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경수와 찬열은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휑한 운동장은 너무나 조용하다. 매일 왁자지껄하던 학교 운동장에 아무도 없는걸 보는 건 처음이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반이 넘었다. 9시 반이면 이미 1교시가 시작한지 오래다. 그래도 병원에 갔다왔으니까 무단 결과는 아닐거다. 찬열은 직접 다친게 아니지만 나를 도와주었으니 무단은 면해주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벌써 찬열이 저만치 앞에 가버렸다. 경수가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같이 걷던 발걸음을 놓쳐버렸다. 찬열은 자기가 한참이나 앞에 걷고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키가 커서 시야에도 안들어 오는건가. 괜히 심통이 난다. 경수는 빠르게 뛰어 찬열의 옆에 다시 섰다. 그제야 찬열이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서야 경수가 자신보다 뒤쳐졌던걸 알았다.
" 아, 미안. 놓고갈 뻔했다. "
찬열은 경수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삼십분 전 병원을 나설때와 똑같다. 사실 병원을 나올때 잡혔던 손목은 버스를 타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물론 학교 올때까지 잡고있는게 이상한것이긴 하지만. 사실 경수는 차라리 찬열이 손목을 잡지 않았으면 했다. 찬열의 손이 닿을때마다 자꾸만 긴장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딱히 찬열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만진다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렇지만 찬열에게 미안해 놓아달란 소리도 하지못하고 버스를 탈때까지 계속 온몸이 마네킹처럼 굳은 상태로 잡혀있었다. 자연스럽게 풀리면서 겨우 온몸에 힘을 뺄 수 있었는데, 지금 이순간 또 잡혀버렸다.
경수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걸어다니는 관절마다 삐그덕 소리가 날 것 같다. 경수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있는 찬열의 손을 빤히 보았다. 놓아달라고 말 해볼까?
" 저기, 이거…. "
" 응? "
" ……아니, 빨리 가자고. "
경수는 안타깝게도 트리플 에이형이였다. 그것도 엄청난 거대 에이형. 혹, 찬열이 기분이라도 상할까 아무말도 못했다. 경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걸을 뿐이였다. 반면에 눈치 빠른 찬열은 경수가 어딘가 불편해 하고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찬열이 물었다.
" 이거 불편해? "
" 아니, 아니. 괜찮아, 괜찮아! "
" 불편하면 말을 하지. 나도 모르고 있었어. "
경수가 눈을 크게 뜨고 빠른속도로 도리질 쳤다. 절대! 저얼대 아니야! 절대 불편하지 않다는걸 증명하듯 손사래까지 열심히 쳤지만, 찬열은 부드럽게 경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 진짜 괜찮은데……. "
순식간에 손목이 가벼워졌다. 똑같은 곳을 계속해서 잡고있던 묵직한 느낌이 사라지니, 허전하기도 하고 좀 춥기도 하다. 잡혀있을 때는 불편했는데 막상 풀고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경수는 공중에서 홀로 무안하게 떠있는 손을 얼른 내렸다. 그리고 주머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힘들게 계단을 5층까지 오르자 교실이 보였다. 학교까지 오는데 참 멀고도 험한 길을 겪어서 왔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업이 한창이라서 그런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선생님들의 수업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찬열은 성큼성큼 걸어 교실 뒷문 바로 앞에 서있다. 찬열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 들어가자. "
" 응. "
찬열이 문을 활짝 열고 당당한 걸음과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간다. 경수도 찬열의 뒤를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반 애들도 모두 찬열과 경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경수는 태어나서 몇 번 받아본적 없는 따가운 시선에 얼굴이 벌개졌다. 아, 완전 쪽팔려……. 할 수만 있다면 책상 밑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다.
" 너넨 일교시 시작한지가 언젠데 이제와? "
" 그게…그러니까…. "
" 병원 갔다왔어요. 경수가 손가락에 금가서 깁스하고 왔어요. 그치 경수야? "
" 어,맞아. "
우물쭈물 하는 경수를 대신해 찬열이 잽싸게 대답한다. 그의 말투 하나하나가 모두 여유롭다. 경수는 순간 찬열에게 엄청난 고마움을 느꼈다.
" 그래, 아무튼 빨리 자리에 앉아. "
" 네에. "
찬열은 긴다리를 뽐내듯 휘적휘적 걸으며 제자리로 가 앉았다. 키가 커서 그런지 찬열은 맨 뒤에서 바로 앞줄이였다. 반면에, 경수는 앞에서 두번째 줄이였다. 하긴 키 차이부터가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경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자기자리로 가 앉았다. 아직도 모든 애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런 주목을 받는 건 아무래도 내겐 아직 부담스럽단 말이다.
가방을 책상 고리에 걸고 교과서를 펼친다. 얼마 남지않은 수업이라도 들으려고 펜을 잡아보지만 깁스 때문에 집기가 힘들다. 왜 하필 오른손이야! 도저히 공부도 안되고 집중도 안되고. 경수는 칠판을 보고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찬열을 생각했다.
되게 당당하고…시원시원하고…… 멋있어. 사람들 앞에만 서면 발끝부터 딱딱하게 굳는 경수로써는 방금 전 당당하게 교실을 들어서는 찬열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경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찬열의 곧은 옆모습이 보인다. 햇빛이 창가 바로 옆에 앉은 찬열을 삼켜버리는 것 같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시 생각하는 듯 찬열이 샤프 끝부분을 아랫입술로 꾹 누른다.
계속해서 경수는 몰래몰래 찬열을 훔쳐보았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걸 보면 분명 공부도 잘할거다. 찬열을 지켜보면 볼수록 경수가 갖고있지 않은 것들을 찬열은 모두 갖고있었다. 경수의 눈에는 찬열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보다 더 존경스러워 보였다. 찬열은 그만의 완전한 이상형이였고, 한마디로 로망! 그 자체였다. 도경수의 워너비 박찬열.
*
넋을 놓고 멍하니 펜만 붙들고 있던 경수가 종소리에 놀라 흠칫했다. 1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급하게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 계셨다.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까지 자료는 모두 제출하도록. "
선생님이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애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자꾸만 눈이 감겨 온다. 1교시는 이미 버린 상태고, 2교시부터는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경수가 잠시 잠을 깨기 위해 자판기에서 뭐라도 사먹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 김종인, 빨리 이리와 봐. "
" 아, 왜 또. "
앉아있던 경수의 앞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정체는 찬열이였다. 그리고 찬열의 뒤에선 누군가 서있었다. 경수는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누군지 보았다. 그는 찬열의 옆에서 궁시렁 거리며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빛을 받아 빛난다. 광택이 나는 노란색 명찰에는 '김종인'이라고 써있다.
너가 바로 미친놈처럼 날아다니던 오토바이 소년이구나. 김종인.
" 사과해. "
" …얘한테? 내가 왜? "
" 아침에 기억안나? "
" 아침에 뭐가? "
찬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종인에게 말했지만, 종인은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어이없다는 반응이였다. 경수는 자기가 재료가 가득든 샌드위치 사이에 낀 햄 같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그저 입만 꾹 닫을뿐이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찬열은 조금 화가 날 지경이였다. 종인은 여전히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뭐라도 씹은 표정이다.
" 아침에 너가 오토바이 타다가 횡단보도에서 경수 넘어졌어. "
" 근데? "
" 근데라니! 너 때문에 애가 이지경이 됐는데! "
조용히 앉아서 둘을 지켜보고만 있던 경수는 깜짝 놀랐다. 찬열이 갑자기 다친 오른팔을 붙들고 당겼다. 경수는 순간 찬열의 힘에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찬열은 경수의 손목을 잡고 종인에게 보여주었다. 놀란 경수는 눈을 크게 뜨고 찬열과 종인을 번갈아 보았다. 둘 사이에서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 자, 봐. 손에 깁스까지 했어. "
" ……진짜야? "
종인의 눈이 경수를 향했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을 때 경수는 흠칫하며 찬열에게서 손목을 빼냈다. 그리고 깁스한 손을 뒤로 숨겼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였다. 경수도 깁스를 한 오른손을 숨기며 흠칫 놀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손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찬열의 남겨진 손이 허공에 떠있다. 찬열은 조금 놀란눈으로 경수를 보았다. 종인도 무슨일인지 싶어 경수를 보았다. 찬열과 종인 모두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주목을 받고있다는 게 느껴진다. 가뜩이나 멀대같이 키큰애들 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더욱 위축되어버렸다. 뭐라고 대답할지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이다. 딱히 둘의 시선을 피하려 한건 아니었지만 뭐라 대답할까 생각하다 보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숙인 경수를 보고 찬열은 조금 놀랐다. 뭐 때문에 경수가 이러는지 도통 짐작이 가질않았다.
" 그게…난 괜찮은데. "
경수가 마치 로보트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아도 억지로 짓고있는 미소였다. 눈동자도 한곳에 정착하질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다른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경수는 최대한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는 중이였다.
찬열은 경수가 어딘가 불편해 한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나름 웃는다고 웃고있는데 매우 부자연스럽고 나무토막처럼 딱딱하다. 종인을 경수에게 사과시키는게 먼저일까, 아니면 경수의 표정을 풀어주는게 먼저일까? 찬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종인은 경수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았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불안해보인다고 생각했다.
" 내가 사과해야 돼? "
" 당연하지! "
무심한 종인의 말에 찬열이 큰소리로 맞장구 쳤다. 종인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 근데 나, 진짜 괜찮으니까 갈게. 내가 잘못해서 넘어진거니까 치료비 같은거 안줘도 돼. "
" 어? 야, 야, 도경수! "
경수가 무작정 찬열과 종인사이를 비집고 잽싸게 빠져나왔다. 뒤에서 찬열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경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종인은 뒤따라오지 않도록 빠르게 걸어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경수가 교실 밖으로 사라질때까지 바라보았다. 찬열이 종인의 어깨를 치며 따졌다.
" 아, 진짜! 김종인 너. "
" 내가 뭘. "
" 그깟 자존심 좀 굽히면 뭐 덧나냐? "
찬열은 그 한마디만 던져놓고 경수를 따라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혼자 남은 종인이 경수의 자리 앞에 덩그러니 서있다.
자..존심?
종인은 혼자 무언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혹시 그게 문제인건가. 깁스한 손을 숨기고는 말도 제대로 못하던 도경수. 사과도 안받고 그냥 뛰쳐나가버렸다. 마치 누군가를 피해다니는 느낌이였다. 대체 뭔데!
" 아니,내가 뭘 잘못했는진 알아야 할거 아니야. "
종인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아무래도 복잡하고 답답한건 질색이였다. 정말로.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환연 현지 인기 많은 거 보면 동탄 미시룩 어쩌고 해도 예쁜게 최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