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13.
찝찝한 점심 식사를 끝내고, 백현이 기분전환도 할 겸 영화나 보러 가자며 나를 끌었지만 손을 내저었다. 남자 셋이서 영화관이라니. 게다가 커플 사이에 껴서. 그건 싫었다. 나중엔 박찬열까지 합세해서 같이 가자며 조르고 졸랐지만 그런다고 갈 내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거길 왜 껴. 끝까지 붙잡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종대에게 전화가 왔다. 금요일엔 미안했다며, 근데 너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 학교에 무슨 일 있냐?
대답하지 않으려 말을 돌렸지만 그런 게 통할 녀석이 아니었다.
ㅡ와우, 어메이징 한데?
난 왜 종대에게만은 이렇게 솔직해지는지 모르겠다. 참 희한해. 오늘도 봐, 변백현한테 털어놓기 어려웠던 일이 김종대에겐 이렇게나 쉽다. 녀석이 내 기분을 파악하는 덴 선수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상황의 테두리 밖의 인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김종인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 녀석이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술술 나오는 것도 우습긴 한데 일단 나도 어딘가 털어놓을 곳은 있어야 숨은 쉬지 않을까.
백현이도 백현인데, 완벽한 내 편이 필요했다. 김종인을 모르는. 녀석을 모르기 때문에 더 객관적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더 내 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게 말이다.”
내 일임에도 남 일인 것 마냥 툭 던지자, 종대가 쯧쯧 혀를 찬다.
ㅡ병신아. 너 또 잠잠해질 때까지 철판 깔고 다니려고 그러지?
“그럼, 뭐.”
ㅡ뭐라도 해야 네 숨통이 트일 거 아냐. 장민지 뭔지 그 동기 년이 너 엿 먹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 뻔히 보이는데 당하고만 있을 거냐고.
“..주차장에 cctv도 없는데 어떡하라고.”
ㅡ이거 남 일 아니고 네 일이거든요? 이건 무심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
ㅡ종교는. 김종교는 진범 안 밝히고 뭐한대?
“..글쎄.”
ㅡ관심 좀 가지라고, 미친놈아. 네가 이러니까 엿을 주는 대로 덥석 받아 처먹는 거 아냐. 어휴, 답답해.
그 동기 년이 잘했다는 건 아닌데, 너도 잘한 거 하나 없어. 진짜 범인 찾아서 데려와서 결백을 밝혀야 니네 과 머저리들한테 한 방 먹이지.
“한 방을 왜 먹여. 그럼 똑같은 인간밖에 더 되냐.”
ㅡ참으면 누가 성인군자 나셨다고 박수라도 쳐줄 줄 알아?
대화를 하면 할수록 종대의 목소리가 높아져만 간다. 변백현은 그 상황에 화를 내더니 김종대는 내 대처가 잘못됐다며 나한테 화를 낸다. 가만 얘기를 들어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서 대답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ㅡ에라이, 고슴도치 같은 새끼야.
“..뭐?”
ㅡ까칠한 척만 했지 속은 물러 터졌다고, 병신아.
그 소리에 발끈해서 아예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라고, 선배들에게 한 마디 했다고 말했더니 종대가 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 예. 잘 하셨어요.
ㅡ너만 손해지.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주지마. 그럴 시간에 진범 찾아서 동기 년이나 조져놔.
“..그러니까 무슨 수로.”
ㅡ김종교 이용하면 되잖아. 종교가 네 편들어주면 끝나는 거거든. 게임 오버.
“그렇지 않아도 그 때 김종인이 나는 아닐 거라고 한마디 했어.”
ㅡ그 때 말한 건 아무 소용이 없네요. 솔직히 진범을 찾는 건 크게 중요하진 않다고 봐, 나는. 그냥 걔가 지금 나서서 네가 그런 거 아니라고 진범 찾아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너 거기서 벗어날 걸?
나더러 김종인한테 부탁이라도 하란 소리야, 지금? 미간을 좁혔다.
내가 긁은 게 아니니까 당연히 언젠가는 밝혀질 텐데 왜 굳이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ㅡ네 말마따나 주차장에 cctv도 없다며. 어느 세월에 밝혀? 당사자인 너도 두 손 놓고 있는데 누가?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넌 그냥 후배 차나 긁는 찌질한 새끼로 남게 될 거라니까.
그래도 그런 건 싫어. 김종인이랑 더 이상 엮이기 싫다고. 불만 가득한 소리를 내자 종대가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비웃는다.
ㅡ답답한 소리하고 있네. 김종교 반응은 어떤데? 네가 안했다고 믿는 눈치야?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아니란 걸 믿는 것 같긴 한데, 왠지 모를 찝찝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확답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세훈이나 백현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으니까.
중도 앞에서 사과를 받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거라고 믿었는데 글쎄….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믿음에 의심이 되는 건 왜일까.
종대 말처럼 내가 아니라는 걸 믿었다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녀석은 아니었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니까 분명히 느꼈을 거다. 회화 시간 내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을.
“..아마.”
ㅡ그나저나 걔 캐릭터 진짜 특이하다.
통화에 집중하느라 넋을 놓고 걷다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부딪힐 뻔 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종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ㅡ인간적으로 그렇게 착한 애가 존재할 수 있기는 해? 걔 사람 맞냐?
나는 좀 이해가 안 돼. 내가 만약 김종교라면 널 완전히 믿지도 못할 거고, 동기 년을 완전히 믿지도 못했을 거야. 걔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뭔데. 친하지도 않다면서? 그렇다고 동기 년을 믿기엔 걔 평소 행실이 좋지가 않잖아. 물론 차가 걸린 일이고, 돈이 걸린 일이라서 이성을 잃을 수도 있어. 근데 이성을 잃었다고 보기엔 너무 침착하단 말이지…. 걔가 진짜 이성을 잃었으면 일단 네가 범인으로 몰렸으니 앞뒤 안 가리고 네 멱살부터 잡던가.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냐?”
내가 멱살이라도 잡혔어야 됐다는 거야, 뭐야. 인상을 찌푸리자 종대가 그치? 나도 지금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근데 여하튼, 김종교 캐릭터도 참 희한하단 말이지.
“걔 원래 그래. 그러니까 종교소리 듣지….”
ㅡ원래 그래?
“어.”
ㅡ원래 그러는 진 어떻게 알아. 평소에 지켜보기라도 했나봐?
이 새낀 뭔데 자꾸 사람 정곡을 찔러.
김종대와 전화를 하고 있으면 자꾸만 할 말을 잃게 된다. 대답이 늦었다간 또 날카롭게 파고들 것 같아서 무슨 헛소리냐며 대충 얼버무렸지만 녀석의 반응으론 이미 나를 파악한지 오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어쩌면 종대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지도 모른다.
차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김종인에 대한 경계가 많이 풀렸다. 장미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녀석과 내 사이를 가로막던 문이 철컥 열리고 말았으니 나한텐 여러모로 독이 된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날 엿 먹이려고 그런 거라면 제대로 성공한 거다. 그렇게 기를 쓰고 밀어내던 김종인을 결국엔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ㅡ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 싫은 사람한텐 손톱만큼도 관심 없어.
새삼 놓치고 있던 사실을 종대와의 통화 중에 다시금 깨닫게 되자 대화를 하다말고 멍해지고 만다. 조금 전 선배들과 대립을 했을 때보다 더 기분이 가라앉으려고 한다. 방심하면 안 되는데.
방심하면, 안 된다고.
“..시끄러.”
목소리가 가라앉고, 종대가 얼른 화제를 돌린다.
ㅡ동기 년은 학교 왔고?
녀석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 쓸데없는 장미 얘기가 시작되려는 즈음에 근처에서 클락션 소리가 들려온다. 기분이 좋진 않았던 터라,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선배!”
내려간 조수석 창문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얼굴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는 걸 보고 모른 척 다시 시선을 돌렸었지. 그런데 그냥 지나갈 김종인이 아니었다. 또 다시 빵빵, 요란한 소리를 내고…. 하는 수 없이 종대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나중에 전화 할게, 끊어. 종대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배, 어디 가세요?”
“..집에.”
“집? 자취방이요?”
“어.”
녀석이 잠깐 길가에 차를 멈추고,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성의 없이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또 나를 부르는 목소리. 선배.
가던 길 가자, 좀. 너나 나나 엮여서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인상을 찌푸리면서 돌아보면 늘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웃는 얼굴이다.
뭐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너는.
“타세요.”
“걸어가도 돼. 가까워.”
“그래도 타요.”
“..가깝다니까?”
가까운 건 둘째 치고, 네 차를 보는 게 싫다 지금은. 타는 건 더 싫고.
녀석에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다가 멈칫 하며 눈을 굴렸다. 긁힌 흔적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눈길을 주는데, 조수석 손잡이 근처에 선명한 흔적이 눈에 띈다.
…흐음.
직접 확인한 건 처음이라 그 흔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차였으면 엄청 빡쳤겠는데? 꽤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말없이 있으면, 함께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진다.
“선배.”
쳐다보던 걸 멈추고 녀석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왜.
“데려다줄게요.”
눈빛이 주는 무언의 압박이 있다. 언제나 휘어져있던 눈꼬리가 제자리를 지키고, 호선을 그리던 입술도 고집스럽게 다물린 채 나를 향해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니 어서 타라고.
“…….”
시발..쓸데없이 진지하고 지랄이야.
성큼성큼 다가가 스크래치가 난 조수석의 손잡이를 잡아 쥐었다.
“얼굴이 안 좋아요, 선배.”
“운전이나 집중해.”
“코앞인데 뭐.”
“..사고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래?”
“저 사고 안 내요. 걱정 마요.”
그리고 사고 나면, 책임지면 되죠. 웃으며 하는 말에 대꾸는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를 타고 오기엔 민망한 거린데 굳이 데려다 주겠다고 똥 폼까지 잡기에 뭐 대단한 할 말이라도 있나보다 생각하며 군말 않고 탔더니, 내내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다.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게 맞았다. 진짜 쓸데없이.
“..수리 안했네.”
“네, 조만간 하려고요…. 보기 흉하죠?”
“..조금.”
“장미 선배 오늘 본 적 있어요?”
“아니.”
일을 벌인 게 누군데 정작 당사자는 나타나질 않고 있다. 장미라는 이름만 들어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져서 미간을 좁히고 있으면,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걸 또 본 모양이다. 운전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장미 선배 만나면 꼭 사과 받아요.”
지금 나 놀려?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걔가 사과 할 거였으면 날 그렇게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여기서 좌회전 맞죠?”
그에, 다시 창밖을 확인하자 익숙한 골목이 나타난다. 어. 짧게 대답하자 김종인이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선배가 한 거 아니라고 제가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사과 하라고.”
“…언제.”
“어제요.”
“어제 언제?”
“..선배 강의 실 나서자마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진짜 믿는 모양이다. 김종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녀석이 또 웃으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한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그래서 끝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내가 대답을 안 하는 건 익숙하다는 듯, 녀석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시야를 확보하면서 말한다.
“진짜 범인 찾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선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쳐다보는데, 조금 전 종대와의 통화가 떠오른다. 김종교를 이용하라던, 녀석의 한마디면 다 해결이 될 거라던, 그 말.
“아까 현철 선배한테 한마디 했다면서요.”
“..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벌써. 역시 소문은 빠르다. 얼마 전의 일인데도 김종인이 알고 있는 걸 보면 과내엔 이미 다 퍼졌을 거다. 저들이 먼저 잘못한 건 생각도 않고 내 욕만 하고 다녔을 텐데 안 그래도 똥 된 이미지, 개똥 하나 얹는다고 뭐가 그리 달라지겠어.
“잘했어요. 안 좋은 소리 들리면 같이 화내요. 참지 말고.”
저 앞으로 우리 집 건물이 보인다. 앞쪽에만 시선을 둔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는 잘했어요, 하는 녀석의 말에 짜증을 내야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
“백현 선배 화 많이 났던데…. 선배한테 전화 와서 저 혼났어요. 도 선배 아싸되면 어떡할 거냐고, 얼른 진범 밝히라고.”
내 일인데도, 나는 남 일인 것 마냥 가만히 두 손 놓고 있는데 백현이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김종대 때문에 여기저기 찔려서 아파 죽겠는데, 너마저….
아무튼 오지랖 알아줘야 돼. 나보다 더 많이 화를 내던 백현이를 떠올리자 괜히 미안해진다. 가끔 귀찮게 굴긴 해도 좋은 놈 인건 확실하다.
“..선배 주위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녀석을 돌아보면, 녀석이 차를 멈추며 나를 본다. 내 얼굴을 보며 살짝 웃다가 시선을 돌려 집 건물을 한번 쳐다보곤, 여기에요? 진짜 가깝네... 몇층이에요?
“..호구 조사 하냐?”
습관처럼 툭, 무심하게 뱉은 한 마디에 김종인이 기분 나빠요? 하면서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뒷목을 몇 번 주무른다. 기분 나쁠 건 또 뭐야.
기분 나쁜 건 아닌데 굳이 알려주고 싶진 않다. 입을 꾹 닫으니 김종인이 씨익 웃는다.
“저 들어가면 안 돼요?”
호기심이 가득한 두 눈과 마주한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슬쩍 보곤 안전벨트를 풀며 문을 열었다.
“어, 안 돼.”
너한테 문을 열게 된 것도 인정하기 싫어 죽겠는데 집을 어떻게 데려와.
기껏 데려다줬는데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근데 그냥 예의 없는 놈 되고 마는 게 낫다. 내가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굳이 데려다 준다고 한 건 김종인이었으니까. 어쭙잖은 변명도 붙여본다.
탁 소리 나게 문을 닫고 차에서 내려, 못으로 긁은 것 마냥 가로로 길게 난 스크래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운전석의 김종인이 내게 말한다. 조금은 아쉬운 목소리로.
“선배는 왜 그렇게 안되는 게 많아요?”
그러게. 너한텐 안되는 게 좀 많다. 밥도, 집도….
“…갈게. 조심해서 가라.”
네 앞에만 서면 나는 솔직해지지 못한다. 고맙다 인사치레라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말도 못한다.
짧은 인사를 하며 차에서 몇 걸음 떨어져 나왔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저 눈을 깜빡이던 김종인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오늘도 졌다. 선배한텐 언제쯤 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또 웃으며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다.
“내일 봬요, 선배.”
그래, 내일 보자. 대답은 속으로 삼키며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녀석의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간다. 그걸 한참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야, 종인아 너 새삼 진짜 잘생겼다.”
캐비넷에서 교재를 챙겨들고 라운지를 지나는 길이었다. 둘러싸인 인파 속에서 김종인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조금 먼발치에서 힐끔 살펴보니,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녀석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녀석은 머쓱한 듯 웃으며 뒷목을 쓰다듬는다.
정장…. 잘 어울리네.
그걸 넋을 놓고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가 누구 한 명이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하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 가던 길이나 마저 가야겠다,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녀석의 옆 자리에서 웃는 얼굴로 서있는 장미를 발견했다.
웃음이 나오지, 너는.
큰 일 벌여놓고 하하호호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배알이 꼴린다. 개똥이나 하나 더 얹어볼까, 인상을 찌푸리며 그 얼굴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강의실 쪽으로 발을 떼려는데,
“선배!”
…아, 김종인.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부르지 말지, 좀. 여기서 불러봤자 너나나나 득 될 거 하나 없다고, 시발.
김종인이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다.
“저 사람이 도경수야? 종인 오빠 차 긁었다는?”
“경수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저 선배가 차 긁은 거 맞아? 근데 종인 선배는 왜 저래.”
“종인이 진짜 대단하다. 나 같으면 저렇게 못해.”
그 모습에 녀석의 주위를 둘러 싼 낯선 얼굴과 간간히 섞여든 익숙한 얼굴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리고….
웃는 얼굴이던 장미의 표정은 일그러진 채다. 근데 웃긴 건 그 표정을 보니까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사실.
이게 뭐라고 유치하게 기 싸움이나 하고 있는 건지. 김종인 중간에 두고 쟁탈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내가 우스워서 입 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선배,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다가온 김종인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태가 난다. 키도 크고, 해서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는 건 알았지만 수트를 입은 모습은 처음이다. 여자들이 왜 저렇게 환장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아서 아래위로 천천히 녀석을 훑으면 김종인이 웃으며 말한다. 아, 학교 행사 때문에 수트 입었어요. 잘 어울려요?
그 말에 대답은 않고 뒤쪽의 장미를 슬쩍 쳐다보았다. 기분이 나쁜지 손톱을 깨물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너 나한테 질투하냐.
질투를 하는 것만 같은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장미를 보던 시선을 돌려, 김종인에게 대답했다. 어, 잘 어울리네.
“…….”
무심하게 던진 말에, 녀석이 대답이 없다. 온갖 말로 시끄러운 와중에 녀석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다시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니 조금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얜 또 왜이래. 내가 대답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냐.
그러던 것도 잠시,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다.
“다음엔 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역시나 대답은 않고 눈을 깜빡이고만 있으면, 또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다.
뭐야, 김종인이 도경수 집에 데려다 줬나봐. 왜 저래? 종인이 진짜 보살 맞나봐. 종인 선배가 저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저 선배가 범인 아닌가봐. 아니야, 장미언니가 봤다던데?
수군거리는 말이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었다. 그 모든 말들은 오른쪽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빠져나갈 뿐이다. 그저 김종인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그러면 녀석은 익숙하다는 듯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조금 짧은, 그 침묵의 시간이 지났을까.
“부학, 도콩. 여기서 뭐해?”
어깨를 둘러오는 손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면 크리스 선배가 서있다. 한 손은 내 어깨 위에,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김종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채로. 한 삼초 간 눈을 맞추다가 그대로 직진.
라운지를 들썩이게 하는 무리를 해치며 1학년 빨리 수업 안 들어가? 3학년, 니들은 수업 없으면 집에나 가라. 하는 잔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수군거림은 계속되었지만 선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깨갱하며 흩어진다. 빈정이 상해서 이미 내뺐는지, 그 뒷모습에 장미는 없다.
“도콩, 누가 네 욕하면 형한테 다 일러. 어제 현철이네 한방 먹였다면서? 잘했어. 그 새끼들이 또 그러면 나한테 말해. 형이 패줄게.”
“아….”
그래, 크리스 선배가 그 일을 모를 리 없지. 난감한 목소리를 내면 평소와 다름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대한다. 그 손길에 담긴 위로를 읽어내곤 고마워서 슬쩍 웃었더니 선배도 따라 웃는다.
“세훈이도 같이 있었다면서?”
“..네.”
옆얼굴로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돌아보니 김종인이 무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올라가있던 입 꼬리를 슬쩍 내리며 녀석과 마주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니 녀석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
“…….”
..녀석의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
흐흐..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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