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하아... 이리도 피곤할수가..."
충혈되어 뻑뻑해진 두 눈을 몇 번 깜박인 그가 눈두덩이를 조심히 매만지고는 기지개를 켰다.
몇시간을 채 눈도 붙이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환은 어제 저녁 몸이 호전되어 대화방에 잠시 들렀던 금옥과의
약속때문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시작한 대화방 일 때문에 바느질을 할만한 여유는 없었지만 값이 좋은 중요한 일이 들어왔다며
꼭 해야한다는 금옥의 성화에 어쩔수 없이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다.
솔직히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자신을 생각해 일부러 마음을 써준 여인에게 거절을 할수는 없었다.
입안이 껄끄러워 끼니도 거른채로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킨 그가 집 밖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제법 추워진 날씨 탓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지 않아 장터 길은 평소보다 한산한 편이었다.
장을 선 가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장터 중간에 위치한 비단가게에 다다른 태환은 손님이 있어 북적이는 통에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기로 했다.
색색이 고운 비단 옷을 구경하러 나온 양반집 규수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태환은 어느새 곁에 다가와 말을 붙이는
주인때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예서 뭐하시오~?"
사람 좋아보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기는 비단 가게 주인에게 활짝 웃어보인 태환은 그에게 이끌려 가게 안으로 몸을 들였다.
"금옥은 오지 않았소?"
"왔다가 금방 돌아갔소. 왜, 금옥과 할 얘기라도 있소?"
비단이 널린 좌판 한 구석에 앉아 만나기로 한 여인의 행방을 물으니 그가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대꾸를 했다.
뭘 저리 열심히 적나...했더니 그 종이를 들고 와 태환의 눈앞에 들이밀어 보인다.
"이게 뭐요?"
"오늘은 이곳으로 가면 되오. 여기서 주는 일이 아니고... 일단 찾아가 보시오. 중요한 것이라 솜씨 좋은 사람을 찾는다기에
내가 자네 누이를 추천했소~"
비단 가게 주인에게서 종이를 받아든 태환은 거기에 적힌 주소에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고맙소~ 품삯 받으면 술 한잔 사겠소~"
"허허~ 내가 고맙지! 자네 누이가 야무진 덕을 내가 보고 있소!"
어깨를 두드려주는 비단 가게 주인에게 태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손님들이 밀려 들어오는 가게를 급히 나섰다.
"어디보자... 여기가..."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에 위치한 주소에 짭짤하게 들어올 품삯이 상상되어 태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종이에 적힌 주소를 눈으로 읽고 입으로 몇번을 되뇌이며 장터를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여기인가?"
양반네들처럼 크진 않았지만 단정하고 깨끗한 집 앞에 다다른 태환은 종이에 적힌 주소와 문패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흠..헛기침을 하고 대문을 두들기며 계십니까? 라고 부르자 두터운 빗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얼굴을 빼곰히 내보였다.
곱상한 얼굴에 허름한 솜옷을 입고 서있는 태환을 위아래로 쭉- 훑던 사내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찌 오셨소?"
"아... 장터 김씨네 비단 가게에서 보낸 사람이오. 바느질감이 있다하여..."
비단 가게에서 온 사람이라 말하자 그제서야 아~하고는 사내가 문을 활짝 열어 그를 맞이했다.
"쑨양 나으리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오늘 사람이 온다 하시긴 했는데... 일단 이리로 따라오시오."
쑨양...?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고 왔으나 하인의 입에서 나온 처음 들어본 생소한 이름에 태환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던 태환은 누마루 앞에 등을 보이고 서서 마른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빛깔 고운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고 서있는 한 남자의 뒷 모습.
근데..그 뒷 모습이 낯익어 하인을 따르던 태환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나으리~ 비단 가게에서 보낸 사람이 왔습니다요."
그 곁에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는 하인과 그런 그를 살며시 바라보는 남자의 옆모습에 태환은 두 눈이 커다래지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나..나으리..!!
하인의 말에 자신을 향해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몸짓에 태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췄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뺨에 남겨진 상처에 태환의 이마위로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다정한 그의 부름에 태환은 땀이 베어 나오는 두 손을 마주잡고는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섰다.
상처가 아물어 흉터는 흐려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볼 수 없는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두 눈을 질끈 감은채로 제발 알아보지 못하기를 수없이 바라고 바랬다.
"바느질 일이라 여인이 오실거라 생각하였는데..."
누마루에 걸터 앉는 쑨양의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본 태환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가 알아들을수 없게끔
목소리를 만들어 입을 열었다.
"제 누이가 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일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누이라..."
그의 대답에 쑨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뚱히 서있는 하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단들을 가지고 오십시오."
"예!"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인이 잰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해 걸음을 옮기고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그곳에 두 사람이 남았다.
혹시나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태환은 등자락이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비단들을 챙겨 들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속에 가득할뿐이었다.
다행히도 더이상 특별한 말을 건네지 않는 그의 모습에 태환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채로 작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나으리~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요."
하인의 손에서 비단 꾸러미를 받아든 쑨양은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인에게 그만 가서 일을 보라 얘기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뒷 마당으로 사라지는 하인의 뒷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태환은 살며시 들어올린 얼굴 때문에
쑨양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별다른 표정의 변화없이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는 그.
알아보지 못한 듯한 그의 반응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쉰 태환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누마루에 놓인 색색이 고운 비단의 모습에 눈을 굴리던 태환은 엷은 살구빛 바탕에 하얀 꽃과 금박 나비가 수놓아져 있는
비단 하나에 시선을 멈추었다.
하얀 꽃.. 하얀 꽃잎..
순간 철렁 내려앉는 가슴에 태환은 마른 침만 간신히 삼켰다.
"이것으로 상의를 만들어 주십시오."
태환의 시선이 멈춘 비단을 들어 상의를 만들어달라는 쑨양의 주문에 한참을 넋놓고 서있던 그가
재차 말을 건네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한채로 붉은 입술을 달싹여 궁금한것을 조심히 물었다.
"여인의... 한복을 만드시는 겁니까..?"
조심히 묻는 태환의 질문에 쑨양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이마를 긁적였다.
"한복이긴 한데... 그것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에 태환이 다시 고개를 살짝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어떠한것을..."
"그... 젊은 여인네들이 입는 옷 말입니다."
"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생각하는듯 싶더니 두 손을 가슴께에 가져다대고 다시 설명을 하는 그의 말에
태환의 표정이 얼어버렸다.
"저고리가 짧은 옷 말입니다.. 이렇게 생긴...?"
"...혹... 기녀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나 싶어 기녀복이냐 묻자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간다.
쑥쓰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이는 그의 모습에 태환은 굳어져가는 얼굴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만드시는 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할 옷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누마루에서 몸을 일으켜 정중히 인사를 해보이는 그에게 태환도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는 떨리는 손을 뻗어 비단들을 챙겨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것을 어찌 알았는지 어느샌가 곁에 다가온 하인을 따라 돌아서려던 태환은 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선물 받을 여인이... 다른 분들에 비해 키가 좀 있습니다. 치맛단을 좀 길게 만들어주십시오."
"아...예..."
치맛단까지 세심하게 부탁하는 그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태환은 긴장이 되어 얼어버린 다리를 겨우 떼어 마당을 향해 걸어나갔다.
손에 들린 비단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하인을 따라 그에게서 멀어진 태환은 그제서야 긴장을 좀 놓고 앞서가는 하인을 붙잡았다.
"혹,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조심히 물어오는 태환의 질문에 하인이 빗장을 열려던 손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물으시오. 뭐가 궁금하오?"
"저 분... 이곳 분이 아니신듯한데... 혹..."
"아~ 쑨양 나으리는 청나라 분이오."
"........!!!!!!!........"
"청나라에서 사신으로 오셨소. 그건 왜 물으시오?"
사색이 된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하인에게 고개를 내저어
아니라고 답한 태환은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대문을 벗어나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사신... 청나라 사신...하.
높은 일을 하는 사람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청나라 사람에.. 사신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그와의 거리에 태환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올렸다.
누가보아도...설화를 위한 옷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옷이기도 하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는 태환의 표정이 복잡해지며 비단을 꼭 쥔 그의 손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하인의 뒤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쑨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에게서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게다가 누이가 있다니.
무엇에 놀랐는지 대문을 황급히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쑨양은 누마루에 걸터앉아 이마를 긁적였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벌써 12화!!!
아직도 끝이나려면 좀 더 있어야하는데...멘붕이네요ㅎㅎ
오늘은 심장이 쫄깃해지는 남자 vs 남자의 만남이었습니다.
설화가 얼마나 좋으면 옷까지...! ㅠㅠㅠㅠㅠㅠㅠ 나두우~~~
저번화에 쑨환 글이 사라져서 이제 떠나야하나봐요...라고
적었는데...그 파장이...ㄷㄷㄷ
설화는 다 끝내고...갈거예요~ㅎㅎㅎ
다음 소재도 아직 떠오른게 없고...일도 좀 바빠질것같아서;;;
겸사겸사 적은것이었는데...
그래도 붙잡아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니 위로가 됩니다ㅠ
언제든 재미난 이야기거리 생기면 올께요~
올거예요..올걸요? ㅎㅎㅎㅎㅎㅎㅎㅎ헛!
늘 재밌게 읽어주시고..댓글 달아 주시는 많은 분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쑨환] 雪花 (설화) 12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3/e/f/3efea1ded495199e366bbf5a6e84200b.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