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의 태양 OST- Tears in heaven
경성 비밀결사대 10
written by 스페스
출입문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내자, 와인병을 정리하던 호석은 출구로 고개를 돌렸다. 호석의 시선이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윤기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손으로 향했다. 비어 있는 윤기의 손을 보고 씩 웃은 호석이 그에게 물었다.
"줬어? 쌈닭이 받았어? 집으로 찾아갔어?"
"하나 물어볼 때마다 와인 한 잔이다."
"그깟 와인쯤이야."
윤기가 체념한 듯 바에 걸터앉자, 호석이 유리잔 세 개를 꺼내 연달아 잔을 채웠다. 그리고는 윤기 앞으로 하나씩 올리며 다시금 물었다.
"집에 찾아갔어?"
"아니. 만났어. 쌈닭 집 앞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윤기쪽으로 호석이 두 번째 잔을 옮겼다.
"뭐라고 하고 줬는데? 형이 여자 집을 찾아가다니... 이거 특종인데. 쌈닭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지."
"아직 한 잔도 다 못 마셨다."
윤기가 손에 든 유리 잔을 흔들었다. 아직 반도 넘게 남은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그러나 호석은 개의치 않고 잔을 윤기 쪽으로 두며, 재차 물었다.
"답이나 해봐."
"뭘?"
"진짜 왜 줬어?"
"... 그냥."
한참 뜸을 들이던 윤기의 답은 고작 그뿐이었다. 바에 몸을 기댄 호석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윤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좀 자신한테 솔직해져 봐. 난 그래도 형이 요즘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서 좋은데."
"그럼 지금까지는 뭐 죽어 있었냐?"
"어. 산송장이었지. 어딘가에 발목 잡힌 것처럼 살았잖아. 사람이 좀 희망적으로 살아야지."
"이런 시대에 희망이라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지?"
"시대가 암울할수록 더 희망적으로."
말을 마친 호석은 바에서 걸어 나와 축음기로 향했다. 이내 경쾌한 음악이 카페 안을 가득 울렸다. 호석이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며 윤기에게로 다가왔다. 그럴듯한 몸짓이었다.
"카페 주인이 아니라 댄스홀 사장을 해야겠네. 그럼 내가 너 신고할 텐데. 불법 댄스홀 운영으로."
"그래서 카페 하잖아. 형이 신고할까봐."
윤기의 말을 받아친 호석이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와인을 병째 올렸다. 윤기가 병을 훑어보다가 이내 호석을 응시하자, 그가 덧붙였다.
"근데 쌈닭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미쳤냐? 누가 뭘 좋아해."
"이야. 이렇게 정색하는 거 보면 사랑에 빠졌다는 거거든. 형이 쌈닭한테."
"야, 사랑은 무슨. 빚진 게 있어서 그렇다니까."
"뭐, 마음의 빚? 형 같은 사람들이 나중에 꼭 딴 놈한테 뺏기고 후회한다고."
호석의 말에 윤기는 말없이 와인을 홀짝였다. 그리고 쌈닭의 집 앞에서 본 종로 의원 의사를 떠올렸다. 꽤나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윤기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둘은 어떤 관계일까. 윤기가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 와인잔을 매만졌다. 친한 오누이? 애인? 그러다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쭈뼛거리며 자유연애시대에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 윤기였다. 그럼 애인은 아니겠지. 윤기는 쌈닭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 자신을 보며 슬쩍 미소 짓고 있는 호석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잔을 깨끗이 비운 윤기가 갑작스럽게 호석에게 물었다.
"아, 태형이는?"
"참 빨리도 찾는다. 이래서 늦바람이 무섭다고.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은 안중에도 없잖아."
윤기가 카페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없네. 지민인가?"
"형 동생 데려다주러 갔어."
"우리 집에?"
"응. 내가 형네 집 어디인지 알잖아."
호석의 말에 윤기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괜히 태형이 때문에 영업 방해한 거 아니냐?"
"아니야. 지민이도 그냥 하루 놀라고 했어. 걔도 형 동생이랑 동갑인데 뭔가 안쓰러워서."
"그럼 다행이고. 난 가봐야겠다. 김사장님이 태형이랑 셋이서 같이 저녁 하자셔서."
윤기가 의자에서 내려와 가볍게 손인사를 건네고는 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호석이 윤기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형, 근데 계속 아버지랑 같이 살 거야?"
호석의 물음에 윤기가 뒤를 돌았다.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집 두고 어디를 가?"
"그냥. 진짜 아들도 경성에 돌아왔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그래. 집에서 쫓겨나면 너 댄스홀로 쫓아내고 내가 여기 주저앉아야겠다."
윤기는 호석을 향해 씩 웃고는 스페스를 빠져나갔다.
* * *
태형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윤기에게 달려들어 물었다.
"줬어? 애인?"
"아, 정호석."
자신의 행선지를 말할 사람이라고는 호석뿐이었다. 윤기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태형에게 덧붙였다. "애인 아니야." 곧 구두를 벗고 실내로 들어온 윤기의 시야에 거실 소파에 앉은 지민이 보였다. 지민이 멋쩍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형, 지민이가 나 데려다줬어. 내가 우리 집 오자고 했지."
윤기를 따라 거실로 걸어온 태형이 자랑하듯 말했다. 뻘쭘하게 서있는 지민을 보고, 윤기가 손을 까딱거렸다. 자리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편하게 놀다 가라고 덧붙인 윤기는 곧 2층으로 연결된 나무 계단을 올랐다. 계단 앞에 선 태형이 윤기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형, 아빠 늦는다고 우리 먼저 저녁 먹으라고 했대. 셋이 같이 먹자."
"밥 생각 없어."
태형은 윤기가 올라간 2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지민을 향해 걸어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자한테 차였나 봐. 우리 형."
지민이 피식 웃었다. 태형이 끌고 오는 통에 집 안까지 발을 들였지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마치 적진에 들어온 듯한 긴장감에 지민은 계속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태형의 집은 본정통 번화가에서 두 블록쯤 안쪽, 일본인 거주지에 위치했다.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지민은 자신의 집에 같이 가자는 태형의 권유를 처음에는 마다했으나, 두 번째엔 승낙했다. 어쨌든 집에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은 지민은 태형의 눈치를 보며 흘끔흘끔 집안을 살폈다. 카펫이 깔린 거실과 높은 천장, 화려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지민은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화려한 자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위로 백자를 포함한 몇 개의 도자기와 정갈하게 다듬어진 분재가 놓였다. 시선은 곧 한 쪽 벽면에 멈췄다. 붓글씨가 적힌 족자와 도금한 훈장, 그 옆으로 흑백사진이 차례로 걸렸다. 지민의 시선을 눈치챈 태형이 사진에 대해 말했다.
"맨 위에 있는 건 나도 모르는 아빠 사진, 나 동경 갔을 때 찍었나 봐."
사진 속 중년 남성이 옆구리에 칼을 찬 일본 고위 관료와 나란히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곧이어 태형이 손가락으로 다음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태형의 아비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과 어린 태형 그리고 여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저기 밑에 엄마한테 안겨있는 애가 나."
"어머니 예쁘시다."
"그치? 울 엄마 예쁘지."
"...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아, 나 이제 배고프다."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태형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미안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갓 차려진 음식 냄새가 거실까지 풍겨왔다. 태형은 지민을 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기다란 팔 인용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앞으로 하나씩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태형은 일하는 여인을 향해 씽긋 웃었다. 긴 식탁에 찬이 한가득이었다. 지민은 눈으로 찬찬히 식탁을 훑었다. 평소에 보지도 못했던 음식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지민은 간신히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렸다.
밥을 한 수저 야무지게 퍼먹은 태형이 지민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 지민의 수저가 그대로였다. 고개를 숙인 채 하얀 쌀밥에 시선이 고인 지민을, 태형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에 남은 밥알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웅얼거리며 물었다.
"왜 안 먹어?"
지민이 태형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입맛이 없어."
지민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말했다.
"그래? 그럼 이거라도 먹어봐."
태형은 갈비찜이 담긴 접시를 지민 쪽으로 밀었다. 눈앞에 놓인 찬을 바라보던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훈장이 부엌 조명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거렸다. 차마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태형은 금세 고기 한 점을 지민의 밥 위에 얹었다. 그런 태형의 행동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은 지민이었다. 수저에 끄트머리에 새겨진 학 모양부터, 식기, 테이블 어느 것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점이 지민의 속을 더욱 거북하게 했다. 불편한 얼굴로 밥알을 씹는 지민을 보고 태형이 물었다.
"맛이 없어?"
"아니. 맛있어."
"그치? 이모! 지민이도 밥 맛있대요."
입안에 밥을 가득 넣은 태형이 발음을 뭉개며 말했다. 자리를 피해주려고 거실에 앉아있던 여인이 태형을 향해 웃어 보였다. 지민은 국을 몇 번 뜨더니, 결국 밥을 반이나 남겨버렸다. 태형은 식사 내내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나 이제 가야겠다."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카페 가봐야지."
"사장님이 오늘은 안 들어와도 된다고 했잖아."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나 갈게."
"그래? 아쉽다. 꼭 가야 되면 어쩔 수 없지."
태형이 재빠르게 물을 들이켜고는 지민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지민의 만류에도 태형은 기어코 문을 열고 지민을 쫓아 나왔다.
현관 밖으로 일본식 정원이 펼쳐졌다. 대문까지는 한참이었다. 밖은 금세 어둑해졌으나, 정원 곳곳에 켜진 불빛이 운치를 더했다. 지민은 정원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곧 대문으로 이어진 돌길을 걸었다. 태형이 홑겹 옷을 여미며 지민 옆에 붙어 섰다. 말없이 길을 걷던 지민은 정원의 중간쯤 가서 태형을 향해 물었다.
"경성에는 왜 돌아왔어?"
"음... 공부도 나랑 안 맞고, 아빠랑 윤기형도 보고 싶고. 또 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게 뭔데?"
"나? 변사."
태형의 답을 들은 지민이 황당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정말 하고픈 게 변사가 맞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태형이 목을 가다듬고 순간 표정을 고쳤다. 이윽고 자리에 멈춰 선 그가 진지한 낯으로 대사를 뱉었다.
"어머니, 우리의 혼인을 허락해 주세요. 아, 그러나 뺑덕어멈 같은 완용의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안 하고 다마내기만 하염없이 썰고 있는 것이었다."
"와, 너 되게 잘한다."
진심이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대사를 뱉을 때만큼은 평소와 다른 눈빛의 태형이었다.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진 태형이 그새 천진한 얼굴을 되찾았다.
"잘했어?"
"어. 진짜 잘 해."
"그럼 우리 다음에는 영화 보러 가자."
"영화?"
"응. 단성사로."
지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대문 앞에 다다랐다. 지민은 태형에게 절대 나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는 철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태형은 철문을 잡은 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앞만 보며 걷던 지민이 슬쩍 뒤돌아보자, 지민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태형이 손을 흔들었다. 지민 또한 웃으며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길로 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자동차 전조등이 내뿜는 빛에 금세 골목이 환해졌다. 자동차가 제법 가까워지자, 지민이 팔을 들어 부신 눈을 가렸다. 이윽고 지민을 지나친 검은 자동차가 천천히 멈춰 서는 소리와 동시에 철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걷던 지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이 열리고 차량이 방금 전 지민이 나온 저택으로 들어섰다. 지민은 철장 사이로 저택 안 풍경을 바라보았다. 멈춰 선 자동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멀리 떨어져 있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사진으로 보았던 태형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남자가 자동차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태형이 와락 남자의 품에 안겼다. 지민은 한동안 부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곧 어둠 새로 걸어들어갔다.
지민 또한 그리운 이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 형을 생각하자 안 그래도 불편했던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형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쉽사리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오늘 밥을 반이나 남긴 것도 비단 태형의 집이 자아내는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지민의 식사량은 적은 편이었다. 형의 마른 얼굴이 생각날 때면, 목구멍이 콱 막힌 듯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답답한 기분에 지민이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어깨가 따끔거릴수록 지민은 두 발에 더 힘을 주었다.
* * *
단성사 앞은 오늘부터 상영할 영화의 간판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화가들이 그림 위로 영화 제목을 색칠해 넣는 것으로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영화 속 얼굴을 그대로 붙여놓은 듯 꽤나 훌륭한 솜씨였다. 인부가 사다리를 잡고 내려오자 그의 손에 들린 페인트 통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괜히 옷에 쏟아질까 봐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나를 사장이 건물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를 쫓아 빈 영화관 건물로 들어서자, 사장이 단성사의 운영 수칙을 읊었다.
"저기 가운데까지는 1등석. 거기부터 요 끝까지는 2등석. 2등석 표를 사고 쥐새끼처럼 몰래 1등석에 앉는 녀석들이 꼭 있다고. 아, 여긴 임검석."
남자가 맨 뒤 가죽의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간혹 일본 순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영화에 반일 요소가 없는지 검열하는 좌석이었다. 빈 건물은 꽤 적막했다. 1등석 뒤로 기다란 나무 의자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저는 뭘 하면 돼요?"
뒷짐을 쥔 채, 영화관을 둘러보던 사장이 답했다.
"영사 기사 옆에서 필름 좀 정리해주고, 가끔 매표소 직원 안 나오면 표도 판매하고. 아, 오늘은 영사기 좀 돌려줘."
"영사기요?"
"기사 놈이 배탈이 났다고 못 온다지 뭐야. 그냥 천천히 두 시간 동안 돌리면 돼. 뭐 총독부에서 공인한 자격이 없으면 영사기를 만지면 안된다는데 이미 검열도 끝났고. 어차피 낮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서 좀 틀려도 티도 안 나."
2층 맨 뒤에 별도의 간이 영사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장에게서 영사기 재생 방법을 배우고, 필름을 정리하는 사이 개점시간이 다가왔다. 실내 전방에 난 유리창으로 극장 내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극장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시간임에도 꽤 많은 모던걸, 모던보이들이 빈 좌석을 채웠다.
실내가 제법 시끄러워졌다. 이윽고 사장이 내게 수신호를 보냈다. 배운 대로 필름을 넣고, 영사기를 돌리자, 흑백의 무성영화가 화면 위로 흘러나왔다. 곧 한구석에 서있던 변사가 마이크를 붙잡고 목소리를 냈다.
한창 영화가 상영될 무렵, 누군가 영사실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모습에 놀라, 손을 멈출뻔했다. 갑자기 영화가 느리게 돌아가자, 변사가 화면을 보며 큼큼 소리를 냈다.
"아니, 쌈닭이 여기 있었네. 깜짝이야."
민윤기였다. 놀란 듯한 표정과 말투가 다소 작위적이었다. 멍한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가 옆으로 간이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어? 여기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데."
"난 저렇게 시끌벅적한 데서 어깨 비비면서 영화 보는거 별로라서."
"일반인 출입 금지예요."
"표 사 왔어. 이거면 영사실 들어올 수 있다던데."
민윤기가 주머니에서 1등석 극장표 10장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흘끗 보면서도 손은 내내 영사기를 돌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 나 그냥 영화 보러 왔는데? 나도 쌈닭이 여기 있어서 심장 떨어질 뻔했어. 기가 막힌 우연이네."
"윤기씨 연기가 더 기가 막힌 데요."
그가 당황한 낯으로 실소를 터뜨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감이 상당하네. 누가 보면 내가 쌈닭 쫓아다니는 줄 알겠어."
"아니면 말고요. 평소에 영화 보는 거 좋아하나 봐요. 이런 대낮에."
"영화에 조예가 깊은 편이라고. 내가."
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에게 대답하랴, 변사 눈치를 보랴 혼이 나간 내 모습을 보더니 그가 웃어대기 시작했다.
"넌 진짜 상상을 초월한다. 매 순간."
"이건 또 무슨 시비예요."
"일을 해도 어쩜. 나와봐."
곧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밀어내고 영사기 레버를 붙잡았다. 남자는 아주 안정적으로 영사기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규칙적으로 기계를 돌리느라 어깨가 뻐근해지던 참이었다.
흑백 화면이 어두워졌다 밝아질 때마다 남자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영화처럼 그와 만난 지난 날들이 천천히 재생되었다. 남자가 영사기를 돌리며 고개를 틀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얼굴 닳아."
"네?"
"내 얼굴이 영화야? 화면 안 보고 자꾸."
"안 봤는데."
남자가 영사기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근데 그 날 옷이요. 왜 준 거예요?"
"... 됐다. 영화나 봐. 바보야."
외화는 조선 영화보다 더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편이었다. 말을 탄 남자 셋이서 사막을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 서부 활극은 시간이 지나 남녀 주인공의 애정씬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차, 극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반면 영사실 안은 적막뿐이었다. 우리 둘의 자리가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숨도 못 쉬고 굳은 것 마냥 화면만 응시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지금쯤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화면으로는 입맞춤이 한창인데, 머릿속은 하얘지고 온통 남자에게로 신경이 곤두섰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눈동자만 민윤기에게로 돌리려던 찰나였다.
빤히 나를 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흑백 화면이 어두워지자 암전과 함께 사라진 그의 얼굴이 곧 밝아진 빛에 다시 드러났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몇 번이나 어둠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진 내가 헛기침을 뱉었다. 그 또한 침묵 끝에 입을 뗐다.
"아... 영화가 참. 하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금 귀여운 입모양이 드러났다. 그가 다시 영사기를 돌리는 데 열중하며 궁시렁거렸다.
"아, 요즘 영화는 어린애들도 보러 오는데 너무 좀. 왜 선조들이 서양문화를 막는지 다 이해가 된다니까."
"영화에 조예가 깊으시다면서요. 저런 장면 처음 본 것 처럼 얘기하네요."
"어? 그게. 봐도 또 이게 굉장히 색다르다고. 아니, 적응이 안 돼.. 그게 아니라. 그냥 좀 그래."
당황한 낯으로 어버버 말을 뱉는 그였다. 처음으로 이 사람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점심 같이 먹을래요?"
갑작스레 극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안 돌리고 뭐 해요?"
남자가 영사기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느라, 영화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놀란 얼굴로 급하게 레버를 돌리며 말했다.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느라 그런 거야. 쌈닭이 밥 먹자고 해서 내가 손을 놓친 게 아니라고."
* * *
경성제대 병원에서 허탕을 친 남준은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종로 의원으로 향했다.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납실에 선 간호사가 남준을 맞이했다. 남준은 실내를 천천히 훑고는 간호사를 향해 물었다.
"최근에 어깨에 총상 입은 환자 있었나요?"
머뭇거리는 간호사에게 남준이 명함을 내밀었다. 매일신보 편집장. 김남준. 글귀를 읽은 여자가 환자 명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접수한 목록에 최근 2주 내에 총상을 입은 환자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여자의 대답에 돌아가려는 찰나, 간호사가 남준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밤 늦게 오는 환자들도 간혹 있는데, 그런 경우는 수납부를 거치지 않고 의사 선생님이 바로 진료를 하셔서요."
그녀의 말에 남준은 수납실 앞 나무 의자에 기대앉았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김석진이라는 의사가 당직을 맡는다고 했다. 남준도 얼핏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남준의 맥박이 점차 빨라졌다. 당직의 대부분을 도맡아 하는 젊은 의사, 그리고 접수를 거치지 않은 환자. 분명 무언가 있다고 느낀 남준이었다. 만일 의사만 제대로 진술한다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남준은 사건을 하나하나 다시 곱씹었다. 석진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머지않아 석진이 마스크를 벗으며 복도로 걸어나왔다. 남준은 수술복을 입은 석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곧 손을 씻고 나온 석진이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진료실에 들어서자, 남준이 그의 뒤를 따랐다.
진료실에 마주앉은 두 남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석진은 남준의 명함을 받고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일신보. 김남준. 이윽고 책상에 명함을 내려놓은 석진이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아뇨. 취재차 방문했습니다. 여쭤볼게 있어서요."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이시길래. 몸이 편찮은 줄 알았는데."
석진이 보조의자에 앉은 남준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렸다. 곧 남준이 석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근 2주 내로, 여기 총상 입은 환자가 왔었나요?"
"환자명부에"
"간혹 밤늦게 오는 환자는 접수를 거치지 않는다고 해서요."
남준이 석진의 말을 잘라먹었다. 석진이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남준을 올곧이 응시하며 답했다.
"등이나 팔을 다친 환자는 몇 명 있었지만, 어깨에 그것도 총상 입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진실인가요?"
"거짓말 할 필요가 있나요?"
받아친 석진을 보며 남준이 찬찬히 웃었다. 곧 석진이 책상에 놓인 남준의 명함을 다시금 눈으로 훑으며 입을 뗐다.
"김남준 편집장님. 요즘 취재 범위가 넓어졌나 봐요. 아니면 겸직을 하시나."
"겸직이라뇨?"
"아니, 기자님이 총상 입은 환자를 궁금해하시는 건 처음이라. 저도 좀 신기해서요."
"취재원이 잘 협조만 해준다면 기사의 범위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겠죠."
남준이 무릎에 놓아둔 모자를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재 수첩을 펼칠 필요조차 없을 만큼 간단한 인터뷰였다. 그러나 남준은 종로 의원에 방문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분명 석진에게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빠져나갈 무렵, 석진이 다시 남준을 불러 세웠다.
"김남준 기자님?"
남준이 고개를 돌렸다. 손에 쥔 신문을 흔들며, 석진이 웃었다.
"기사 잘 보고 있어요."
매일신보였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남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늘 궁금했습니다. 여기 적힌 이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석진이 신문의 날짜 밑으로 적힌 한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집장. 김남준.
남준은 석진의 의중을 알고자 했으나, 아무리 둘러봐도 빈틈이 없었다. 남준이 억지로 미소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금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외롭지 않으세요?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럴 리가요."
남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남준을 에워쌌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남준은 신문사로 돌아가는 내내 석진의 말을 곱씹었다. 늘 상대의 의중을 꿰뚫고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남준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분명 패배였다. 석진의 손에 쥔 패를 알 수가 없었다. 도리어 자신이 석진에게 놀아나는 듯했다. 남준은 입술을 꾹 문 채, 바쁘게 신문사로 걸음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준은 편집장 실에 있는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소년이 남준의 등장에 재빨리 일어나 목례를 했다. 고개를 들며 씩 웃는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안녕하세요. 김태형입니다."
남준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태형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은 태형이 재차 고개를 꾸벅이자, 남준은 보조개가 패이도록 웃었다.
"반갑다."
"저도요."
태형의 원래 생각대로라면 이 신문사의 편집장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야 했다. 변사를 하겠다고 분명 어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말했건만, 아버지는 할 일을 준비해뒀으니 일단 가라는 말뿐이었다. 더군다나 태형과 윤기를 앞에 두고 아버지가 총 두 자루를 내미는 통에 태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총을 소지해야할 만큼 위험한 일이냐며, 잔뜩 겁을 먹은 태형을 보고 윤기가 웃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윤기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태형을 구슬렸다. 본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전부 태형을 위한 것이라고. 태형은 어쩔 수 없이 신문사에 발을 들였다. 첫 출근이니만큼 매일신보 앞까지 아들을 데려다준 아버지 덕에, 태형은 도망갈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그러니 신문사고, 기자고 어느 것 하나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온 사무실에서 태형은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편집장, 김남준. 사무실을 들어오는 남준의 옷차림과 멀끔한 모습에 태형은 압도당했다.
"근데 기자님 생각보다 늙지 않으셨네요."
"편집장인데도 생각보다 젊다는 거지?."
"네. 옷도 입은 게 이제, 굉장히 멋있으시고."
태형의 맞은편에 앉은 남준이 마른 세수를 했다. 친동생은 아니어도, 민윤기와 핏줄이라기에 남준 나름대로 생각했던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예상을 이렇게 벗어날 줄이야.
"너 동경에 유학 다녀온 거 맞아?"
"동경으로 유학을 가긴 했는데, 이제 그게 유학이면 공부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제가 공부는
저랑 엄청 안 어울려 가지고."
태형의 말을 듣고 있던 남준이 고개를 뒤로 재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남준은 푸흐흐 웃으며 태형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 이거 꼭 해야 돼요?"
난데없는 말에 놀란 얼굴로 태형을 응시하는 남준이었다.
"제가 원래 변사가 하고 싶은데, 아빠가 여기 와야 된다고 저를 막 이제 목줄 끌고 오듯이 와가지고여."
남준은 태형의 말을 듣는 내내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구나. 종로 의원에서 느꼈던 패배감은 머릿속에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근데 아버지가 꼭 가래? 매일신보에?"
"네."
"근데 어떻게 하냐. 나는 네가 너무 재밌는데."
"네?"
태형의 반문에 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생각했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새로운 즐거움이 생길 것 같았다. 남준은 방에 들어온 지 십분 도 채 지나지 않아 걸어둔 외투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태형에게 말했다.
"밥부터 먹으러 가자."
"네?"
"점심 시간이네. 이제 우리 식구잖아. 밥 식. 입 구. 밥부터 같이 먹어야 진짜 식구가 되지."
태형은 멀뚱멀뚱 남준을 따라나섰다. 거리를 걷는 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준을 훑어보는 태형이었다. 한 손에 든 외투부터 반대편에 꼭 쥔 서류 가방까지 어느 것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형은 남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골목길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남준의 단골집에 들어섰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설렁탕 가게였다. 태형과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남준이 입을 뗐다.
"네 소개 좀 해봐"
남준의 말에 태형이 부끄러운 듯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설렁탕 사발이 놓였다. 태형이 뽀얀 국물을 떠 후후 불고는 입에 넣었다. 곧 혀가 데인 듯 태형이 얼굴을 찡그렸다.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과 밥을 연달아 말아 넣던 남준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태형에게 물었다.
"가족은?"
"아빠랑 형이요."
"형?"
"네."
"형이면 한창 결혼할 나이인가."
시선을 피하며 태형에게 묻는 남준이었다. 태형의 형이 누구인지 아는데, 굳이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곧 태형이 대답했다.
"애인 있는데, 차인 것 같아요."
남준이 수저를 멈추고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아니, 많이 먹어. 수육도 먹을래? 내가 살게."
From. 스페스 |
오랜만이죠? 늦게 온 주제에 사담 적으려니 엄청 떨리네요. 늦게 온 만큼 분량을 더 채워오려고 노력했어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진짜 마음 같아서는 소중한 댓글에 답글 하나하나 적고 싶은데,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스포를 하게 될까봐 댓글이 너무 평이해지는 것 같아서, 아예 시도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제 마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진심으로 많이 애정합니다. 석진이가 전한 정국이의 임무는 다음화에 나올 예정임을 말씀드리며,
♥영원한 우리의 설탕 윤기야 생일 축하해♥
사랑스런 암호닉들! * 암호닉 쭉 받아요, 신청은 최신화에서!, 혹시 누락되셨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 암호닉 신청하실 때 괄호[ ] 안에 넣어주시면 제가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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