소지으며 다시 정국이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네. 이름이 뭐야?”
“David Kim. 한국 이름은, 김태형.”
***
아침의 버스는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회사원들로 북적인다. 심지어 오늘은 비까지 내려서, 축축하고 끈적이는 공기가 버스 안을 가득 메운다. 간신히 봉을 잡고 버티면 여러 사람들의 젖은 우산이 다리에 스쳤다. 고데기한 앞머리도 벌써 다 풀려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 비 때문인지 오늘따라 학교가는데 시간도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버스가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퀴퀴한 냄새에서 벗어나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학교는 버스 탈 필요 없이 가까운게 최고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정류장에 내린 후 핑크 우산을 펴고 물 웅덩이를 피하며 걸어갔다. 자칫하면 양말도 젖기에 조심해야 한다. 정말 비 오는 날을 가장 싫어 할 수 밖에 없다. 음악을 들으면 날씨 따라 가라앉은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교복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으려 더듬거리는데, 없다. 없어.
“와.. 미친 말도 안 돼.”
얼마 전에 새로 산 거라 기스도 안나게 조심조심 쓰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완벽하게 최악일 수가 없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보자.. 핸드폰을 어디에 두고 왔을까.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빌어먹을 버스 안에서 잃어버린 것이 틀림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핸드폰이 어디 굴러가서 박혀있지 않고 착한 시민의 손에 들어가 다시 주인을 만나길 비는 수 밖에 없다. 우산을 때리는 빗발이 더 거세진다. 벌써 오늘 하루를 다 보낸 것 처럼 피곤이 몰려온다. 그래도 일단, 뛰자.
허겁지겁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앞에 소희의 얼굴이 보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항 새도 없이 소희를 붙잡고 핸드폰을 빌려 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단조로운 컬러링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마음 속으로 연신 제발을 외쳤다.
[..여보세요.]
받았다. 낮은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누군가가 핸드폰을 습득했다는 사실에 안심했으나 아직 마음을 놓기에는 일렀다.
“여보세요, 제가 그 핸드폰 주인인데요. 제가 버스에서 두고 내린 것 같은데 돌려주실 수 있나요?”
[네. 어디계시죠?]
다행히 돌려줄 의향이 있는 것 같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온다. 긴장 때문에 핸드폰을 꽉 쥐던 손에 힘이 풀렸다.
“지금 탄소고등학교 안에 있는데 바로 나갈 수 있어요!”
[아. 안나오셔도 돼요. 저도 탄소고거든요.]
“어 잘됐네요! 저 2학년 3반 21번 김여주예요. 아, 아니다 제가 교문 앞에 있을게요. 진짜 감사합니다.. 복받으실거예요.. 고마워요.. ”
연신 고맙다며 말을 끌자 수화기 저편에서 빗소리와 함께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다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안에 있어요. 제가 갈게요. 기다려요.]
그 와중에도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한 건, 조금 부끄러운 사실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뻔하지만 이런 소재를 보고 싶어서 들고왔어요..ㅎㅎ 소재의 비밀은 제목에 있어요!
글잡은 처음이라 긴장되네요ㅠㅠ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들 아시겠죠?
이번 화에는 등장인물 소개하느라 스토리 진행이 별로 안됐네요ㅠㅠ 정작 주인공은 나오지도 않았어.. 다음 화 부터 열심히 풀어갈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하트)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