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Killer
05
학연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택운 때문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방을 빙빙 돌아다니던 학연이 멈춰섰다. 희미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약간의 파열음과 함께, 학연의 방 안으로 택운이 우당탕 하고 넘어졌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학연이 급하게 무릎을 굽혀 쓰러진 택운을 살폈다.
"이게 무슨… 택운아, 괜찮아? 정택운!"
택운이 눈을 깜박였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며 택운이 팔로 상체를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학연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뿍 묻어나왔다. 새초롬하고 커다란 눈망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늘 그랬다. 당당하고 멋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차학연은 항상 택운의 앞에서는 별것없는 꼬마아이처럼 무너졌다.
택운의 말 한 마디에 울고 웃었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다칠까 애지중지 보물단지처럼 정택운을 아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택운은 가까스로 학연의 눈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 듯 택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실패했습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순간적으로 학연은 자신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실패라는 단어가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단순히 임무를 실패했다고 화가 나는 감정이 아니었다. 정택운이 임무를 실패했다는 것은 이재환을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이재환이 택운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차분한 택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학연의 목구멍까지 숨이 턱 막혀 올라왔다.
열에 열이었다. 확률을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이재환은 정택운에게 반했을 것이다. 설사 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재환의 흥미는 끄는 데 성공했음이 틀림없다.
상대가 이재환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말 그대로, 좆됐다. 학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택운의 얼굴을 내보이지 않으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노력들이 한번에 허사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떡하려고 그래, 운아…"
"면목 없습니다. 실패해서 죄송…"
"지금 니가 실패했다고 혼내는 걸로 보여? 그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이재환… 니 얼굴 봤으니까 어떻게든…"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가보겠습니다."
택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멍하니 꿇어앉아 있는 학연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학연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방에는 그 혼자였다. 학연의 눈에 물기가 돌았다. 커단 눈에 눈물이 맺혔다.
"…끝까지 차갑구나, 택운아."
학연이 조그맣게 웃었다. 애써 짓는 웃음이라는 것이 확연히 티날 만큼 웃음은 처연했다.
상관없었다. 정택운이 자기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차학연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질 수 없다면 그냥 너를 위해 살겠다고, 얼마든지 너라면 다칠 준비도, 각오도 되어 있다고 그렇게 차학연은 생각했다.
맹목적인 사랑일 뿐이라고, 혹은 그저 과거에 대한 동정과 연민, 책임감이 뒤섞인 감정일 뿐이라고 욕한다 해도.
-
상혁이 모퉁이를 돌았다. 키가 큰 인영이 어둠 속으로 복도를 따라 기척없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벽에 바싹 붙어 발소리를 죽였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가는 와중 문득 이곳은 막다른 복도라는 것을 생각해낸 상혁이 잠깐 멈춰섰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잠깐 딴생각을 하던 도중 눈 앞의 인영이 사라졌다.
"…내가 잘못 봤나?"
복도 끝까지 걸어간 상혁이 앞에 있는 벽을 만졌다. 두드려 보았지만 시멘트로 꽉 찬 텁텁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까워 죽겠네, 입맛을 다신 상혁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위에서 부스러기가 살짝 떨어졌다. 상혁이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천장과 다를 바 없었다. 왜 부스러기가 떨어진 거지, 상혁이 까치발을 들고 긴 팔을 뻗어 천장을 만져보았다.
"……!"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누르자 뚜껑이 열리듯 아래로 천장이 제껴지며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철저하게도 숨겼네, 상혁이 중얼거렸다.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천장을 닫은 상혁이 우와,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딱딱하고 까만 대리석과 빨간 양탄자가 어우러져 세련되고 사람을 압도하는 엄숙함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 건물과 달리,
천장 위쪽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위쪽에도 복도가 있었는데, 자그만 시냇물이 복도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편안하고 보드라운, 자연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곳도 있구나, 상혁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반대편에 학연의 방 문과 같은 원목 재질로 만들어진 문이 있었다.
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상혁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눈치챘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열었다.
상혁의 눈이 커졌다.
남자였다. 키가 컸지만 마른 몸은 금방이라도 휘청일 듯 가파른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중이었는지 하얀 와이셔츠 단추는 모두 풀려 있었다.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날렵하고 갸름한 얼굴은 당황의 빛을 역력히 내비치고 있었다. 새초롬하게 눈꼬리가 올라간 크지 않은 눈은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유순해 보이지만은 않는 인상이었음에도 동그랗게 커진 눈과 발갛고 통통한 입술은 이상하게도 사랑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일종의 처연함이 배어 있는.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은 윤기있게 빛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 상혁이 비쳤다.
쭉 뻗은 다리와 탄탄한 배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선을 자랑하듯 아른거렸다. 옷깃을 잡고 있는 손가락 또한 그를 닮은 듯 섬세하게 뻗어 있었다.
"…도대체 여길 어떻게,"
"…당신이, Beautiful Killer?"
"누구야 너, 누군데-"
"한상혁, 스물 세 살. 조직에 들어온 지 일 년 정도 됐어요."
택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한상혁이라면 학연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신입인데 실력도 상당하고 머리도 좋다고, …그런 류의 칭찬이었다.
택운이 상혁을 쭉 훑어보았다.
큰 키에 딱 봐도 탄탄한 몸, 순해 보이는 눈꼬리지만 이상하게도 전체적인 인상이 순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장난스러운 소년 같은 저 웃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택운의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고 재미있는 놀거리를 찾은 듯 꾸러기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상혁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택운이 말했다.
"…차학연한테는 비밀로."
"뭐야, 역시 둘이 친한 사이였구나. 알았어요, 까짓거 비밀로 하지 뭐."
"…… 알았으면 그만 나가 주지."
"근데 맨입으로?"
"…?"
"맨입으로 숨겨줘?"
택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래서 어린 것들이 싫다. 같잖은 호기심으로 사람을 매번 귀찮고 곤란하게 만든다.
작게 한숨을 내뱉은 택운이 상혁의 능글맞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뭘 원하는데?"
"아,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문 밖에 서 있던 상혁이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세게 문을 닫은 상혁이 택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정택운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신이 빚은 피사체마냥 고혹적이며, 티 없이 하얬고, 치켜뜬 눈은 묘하게 섹스어필을 불러일으켰다.
와, 이거 정말… 한상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름이 뭐예요?"
"알아서 뭐해,"
"차갑긴… 뭐 이름이야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시간날 때 종종 나랑 만나주면 돼."
"…지금 나랑 장난해?"
"장난 아닌데? 나 그쪽 맘에 들어요. 첫눈에 반했어요, 아 이건 좀 오글거리나?"
"정신나간 새끼."
욕하는 것도 섹시하네, 상혁이 작게 웃었다. 택운이 하아, 하고 긴 탄식을 뱉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차학연도 모자라서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애새끼도 죽자고 달려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순간의 호기심일 것이라고 택운은 생각했다. 어찌됐든 몇 번 만나주는 걸로 이 일이 덮일 수 있다면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택운에게는 이재환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눈앞의 꼬마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는 거다. 택운이 입을 뗐다.
"…그래, 그럼."
"와, 알았어요. 나 입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택운은 후회했다. 들어주지 말 걸…
-
재환이 눈을 떴다. 몇 번 깜박였다. 익숙한 곳이었다. 거의 쓰지 않았던 자신의 침실에 눕혀져 있었다.
아침인 것 같았다. 부신 눈을 비비며 옆을 돌아보니 김원식이 서 있었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리니 허벅지 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얼굴을 찡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붕대로 감겨 피로 물든 허벅지가 보였다.
아, 그랬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마치 아주 먼 일인 것 마냥 재환의 머릿속에서 반복재생됐다.
정택운이었다. 그래, 정택운이었어. 재환이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던 하얀 아름다움이 그려졌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만면에 피어올랐다.
"…그, 였습니까."
"Beautiful Killer…"
"역시 그였군요."
"물건 하나… 제대로 건졌어."
원식이 재환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출혈로 인해 핏기가 없는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묘한 모순을 이루었다.
"아름다워, 정말. Beautiful Killer… 그 이름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피조물이었어."
"…정신차리십시오, 보스. 한낱 킬러에게 그렇게 마음을 뺏겨버리시면,"
"너도 알잖아, 나 미친놈인 거. 미쳤어, 나. 말 그대로 killer, 위험하지.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워.
Beautiful Killer, 위험한 아름다움에 미쳤어. 돌아가는 길은 없어…, 내 말… 이해가 돼?"
안녕하세요, 돌쇠입니다 :)
5편을 들고 찾아왔어요!
이번 편에는 자그마한 이벤트가 있는 거 아시죠? 과연 얼마나 많은 분들이 맞춰 주실지 기대됩니다 흐흐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ㅠㅠ 댓글들도 글 쓰다가 잘 안 써질 때마다 한 분씩 전부 꼭꼭 다시 읽고 있어요!
독방에서 와주신 모든 분들, 암호닉 블루밍 님, 레오정수리 님, 초롱초롱 님, 정모카 님, 쥐엔티 님, 카니발 님 전부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