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 특별편
부제 : 그 남자의 이야기
그 남자의 이야기, 첫 번째.
"내가 깨워달라고 했잖아!"
"내가 그렇게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러도 안 들은 게 누군데!"
"들을 때까지 말했어야지!"
아침부터 전쟁입니다. 오늘 10시에 미팅이 있는데, 늦잠을 잤거든요. 그녀가 내 주위를 맴돌며 그러게 자기가 깨울 때 곱게 일어나지 그랬냐며 타박을 합니다. 안 그래도 급하게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까지 들리니 곧 미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봅니다. 9시 55분. 환장 하겠네요.
"병신아, 티 거꾸로 입었잖아!"
"남자친구한테 병신이 뭐냐. 말 예쁘게 안 해?"
나는 그녀에게 대꾸하며 그 자리에서 팔만 빼고 티를 돌려 다시 입습니다. 내 모습을 보던 그녀가 자신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난리를 칩니다.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닐텐데 왜 저러나 모르겠어요. 그녀가 머저리 셋과 내가 있는 하숙집에 들어온 것도 벌써 3년 전 일입니다.
"아악! 제발! 내 눈은 소중하다고!"
"내 청각도 소중하거든? 소리 그만 질러라."
"싫은데!"
나는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모아 잡습니다. 입을 잡힌 그녀는 잔뜩 심술이 난 얼굴을 합니다. 누가 사랑스러운 애인 아니랄까봐 하는 짓마다 아주 예뻐 죽겠어요. 나는 한 손으로 코드를 챙겨 들고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내 말을 잘 들으라는 나름의 신호예요. 한 번만 더 소리 지르면 이따가 자몽 워터 없는 줄 알아. 그녀는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 번 없어, 하고 못 박는 내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그녀의 입을 놓아줍니다.
"뽀뽀."
"무슨 뽀뽀야. 빨리 나가기나 해!"
애초에 그녀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의 볼에 도둑 뽀뽀를 하고 현관으로 도망 갑니다. 신발을 구겨 신으며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데,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 몰래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립니다. 거 봐요. 그녀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그녀와 함께 산 지는 3년이지만, 알고 지낸지는 10년입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논문도 쓸 수 있어요.
"57분! 너 진짜 지각이야!"
"나 너무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잘 할 수 있지?"
"내가 애냐? 그럴 일 없을 거니까 나가, 빨리!"
"김태형 아직 자잖아! 목소리 낮추라고!"
"당장 꺼지라고!"
"내가 더러워서 간다, 더러워서!"
그녀의 사랑이 담긴 배웅에 나는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섭니다. 나는 김남준의 취향을 반영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돌계단을 내려가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도어락을 풀고 현관문을 엽니다.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내가 다시 들어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깜박한 게 있어서."
"뭔데!"
그녀는 당장이라도 방에 들어가 내가 놓고 온 물건을 가져다 주겠다는 듯이 몸을 집 안으로 틀고는 다급하게 묻습니다. 아쉽게도 내가 깜박한 건 그게 아닌데 말이에요.
"사랑해."
그녀는 김빠진 얼굴을 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트립니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합니다. 대답.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나도, 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야죠.
그 남자의 이야기, 두 번째.
오랜만에 남자 넷이서 농구를 한 판 하기로 합니다. 예전에 자기도 농구하겠다고 설치다가 손에 깁스를 했던 그녀는 집에 남고요. 12월인 만큼 추운 날씨지만 우리 넷은 땀까지 흘리며 뛰어다닙니다. 서로 밀치고, 발 밟히고, 팔꿈치로 찌르고. 우리는 점수 내기에서 진 김남준과 김태형이 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 집으로 복귀합니다. 한 손에는 그녀를 위한 치킨도 들고요.
"아 노오오오력! 노오오오력!"
"......."
"아 노오오랗구나 싹수가! 훠우!"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라니. 우리는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대로 굳습니다. 집이 떠나가라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튼 까닭에 그녀는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신 나게 따라 부르며 춤을 추네요. 사실 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걸레를 보아하니 집청소를 하려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미루어 봤을 때, 저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춤을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틉니다.
"...뭐 하냐? 넌 저게 또 보고 싶어?"
"귀엽잖아."
"......."
나는 여전히 화면에 눈을 고정합니다. 옆에서 김태형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만 넘어가기로 합니다. 내 눈에만 귀여우면 됐죠. 뭘 더 바랍니까.
그 남자의 이야기, 세 번째.
"내 모자 본 사람!"
"네 옷장 두 번째 서랍에 있을 걸."
"감사!"
거실이 떠나가라 자신의 모자를 봤냐고 묻던 김태형은 그녀의 말에 감사!를 외치며 방으로 들어갑니다. 늦잠 자서 빗지도 못하고 까치집 지은 머리가 참 볼만해요. 김태형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전정국이 잔뜩 부은 눈으로 절규를 합니다. 얘도 늦잠을 잔 모양이에요.
"와이셔츠 다리는 거 깜박했어!"
"내가 해서 옷장에 걸어놨어."
"오..."
전정국은 순식간에 환한 얼굴을 하고는 방으로 들어갑니다. 김남준이 화장실에서 칫솔을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녀 앞에 칫솔을 흔들어 보입니다.
"내 칫솔 네가 바꿨어?"
"응. 칫솔은 두 달마다 바꿔줘야 된대. 네 건 두 달도 더 된 것 같아서."
"고맙다."
"고마우면 자몽 워터 사."
"......."
그녀는 자몽 워터 일진이에요. 맨날 우리에게서 뜯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만큼 그녀가 우리를 챙겨주거든요. 또 그녀는 김남준의 방에서 군것질거리나 물건들을 곧잘 빼오고는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김남준은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걸 파괴하는데다 수습도 불가능한 마이다스도 아닌 마이너스의 손 덕에 금방 더러워지는 김남준의 방을 그녀가 일주일에 한번씩 치우거든요. 그녀는 이 하숙집의 엄마같은 존재예요. 이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그녀가 들어간 부엌에서는 큰 파열음이 들립니다. 나는 급하게 소리가 난 곳을 향합니다.
"... 미안."
"......."
"내가 나중에 똑같은 걸로 사올게. 진짜."
처참하게 산산조각 난 머그컵이 바닥에 쓰러져있습니다. 작년에 일본 출장을 갔다가 사온 쿠마몬 머그컵이니 똑같은 걸 사오겠다는 그녀의 말은 실현 불가능합니다. 목숨을 다 한 머그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나는 머그컵을 멍하니 보다 문득 그녀를 살핍니다.
"다친 데는 없어?"
"응. 나는 괜찮은데 문제는 이거..."
"그럼 됐어. 내가 치울게."
그녀가 이 집의 엄마라면 나는 콩쥐입니다. 머그컵 조각은 모아놨다가 나중에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줘야겠어요. 우리의 이별은 아주 슬플 겁니다.
그 남자의 이야기, 네 번째.
"헐! 아가다!"
카페에 들어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아기를 보자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그녀와 달리,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섭니다. 그녀는 아기만 보면 환장을 하지만, 나는 질색을 하는 편입니다. 아기는 나와 맞지 않아요. 내 인생에 있어서 아기는 그녀 하나로 충분합니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그녀는 애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초콜릿 바를 들고 아기를 유혹합니다.
"이거 주까요? 갖고 싶어? 그럼 손 내밀고 주세요- 해보세요. 손 모으구! 이케!"
얼씨구. 애교도 부립니다. 나한테 저거 반만 해줘도 소원이 없을텐데요. 언젠가 그녀는 '너만 보면 아기들이 도망가니 절대 아기들에게 말을 걸지도, 다가가지도 말라' 고 경고를 한 적이 있어요. 웃깁니다. 애들이 도망가는 게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죽어도 안 드나 봐요. 하지만 콩쥐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닥치고 그녀의 말대로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 밖에요. 잔뜩 경계하고 그녀를 보던 아기는 이제 두 눈을 빛내며 "주떼여-" 하고 두 손을 모아 내밉니다. 그러면 그녀는 앓는 소리를 하며 아이의 손에 초콜릿을 쥐여줍니다. 뒤에서는 아기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보고 있어요.
"감쟈함미다!"
"윤기야, 들었어? 방금 감사합니다 한 거? 오구, 예뻐."
감사합니다, 하는 말 하나에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아이를 안아든 그녀가 뒤를 돌아 나에게 묻습니다. 애 부모님께 민폐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잠시, 갑자기 아기를 안아 든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 설레는 겁니다. 이게 뭐라고.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생각을 고칩니다. 그녀를 닮은 딸이라면 아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원래 난 이렇게 말을 쉽게 번복하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에요.
그 남자의 이야기, 다섯 번째.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허공에 앞뒤로 흔듭니다. 할 말이 있나봐요. 뭔데. 내 물음에 그녀는 기다렸다는듯이 입을 엽니다.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지금 뭐 하냐."
"뭐. 왜."
"너 어디가서 눈 그렇게 떴다가는 테러 신고 받는다. 시각 테러 신고."
"......."
두 눈에 빛을 내고 미스코리아처럼 깜박이며 묻던 그녀는 몇 초간 나를 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립니다. 여자친구한테 말이 그게 뭐냐. 존나 너무하네. 입도 내밀며 투덜댑니다. 글쎄요. 어젯밤 자몽 워터 한 모금 마셨다고 넌 정말 개자식이라며 손가락질 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합니다.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지 말라고."
나는 속으로 절규를 합니다. 대체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자아들 중 어느 새끼가 지껄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곱씹어봐도 오그라드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내밀던 입을 집어넣고 입꼬리를 슬슬 올립니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면 그녀는 알겠어, 하고 대답하며 만족한 얼굴로 방을 나갑니다. 참 단순해요.
그 남자의 이야기, 여섯 번째.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작업이 손에 안 잡히더니, 그녀의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어 젖히고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스토리처럼 고등학교 때부터 그녀를 쭉 좋아했던 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노벨상에서 순정 분야를 만들어 나는 노벨 순정상을 받아야해요.
같은 반 애들 이름도 못 외우던 내가 한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 없는 그녀를 아는 이유는 단순히 앞집이라는 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등교하다 마주치기도 하고, 가끔 엄마가 전해주랬다며 반찬을 주고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내 성격 때문에 그저 얼굴과 이름만 아는 상태로 고등학교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참, 손꼽게 좁았던 내 인맥 중 하나인 전정국과 그녀가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나중이었습니다. 둘은 부모님끼리 친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붙어다닌 케이스인데, 밖에서는 서로 쪽팔리다며 아는 척도 안 하더라고요.
고2 겨울이었습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셨고, 고집이 센 나는 아버지와 유독 크게 싸웠습니다. 못할 말들을 쏟아낸 그날 밤, 나는 방문을 잠그고 씩씩대며 잠을 청했습니다. 어쩐지 그날 따라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더라니,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서는 하늘로 가셨습니다. 주무시는 사이에 뇌출혈이 일어난 겁니다. 당신의 마음에 말로 쏴댔던 화살들이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어머니와 형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을 때, 나는 감히 그 앞에서 울 수가 없었어요.
나는 작곡 노트를 덮고 교과서를 폈습니다. 내일 죽을 듯이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어머니는 드디어 철이 들었다며 좋아하셨고, 몇달 뒤 치룬 모의고사에서는 본 적 없는 숫자들이 떴습니다. 독서실에서 노래 가사가 아닌 수학 공식과 사투를 벌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밤, 그녀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꼭 할말이 있다면서요. 우리는 아파트 단지에 있던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왜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건지 물어봐도 돼?"
"그거야..."
"죄책감 때문에?"
"... 뭐?"
아버지 얘기였습니다. 내가 당황하자 정말 겨우 그것 때문이냐고 되묻던 그녀에 나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말 하느냐고. 네가 겨우라고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눈도 꼼짝 안 하고 있더니 자기가 할 말만 하던데요.
"나는 네가 정말 원하는 걸 했으면 좋겠어."
나는 다시 그녀에게 독설을 퍼부으려던 참이었어요. 지금까지 학교에서 마주쳐도 인사 한 번 안 하다 왜 이제와서 아는 척이냐고,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에요. 그게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거든요. 내 아버지께 그랬던 것처럼요.
"아마 아저씨도 그걸 원하셨을 거야."
그녀는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습니다. 화면에는 내가 가사를 적던 노트의 일부가 찍힌 사진이 있었어요. 나는 그제야 그녀가 가끔씩 동네 정자에 앉아 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줬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는 요즘에 보기 드문 학생이라며 그녀의 칭찬을 하곤 했었어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런 그녀에게 내 자랑을 했었던 겁니다. 내 작사 노트를 몰래 찍어 가 보여주면서요.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어요. 병원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한번 울지 않던 나는 그날 밤 모든 눈물을 쏟아낸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 내가 울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던 그녀는 어색하게 나를 안아주며 해가 뜰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내 곁을 지켰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늘 절대적인 내 편이었어요. 나는 가끔 그녀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 나는 그때부터 그녀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노벨 순정상이 정말 생긴다면 그 상은 내 것이에요.
그 남자의 이야기, 일곱 번째.
"영화 보러 가자! 오늘은 내가 살게!"
그녀의 기분이 좋아보입니다.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면 나도 좋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겉옷을 챙겨입고 장갑과 목도리를 챙깁니다. 서둘러 거실로 나가면 그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고 있어요. 나는 현관문을 여는 그녀를 불러 세웁니다.
"또 따뜻하게 안 입지."
"아, 맞다."
나는 챙겨온 장갑을 그녀의 손에 끼우고, 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두릅니다.
"너무 꽉 조이는 것 같은데."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야."
"... 빨리 뒈지라고?"
"잘 아네."
말 참 예쁘게 합니다. 그녀는 한쪽 장갑을 벗더니 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면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말합니다.
"여기가 더 따듯해."
뭐, 그렇다네요.
그 남자의 이야기, 여덟 번째.
"오우, 세상에. 와... 어머... 우와!"
"......."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영화를 보자고 할 때부터 눈치채야 했어요. 표도 자기가 끊어오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들고 온 영화표를 보니 떡하니 청불 표시가 있었습니다. 잔인하거나 무서운 영화 말고, 그거요. 영화가 절정에 다다르면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추임새를 넣기 바쁩니다. 이게 판소리도 아니고 추임새를 넣는다고 배우들이 연기를 더 신명나게 하는 것도 아닌데 꼭 저럽니다. 나는 그녀의 입에 팝콘을 쑤셔 넣습니다.
"으... 은그으?"
"영화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어."
"... 맛있다. 더 줘."
"......."
입이 터지도록 넣었는데, 그새 다 먹고 또 달랍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도 토끼도 아닌 돼지랑 연애를 하는 것 같습니다.
"뭘 그렇게 봐. 얼굴에 팝콘이라도 묻었어?"
"예뻐서."
"그건 나도 알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요.
그 남자의 이야기, 아홉 번째.
감탄사를 멈추지 못하던 그녀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쫓겨났습니다. 대신 영화의 뒷 이야기는 우리가 쓰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아침부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는데, 그녀는 굳이 내 팔을 흔들며 깨웁니다. 내가 겨우 눈을 뜨면, 그녀는 대뜸 자신의 목을 내 앞으로 들이밉니다.
"보여?"
"......."
"보이냐고."
"어. 예쁘네."
"지금 장난하냐? 너 때문에 출근 못하게 생겼잖아!"
그녀는 어젯밤 그녀에 목에 남겼던 키스마크를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킵니다. 어깨도 아닌 목! 하면서요.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나는 잠에서 깨려고 눈을 비비며 대답합니다.
"목도리 매고 다녀. 내가 네 몸까지 챙기네."
"지랄 말고!"
그녀는 거울을 보며 울상을 합니다. 이제 학교는 어떻게 가냐며 발도 쿵쿵 구르고 칭얼이더니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째려봅니다. 뭐, 하고 물으면 그녀는 잔뜩 불만인 얼굴로 내게 말합니다. 나 학교에서 잘리면 너 때문인 줄 알아. 웃깁니다. 그게 왜 내 탓입니까. 내가 한 짓만 생각하고, 자기가 예쁜 건 생각 안 하나 봐요. 이건 순전히 그녀의 잘못입니다. 억울하면 예쁘지나 말든가요.
그 남자의 이야기, 마지막.
사방에 방음벽 뿐인 작업실에 이골이 나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딱히 어딘가를 가려던 것도, 무언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던 터라 멍하니 서서 빗소리만 듣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고 그녀에게 카톡을 보냅니다.
[비가 온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오전 12:27
그저께였던가.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시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걸 보고 있자니 생각이 나던데요. 오늘은 밤늦게 들어올 거라는 내 말에 어깨도 눈썹도 축 늘어트리던 그녀가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던지. 나는 다시 시를 읽습니다. 문학 소녀가 된 기분도 들고 나쁘지 않습니다. 핸드폰에서는 띵-. 알림음과 함께 새 메시지가 뜹니다.
[ ∧,_,∧
(`・ω・´) n__ ❤
η > ⌒\/ 、_∃
(∃) / ∧ \_/
\_/ \ 丶
/ ノ
/ / /
( ( 〈
\ \ \
(_(__) ] 오전 12:29
... 이런 건 어디서 찾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 대체 뭐라고 검색해야 이런 걸 찾을 수 있는지 감도 안 와요. 나는 한숨을 쉽니다. 해탈한 나는 그래도 바로 답장이 와준 거에 고마워하기로 합니다.
내가 아무리 표현을 해도, 그녀는 표현은커녕 눈치조차 못 챌 때가 많습니다. 토끼 잠옷을 즐겨 입는 그녀 때문에 전정국은 그녀를 가리켜 토끼라고 부르고는 하는데, 그건 틀린 표현이에요. 오히려 내가 토끼고 그녀는 거북입니다. 앞뒤 안 보고 달려가다, 겨우 한 발 두 발 떼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가끔은 답답하기도, 허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아 잘못 보냈다! 저거 아니야!] 오전 12:32
[사랑해, 라고 말했더니 좀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오전 12:32
[사랑해 윤기야] 오전 12:33
그건 그녀도 그녀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속도가 느린 것뿐이에요. 너무 느려서 누구도, 심지어는 그녀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모르면 또 어떤가요. 내가 아는데. 나는 웃으며 핸드폰만 보다가 막 작업실로 들어온 김남준에게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 빛만 쬐고 웃는 게 공포 영화인 줄 알았다며 뒤통수를 한 대 맞습니다. 맞으면 또 어떤가요. 이렇게 좋은데.
가끔은 거북이도 아닌 달팽이 같은 그녀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기꺼이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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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정말 많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다음 글은 암호닉 확인과 메일링 공지가 나갈테니 거기서 또 보아요! 그래도 이 말은 빼먹지 말아야지.
사랑합니다.
BGM : Jin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