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성 오르비스 5 |
5. 종인은 오토바이에 걸터앉은 채로 찬열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패딩을 입었어도 늦은 밤은 종인에게 조금 추웠다. 종인이 어둠속에서 빛나는 간판들 중 하나를 올려다보았다. 행복 독서실이라 쓰여있는 간판은 노란빛을 뿜어냈다. 행복 독서실은 찬열이 평소 다니는 독서실이였다. 종인은 몸을 짧게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입고있는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열이 새로 컬러링으로 바꾼 유명한 가수가 부른 팝송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종인은 꼭 이 노래가 여자를 꼬시기에 좋은 노래 같았다. 보통 대부분의 여자들은 감성에 젖은 이런 류의 노래들을 좋아했다. 전화를 걸며 달콤한 노래가 흘러나오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면 그 분위기를 타고 바로 뻑가버린다. 가뜩이나 땅굴로 기어들어갈 듯한 박찬열 목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더 뻑간다. 이 새끼가 또 누굴 꼬시려고. 종인은 컬러링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물론 찬열은 맘에 드는 노래를 컬러링으로 해둔 거겠지만 그것 때문에 찬열을 좋아하게된 여자들도 많았다. 항상 찬열의 옆에 있던 종인은 노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던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노래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반복될 때쯤 찬열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언제 나오냐? " - 지금 나가고 있어, 지금. " 아까 전화했을 때도 지금 나오고 있다매. " - 이번엔 진짜 나가고 있어, 진짜로! " 암튼 빨리 나와라. 엉아 춥다. " - 지랄은. 찬열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종인은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입김을 후- 불었다. 입에서 담배연기처럼 흰 기체가 피어났다. 봄 밤은 아직 추웠다. 종인은 코 끝이 조금 찡해졌다. 담배 한대만 딱 피웠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때였다. 찬열이 독서실 건물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그리고는 종인의 오토바이 앞으로 달려왔다. 어깨에 맨 커다란 가방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찬열은 피곤한지 눈 밑 다크서클이 조금씩 내려와 있었다. 종인은 힘없이 축 쳐져있는 찬열을 보며 말했다. " 타. " 종인이 헬멧을 찬열에게 던져주고,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타 헬멧을 썼다. 찬열도 헬멧을 쓰고 종인의 뒷자리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종인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 출발?" " 출발. " 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익숙하게 종인의 허리를 잡았다. 종인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 집으로? " " 힘드니까 집으로 부탁해요. 기사님. "
종인이 피식 웃으며 헬멧의 가리개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니 시다바리도 아니고 맨날 데리러 오래. 찬열이 종인의 투덜거림에 크게 웃었다. " 너 내 시다바리 맞잖아. " " 닥쳐. " 종인이 열쇠를 잡고 돌리자 오토바이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손잡이를 잡은 종인의 손에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오토바이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찬바람을 가르며 도로를 달렸다. 부아아앙- 다행히 주변에 차가 별로 없어 조금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종인은 이 느낌을 좋아했다. 바람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무작정 달리는 스피드를 만끽하는 기분은 최고였다. 그때만큼은 마음이 뻥 뚫리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종인은 오토바이를 즐겨 탔다. 반면 찬열은 오토바이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고가 두려웠고 찬열은 은근 겁이 많았다. 그렇지만 등하교 때나 집에 가기 편한 이유만으로 종종 종인과 오토바이를 같이 타는 것 뿐이였다. 지금도 버스가 끊겨 종인을 불렀지만,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찬열은 조금 무서웠다. 그러던 와중 오토바이가 빨간불에 걸렸다. 몇몇 서있는 차들 때문에 오토바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종인은 오토바이를 천천히 멈춰세웠다. 찬열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너무 빨라. " " 뭐가 빠르다고 이게. " " 일찍 세상 뜰 수도 있어. " " 내가 알아서 할게. " 종인은 귀찮다는 듯 휙휙손을 흔들며 대충 대답했다. 하여간 못말려... 찬열은 종인의 등을 주먹으로 퍽 쳤다. 약간의 진심이 더해진 주먹이였다. 종인이 과장되게 윽,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존나 할아버지네. 허리가 아프다는 종인에게 찬열이 말했다. 찬열이 아무것도 아닌 장난에도 웃음이 나왔다. 오토바이가 멈춰진 사이에 둘은 끅끅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서서히 웃음이 멈춰졌다. 눈에 눈물이 조금 맺힐 정도로 웃어제꼈다. 찬열은 손으로 눈을 가볍게 훔치며 말했다.
" 그런데 너 경수랑 짝이더라? "
아무런 사심없이 궁금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묻는 말이였다. 찬열의 뜬금없는 물음과 동시에 빨간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모든 차들이 서서히 출발했고 종인도 오토바이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종인은 갑작스럽게 나온 경수의 이름에 잠깐 멈칫했다. 종인은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 응. " 대답이 꽉 막힌 헬멧 속에서 웅웅 울렸다. 작은 소리라서 찬열이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찬열은 다시 말했다. " 너 부러워. " " 뭐가 부러워. " 종인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계기판의 바늘이 점점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오토바이에 점차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찬열은 종인의 허리를 다시 꾹 잡았다. 아까 전보다 더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찬열은 종인이 경수가 자리를 바꾸려 할때 고의적으로 막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종인은 일부러 그 사실을 찬열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종인은 찬열이 경수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경수에 대해 물을 때 찬열의 대답은 어떨지 궁금했다. 종인은 무심하게 물었다. " 왜? " " 그냥. 경수 귀엽짆아. " " ……. " " 눈 떼굴떼굴 굴러나디는 것도 그렇고 키도 조그맣고 귀엽지 않아? " " 그런가. " 종인은 무심하게 앞만 보며 말했다. 찬열이 종인의 등에 볼을 대고 킥킥 웃었다. 넌 너무 감성이 메말랐어. 딱히 귀엽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말을 걸때마다 눈을 크게 뜨길래 신기해서 웃었던 적은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자리를 바꾸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종인에게는 호기심이였다. 경수를 옆에 두고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반응을 보고싶었다. 종인은 하고싶은건 꼭 해야만 했고, 갖고싶은 건 꼭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였다. 그래서 경수를 잡았던 거였다. 그렇지만 찬열은 다른 이유였다. 귀엽다? 단지 그 이유만일까. 종인이 보기에 원래 찬열은 단순하기도 단순한 사람이였다. 하고싶으면 하고, 아니면 아닌. 머리를 꼬아서 내뱉는 거짓같은 건 없었다. 찬열이 귀엽다고 말했다면 정말 귀여워서 그랬단게 끝이란거다. 그렇기 때문에 찬열에게는 그 이유가 전부라는 걸 알면서도 종인은 머릿속 한구석에서 자꾸만 의심을 했다. 정말로 그 이유만일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의문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마주쳤던 도경수를 생각했다. 찬열이 귀엽다 말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 자신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장면과 함께 지금 이순간 종인은 답답하게 조여오는 위기감을 느꼈다. * 오토바이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종인은 아파트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멈춰세웠다.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찬열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다. " 고맙다. " " 어차피 나도 집에 와야됐어. " " 하긴 너네집도 우리집 바로 옆동이니까. 암튼 땡큐. " 찬열이 이를 내보이면서 씨익 웃었다. 헬멧을 종인에게 건네주고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찬열의 눈이 커졌다. 항상 주머니에 넣어져있던 묵직한 느낌의 핸드폰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찬열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종인에게 말했다. " 어? 나 핸드폰 없어졌어. " " 두고 온거 아니야? " " 아냐, 분명 독서실에서 들고온 생각은 나는데. " 찬열은 온몸과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아보았지만 무언가 잡히는 느낌은 없었다. 분명 독서실에서 나올때 손에 들고 나온 기억은 나는데……. 어딘가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았다. 종인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찬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오는건 딱딱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 배터리 없어서 전화기 일부러 꺼놓고 있었지. " " 그럼 독서실 다시 가봐? " " 아냐, 됐어. 뭐하러 또 가. 그냥 집에 가자." " 그래도 아깝잖아. " " 폰이야 새로 사면 되는거고, 암튼 난 들어간다. " " 잘가라. " 찬열은 양손을 크게 흔들며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아파트 입구에 주황빛 센서가 반짝 켜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꺼져버렸다. 종인도 찬열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오토바이를 끌고 바로 옆동인 집으로 향했다. 몇일동안은 찬열과 카톡을 못할 것 같다. 뿐만아니라 여자꼬시는 팝송 컬러링도 당분간은 안녕이겠다. * 경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손에는 두유를 들고 있었다. 막 학원에서 끝나 집에가는 길에 마시려고 산 것이였다. 두유를 들고 있으니 손을 통해 온몸이 따듯해지는 것 같아 좋았다. 뚜껑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시려고 할 때 였다. 경수는 아스팔트 길바닥에 무언가 떨어져있는 걸 발견했다. 주변이 어두워 잘못하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다. 경수는 재빨리 달려가서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웠다. 그건 바로 핸드폰이였다. 경수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보았다. 그 흔한 케이스 하나 껴져있지 않고 액정에는 투명필름 한장만 딱 붙여져 있었다. 누군가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떨어뜨린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았다. 전원이 꺼져있어 전원을 켜보았지만, 배터리가 없다는 창을 끝으로 다시 꺼졌다. 경수는 이 핸드폰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집에 가져가기로 했다. 배터리를 충전해서 주인을 찾아주는게 좋을 것 같았다. 경수는 가방 앞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다시 집으로 가는 걸음을 옮겼다. 경수가 집으로 들어서 몸을 씻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학교갈 준비를 하며 가방을 챙기려 할때 밖에서 주운 핸드폰이 생각났다. 경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온지 꽤 됀 오래된 스마트폰 기종이였다. 경수는 충전기를 핸드폰에 전원을 꽂고 전원을 켰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 침대위에 누웠다. 핸드폰을 위로 들어 켜지는 화면을 보았다. 삼성이라고 뜨는 화면에 막대바가 조금씩 차오른다. 경수는 어떤 사람의 핸드폰일까 조금 두근거렸다. 마침내 막대바가 모두 채워지고 핸드폰의 터치 잠금 화면이 떴다. 다행히도 패턴잠금은 걸려있지 않았다. 경수는 떨리는 맘으로 터치잠금화면을 풀었다. 배경화면은 매우 심플하게 기본화면이였다. 핸드폰을 잘 꾸미지 않는 사람같아보였다. 패턴도 안걸고, 배경화면도 기본화면이였다. 패턴도 복잡하게 걸려있고 핸드폰을 테마도 다운받는 경수와는 정반대였다. 메뉴를 들어가보니 게임어플들이 대부분이였다. 게임을 좋아하나. 음악 다운로드 목록을 들어가보니 노래만 300개가 넘었다. 정확히는 308개. 요즘나오는 최신가요도 있었고, 인디밴드, 팝송, 힙합 등 장르도 여러가지였다. " 우와…. " 경수는 엎드려서 쭉 정렬되어있는 음악 목록들을 보며 감탄했다. 핸드폰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경수는 갤러리를 눌렀다. 갤러리를 보면 이 핸드폰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러개의 폴더 가운데 기본폴더를 눌렀다. 풍경사진, 음식사진 등등 여러사진이 있었다. 계속해서 옆으로 스크롤을 넘기다 경수는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 ……! " 이것은 분명 찬열의 사진이였다. 경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자세를 벌떡 일으켰다. 분명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사진 속의 인물은 찬열이였다. 사진 속의 찬열은 책상에 엎드린채로 고개를 돌리며 웃고있었다. 찍은 날짜는 3월 16일이다. 지난주에 찍은 사진이였다. 화면을 계속 옆으로 넘기니 일상속에서 남이 찍어준 사진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찍은 것 같은 셀카도 있었다. 이 핸드폰은 찬열의 휴대폰임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의 사진이 이렇게 많을리가 없었다. 갤러리 중간중간에 찬열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 많았다. 경수는 찬열의 휴대폰을 자신이 갖고있다는 사실에 급격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의 핸드폰을 이렇게 막 보아도 될까……. 자신이 찬열의 사생활을 막 훔쳐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자꾸만 보고싶었다. 찬열의 핸드폰을 통해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핸드폰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졌다. 에라 모르겠다. 안봤다고 발뺌하면 끝 아닌가? 경수는 침을 한번 꾹 삼키고 다시 갤러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뒤로 넘길수록 찬열의 예전사진들이 나왔다. 작년 겨울쯤에 찍은 걸로 보이는 사진에서, 찬열은 완전히 까만 흑발이였다. 그의 흰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경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였다. 저 깊숙히 파묻혀있던 찬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현재의 옅은 갈색머리도 잘 어울렸지만 까만 머리도 정말 멋있다고 경수는 느꼈다. 그 외에도 머리가 길었을때, 머리를 잘랐을 때. 겨울에서 여름으로. 조금 앳되보이는 찬열의 사진과, 가족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변해왔던 찬열의 흔적들을 보며 경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음만으로는 찬열에게 한걸음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경수는 찬열의 사진들을 갖고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간직한채로. 남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 사진을 맘대로 보내는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양심따위 보다는 찬열에 대한 마음이 더 컸다. 그를 알고싶어하는 욕심은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점점 커져만 갔다. 경수는 잠시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결심한듯 블루투스를 켰다. 그리고 찬열의 사진들을 모두 선택하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송시켰다. 두 핸드폰의 액정에 떠있는 전송중이라는 글씨를 보며 경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래도 괜찮을까…? '전송 완료' 하얀색 글씨가 뜨자마자 경수는 자신의 핸드폰의 갤러리에 들어가 보았다. 찬열의 사진들이 모두 저장되어있었다. 경수는 한장한장 다시 넘겨보며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찬열의 사진들을 손에 넣었다는 뿌듯함에 걱정들은 눈치챌 새도 없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느껴보는 행복이였다. 경수는 따로 새로운 폴더를 만들어 그 안에 찬열의 사진들만 넣어놓았다. '새 폴더'라고 쓰여있는 폴더 이름이 어쩐지 딱딱해보였다. 경수는 폴더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자판을 눌러 새로 고쳐 넣었다. orbit. 경수가 써넣은 폴더의 새로운 제목.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든 숨겨둔 이름이였다. 찬열을 중심으로 다가갈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경수와 비슷했다. 그리고 퍼펙트 오르비스가 생각난 것도 이유였다. 게다가 영어로 써넣으니 어딘가 있어보이기도 했다. 나의, 나의…… 오르비스. 경수는 조심스럽게 입으로 말해보았다. 그리고는 완료 버튼을 눌렀다. 입으로 말할때의 발음은 실크처럼 부드럽게 흘러갔다. 이름만 말해도 온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까지도 과분했지만 경수는 마지막으로 딱 한가지만 더 갖고싶은 것이 있었다. 찬열의 전화번호. 지금까지 말할 용기가 없어서 번호가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럴때마다 경수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찬열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번호를 알 수있었다. 경수는 딱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찬열의 핸드폰으로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경수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경수는 걸려온 번호를 전화번호부에 저장했다. 이름을 무어라고 저장할까 하다, 그냥 박찬열이라고 저장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만약 찬열만 특별하게 저장해놓았다가 남들이 보았을 때 이상한 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딱딱한 '박찬열' 세글자만 써넣고 경수는 저장을 끝냈다. 쭉 나열되어있는 다른사람들의 번호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박찬열이라는 이름만이 경수의 눈에 띄었다. 별 다른 특징이 없어도 특별한 존재는 한눈에 알아볼 수있는, 어찌보면 본능이였다. 겨우 전화번호부에 한명이 추가되었을 뿐이였지만 아주 묵직하고 커다란 존재감이 핸드폰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수는 가슴이 미친듯이 쿵쾅거렸다. 이제 이 번호로 전화를 걸면 찬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였다. 11개의 나열된 번호는 찬열과 경수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한시라도 빨리 찬열에게 전화기를 갖다주고 싶었다. 내일 학교에서 만나면 주는게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일 찬열에게 핸드폰을 갖다준다면 혹시라도 자신이 훔쳐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럴바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몰래 돌려주는게 나을 것 같다. 경수는 찬열의 핸드폰으로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가장 가깝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주로 1번에 많이 저장했으니까. 찬열의 1번은 누굴까? 혹시 여자친구라도 있다면 조금 많이 씁쓸할 것 같았다. 경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귀에다 갖다대었다. 받는사람이 설마 여자는 아니겠지……. 뚜르르- 몇 번 신호음이 갈 동안 경수는 맨처음 해야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핸드폰을 주웠는데 단축번호 1번으로 전화드려봤어요…, 아니면, 혹시 주변에 핸드폰 잃어버린 분 계세요? 아, 이것도 아닌것 같다. 경수가 재빠르게 무어라 말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건너편에서는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박찬열? " ……. " - 폰 찾았냐? 막 니 주머니에 있었다거나 그런거 아니지? " 아……그게 저…. " 순간 경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자니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경수가 잠시동안 말이 없자, 건너편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야? " 그…쪽은 누구신데요. " - 나 김종인인데. " 저는… 에?! " 경수는 황급히 귀에서 전화기를 떼고 액정을 보았다. 대놓고 '김종인'으로 전화가 걸려져 있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경수는 머리를 쥐어잡았다. 왜 처음 전화걸때 못본거지? 왜! 이제와서 전화를 끊기도 애매한 상황이였다. 자책할수록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린 경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 그게…… 나 도경수야. " - 뭐? 경수는 눈을 딱 감고 정체를 밝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종인의 소리는 조금 놀란 목소리였다. 혹여나 종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경 " 내가 이 핸드폰을 주웠는데… 단축번호 1번이 바로 너였어. " -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어? " 지, 지금? " 시간을 보니 벌써 12시가 지났다. 원래 지금 시각에는 나가면 안되는게 원칙이지만, 부모님 몰래 나가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 박찬열 걔 핸드폰 없으면 못사는 애야. 지금쯤 카톡 못해서 돌아버렸을걸. " 그럼 내가 찬열이네 집으로 갖다줄게. " 경수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나갈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초조한 움직임에 경수는 정신없이 방을 돌아다녔다. 지갑, 지갑을 어디에 놨더라……. 지금 이시간에 찬열을 만날 생각에 제정신이 오락가락하다. 그 와중에 전화기 너머로 종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전화하면 너네 집 앞으로 나와. " ……너가 우리집으로 온다고? "
갑자기 어쩔줄 모르는 애처럼 부산한 경수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경수는 종인의 말이 무슨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뭣 때문에 오는거지?
- 응. " 왜? " - 너 박찬열네 어딘지도 모르잖아. - 그리고 원래 너같은 애들은 밤 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해. " ……. " - 그러니까 잔말말고 나와. 응? 종인은 경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뚝 끊어버렸다. 경수는 통화가 끊긴 핸드폰 액정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종인은 경수에게 대답을 할 기회조차 주질 않았다. 또 지난번처럼 종인의 '응?'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싫다고 말을 해보려 해도 자꾸 멈칫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꼭 싫은것만은 아니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인은 경수를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였다. 너같은 애들은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말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엄연한 배려이자 호의였다. 그 이유때문에? 아니면 찬열을 만나러 가는 길이여서? 둘 중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겉으로는 부정하면서 속으로는 싫어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였다. 자신의 속내가 그렇다는 걸 깨닫자마자 경수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수는 손등을 볼에 슥 대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따듯해진 열기를 손등으로 느꼈다. 경수는 뜨거워진 얼굴을 뒤로하고 겉옷과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는 두 대의 핸드폰을 양손에 모아 꽉 쥔채로 침대위에 가만히 걸터앉아 종인의 전화를 기다렸다. 요즘 들어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시도때도 없이 자꾸만 심장이 떨려온다. 그것은 마치 높은 하늘에서부터 빠르게 고공낙하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였다. |
| 잡담 |
항상 달아주시는 댓글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하트⊙♡⊙.. 고마워유 오르비스는 잔잔하게 천천히 굴러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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