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무슨 한겨울에 수영장이야."
말이 나오자 마자 권이는 살짝 눈쌀을 찌푸린다.
"한겨울은 아니지, 아직 11월인데."
"아니야, 침 뱉으면 바로 얼던데, 한겨울 맞지."
"아, 형. 더러워요. 꼭 예를 들어도."
눈치 없이 박경은 또 꼬투리를 잡고, 은근이 귀하게 자란 표뚱땡이 거기에 또 꼬투리를 잡느라,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진다.
애새끼들. 도움이 안 되긴.
요새 이상하게 자꾸 괴롭혀야겠단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
별 약속 같은 게 없어도 항상 붙어다닐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최근 들어서는 우리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든 조금은 변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박경이 조용히 오더니 김유권이 나한테 약점 잡힌 거라도 있냐고, 왜 그렇게 자꾸 놀려대냐고 물어왔다.
그런 거 없는데. 대답해놓고서야 최근들어 김유권이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박경한테 오히려 되물었더니, 벙찐 얼굴로 새끼야, 니가 자꾸 갈구잖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랬나.
이상한 일은,
그 대화 이후로 이상하게 자꾸 김유권이 인상 쓰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시도때도 없이 든다는 거다. 어쩌면,
박경 말대로 그 전부터 그래왔는데, 이제서야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자각한 걸지도.
어쨌거나,
중학교도 곧 졸업인 터라 한가로운 머릿속에 갑자기 김유권은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곧바로 물속에서 허우적 거리면서도 자꾸 매달려 오는 권이의 찌푸린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상상을 하니 자연스럽게 그 표정이 덧씌워져서 권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참 후에야 알아챈 건지 슬쩍 보고는 기분 나쁘게 쪼개지 말고 수업이나 들으라면서 자기는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내가 웃고 있었나.
"나, 수영장 갈래!"
몇 번이나 수영장으로 화제를 돌려 설득하다가 삼천포로 빠지기를 십여 분.
조용히 빨대로 요구르트를 빨고 있던 태일이 형이 뜬금없이 외치는 말에 이탤빠돌이인 표뚱땡이가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박경도 수영에는 자신 있다면서 결국은 주말에 가는 걸로 분위기가 쏠린다.
이럴수가. 내가 쪼꼬맣고 쓸데없다고 놀려만 대던 태일이 형이 알고보니 우리를 움직이는 검은 손이었다니.
어쨌거나 점점 굳어가는 권이 표정을 곁눈질 하며 나는 박경이랑 또 신나게 니가 수영을 잘 하네, 내가 수영을 잘 하네 열을 올리며 수영장 굳히기를 하고 있었다.
"지훈아, 이거 불어줘."
탈의실에 들어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경을 꺼내는 사이에
옆 라인에서 옷을 갈아입은 태일이 형이 총총 걸어오더니 웬 비닐주머니를 표지훈한테 내민다.
"뭐에요?"
"튜브."
"튜브?"
"튜브."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는 지훈이 말에 재확인까지 해준다.
크크큭. 크캬캬캭. 아. 흐흐흡, 존나, 이거 진짜 대박. 크크크킄큭. 튜브래. 대박. 크크크큭.
옆에서 이게 뭔가 싶어 같이 보고 있던 박경이 빵터쳐서 락커를 탕탕 쳐가며 웃어제껴대다가 이탤빠의 살인눈빛을 받고는 입을 막고 크큭댄다.
크크크큭. 근데 웃기긴 웃긴다.
"태일이 형. 실내수영장에서는 튜브 못 써요."
"어? 못 써?"
"네. 실내 수영장에서는 튜브 안 돼요."
"아... 나 수영 못 해서 튜브 있어야 하는데."
하며 금새 시무룩해진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옆 라인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은 권이가 나타나고,
그럼 부표 달아줄게요, 표지훈이 태일이 형을 달래는 소리가 들려오는 사이에 문득 시선이 권이의 다리를 향한다.
곧고 하얀 다리.
여름에 자주 봐왔던 다린데, 오늘따라 눈길이 간다.
집에서 우태운 새끼의 살찌고 털털한 다리만 봐와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돌리고 락커를 잠근 뒤 애들을 따라 수영장으로 들어간다.
"아, 존나 박경 이 허세덩어리."
"새끼야, 너나 나나."
"그건 아니죠, 형은 여기 끼려고 하면 안 돼요."
오자마자 힘 빠지기 전에 전에 얘기한 내기시합을 하자는 자칭 물개 박경의 말에 바로 일렬로 왕복 자유형을 했는데
표지훈이랑 내가 벽을 찍고는 내가 먼저 들어왔네, 니가 먼저 들어왔네 한참을 다투고서야 보니 박경이 들어오다가 철푸덕 대더니 벽을 몇 미터 두고는 서버렸다.
존나 지가 물개라더니 왕복도 한 번 못하는 병신 새끼.
야, 내가 쉬는 동안 뒷다리 근육이 살짝 죽어서 그래.
뒷다리는, 니가 짐승이냐. 표뚱땡이랑 나랑 둘이서 신나게 갈궈대니 박경이 자기가 잠수는 진짜 최고라며 끝까지 허세를 부린다.
경주하는 사이 옆에 앉아서 발장구 연습을 하고 있던 태일이 형을 표뚱땡이 정성스레 부표로 포장을 하더니 물에 띄워준다.
아, 태일이 형 발이 안 닿아. 귀여워귀여워, 뭐 이런 동굴 효과음이 들리더니 어느새 저쪽으로 가서는 무슨 아들 데려온 아빠마냥 수영을 가르쳐 준다.
저 조합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단 말야. 쟤네 이상해.
마찬가지로 옆에 앉아서 발장구치던 권이는 은근 배려심 있는 박경이 잠수 시합을 하자며 자연스럽게 다가가니까 주춤대면서도 물 속으로 들어온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들어가는 거야.
하나, 둘, 셋.
물 위로 빼꼼이 올라온 바가지 머리가 혼자 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물 위에서 박경과 나는 눈길을 교환한다.
"야, 이 미친 놈들아!"
태일이 형이 부표와 혼연일체가 되어 수영장 반대편에서 한가로이 발장구를 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때
나머지 넷은, 어색했던 권이까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장난을 쳐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수영장에 울려퍼지는 힘찬 외침.
잠시 한가롭게 배를 띄우고 부유생명체에 빙의하고 있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니
소리를 친 권이는 뒤돌아선 채 벽에 붙어 있고 표뚱땡과 박물개는 좀 떨어진 물 속에서 낄낄대고 있다.
그러고선 수면 위로 올라오는 물개의 앞발에는 남색 수영복이.
"아, 씨발, 가져오라고!"
권이는 벽에 붙은 채 뭐 어쩌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고 있다.
아, 저새끼들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급하게 다가가니 수영을 못하니 애들한테 달려들지도 못하고,
수영장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권이가 울상을 짓고 있다.
권이를 괴롭히려고 온 건데,
당황한 모습, 찌푸린 얼굴 보고 싶었던 건데, 이건
어쩐지 유쾌하지 않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수영복을 손에 들고 돌리며 낄낄대는 박경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수영복을 뺏어 권이한테로 간다.
손닿는 곳까지 가도 권이는 벽 쪽으로 붙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울 것만 같은 얼굴이다.
...아이씨.
"김유권, 이 쪽 봐봐."
"...씨발, 좋냐?"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다.
"수영복 가져왔어. 몸 돌려봐."
"...몸 돌리면 다른 사람들한테 다 보이잖아. 그냥 줘."
줄 것처럼 해놓고 도망갈까봐 걱정이 되는지 그냥 그렇게 돌아선 채로 있다.
"혼자 입다 넘어져. 돌아봐, 가려줄게."
하면서 더 붙어선다.
물 속으로 수영복을 집은 반대편 왼손으로 권이 허리를 건드린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바짝 붙어봐.
여전히 울상인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이 얼핏 서리더니, 결국은 돌아선다.
왼쪽 허리에 닿았던 손이 천천히 몸을 돌리는 권이를 따라가 등을 감싸 안는다.
어렸을 적부터 키는 계속 비슷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조금 달라진 모양이다. 바짝 붙어선 권이는 어느새 내 턱까지 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그래서였나.
요새들어 자꾸만 괴롭히고 싶었던 게.
"야... 너무 가까워."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다 보이잖아."
부끄러운 건지 눈길을 피하는 권이 얼굴에서
그래도 울 것 같은 표정은 사라진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던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물 속에서 허벅지가 맞닿으니 권이가 슬쩍 엉덩이를 뒤로 빼는 게 느껴진다.
"내가 수영복 들고 있을게, 두 손으로 내 어깨 잡고. 내가 뒤로 살짝 물러나면 다리 하나씩 들어서 입어. 알았어?"
"...응."
"두 손으로 내 어깨 두르라고."
권이가 주춤대면서 눈치를 보더니 물 속에서 앞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들어 내 어깨에 올려놓는데,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목을 껴안는 것 같은 자세가 되어 버린다.
야, 너네 무슨 에로 영화 찍냐. 어흐, 형들 야해요.
두 잉여들이 뒤에서 깐죽대니 신경 쓰였는지 권이가 빨리, 라고 낮게 내뱉은 소리가 쇄골을 간지럽힌다.
수영복을 양손으로 잡아 벌려 내리면서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니
권이가 내 어깨를 잡아 몸을 지탱한 채로 발을 하나씩 넣어 수영복을 입는다.
아래 보지마.
눈도 못 마주치고 말을 하는데,
권아, 그 말 안 해도 난 지금 네 부끄러워하는 얼굴만 보고 있어.
수영복을 다 입은 권이는 여전히 가까운 나를 밀어내고
그대로 수영장을 나가버렸다.
권이 등을 감싸안은 손을 떼는데,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손이 조금만 더 내려갔더라면...
...아니, 내려갔더라면, 뭐 어쩌자는 거야, 우지호.
무슨 생각하는 거냐.
...이게 다 박경, 표지훈, 저 놈들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잖아.
박경이 자꾸 나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게 틀림없다. |
- 야, 너 그거 뭐야. - 뭐. - 그 장난, 니가 먼저 하자고 그런 거잖아. - ...... - ...... - ...... - 우지호. - ...... - 너 김유권 좋아하냐? - ...무슨 헛소리야, 새끼야. 김유권을 좋아한다니, 무슨 헛소리야. 걔랑 나랑 벌써 몇 년을 알고 지내 왔는데. 그리고, 남잔데. - 그래. 그럼 뒷통수는 괜히 맞아줬네. 앞으로 등하교길 조심해라. - 꺼져. 그런데 이상하게도 박경한테서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가 김유권을 좋아하게 된 모양이다. |
* 매치업 보면서 쓴 거라 오타나 어색한 표현이나 쓸데없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음. 아잉.
문제시 김돼지는 미녁신 꺼.
* 아저씨 글이랑은 이어서 보셔도, 안 이어서 보셔도 상관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