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눈동자가 열렸다. 광량 인식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홍채를 조이는 엔진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한숨부터 나왔다. 대책도 없이.. 이렇게 던져두고 가면 날더러 어쩌라고. 100년 사이 기계 전쟁이 무려 2차까지 끝났다. 황폐해진 땅과 마음에 들어설 꽃같은 것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관습처럼 살아나 생을 지속했다. 거기에 의지란 없었다. 그냥 그런 것이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에 이유가 없듯이. 그렇게 이유도 없이, 나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 라는 말 자체가 여성 반려인을 뜻하는 고어이지만, 나는 그 포근하고 따뜻한 어감 때문에 사어를 되살려 다시 썼다. '아'에서 벌어지는 입으로 밥숟가락처럼 들어오는 달디 단 공기와, '내'에서 포근하게 구부러져 사람을 받아들이는 혀는, 발음보다는 시식에 가깝게 작용했다. 음미하듯, 아-내-. 깊고 길게. 다시, 아- 내-. 품 속으로 동그랗게 들어오던 정수리, 손깍지를 끼면 내 손이 다 뿌듯하게 들어차던 옹골맞은 기골, 직선과 곡선이 위태롭게 공존하던 척추와, 목덜미와, 종아리와, 눈. 나는 네가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여자로 태어났다면, 너에게 빠지는 일은 없었을거라고 입버릇처럼 속삭였다. 잠든 네 흑단같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래서 어머니가 '이런거'를 주문하셨을때, 나는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까마득했다. 그 무엇으로도 이 사람의 자리를 채울 순 없어요, 어머니. 그걸 왜 모르세요.. 오열을 쏟던 것이 어느새 4차례. 5번째 '이런거' 앞에서 나를 휘감는건 슬픔보다도 권태였다. 더이상 무릎이 꺾이지 않았다. 배트를 찾아 그것을 부수는 대신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속절없어라, 늙은이. 아무 소용없을텐데도 민들레같은 희망 그거 뭐라고 당신의 심장을 넘기셨나. 옆집 아이 이름 부르듯 집 한채를 선뜻 내미셨나. "어머니, 이런거 이제 그만하시라고-" [너는 사람이 죽어가는걸 지켜만 보고 있니?!] "... 어머니," [정신차려, 이석민. 지금 200세 시대야. 너 살 날이 산 날보다 아직 창창하게 남았다고. 언제까지 네 인생 네가 조져먹고 살거야?!] "그렇다고 이렇게 동의도 안 구하시고 막 던져두고 책임지라고 떠넘기시기 있어요?!" [어미된 도리로서 자식 죽는 꼴 안 보려고 그랬다, 왜. 환불할거니? 그럼 연 끊고.] "어머니!!" 날카로운 환청이 귀를 베었다. 피를 뚝뚝 흘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상자를 열어 로봇을 꺼냈다. 버진씰을 딱지마냥 잡아뜯고나니 만신창이가 된 심장으론 그저 쉬고싶었다. 괜찮아진 것 같더니, 아직 아닌가보다. 뜯고나면 환불 및 교환이 불가하다는 씰 6개를 모조리 잡아채 야수처럼 뭉갰다. 당신 원하는대로, 어머니. 스티로폼 볼을 헤치자 드러난 얼굴은 끽해야 스물 위아래였다. 그 또래 아이들에 비해 아주 조금 더 긴 하관과 뺨 위쪽으로 날카롭게 올라붙은 볼살이며, 조그만 입술. 비죽거리며 박스를 해체하고 의자에 앉혀놓은 사이 실내광을 감지하고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스티로폼 볼들을 봉지에 욱여넣다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거실 복판에 '그것'이 서있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생명이라기엔 너무 차갑고 비생명이라기엔 너무 따뜻한, 반생명. "안녕하십니까, 이, 석, 민, 주인님. SVT 테크닉스 SY72315-14 모델입니다. 이름을 지어주세요." 딱딱한 기계의 인사였다. 비생명이었군. 눈썹을 찌푸리며 다가가자 엔진음이 미세하게 들렸다. 위이잉.. 빛을 등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잘 안 보이십니까." "아니, 홍채 보이네." 기계식으로 조였다 풀어지며 광량과 거리를 감지하고 그에 맞게 렌즈와 ISO를 조절하는 전자식 안구 시스템. 인간이 홍채의 작용을 관할하는 중뇌의 마비 여부로 생사를 판단한다면 그건 기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계를 분양받을때 가장 먼저 체크할 점. 홍채 팬이 미세하게 좁아지며 물리적으로 광량을 잘 조절하고 있는지. 그것이 잘 안되면 버진씰의 유무와 상관없이 교환 혹은 환불을 요구할 수 있다. 손을 내밀었다. 역시 빠르게 거리를 감지해 압력을 조절하고 손을 잡는다. 기계 주제에 체온까지 설정했나. 눈썹이 이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반갑다." "감사합니다. 이름ㅇ," "너 여기서 얼마 못 살아." "아." "있는 동안은 열심히 잘해줄게. 그런데 네가 모시기 좀 힘든 사람일거야, 난. 정신이 여러모로 좀.. 그래서." "괜찮습니다." "이름 필요없을거야. 부를 이름이 필요해질때까지 네가 못 버틸테니까." "상관 없습니다." "네 방 저기 쓰면 돼.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다른 주인 알아봐줄게." "저는 계속," 돌아서는 찰나에 들리는 사족이 거슬렸다.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아," 요즘 홈봇들은 이런 것까지 물어보는군 싶어 대강대강 대답했다. "너 편한대로." 다시 스티로폼 볼을 치우러 뒷뜰로 나갔다. 녹슨 고철덩어리들로 뒤덮인 붉은 땅 귀퉁이를 파헤쳐 서있는 집이었다. 주제에 마을을 이뤘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혹은 모여, 삶을 꾸렸다. 한때는 동네마다 있었다는 뒷산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추락한 전투기가 거대하게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그마저도 1차때의 일이라 벌써 70년 가량이 지난지라 날개며 배에는 이끼가 슬었고 군데군데 곰팡이며 거미줄까지도 쳐져 있었다. 시간은 자연의 다른 말이다. 1차 기계 전쟁. 20대의 나이에 2차를 참전한 나로서는 어른들에게서 전해들은 바가 다라지만 증거물을 껴안고 사는 주민으로서는 글쎄. 전쟁이란게 비현실적이던 때도 있었나 싶어 오히려 그때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어느새 주민들의 신줏단지가 된 전투기는 성경에 나오는 황금 송아지를 떠올리게 한다. 징벌의 시간. 적색의 땅 위에 살림을 꾸린 사람들은 모래바람이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전투기 앞에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니체였던가, 신은 죽었다고. 전쟁 틈에서 사람들은 기도마저도 잃어버렸다. 붉은 원에 초록색 별이 크게 그려진 몸뚱아리를 쳐다본다. 한때는 기도할 것이 많았다. 지금은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멍하니 쳐다보며, 그저 중얼거릴 뿐이다. 좋은 날, 오게 해주세요. 나는 다시 푸대자루에 스티로폼 볼을 쓸어넣기 시작한다. - "후-!" 정한은 서류를 내팽개치며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의 지훈이 회전 의자를 끌어와 묻는다. "떨어졌어?" "어-" "아이고," 지훈이 짧게 탄식을 내지르더니 자리로 돌아간다. 칸막이 너머로 짤뚱한 정수리가 사라진다. 정한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벽으로 눈을 돌린다. 편리, 그 이상의 고객 감동으로- 거창한 사훈이 높다란 벽 가장 위에 적혀있다. 정한은 잠깐 입 속으로 신음을 앓는다. 젠장, 공학도라니. 지훈 쪽을 넘겨다본다. 쟤도 별수없군. 정한이 내팽개친 서류에는 〈제 20차 응용과학기술연구원 신무기 개발 기술 지원 공개 PT>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앞머리를 후후 불어 의자에 늘어져 있던 정한이 책상 앞에 돌아와 서류를 치운다. 정한은 과거의 자신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학자라는 꿈을 꾸기 시작할때, 너는 결국 군수 산업의 노리개가 될 것을 알고나 있었느냐고. 그는 한때 학자를 꿈꾸었으나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 기계를 그리던 그는 화학으로 방향을 틀어 지금의 대기업 연구원 자리를 꿰어찼다. 정한은 주사위를 굴리며 다시 조용히 서류를 힐끔거렸다. 응용과학기술연구원. 줄여서 응과원. 조용히 속으로 읊조렸다. 응가원. 남의 밑을 닦는대도 이보다 더럽진 않을테지. 3번째 기계 전쟁이 임박했다. 과학이 종교가 된 세상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벨 길로틴을 만든지가 어언 100년이 넘었다. 자가 복제와 증식이 가능한 알고리즘을 지닌 로봇들은 상식을 갖고 지식을 갖고 정서를 가지더니 의견을 만들어냈다. 끔찍한 씨앗이었다. 끊임없이 집어넣어줘야 하는 인간의 뇌와 달리 쉴새없이 꺼낼 수 있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비교한 기계들은 인간의 생존 가치가 0에 수렴한다고 결론지었다. 비로소 제 1차 기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의 끝, 길지 않은 세월 후 피폐한 땅에서 기어이 살아난 사람들을 이보다 더 비웃을 순 없다는 듯 다시 2차 전쟁을 일으켰고,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인류의 멸족을 앞당길 심산인지 3차조차도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그들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국가 경제는 군수 산업이 주도권을 쥐고, 여타의 대기업들은 무기를 만드는 데 미쳐가기 시작했다. 정한과 지훈은 그런 대기업, SVT 테크닉스의 소속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원폭을 만들었다잖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헛헛한 위로 따위가 정한에게 반창고가 될 순 없었다. 그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또 그래서, 그들은 그런 위로라도 던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당사자는 콧방귀를 쳤다. 그래서 그게 옳다든? 서랍을 열었다. 늘 몇 통씩 쟁여두고 있던 두통약이 깜박하는 새에 다 떨어졌다. 정한은 주사위를 꾹 쥐었다. "두통약 사러 잠깐 갔다올게. 말 좀 해줘." "오오냐-" 지훈이 건성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두꺼운 벙커 철문을 몇 개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몇 십개 층을 지나자 계단이 나왔다. 천장 뚜껑을 열고 마저 올라오면 붉은 흙먼지 가득한 '한때의' 시내. 정한은 야전상의 옷깃을 곧추세우고 고글을 썼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넣고 볼 일 없다는듯 무표정하게 앞을 노려봤다. 먼지 바람은 날이 갈수록 핏빛이었다. 그 사이를 뚫고 길 너머로 사라졌다. 터진 주머니 틈으로 새어나와, 바닥으로 주사위가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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