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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어느 지방의 이름 모를 깊은 산속, 음침한 기운이 흐르는 폐공장 바닥엔 먼지가 두껍게 깔려있었다. 조금만 발을 움직여도 퀘퀘한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 속에서 백현은 동료들과 차렷자세를 한 채 일렬로 섰다. 이제 곧 조직의 가장높은 위치에있는 우두머리인 보스가 들어올 것이다. 빳빳하게 긴장된 분위기는 폐공장을 가득 둘러싸고 있었다.
백현은 조직에 들어온지 2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밑에서 조금 위인 중하위정도의 계급을 차지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허드렛일을 맡기도 하고, 다른곳에 정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패싸움에서 주먹을 쓰기도 했다. 사실 그는 많이 덤벙대는 성격때문에 초보적인 실수를 자주 저질렀다. 그래서 2년이란 시간을 조직에 몸담고 있었음에도 아직 낮은 계급 위에있었다. 그래도 백현은 형님들에게 깍듯한 태도와 항상 생글생글 웃고다니는 얼굴 때문에 조직원 모두들 그에게는 좋은 태도로 대해주었다.
형님들은 주로 백현을 '허당'이라 불렀다. 그만큼 깡패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싸움은 재빠른 몸놀림과 탄탄한 주먹으로 잘하는편에 끼었으나,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의외로 그는 마음이 약했다. 백현 자신도 자기가 깡패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사람을 때리고 상처주는 것이 꺼림직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처리하고 온 후에는 백현은 하루종일 무거운 죄책감에 몸서리쳤다. 조그만 쇼파에 몸을 구기고 누워 이불로 온몸을 꽁꽁 둘러싸맨 채로 생각했다. 자신은 조폭이라는 직업에 아직 무뎌지지 않은것 같다고.
물론, 지금도 그런 성격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백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불필요한 연민이나, 양심, 충성따위는 잊어버려도 좋다. 잊어야만 한다. 백현은 이 순간, 모든 것을 끝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르는, 오직 그만이 알고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일의 결과는 백현조차도 모른다. 이 계획에 성공하지 못할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해보지 못할 수도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어쩌면 하늘의 구원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수도 있겠다.
어찌됬건 이 계획은 고요한 연못에 폭풍같은 피바람을 몰고 올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현은 옆에 나란히 서있는 형님들 몰래, 입고있던 싸구려 수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한 쇳덩이의 느낌이 손에 묵직하게 잡혔다. 백현은 총의 손잡이를 한번 세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폐공장에는 한개의 조그마한 창문이 있었다. 백현은 창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은 먹먹한 회색빛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공기가 축축한게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백현은 금방이라도 쪼그라들 것만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이내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풍경이 백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아…….
***
땀이 줄줄 날정도로 무더웠던 어느 여름이었다. 노을이 져가는 시간, 한적한 공터에선 무자비한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 아으윽…. 으으…!! "
백현이 땅에 철푸덕 넘어지며 바닥에 부딪힌 오른쪽 팔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가뜩이나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나는 더운 여름에, 그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스멀스멀 배여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피와 땀으로 이마에 엉겨붙어있어 안쓰러웠다. 반팔셔츠 사이로나온 팔의 맨살에는 모래가 잔뜩 달라붙었다. 그야말로 백현의 몰골은 봐줄수 없을만큼 처참했다. 앞에서 바삐 주먹을 날리고 있던 형님이 뒤에 쓰러져있는 백현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 야! 저 허당새끼 다친 것 같은데. 은철아! 여긴 내가 맡고 있을테니까 쟤 병원 좀 데려가. 빨리! " " 예!! "
같은 조직인 한 남자는 재빨리 바닥에 널부러진 백현을 들쳐업고 도로변으로 뛰었다. 백현은 남자의 등에 축 처진채로 엎힌채 들썩들썩거렸다.
" 그러길래 무턱대고 나대지 말라그랬제. " " 죄송해요, 형님. "
백현은 기운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남자는 백현의 말을 대충 씹고 다시 물었다.
" 그나저나, 어디어디 맞았냐? " " 모르겠어요…. 골고루 맞은 것 같은데. 넘어지면서 팔도 제대로 부딪혔고…. " " 아휴, 이 병신. 그러니까 상황 좀 보고 댐벼야제. 괜히 허당이 아니야. 쌈질도 타이밍 봐가면서 하는거라고. " " 아까도 그말 하셨잖아요…. 저 아픈데 그만 좀 쪼세요. "
백현은 다친 오른팔을 바깥으로 뺀채로 킬킬 웃었다. 그렇지만 아픈것은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파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남자는 그런 백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허, 소리를 냈다. 이게 자꾸 기어오르네. 너 다쳤으니께, 봐주는거여. 저만치로 병원이 보였다. 나름 동네에서 큰 대학병원이었다. 평소 큰병원은 잘 가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대충 눈에 보이는 가까운 병원을 가기로 했다. 남자는 백현을 업고, 더 발걸음을 빨리 뛰었다. 병원의 자동문이 열리고 응급실로 들어오니 머리아픈 병원냄새가 훅, 하고 풍겼다. 병원에 오니까 온몸이 더 욱신욱신 쑤시는 것 같았다. 살짝만 움직여도 느껴지는 고통에 백현은 얼굴을 구기고 앓는소리를 냈다. 아으….
남자는 급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 저기요, 아가씨. 이새끼 다쳤는데 어찌해야합니꺼? "
머리에서 피가 줄줄 나오는 백현을 보고 화들짝 놀란 간호사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이들을 안내했다.
" 빨리 저 따라오세요! "
간호사는 재빨리 침대에 자리를 마련했다. 백현은 간호사와, 형님에 부축을 받으며 병원 침대에 누웠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백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몸이 피곤한지 자꾸 눈꺼풀이 감겼다. 무거운 눈을 감고있다보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간호사와 형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기절인지 잠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백현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몇번 깜빡였다. 한 잠을 자고나니까 몸이 편해진 것 같긴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은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고 삐걱거렸다.그리고 욱신거리는 아픔이 찾아왔다. 백현은 겨우겨우 상체만을 들어올려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있는 상태로 오른팔에는 기브스가 되있었고 다리와 머리에는 붕대가 미라처럼 칭칭 감겨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왼손을 올려 얼굴을 만져보니 반창고도 몇개 붙여져 있었다. 눈도 좀 부은 것 같고…. 거울이 없어 지금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본다면 자기는 마치 트럭에 치인 사람 같아보일 것이다. 백현이 조용한 6인실 안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까 응급실에 실려왔을 때 처음 본 여자와는 다른 여자였다.
" 변백현 환자분,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 " …이거 치료 다 한거예요? " " 네. 지금 오른팔이 부러지셔서 깁스 했구요, 다리는 인대가 늘어난 상태여서 급하게 움직이시면 안되구, 머리부분이 출혈이 좀 있 어서……. " " …네에. "
그녀가 무어라 주절주절 말하는데 머리가 멍청해서일까, 대체 무슨소린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말을 백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쳐주었다.
" 그리고 한 일주일 정도 입원하셔야 될 것 같아요. " " 네? 입원이요? " " 지금부터 일주일정도는 병원에서 입원하면서 관리 받으시구, 퇴원하시면 깁스 푸를 때까지 정기적으로 오셔서 상태 보시면 되요. "
백현이 고개를 건성건성 끄덕이자 간호사는 몸을 무리해서 쓰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갔다. 6명이서 같이 쓰는 6인실이었지만 병실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가끔가다 뒤척이는 소리만 있을 뿐이였다. 심심해진 백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목발도 짚지 않고 한 쪽 발을 절뚝거리며 병원 복도를 지났다. 이런 큰 대학병원에 입원은 처음이였다. 여름이었지만 병원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어 오히려 추웠다. 바깥공기를 쐬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거의 저녁시간대라 그런지 한산했다. 입구쪽의 카운터를 지나 드디어 병원 밖으로 나오자 더운 햇빛이 땅을 향해 강하게 내리쬤다. 그래도 백현은 인공적인 에어컨 바람보다 따가워도 바깥의 햇빛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병원 뒤편에는 환자들을 위한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다. 백현은 그곳으로 가고있었다. 날씨가 조금 더워도 산책도 할 겸 병원 밖의 공기를 쐬니 나름 괜찮았다.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끔가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두명씩 보일 정도였다.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공원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직도 두들겨 맞은 몸이 저릿저릿하게 아프다. 몸에 힘을 뺀 채로 벤치에 앉아 공원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원 주위에는 꽃들이 의외로 많았다. 병원 주위라서 삭막할 줄 알았는데. 무식해서 꽃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보기에는 예뻤다. 예쁘면 그걸로 됐다.
꽃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환자복을 입고 있는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그 주위를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백현은 호기심에 그 주위로 가보았다. 뭐하는 사람이지? 환자복을 입은채 앉아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백현은 조금씩 그에게 다가섰다. 백현의 절뚝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는지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 "
그의 앞모습을 바라본 그 순간, 백현은 그 자리에서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굴러가고, 노을에 비쳐 붉게 빛나는 얇은 갈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백현을 꿀꺽 마른침 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몇 번 오지않는 아주 강한 예감이 백현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 예감은 지금까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던 것이였다.
' 이 남자와 나는 어떻게든 이어질 운명이다. '
엄청난 힘을 가진 자석처럼 저도 모르게 이끌려 그의 옆에섰다. 그의 옆에 서서 백현은 그에게 건넬말을 머리를 굴리고 굴려 생각했지만, 도저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손에 땀이 축축하게 배일 만큼 초조해지고 입은 점점 말라갔다.
때마침 남자의 옆머리 부근에 이름모를 꽃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백현은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며 꽃을 빼내었다. 잠깐이였지만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참 부드러웠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현의 손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버렸다. 놀란 듯한 남자의 표정에 당황한 백현이 어눌한 표정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저기…. 이 꽃, 머리에 떨어져있었어요. "
떨리는 손으로 백현이 그의 눈앞에 꽃을 내밀어보였다. 남자는 눈앞에 내밀어진 꽃을 보고는 백현을 향해 수줍게 웃었다. 그의 수줍은 미소에 돌덩이 마냥 가만히 멈춰있던 심장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 꽃이 떨어진게 아니고, 제가 꽂은 거예요. " " 아……. "
꽃을 내밀고 있는 백현의 손이 무안해졌다. 아, 그러시구나…. 백현은 꽃을 들고 있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남자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또 한번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백현은 세상이 환해진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실제로 그를 둘러싼 배경이 환해지는게 아니라 내가 갖고있는 마음이 화사해지고 밝아지는 것이다.
백현이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들고있는 꽃을 다시 그의 귀 옆쪽에 꽂아주었다.
" 그럼 다시 꽂아줄게요. " " ……. " " 됐죠? "
허전했던 그의 머리에 작고 하얀 꽃이 다시 꽂혀졌다. 또 다시 스쳐지나간 남자의 머리카락은 역시나 부드러웠다. 백현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릿결 사이를 훑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실크처럼 하늘하늘하게 흘러내릴 것만 같다. 잠시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에게서 은은한 꽃 향기가 어렴풋이 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머리에 꽂힌 꽃을 만져보고 다시 백현을 보며 말했다.
" 고마워요. "
그는 목소리 조차도 예뻤다. 태어나서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 것만 같았다. 그가 머리에 꽃을 꽂은채로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풍경화의 한 조각처럼 보였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은 점점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번도 느껴본적이 없는 감정이였다. 백현 자신도 대체 왜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이러지….
남자는 링거를 맞기위해 기다란 링거대를 끌고 나온 것 같았다. 그가 끌고나온 링거대의 손잡이 부분에는 이름표가 달려있었다. 백현은 손잡이부분에 달린 이름표를 발견했다. 이름표에는 돋움체로 단정한 글씨가 써있었다.
'도경수.'
백현이 그에게 물었다.
" 이름이 경수예요? " " 어..떻게 아셨어요? " " 저기 옆에…. "
백현이 손가락으로 이름표를 가리켰다. 경수는 이름표를 보고 알겠다는 듯 작게 말했다. 아, 그렇구나…. 잠시 뜸을 들이다 경수가 백현의 이름을 물었다.
" 그 쪽은 이름이 뭐예요? " " 변백현이요. " " 백현? " " 그냥 이상한 이름이라서… 딱히. "
백현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힘없이 말했다. 원래 평소 자기 이름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성 때문에 자주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변기나 변소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백현이라는 별 특징이 없는 무미건조한 이름은 자신과 정말 안어울리는 이름이였다. 게다가 조직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름을 불리는 대신 '야' '너' 등 지칭대명사나, 허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서 이름이 불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백현 자신도 변백현이라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였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자신의 이름은 경수의 앞에서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백현은 자신의 이름이 백현이 아닌 다른 멋지고 특별한 의미가있는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현이 자신없어하는 목소리로 말했을 때 경수는 전혀 그렇지않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름 예쁘다. " " 에이, 별로요. " " 음…. 내가 보기엔 오히려 백현씨 이름은 특별해 보이는데. "
정말…이예요?
백현은 가만히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특별해 보인다고 했다. 백현은 그가 말한 말을 한글자 한글자 되새겨보았다. 특별하다. 특별…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동안 백현에게 특별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은 처음이였다. 정말로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경수는 백현에게 특별함을 심어주었다. 경수의 미소가 따듯했다.
경수는 화단에 펴있는 꽃을 보고있었다. 화단에는 하얗고 조그마한 꽃들이 빽빽하게 모여있었다. 경수의 머리에 꽂혀진 것과 같은 종류의 꽃들이였다. 경수는 꽃하나를 툭,하고 꺾어 백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백현의 눈 앞에 순백색의 하얀 꽃잎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 " 뭔데요? " " 나도 몰라요. 난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요. "
진짜 몰라서 물어본건데. 경수는 들고있던 꽃잎을 하나하나 띠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백현도 화단에서 조그마한 꽃을 하나 꺾어냈다. 하얀 꽃잎은 아무것도 묻지않은 깨끗한 순수함의 결정체였다. 꽃을 손에 든 백현은 손에 든 것을 멍하니 살펴보다가 말했다.
" 여름꽃 어때요? " " 네? " " 그냥…. 여름에 피는 꽃이니까 여름꽃이라고 하고 싶어졌어요. "
너무나도 쉽게 답을 내놓는 백현의 옆모습을 경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을때문에 어둡게 그늘져버린 백현의 옆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보였다. 경수는 이 남자를 두팔로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경수는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읽었다. 얼굴에 덕지덕지 상처가 나있어도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고, 지금처럼 알 수없는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멍하니 꽃을 바라보는 백현의 옆모습을 보며 경수는 생각했다. 이 남자라면 과연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여름에 피니까, 여름꽃' 이라는 백현의 솔직하고도 멍청하리만치 단순한 대답은 경수의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켰다. 가슴이 떨렸다. 경수는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백현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 그러면, 그렇게 해요. 여름꽃이라고. "
***
그 날 이후로, 백현은 경수와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만나서 서로 잘 몰랐던 얘기도 했고, 백현이 잠깐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도 경수에게 해주었다. 차마 다른 조폭들과 패싸움하다가 개같이 얻어터졌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백현이 내뱉은 거짓말이였다. 그러나 진짜인줄 아는 경수는 참 안됐다면서 걱정스레 맞장구를 쳐주었다.
언젠가 밖을 구경하자는 백현의 제안에 경수는 병원 밖으로 멀리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백현이 왜냐고 물었지만, 경수는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둘이 처음 만났던 병원 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또 백현이 가끔 경수의 병실에 놀러가서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백현을 위해 경수가 손수 밥과 반찬을 떠먹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경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엄마가 된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고있는 얼굴만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처럼 맑았다.
처음 경수를 보았을 때, 그는 어딘가 우울하고 쓸쓸해보였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의 어두운 모습은 감출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현은 그럴 수록 점점 경수가 좋아졌다. 더욱 안아주고 싶고, 감싸주고 싶었다. 백현에게 이런 생소한 감정은 아직도 적응되지가 않았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볼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오기도 했고, 그가 혼자 병실에 앉아 가을낙엽마냥 쓸쓸해하는 얼굴을 볼 땐, 마음이 어딘가 한구석이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백현은 하루하루 설렘을 가지고 살았다. 그저 너무 가까이도 아니고, 너무 멀리도 아 닌채로 그의 미소를 보며 오래도록 그의 곁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현에게는 그야말로, 경수가 첫사랑이였다.
어느덧 백현이 퇴원할 날짜가 되었다. 간호사는 백현에게 짐을 다 챙기고 퇴원절차를 밟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환자복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백현은 짐을 모두 싼 채로 아직 낫지않은 발을 절뚝거리며 경수의 병실로 들어왔다. 경수는 병원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었다. 백현은 그의 침대 옆으로 가서 섰다. 그를 발견한 경수는 백현을 보고 살풋 미소지었다. 역시 그는 미소가 어울리는 남자였다.
" 저 오늘 퇴원해요. " " 아, 그래서 이렇게 사복 입으셨구나.. 멋져요. "
경수는 백현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백현이 옷이 들어있는 봉투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다 이내입을 열었다.
" 많이.. 아쉽죠. " " 그러게요,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
백현이 머쓱한지 깁스를 하지 않은 왼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경수는 티내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시무룩해져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 …백현씨 가고나면, 많이 쓸쓸할 것 같아요. " " 자주 올게요. 꼭. "
백현은 짧게 말하고,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머리에 꽃을 꽂아줄때와는 또 다른 감촉이였다. 백현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안정을 느꼈다. 앞으로 못볼 사이는 아니니까…. 경수는 백현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 그럼, 잘가요. "
경수의 말을 듣고 백현은 뒤돌아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 당시, 여름이 절정에 달했던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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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 퇴원한 후에도 백현은 자주 경수의 병실을 찾아갔다. 경수는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조금의 변화를 찾자면, 전보다 조금 살이 빠지고, 창백해졌다. 백현은 경수의 이마에 손을 대보며 걱정했지만, 경수는 언제나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에어콘 바람을 너무 쐬서 그런가봐요. 그게 그의 대답이였다. 그럴 수록 백현은 경수가 안쓰러웠다. 그는 마음에 벽을 쌓아두고 혼자 고립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백현이 경수의 병실에 찾아온 어느 날이였다. 언제나 침대에 앉아있던 그가 사라져 있었다. 백현은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며 경수를찾아보았지만 온데간데 아무데도 없었다. 이쯤되자 백현은 경수가 미친듯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요즘들어 그는 어딘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혹시 사고나, 이상한 일이라도 당한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병원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햇빛이 쎈 여름에 뛰어다니다 보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백현은 경수를 찾아 이곳저곳을 열심히 뛰었다. 대체 어디있는거야…!
그 때, 병원 뒷 편 골목에서 백현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어딘가 서늘하고, 낌새가 좋지않았다. 백현은 두 주먹을 꽉 쥐고 헉헉대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발을 뗐다.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불쾌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끝에 다다라서야 그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한 대여섯명 정도 되는 무리들이 누군가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있었다.
" ……어? "
그들은 바로 백현의 조직에 있는 상급 간부들이였다. 모두 어쩌다 한번쯤은 얼굴을 본 남자들이였다. 그들도 혹시 백현의 얼굴의 알고있을지 몰랐다. 백현은 벽 뒤에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남자가 주저앉아있는 사람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때렸다.
짝-. 가차없이 뺨을 때리는 날카로운 파열음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백현은 그 소리에 맞춰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다시 남자들은 폭행을 가했다. 머리채를 잡고, 맞고있는 사람의 머리를 벽에다 세게 박아버렸다. 쿵! 머리채가 잡힌 사람은 쿨럭,하고 시뻘건 피를 토하며 기침했다. 얼굴은 잘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조직쪽에 골치아픈 일을 만들어버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맞고 있는 것일 거라고. 백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뒤를 돌려는 찰나였다.
" ……!! "
백현은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큰소리를 낼뻔했다. 백현은 믿을 수 없다 는듯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경수씨?
머리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엎드려 고통스러운 듯 기침하고 있는 남자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경수였다. 남자에게 팔을 잡힌 경수는 다시 한번 뺨을 얻어맞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피를 뱉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시뻘건 액체가 아스팔트 바닥에 점점 번졌다. 백현은 강렬한 붉은 액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냥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빨리, 빨리 경수씨를 구해야 하는데……. 한 남자가 경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벽에 머리를 다시 박아버리며 말했다. 벽이 커다란 진동을 내며 또다시 울렸다. 쿵. 경수의 머리에서는 꿀럭꿀럭 흘러나오는 피가 멈추질 않았다.
" 그러니까, 니가 빨리 죽어야 우리가 편해진다니까? " " ……컥…. " " 우리 보스가 급하시대…. 니네 어머니도 죽었는데, 그치? " " ……하...악…아…. " " 그러길래, 모두 니네 가족이 모두 우리한테 민폐인거야. 알지? "
남자는 반대쪽 뺨을 또한번 후려쳤다. 경수가 아스팔트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그는 조용히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 …흐..으..윽.. " " 어차피 넌 살날도 얼마 안남았다며… 얼마안가 뒈질테니까……. " " ……. " "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너나 나나, 이노무 좆같은 인생…. "
남자는 퉁퉁 부어오른 경수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수는 그저 눈을 꽉 감고, 피를 흘리는 채로 흐흐 웃었다. 그러다 바닥에 엎드려진 채, 발로 밟히기도 했다. 남자의 발이 경수의 마른 몸을 걷어찰 때 마다, 경수는 단말마의 신음소리를 냈다. 백현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손은 미친듯이 떨고 있었다. 모든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가 않았다.
방금 전 들었던 뺨을 때리던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사라지질 않았다. 백현은 엄청난 혼란속에 서있었다. 가서 형님들을 때려눕히고, 경수를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저렇게 잔인하게 맞고있는 경수를 모른척을 해야하는가? 아무런 사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백현은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였다. 그야말로 패닉상태였다. 경수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점점 영역을 넓혀, 짙게 퍼져갔다.
***
형님들이 모두 떠나갈 때까지 자리를 피하지 않고 모두 지켜보았다. 혼이 빠져나간 듯, 백현은 힘없이 아스팔트 바닥에 시체처럼 쓰러진 경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백현의 넓은 등에 업힌 경수는 그와중에도 정신을 놓지않고 있었다. 백현은 아무 말없이 그냥 묵묵히 경수를 들쳐업고 가로등길 아래를 걸었다. 백현의 등에 축 업혀 몸을 기댄 경수가 자꾸만 피식피식 웃었다.
" …왜 이런꼴로 있냐고 안물어봐요? " " ……왜 이런꼴로 있어요. " " 나도 몰라요. 말했잖아요, 나 그렇게 똑똑한 사람 아니라고. "
백현은 쓰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엎드려 절받기네요. 백현의 대답이 끝난뒤에도 계속해서 정적이 흘렀다. 둘은 아무말도하지 않았다. 그저 가로등이 위태롭게 켜진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뿐이였다. 백현은 그 순간 자신이 너무나도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이, 목숨버려서라도 충성을 맹세하는 조직에게 미친듯이 맞고있다. 그 가운데, 나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백현은 가운데서 이도저도 못하는 자기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의 무기력함이 죽여버리고 싶을정도로 한심했다.
그러나 자신의 무기력함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경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였다.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싶을 뿐이였는데…. 백현은 입술을 피가 나올정도로 질끈 깨물었다.
그때 가만히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 있던 경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사실 우리 아버지가 이바닥에서 좀 유명한 조직폭력배의 보스랑 친분이 있었어요. 똑똑한 아버지는 그쪽의 기밀을 다 빼내, 손에 넣으셨어요. 아무도 모르는 기밀이요. 만약 그게 밖으로 누설된다면 아마 그 조직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되겠죠. "
아직 경수는 백현이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백현은 아무대꾸도 하지않고, 조용히 혼잣말처럼 늘어놓는 경수의 말을 들었다. 그가 말할 때 마다, 몸에서 흐르는 피가 백현의 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벌써 주위가 어두컴컴해졌다. 경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만이 고요한 거리를 메웠다.
" 그래서, 그 조폭 보스는 직접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요. 칼로 심장을. 쿡. 우리 아버지는 더럽게 똑똑하고 영리했어요. 쓸데없이…. 그래도 그 남자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남겨두면 안된다고 생각했나봐요. 그는 우리 어머니마저도 죽였어요. 그게 바로 두달 전이였어요. 그런데 왜 나는 지금까지 안 죽였을까요? "
나긋나긋이 말하는 경수의 목소리가 목덜미 주위에서 맴돌았다. 경수의 말을 듣는 순간 기억의 조각들이 백현의 머리속을 스쳐갔다. 언젠가 전에 보스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 그 애,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도명석이 아들. 그 비실비실한 애 하나 때문에 조직 전체가 흔들려……. ' ' 그 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딱히 저희가 손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 ' 참으로 눈에 거슬리는 애야……. 딱 쓰레기처럼. 빨리 치워버렸음 좋겠군. '
한 때 조직의 기밀을 빼간 남자의 아들을 보스가 꽤 골칫거리로 삼는다는 얘기는 조직내에서 꽤 유명하게 퍼져있었다. 그런데 그얘기의 중심인 장본인이 바로 경수였던 것이였다. 그것도,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경수였다. 백현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되었다.
한편, 조직 내에서 돌던 이야기에 의하면 남자의 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백현은 경수를 업은 손에 힘을 주고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말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진 몸에 발걸음이 턱, 멈췄다. 그와 동시에 경수도 입을 열었다.
" ……나 이제 반년도 안남았어요. " " 무슨 소리예요 그게……. "
백현은 애써 웃어보려 말했지만,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떨렸다. 예감이 좋지않다. 고개를 돌려서 본 경수의 얼굴은 그 어느때 보다 슬퍼보였다. 얼굴에 슬픔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백현은 경수가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경수는 어느때 보다 잔인했다.
" 나 시한부예요. 시한부. 알죠? 신파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거. 그거 예요. 병 걸려서 오래 못사는거. "
백현의 눈이 번쩍하고 크게 떠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백현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말이 진짜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우주공간에 홀로 남겨진 허망하고 싸늘한 그 기분을 알까. 그에 비해 경수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두 달전에, 엄마 죽는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뒤로 한동안 나는 미친 것 같았어요. 아니 미쳤어요. 이상한 헛것이 보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눈 앞에서 바로 죽어가는 장면이 똑똑히 그려졌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서까지 정신치료도 받아보고…. 그러던 도중 내 몸이 이상해졌어요. 이유는 몰라요. 내가 미쳐버려서 그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있었대요. 의사는 나보고 이미 손쓸 수가 없는…… 상태라고 했어요. 그 뒤로 나는 병원에 갇혀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 새끼 부하들이 병원에 있는 나를 감시하며 내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가끔가다 재수없는 날은 몇번 이렇게 맞기도 해요.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어요. 나한테 여긴 감옥이예요. "
백현은 눈을 감은채로, 제자리에서 경수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경수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말하는 텀이 길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가슴을 짓밟고 꾸물꾸물 올라왔다.
" 병원에 시체처럼 누워있으면서 나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원망도 많이 해봤어요. 누굴 원망해야 하는거지? 쓸데없이 기밀을 손에넣으려하다 죽어버린 야망 많던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여버리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조직들? 나를 이세상에 태어나게만든 엄마? ……아니면, 운명을 거스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 버린 나? 그래요. 결국 내가 문제였어요. 나는 이 세상에 나오면 안되는존재였구나…. 그래서 신은 나를 빨리 죽어버리라고 나에게 병을 주셨구나. 그래,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버리자. 반년만 참자. 그러 면 이 아픈 고통도, 슬픔도, 외로움도 모두 잊을 수 있으니까요. "
" 경수씨…. "
백현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길에 말을 늘여놓던 그는 잠시 조용했다. 그저 백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였다. 백현의 어깨부근이 피가 아닌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 그러던 도중에 갑자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는 이러고 있는 거지?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다니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왜 나는 그럴 수가 없는 거지? 왜? 어째서? 나는 모든 아픔을 다 겪었는데도 신은 왜이리 내게 조금의 시간밖에 주지 않았을까요? …… 나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인걸까요? " " ……. "
거리는 너무나도 조용했고 경수는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있었다. 백현은 정말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눈앞에서 그가 아파하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싫었다. 눈물 방울이 비오듯 백현의 어깨로 뚝뚝 떨어졌다.
" 나 살고 싶어요……. " " ……. " "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좀더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 " ……. " " 흑..으.. 나도, 희망이란 걸 가져보고 싶어요…. 이 지옥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 " ……. "
" 흐..으..나도,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흑흐..흡..으……. " " ……. " " 단 한번만이라도…흑..흐..읍.. 나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제발……. "
그 순간부터 경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세상이 무너지는 듯 울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온몸으로 너무나도 간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를 꺼내달라는 마지막 몸부림을.
백현은 어깨너머로 떨어지는 투명한 눈물을 보았다. 어느샌가 백현도 같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넘쳐 뺨을 타고 흘렀다. 툭. 툭. 검은 아스팔트에 짙은 자국이 남았다. 고통의 결정체인 눈물들은 백현에게 슬픔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어째서, 그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해야하지? 왜 모든 짐을 아무것도 몰랐던 경수씨에게 떠넘겨야해?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분노는 백현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더이상 경수를 아프게도, 고통스럽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것은 백현의 몫이였다. 그 러기 위해서는 그의 말대로, 경수를 지옥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야했다.
무한하게 반복되는 이 굴레속에서 경수를 꺼내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굴레를 부숴버리면 되는것 아닌가? 그것도 아주 산산이, 다시는 끼워맞출 수 없게. 그때부터 백현은 머릿속으로 모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을 그 엄청난 계획을. 그의 머리속에는 딱 한가지 생각만이 자리잡았다.
' 보스를 죽여버리자. '
백현은 눈을 감고 다짐했다. 기필코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그동안 충성을 바쳤던 내 조직을 배신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경수를 아프게 했다면, 그에 따른 죗값은 받아야만 마땅하다. 원망과 분노, 안타까움, 그리고 가슴이 저릿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졌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였다. 백현은 다짐하듯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다시 멈춰있던 걸음을 옮겼다.
" …경수씨, 내 말 잘들어요. "
경수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백현은 개의치않고 경수에게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 우리… 도망쳐요. " " ……. " " …우리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요. 둘이서만.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요. 반드시. " " ……. " " 경수씨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 " ……. " " 우린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어요. "
우린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어요. 백현은 마음속으로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경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조직에 대한 충성을 져버리는 것이라도. 경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백현이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도, 자신을 위해 엄청난 일 을 도모 할 것이라는 사실도 모두. 상처입은 나의 가녀린 천사는 앞으로도 알지 못해야만 했다.
백현이 고개를 돌려, 업혀있는 경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잔뜩 껍질이 일어난 그의 거친 입술에서는, 축축하고도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간혹가다 짠 눈물이 섞인 맛이 나기도했다. 백현은 경수의 입술을 좀더 진하고 깊게 탐했다. 서로를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두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 서로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혼란스러운 이와중에도 백현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더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몇 번 더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를 반복하며 애절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잔인했던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절대로, 꼭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모두 백현의 몫이였다. 지금 순간부터 백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단지 원하는게 있다면 한번만 더 그의 환한 미소를 눈 앞에서 보고 싶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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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
제성ㅇ해여... 넘 길져 원래 상, 중 나눠서 올리려고 했는데 이야기 흐름상 같이 올리는게 나을것 같아서 스압 죄송하고 지루해서 안보시면 어뜨카나.. 나름 자른다고 잘랐는디 ㅠㅠ 아무튼 안녕하세요 렁넝입니다 저 아시는분 계시남... 오르비스 공백기가 너무 긴것같아서 그동안 조금씩 단편이라도 찔끔찔끔 풀려구요 역시 아련은 배또가 갑이져 굳ㅇb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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