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이 나라가 실제로 존재하는 게 맞는 것일까?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알 수 없을 만큼 그저 새하얀 곳.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이곳은 상상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지나치게 눈이 부시는 새하얌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멍하니 끝을 알 수 없는 저 먼 곳을 내다보다가 배낭을 고쳐맸다. 현아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2012.09.26, 06:00 AM 미지의 세계 도착. 산과 나무 외에 인간이나 짐승 따위의 생물체는 없는 것으로 보임.」
아무것도 없다. 조금 극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없다. 보이는 거라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푸른 색의 나무가 아닌 하얀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한 나무와 그것으로 이루어진 산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풍경에 현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걸어도 걸어도 다른 생물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으면 또 모를까 가끔가다 듬성듬성 하나씩 심어져 있는 나무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다 아파졌다. 하얀 도화지처럼 흔적 하나 없는 땅을 밟았다. 현아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졌다.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첫눈이 내릴 때면 종종 설레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마저 듣기 싫었다. 너무 하얘서 너무 깨끗해서 이젠 눈도 따끔거렸고 당장에라도 이곳을 뜨고 싶었다.
"하…. 진짜 지랄 맞은 곳이네"
한 시간 가량을 걷기만 하다가 한계를 느낀 현아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똑같은 나무, 똑같은 풍경은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고 지루하기만 했다. 처음 이 나라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설렘과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현아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졌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고 이해하고 발견한다는 건 어린 현아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큰 지구라는 행성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은 우주,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야기 등은 현아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 내가 처음 발견해서 내가 처음 알게 되고 내가 그것을 남들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 그것이 현아의 궁극적인 꿈이었고 목적이었다. 그 꿈이 석 달 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남극해의 한중간에 존재하고 있던 작은 섬. 인간의 최초가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는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진화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섬을 최초 발견한 사람은 나일 것이라고 현아는 확신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아는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이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습의 땅은 아니지만, 이 섬이 주는 의미는 컸으니까.
"하긴, 사람이 안 사는 게 당연하긴 하다."
정말 그랬다. 사람이 살았다면 이 섬의 존재는 세상에 이미 알려졌을 테니까. 만약 문명이 발달 못 한 나라라면 이해가 갈 수도 있겠지만, 이곳의 기후를 보니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웠다.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고 사시사철이 겨울인 나라. 이 섬이 그런 것 같았다. 수첩에 간단한 메모를 한 현아는 배낭에서 두툼한 점퍼를 꺼내서 더 껴입었다. 정말 추웠다. 사람도 없고 뭐도 없으니 정신병이 올 것만 같다. 이곳에 도착한 지는 겨우 한 두 시간이 흘렀지만, 너무 외롭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감정 따위도 생겼다. 맨정신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으아!!!"
현아가 푸념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정녕 아무도 없는 거냐!!! 난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진짜 아무도 없어? 그래? 의 함축적인 뜻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현아가 한숨을 쉬면서 세운 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재미없고 재미없었으며 재미없었다. 그래도 이미 왔으니까 내가 이 땅을 찾았으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목적 없고 정해지지도 않은 그곳으로 무작정 걸어볼 심산이었다. 아무도 안 살면 여기는 이제부터 내 땅이라고 치지 뭐. 누구도 보는 사람 없고 알아주는 사람 없는데 갖은 허세를 부리며 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도 하얗게 내려앉은 눈을 탈탈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악!!!"
누… 누구야! 뭐야? 뭔데…? 사람… 이야?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눈앞에 무언갈 보고는 다리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멋없이 털썩 주저앉은 현아는 두 눈을 비볐다. 거의 체념했는데, 이곳에는 분명 사람이 살 수가 없다고 있을 리가 없다고 이미 단정 지었는데 또다시 현아는 당황스러워졌다. 현아의 눈앞에 서 있는 저 존재는 분명 인간이다.
"hello…?"
저가 뱉어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작 한다는 말이 헬로라니. 그렇다고 안녕하시냐고 물을 수도 없고 세계공용어인 영어로 인사를 건넸지만 사실 대답을 바라고 건넨 인사도 아니다. 상대가 그럴 여유가 되지 않아 보여서. 키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덩치는 작았다. 이곳에 살아서 그런지 사람마저도 새하얬다. 뽀얗다 못해 하얗고 하얗다 못해 투명했다. 입고 있는 옷도 하얬고 머리는 짧은 단발머리에 파란빛이 살짝 돌았는데 이마저도 하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화이트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지만 이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겠는 게 또 의아하다. 더욱 이상한 건 이 추운 날씨에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나치게 얇고 짧았으며 심지어 신발마저도 신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님은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계신다면 옷 사줄 형편도 안되는가 싶다. 무엇보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 하며 보고 있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다는 것. 현아는 한 가닥 희망 같은 이 아이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이 섬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정말 많았기에.
"아…."
현아는 한걸음 내딛자마자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아이가 서럽게 울었다. 그러면서 뒷걸음을 치는데 현아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무언가 잘못을 한 것 같은 생각이 순간 스쳐 갔다. 주춤주춤 계속해서 뒷걸음을 치는 아이의 시선은 정확히 현아를 향해 있었고 얇은 윗옷의 소매를 꼭 쥐고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현아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말도 통하지 않을 테고 저에게 겁을 먹고 우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현아 역시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 까지 조금이라도 경계를 풀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현아는 아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했다.
「2012.09.26, 07:38 AM 미지의 세계에 도착한 지 한 시간 38분이 지난 지금 이곳을 똑 닮은 인간을 발견.」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는 아이만 관찰한 게 벌써 30분이나 흘렀다. 차츰 울음은 멈춰갔지만, 현아에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이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건 아이에게 당황스럽고 두려울 것이다.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현아에게서 도망을 쳤으면 나았을걸 아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현아는 어떻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됐다. 마땅한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현아는 결국 일단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가만히 있던 현아가 다시 움직이니 아이는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현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밝게 웃으면서.
"hello?"
아이는 현아의 모습에 조금 주춤하는 듯한 눈치였다. 현아는 굴하지 않고 계속 손을 흔들어댔다. 제발 경계를 풀어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너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알아주길 바랬다. 현아의 노력 덕분인지 아이가 갑자기 현아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손을 흔들어 줄지는 생각 못 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귀여워 보였다. 아까는 그렇게 울다가 나한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라니. 현아는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히 아이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저, Do you speak English?"
현아가 아이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말이 통해야 이 섬에 대해서 물어보고 관찰도 할 테니까. 하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뻑 걸렸다. 영어를 할 줄 모르나? 현아가 아이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아이는 더 말라 보였다. 하얀 피부와 파란빛의 머리와는 대조되게 눈동자는 새까맣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묘하고 매력 있게 느껴졌다. 아이는 무언가 신비스러운 감이 들었다. 아이는 현아를 한동안 보고만 있더니 뒤를 돌아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가? 저기!"
현아는 아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아무런 흔적도 없어서 그저 삭막하고 괜히 무섭기만 했는데 아이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곳을 따라 밟고 있으니 이 섬이 또 다르게 느껴졌다. 현아는 아이를 따라 걸으면서 이것저것 말을 많이 걸었다. 영어로도 말을 해보고 한국어로도 해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노래도 불러봤지만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현아는 잠깐 왜 이렇게 냉정하냐, 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고민해보니 혹시 말을 못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예 말을 못하는 걸로 단정 짓는 게 속이 더 편했다. 그리고 다른 세상 밖으로 노출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문명이 전혀 발달하지 않아서 말을 못 배웠을 가능성도 컸다. 그렇다면 이제껏 현아가 했던 말들 역시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된다. 즉 앞으로 이 섬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기회 역시 사라지게 되는 건데 막막하기만 하다.
갑자기 아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땅만 보고 걷던 현아가 멈춰서는 아이를 따라 덩달아 제자리에 섰다. 고개를 든 현아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넋을 놓았다. 티브이나 여행 잡지에서나 봐오던 그런 바다였다. 에메랄드 빛의 투영한 바다. 파도 하나 치지 않아서 언뜻 보면 호수 같기도 했다. 잔잔히 울렁이는 에메랄드색의 물결은 환상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말도 잇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던 현아는 얼른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