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Killer
04
하얀 손목에 둘러진 시계를 얼핏 쳐다보았다. 새벽 한 시 사십 분,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한 번 더 권총과 단도를 확인한 택운이 의자에 올라서서 방 천장을 밀었다. 천장이 창문마냥 두 방향으로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새카만 도화지에 새하얀 물감을 칠해 놓은 듯 별도 없는 하늘에 덩그러니 달이 혼자 자신을 빛냈다.
건물 옥상에 올라서 천장을 닫은 택운이 표정을 찡그렸다. 달이 너무 밝아…
굳이 달이 이렇게 밝지 않아도 어둠에는 익숙한지라 충분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밝은 빛은 적에게 발각되기가 쉬웠다.
칫, 자그맣게 투덜거린 택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VF가 있는 쪽을 보았다. 점처럼 조그만, 희미하게 빛나는 금색의 건물이 일렁였다.
택운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얼굴과 몸에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기분 좋았다.
택운의 프라임 시간대는 늘 새벽이었다. 밤잠이 없기도 했지만 택운이 유난히 새벽 공기를 좋아하는 탓도 있었다.
고요하다, 이 세상에 자신밖에 살아숨쉬는 생명체가 없는 듯한 그 적막. 살갗에 닿아오는 차갑지만 상쾌한 그 기류는 택운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쾌락이었다.
"…-하…,"
바람에 녹아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택운은 잠시 생각했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다리는 가벼웠고 힘없이 늘어뜨린 팔은 바람에 휘날렸다. 사뿐사뿐 복잡하게 얽힌 건물들을 익숙하게 타고넘으며 택운이 따뜻한 숨을 뱉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늘 잠이 오지 않으면 재환은 책상 앞에 앉아 푹신한 의자에 등을 최대한 기대고 창문 밖을 바라보고는 했다.
처음 BR에서 킬러를 보냈을 때도 그랬다. 재환은 밤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고요하고 서늘한 밤공기, 적막하고 조용한 밤거리.
그날따라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약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쳐지나가며 달빛과 함께 유유히 흔들렸다.
이홍빈을 만나고 온 것이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슨 대가를 받을 수 있죠?'
재환이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곤란해하는 것을 보는 일은 사실 꽤나 재밌는 일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는.
다시 웃음이 났다. 이홍빈, 아직 멀었어 넌…
재환이 웃느라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재환의 동공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졌다.
-눈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재환은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닫혀 있던 창문은 언제 열린 건지 활짝 열려 있었다. 창틀에 올라서 재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그, 가 확실했다. Beautiful Killer.
한밤중인데도 새하얀 피부는 창백하다는 느낌을 줄 만큼 빛이 났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서늘한 바람에 그대로 휘날리고 있었다.
쭉 뻗은 우아한 신체는 군살 하나 없이, 거의 조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딱 맞는 까만 정장자켓에 하얀 와이셔츠, 딱 맞는 가죽바지.
정말 무난하기 짝이 없는 차림이었으나 그것마저 그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하나의 악세서리처럼 느껴졌다.
자그만 입은 슬쩍 올라간 입꼬리와 적당히 발간 입술 때문인지 창백한 얼굴에 사랑스러움을 띄게 했다.
크다고만은 할 수 없는 눈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채였는데, 그 눈꼬리가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을 풍겼다.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반사되는 그 흑요석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질식할 것만 같이 빨려들었다.
긴 팔은 자신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 팔의 끝에는 하얗고 섬세한 손가락이 존재했고, 보드라운 조각 같은 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총이 거기에 있었다.
달빛이 Beautiful Killer를 비췄다.
사람인가? 사람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환영이 아니라면…
자신도 모르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킨 재환의 목울대가 작게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로지 달빛만을 의지해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숨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존재하는 단어 중 그 느낌을 한 번에 표현할 적합한 단어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찰칵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멍하니 정택운을 바라보던 이재환이 정신을 차린 듯, 입가에 웃음이 걸쳐졌다.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줄이야. 제대로 건졌는데, 물건.
순수한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감탄이 빚어낸 웃음이었다. 이홍빈 말이 사실이었군, 전부.
고작 한 사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자조했었는데, 그게 가능할 정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차학연이 그렇게 꽁꽁 싸매고 아무한테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군. 재환이 중얼거렸다.
"Beautiful Killer."
"……."
"정택운."
택운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술은 떼지 않았다. 재환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소문대로 정말… 아름답네. Beautiful Killer? 나 죽이려고 왔어?"
순간 택운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재환이 있었던 자리에는 총탄이 박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대로 뛰어오른 재환의 오른발이 정확히 택운의 오른손을 가격했다. 총이 손에서 떨어졌다.
건물 아래로 총이 박살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택운이 허벅지 안쪽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창틀에서 재환의 방으로 사뿐 내려온 택운이 가볍게 점프하더니 바로 뒤의 벽을 딛고 뛰어올랐다. 재환은 피하지 않았다.
택운이 단도를 치켜들었다.
손목이 잡혔다. 재환의 왼손이 택운의 오른 손목을 움켜쥐었다. 엄청난 악력에 손에 칼을 제대로 쥐고 있는 것도 무리일 정도였다.
"이 정도야? Beautiful Killer, 실망… 큭!"
택운의 왼손이 재환의 오른쪽 허벅지를 정확히 가격했다. 그리고 꽂아넣었던 단도를 한 번에 빼냈다. 울컥, 하고 피가 터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택운이 잡혔던 오른손을 빼내려고 했다. 순간 택운의 입에서 어,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재환의 왼손은 그대로 자신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었다.
재환이 오른손을 들어 택운의 왼 손목마저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택운의 뒤통수가 벽에 메다꽂혔다.
그 충격으로 택운의 두 손에서 단도가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택운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이재환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길이가 짧은 단도라, 급소에 정확히 꽂혀야 즉사하는 것은 맞았다. 허벅지에 꽂았을 때부터 재환의 죽음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처라면 걷는 것이 어려워야 했다. 택운의 시선이 재환의 허벅지로 향했다. 피가 흘러나와 바지를 한 가득 적시고 있었다.
다시 택운의 시선이 재환에게 향했다.
이재환과 눈이 마주쳤다. 이재환은 웃고 있었다.
"놀랐어?"
"…… !"
"아까 어, 하는 거 들었어. 목소리 예쁘던데, 한번만 말해주면 안돼?"
택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택운이 다리를 들어 재환의 상처를 걷어찼다. 그 순간 약해진 재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택운이 창을 등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와, 아프다."
"……."
"말 좀 해. 응? 목소리 듣고 싶다니까."
택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택운의 머릿속에는 단도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단도가 전부 재환의 발 밑에 있었다.
재환이 한 발짝, 움직였다. 택운이 뒷걸음질쳤다. 창틀이 발을 가로막는 것이 느껴졌다.
재환이 또 한 발짝 움직였다.
"뭐해,"
"……."
"말해 보라니까, 택운아."
택운이 생각했다. 이 새낀 미쳤어. 까만 눈동자에 어린 광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박제라도 당할 것 같은 기분에 택운이 창틀 위에 올라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식혔다.
택운이 뛰어내렸다.
-
재환은 한참 동안 택운이 사라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입가에선 비싯비싯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다.
머리가 몽롱해지고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그 전에 흘린 피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출혈량이었음에도,
이재환은 싸움 도중에는 절대로 정신을 잃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가버렸네, Beautiful Killer. 재환이 중얼거렸다.
의자에 앉았다. 그제서야 축축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위험한 상태까지 갈 수 있었다. 재환이 책상 위에 올려진 벨을 눌렀다.
몇 분 후에 원식이 노크를 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원식은 대답이 없자 문을 열었다.
"…보스, 이게 무슨…"
"아, 원식…"
"보스, 괜찮으십니까? 보스!"
자신을 불러대는 원식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귓가에 택운의 작은 어, 가 맴돌았다.
정택운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손목을 잡혀 눈이 마주쳤을 때, 아주 가까이서 본 정택운은 고양이 같은 처연함이 있었다.
점점 눈앞이 뿌얘졌다. 의식이 사라져갔다. 재환이 눈을 감았다.
-
상혁이 학연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뭐가 그리 초조한지 쉴새없이 방을 돌아다니는 학연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히, Beautiful Killer가 오늘 떠난 것이 틀림없다. 언제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네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상혁이 졸린 눈을 부볐다.
콰당탕, 그리고 아주 잠깐의 비명소리.
상당히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한상혁은 그것을 귀신같이 캐치해냈다.
잠이 한 번에 모두 달아난 것 같았다.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대곤 숨을 죽였다.
'너… 무슨… 야?…'
'……실……다.'
상혁이 들을 수 있는 건 뚝뚝 끊긴 단어 몇 개 뿐이었지만, 대화라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은 이곳뿐이다. 대화가 끝나면 이곳으로 나오겠지 하고 상혁은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났다. 더 이상 대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나오지 않는 거지, 상혁이 살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문 뒤쪽으로 돌아나가 꺾이는 복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와이셔츠 자락이었다.
"…찾았어, Beautiful Killer."
안녕하세요, 돌쇠입니다 :) 4편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너무 감사드리고 있어요ㅠㅠ 독자님들이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항상 힘이 나고 있습니다 :)
독방에서 와주신 모든 분들, 암호닉 고양이 님, 초롱초롱 님, 여루 님, 약장수오빠 님, 라빅스 님, 구름 님, 블루밍 님, 형광 님, 레오정수리 님, 쥐엔티 님, 카니발 님!
전부 감사드립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