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 에피소드 스릴러 <세피아의 지하철> 17~18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9/3/a/93aa2c7171fa633c4041af000c6eaa0f.gif)
Episode thriller
세피아의 지하철
17
18
아직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정호승/모두 드리리 中)
| 17 |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일이었다. 소녀는 줄곧 몸이 약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소녀를 입원 시켰다. 학교를 자주 빠져 여태 변변한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던 소녀는 늘 심심하게 하루를 보냈다. 병원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창 밖을 구경하거나. 간호사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것 정도. 소녀의 하루 일과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앞으로 한 소년이 나타났다. 원인 모를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과 동갑이라는 점에 소년과 소녀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소년의 병실은 소녀의 병실 옆에 있었다.
둘은 매일 같이 서로의 병실을 들락거리며 놀았다. 스케치북을 뜯어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하고 몰래 과자를 뜯어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잿빛이었던 소녀의 일상에 조금씩 수채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소년이 좋았다.
'나도 학교 다니고 싶다.' '학교?' '응.' '난 별론데. 우리 형은 맨날 학교 욕 해. 숙제도 엄청 많이 내주고 친구랑 싸우면 벌까지 세운다더라. 급식도 맨날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된대.' '그래도 친구들이 많잖아.'
그 날은 소년이 소녀의 병실로 찾아왔다. 소년은 작은 싹이 트여 있는 화분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 이거. 퇴원할 때까지 같이 기르자. 그래서 퇴원하면, 서로 집 마당에다가 높이 높이 기르기로 하자. 그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뜻밖의 선물에 입꼬리를 올리면서도 왠지 모를 수줍음에 얼굴을 붉혔다.
'나도 친구들이랑 같이 밥도 먹고 공부도 같이 하고 싶다.' '내가 있잖아.' '응?' '내가 다 해줄게.' '…….' '같이 공부도 하고 급식도 같이 먹고. 학교도 같이 가고.' '…….' '내가 해줄게. 성음아.'
그러니까 우리 빨리 낫자. 소년이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와 화분을 적셨다. 새파란 잎사귀에 촉촉히 물이 스며들어갔고 소녀는 그걸 조용히 지켜봤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왔다. 저질적인 면연력으로 매년 겨울마다 감기에 걸리던 소녀는 올 해에도 어김없이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다. 끓어오르는 고열에 소녀는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러기를 벌써 이주일이었다. 소년은 매일 같이 소녀의 병실로 찾아와 주인을 잃은 화분에 물을 줬다. 아직 화분의 싹은 싱싱했다는 점에서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매일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녀의 감긴 눈을 바라보던 소년의 얼굴이 애처롭게 찌그러졌다.
소년이 죽은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뼈마디가 보이는 얇은 손목을 감싸쥐듯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프지 마. …… 소년의 손이 조심스럽게 소녀의 머리칼을 정돈했다. 소년이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뭣도 아닌 위로를 마음으로 힘겹게 전달할 뿐.
그 날은 소녀의 생일이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소년은 선물이랍시고 라면 박스 하나를 가져왔다. 지독했던 감기는 많이 호전이 되어있던 상태였고 이제 소녀는 뜬 눈으로 소년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병실에 들어서자 소녀가 밝게 웃음을 머금었다. 소년의 선물을 확인하던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박스 안에는 수 많은 동화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소녀가 그 속에서 동화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인어공주였다.
'네가 저번에 친구들이랑 같이 공부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응.' '…내가 대신 해준다고 했었는데, 그게 좀 늦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가져왔어. 우리 집에 있던 거야. 형이 쓰던 거.'
그렇게 말했던 소년의 표정이 언뜻 슬프게 일그러졌던 것 같기도 했다. 읽어줄게. 소년이 소녀가 고른 동화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글자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소년이 가끔씩 소녀의 반응을 살피려 시선을 흘긋거렸다. 인어가 목소리를 빼앗기는 대신에 두 다리를 얻었을 적엔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고. 인어가 왕자님의 모습을 훔쳐봤을 적엔 꼭 저가 인어라도 되는 마냥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소녀의 표정을 살피며 소년이 마음 속으로 웃었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성음아. 인어의 죽어버린 목소리가 되어도 좋아.
그 뒤로 그 둘은 많은 양의 동화들을 읽었다.
시간이 흘러 둘은 열 하나의 여름을 맞이했다. 소녀의 몸은 놀랍게도 호전되어 퇴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년을 짐을 챙기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묘하게 들떠 보이는 그 얼굴에 소년은 억지로 보조개를 그렸다.
'나 없어도 울지 마.'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먼저 가서 미안해. 마당에다 화분 기르자는 거, 꼭 지킬게. 네 말대로 높이 높이 기를게. 보여줄 테니까 나중에 놀러 와.' '……응.' '잘 있어.'
안녕. 홍빈아.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소녀가 말했다. 손을 흔들었고, 소녀가 떠나자 병실엔 칠흑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소년이 천천히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가던 소년의 병실을 소녀는 빠르게 잊어갔다. 누군가가 그랬다. 기다림은 잊혀짐에 비해 더디고 그만큼 단단하나 잊혀짐은 빠르고 그만큼 가벼웠다. 소년은 병실 안에서 소녀의 온기가 묻은 동화책을 두 손이 떨리도록 쓸어 내렸다. 소년은 여전히 그 곳에서 소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녀는 오지 않았다.
소년은 교수의 만류에도 억지로 퇴원 신청을 했다. 형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소년은 열 하나의 겨울 동안 입학을 준비했다. 이성이 절제하지 못하는. 집착이었다.
다음 해의 봄이 찾아왔다. 평화로운 날씨에 숨을 죽이며 등굣길을 걸어가고 있던 소녀가 익숙한 인영에 움직임을 멈췄다. 저 멀리서 책가방을 손에 쥐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이 작게 손을 흔들었고 소녀는 반가움에 소년의 앞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너도 학교 다니기 시작한 거야?' '응.' '진짜? 와. 그럼 우리 이제 맨날 맨날 보겠다. 퇴원은? 퇴원은 언제 했는데?' '저번 겨울에.'
너 가고나서. 덧붙인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소녀의 얼굴은 예뻤다.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소년은 소녀의 옆 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평화롭고 잔잔한 하루 하루들이 지나갔고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꼭 너를 앉히겠노라고. 소년은 서툴게 자전거의 체인을 밟으며 생각했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키운 화초들과 꽃들을 보여 주겠다며 소녀는 소년에게 학교가 끝나거든 기다리라 일렀다. 육 반의 담임은 체육 선생이었다. 하필이면 그 날따라 지각을 한 아이들이 많아 반 전체가 벌을 받는 바람에 종례는 십 분이나 늦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던 소년이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와 소녀의 반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소녀는 없었다.
소년이 급한 마음에 다급하게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어내렸다. 몇 번이고 손가락이 엇갈려 자물쇠가 풀어지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소년이 자전거의 체인을 밟으며 학교의 운동장을 매끄럽게 빠져 나갔다.
소녀를 찾아봤지만 소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내리며 가파른 숨을 헐떡였다. 내내 자전거의 체인을 밟아 내리던 발등이 아프게 시큰거렸다.
어떡해.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에이, 신고는 무슨. 그냥 가자. 괜히 이상한 일에 얽히기 싫어. 그래도… 좀 이상하던데. 분위기. 아빠랑 딸 같지는 않았잖아? 야, 나 지금 알바 늦었거든? 괜한 소리 들먹이지 말고 빨랑 가자,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신고는 해두자.
소년이. 다시 한 번 힘차게 자전거의 폐달을 밟았다. 정신 없이 거리를 쏘다니던 소년이 막다른 골목에서 심상치 않은 인영을 발견하고선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거리며 자전거가 멈췄고 그 앙칼진 소음에 고개를 돌린 누군가가 소년을 쳐다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누군가의 옆에 소녀가 부들부들 떨며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 긴장감 비슷한 감정이 피어오르며 잠시 침묵적인 정적이 이어졌다.
'건들지 마.' '뭐? 하, 참. 야. 이 꼬맹이 새끼야. 학교에서 어른한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든?' '건들지 말라고 했어.' '쪼끄만 새끼가…… 어른이 말하는데 건방지게 말대답이나 하고……"
소년이 자전거의 폐달에서 발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무섭게 누군가에게 몸을 던졌다. 거만에 젖은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갑작스런 몸부림에 놀라며 세차게 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쉽게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짙은 카키색 고르덴 바지에, 소년은 몇 번이나 잇자국을 남기며 사납게 반항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소녀가 까무룩 정신을 놓으며 눈을 감았다. 소년은 더욱 더 세게 어금니에 악력을 쥐었다. 살을 파고드는 악력에 잠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던 누군가가 구석에 버려져 있던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술병을 내던진 누군가가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를 잡고 있던 소년의 몸통이 비참하게 비틀거리다가 이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마가 찢겼는지 울컥대며 핏물이 쏟아나오고 있었다. 새하얀 소년의 피부에 검붉은 핏자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어디선가 경찰차의 엠블런스가 들려왔다.
수술을 준비하는 응급실에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수술을 시작할 수 없었고 소년의 유일한 보호자인 어린 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에게선 그 무엇의 흔적이 없었다. 가족의 온기 따위의. 네 시간이 지난 시점에 형이 숨을 헐떡이며 대학 병원의 응급실을 찾아왔다. 소년의 책가방에서 찾은 학교 이름 덕분에 겨우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소년의 생사를 주름 잡는 화면 위에 곡선을 그리는 선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형이 울먹이자 교수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돈 있으면 싸인하던지. 아님 나가던지. 그 날 교수는 새벽에 참석할 파티를 위해 모든 수술 일정을 캔슬한 상태였다. 교수의 반응에 소년의 형이 허탈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뒤늦게 어린 딸이 응급실에 실려왔다는 말을 듣고서 교수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초록빛으로 하늘거리던 선이. 삑, 하며 직선을 그렸다.
소녀는 정신을 잃고 하루가 지난 뒤에야 완전히 깨어날 수 있었다. 그토록 지독했던 병실 안에 다시금 갇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소녀는 멍청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 어떠한 충격으로 인해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가습기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확인하던 소녀가 느리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맑게 개인 하늘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 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열며 천천히 소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소녀는 하늘로부터 시선을 떼어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보여 소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복잡한 감정으로 젖어 있는 시선이 소녀의 새까만 눈동자로 닿았다.
소녀가 언젠가 몇 장을 뜯은 적이 있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 동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인영이 무심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화책 읽어 줘. 그 때 처럼.
또박또박하게 쓰여 있는 글자들을 곱씹던 그가 소녀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가 시리게 웃었다. 이재환이 책장에서 동화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동화책의 딴딴한 표지 위 어릴 적 비뚤빼뚤한 글씨체로 적어뒀던 제 이름이 보였다. 이재환은 그걸 바라보며 멍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당신 고소할 거야. 당신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당신이 수술을 피해서 내 동생이 죽어 버렸어. 근데 뭐? 사인이랍시고 끄적인 게 합병증이라고?' '병원에서 소리지르지 말게나.' '좆 같은 소리 집어치워. 언젠간 내가 이 손으로 당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야.' '그 때 일은 미안하네. 그 날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말이지.'
인자하게 웃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재환이 버티기 힘든 분노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두고 봐.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입 다물어. 병원이야.' '…….' '그래서 사례로 원하는 게 뭐지?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 가지고 말을 참 질질 끄는군.'
이재환이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집과는 차원이 다른 넓은 구조의 집이었다. 옆집엔 능력 좋은 교수와 차분하고 귀염성 있는 딸이 살았다.
'오빠. 나 커서 오빠랑 결혼해도 돼?' '그래주면 좋지.'
동생아. 네가 사랑했던 아이는. 내가 대신 사랑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옆 마당에 심어져 있는 수 많은 화초의 대가리를 바라보며 이재환은 살풋 웃음을 지었다. |
네가 없는 난.
처참해.
18 |
"어. 학연이 형도 있네." "……이홍빈. 홍빈아." "우리 성음이 친구도 있네." "……." "안녕. 우리 아까 만났었지?" "……." "근데 기억력이 되게 나쁜가 봐. 공부 잘하게 생겼는데." "……." "내가 한 말 벌써 잊었나 보네."
성음이랑 한 번만 더 노닥거리는 꼴 나한테 보여주면. 분명 죽여 버린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이홍빈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과자를 한 줌 집어 입에 털어 넣었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에 넌 뻣뻣하게 굳어오는 몸을 숨길 수 없었어. 머리가 어질했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을 뿌린 듯 차가워졌어.
차학연이 무턱대고 이홍빈의 손목을 잡아끌며 푸드코트를 빠져 나가려고 했어. 그러나 이홍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았지. 이홍빈이 버릇 처럼 손바닥을 볼살로 내려치며 보조개가 파이도록 진하게 웃었어. 얼떨결에 따귀를 얻어 맞은 차학연이 잠시 몸을 비틀거렸고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수진이가 경악하며 동그랗게 눈을 치떴어. 너도 마찬가지였어. 놀라며 입으로 손을 갖다댄 네가 한없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이홍빈을 쳐다봤어.
그런 너를 발견한 이홍빈이 천천히 너의 곁으로 다가왔어. 작게 부스럭대며 흔들거리고 있는 봉투. 넌 그것을 멍청하게 쳐다봤어. 복잡한 상황에 넌 감히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어. 이홍빈이. 무서워졌어.
"성음아. 우리 이제 집 가자." "……." "응? 출구가 막혔지만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너.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애야? 대체 뭔 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글쎄." "……." "잘 생각해 봐."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성음아. 빙그시 웃어버리는 태도에 넌 또 할 말을 잃었어. 그저 혼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네가 뭔 짓을 꾸몄는지 네 입으로 말해." "……." "말 안 해?" "…닥쳐. 차학연. 죽여 버리기 전에." "좋아. 네가 안하면 내가 해." "……." "…어느 때 처럼 환각제를 풀고 조금 괴롭혀 주면서 놀려고 했어. 그러다가 걸려든 인간에게 다가가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순간 미끄덩한 게 밟혀서 봤더니. 냄새가 이상했어." "……." "뭔가 이상해서 성음이 친구를 데리고 지하철 안을 뒤지고 다녔어. 지하철에 숨어 있던 시체들에게 물어봤지만 하나 같이 다 고개를 내저었어." "……." "……지하철의 머리부터 마지막 칸까지 듬뿍 뿌려져 있는 건. 시큼한 내음을 풍기는 석유였어." "…닥쳐, 제발…… 말하지 마……" "난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아. 풀어뒀던 환각제를 모두 다 다시 빨아들였어. 덕분에 지금 정신이 흐릿해." "……." "환각제를 빨아들이자 질주하는 것 처럼 보이던 지하철이 멈췄어. 유리창을 깨부셨고, 성음이 친구…… 야. 너 이름 뭐냐. 수지?"
그에 수진이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어. 수진이요.
"그래. 수진이. 수진이를 데리고 나왔어. 비록 살아 숨 쉬는 모든 게 미치도록 밉지만, 누군가가 내 꼴을 당하는 걸 보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으니까." "……." "이제 말해. 석유를 뿌린 게 누군지." "……." "내가 하지 않았으니. 상혁이가 그랬을 리 없어. 다른 시체들은 이 곳의 지리도 잘 몰랐고. 그렇다면 남은 건." "……." "너 뿐이야. 이홍빈."
똑바로 말해. 왜 성음이를 그 지하철 안으로 데려가려고 안달인 건지. 그 봉투 속에 연고 말고도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건지도. 말해.
싸한 분위기 속에서 넌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 이홍빈이. 그런 일을 꾸몄다고? 갑작스런 상황에 넌 머리가 아팠어. 수진이와 너. 그리고 김원식과 한상혁. 이재환과 차학연. 마지막으로 이홍빈. 대체 이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꼬여 있는 건지 넌 도저히 가늠키가 어려웠어.
차학연의 조근조근한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이홍빈이 문득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어. 아주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제끼는 모습에 차학연이 눈살을 찌푸렸어. 연고가 들어 있는 봉투가 약하게 흔들렸어. 그 속에서 성냥갑과 라이터를 발견한 네가 고개를 들어 이홍빈을 바라봤어. 이홍빈이 갑작스레 뚝 웃음을 끊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에 넌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어. 덮쳐오는 불안감에 네가 수진이의 손을 꼭 맞잡았어.
"죽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성음아?" "……." "모르지?" "……." "그러니까 난 너한테 그걸 알려주고 싶어. 직접." "……." "생각해 보니까 내가 죽었을 땐 주위가 너무 차가웠던 것 같아. 그래서 너 만큼은 따뜻하게 죽여주고 싶었어." "……이홍빈, 너 진짜. 미쳤어……?" "이제 알았어? 나 미쳤잖아. 너한테. 아주 제대로." "……." "석유는 생명력이 길어. 절대로 쉽게 죽지 않거든. 거기에 불씨가 닿으면, 더 힘차게 날아오르면서 또 다른 생명을 탄생 시키지." "……." "그 찬란한 탄생을 지켜보면서. 죽는 거야."
다 같이. 어때? 내가 옆에 있으니까 따뜻할 거야.
이홍빈이 말을 마쳤어. 넌 팔뚝에 돋아나는 소름에 잠시 입을 다물었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 "그리고 씨발.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데." "……." "제발 내가 보는 눈 앞에서 죽어."
이홍빈이 중얼거리며 너의 손목을 낚아챘어. 차학연이 등허리를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이홍빈은 너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어. 뒤에서 수진이와 차학연이 너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게 느껴졌어. 그러나 이홍빈이 미친듯이 속력을 내며 달리는 덕에 그 둘은 점점 멀어지고 말았어.
이윽고 도착한 곳은 엘리베이터 앞이었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무작정 너를 구겨넣은 이홍빈이 일 층 버튼을 눌렀어. 이홍빈이 붙잡은 손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너무도 강한 악력에 넌 이내 포기하고 말았어. 문이 열립니다. 일 층에 도착하자 길게 뻗어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보였어. 여전히 작동은 멈춰져 있는 상태였어.
여전히 너의 손을 부숴질 것 처럼 꽉 쥐고 있는 이홍빈이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어. 성음아. 있지. 나 너 좋아해.
괴팍할 정도로 부드러운 그 음성에 네가 꾹 입술을 깨물었어. 이 순간에서 믿어야 하는 건. 대체 누구인 걸까.
이윽고 에스컬레이터의 마지막 계단을 밟은 이홍빈과 네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걸음을 멈췄어. 저 멀리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어. 넌 그것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 가늘게 눈을 접혔어. 그러자 보이는 건.
"…정택운……?"
인기척을 느꼈는지 정택운이 뒤를 돌았어. 익숙한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그 모습을 넌 멍하니 바라봤어. 정택운과 잠시 눈이 마주쳤어. 그러나 정택운은 다시금 고개를 아래로 내렸어. 이재환은 그 옆에서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한상혁은 너를 발견하고서 동그랗게 눈을 치떴어. 네 손목을 잡은 힘에. 더욱 악력이 실리는 게 느껴졌어.
정택운의 하얀 가운엔 많은 핏자국이 있었어. 그 동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네가 이윽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인영을 하나 발견했어. 울컥거리며 피를 토해내고 있는 건 김원식이었어. 정신이 없는지 계속해서 눈을 감빡이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어.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인기척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린 정택운은.
"……." "……."
여전히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 야구잠바를 걸치고 있는 차학연에. 들고 있던 소독수를 떨어뜨릴 뻔 했어. 차학연과 정택운의 눈이 마주쳤어. |
이제 진정으로 돌아버린 홍빈이... 근데 어떻게 보면 가장 불쌍한 인물인 것 같기도 하고.
스무 편이 넘어야 끝날 줄 알았는데 두 편만 더 나오면 완결이 될듯 싶어요. 생각하고 있는 번외도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ㅋㅋ
저번 편에 어느 독자님이 브금을 하나 추천해 주셔서 이렇게 데려왔는데... ㅎㅎ... 어떤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lub 8-love in december 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참 제 취향을 고대로 저격하신 듯... 고맙습니다...★★
근데 다시 정주행으로 읽고와 보니까 이건 뭐... ㅋ... 빈틈이 너무 많아서 수정해야 될 부분이 차고 넘친 듯... (눈물을 흘린다) 오타는 또 왜 이러는지 참... ㅋㅋㅋㅋㅋ
한상혁을 한상역으로 쓴 부분이 있어서 처음에 역 이름 잘못 쓴 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 ^^...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댓글 맨날 정독해요. 심지어 두고 두고 생각날 때마다 봐요. 고마워요... 진짜... 나라세...★ 흡...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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