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02
"야, 임영민 어딨어!"
등교를 한지 1분도 채 되지않았을 때였다. 김여주는 아직 가방을 고리에 걸고있었고 임영민은 교복 와이셔츠 대신에 체육복으로 갈아입던 와중이었다. 임영민의 여자친구로 핫한 그녀, 박희진이 저 끝 반에서부터 영민과 여주의 나란한 등교 소식에 달려오신 게 분명했다. 앞문을 박차고 아이들 어깨를 우왁스럽게 밀며 영민의 앞에 선 희진은 씩씩대며 휴대폰을 책상에 던졌다.
순식간에 교실이 조용해진다. 심지어 교실 밖에서 뛰어다니던 남학생들의 소리마저 줄어들었다. 여주가 조용히 할 말을 다 하는 애라면 희진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부터 하는 애였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박희진은 임영민과 사귀지만 않았다면 '성격 더러운 애'라는 타이클을 3년 내내 거머쥐었을 테다.
"왜 그래 희진아?"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내 전화 왜 씹어?"
"아침에 바쁜 거 알잖아, 매일 이럼 어떡해."
"솔직하게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우리 사귀는 거 맞냐고. 김여주가 여친이지 내가 여친이야?"
"그것도 이해 못 해 줘 희진아? 니가 나 좋다고 징징댄 거잖아."
"야, 야."
"근데 시발 이제 와서 이렇게 소란 피우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영민이 책상 위에 올려진 희진의 휴대폰을 바닥으로 던졌다. 목소리가 떨렸다. 긴장이 아닌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박희진이 아이들 있는 데서 쪽을 줘서? 아니, 그런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본인의 책상 위에 휴대폰을 던져서? 그것도 아니다. 단지 영민이 화가 난 이유는 여주가 인상을 찌푸리고 이쪽을 보고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려 해도 이어폰을 뚫는 목소리 크기였겠지.
허. 박희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임영민이 고개를 돌려 김여주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기에. 영민과 희진이 연애하며 싸운 이유는 빠짐없이 다 김여주 때문이었다. 그것만 아니면 영민은 늘 희진에게 사랑을 주었고 사랑스러운 말을 했으며 먼저 전화를 거는 일도 잦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여주였다. 이번에도 역시 여주의 눈치부터 살피는 걸 보란듯이 보여주고 있으니, 기가 찰 법도 했다.
"야 너 미쳤어? 나랑 끝낼 거야? 어?"
"끝내자고 온 거잖아. 응, 그래 그러자."
"야 …!"
"이제 우리 그냥 친구니까 오늘 하교는 혼자서 해 희진아. 그럼 잘 가구."
보조개를 쏙 넣어 웃은 영민이 입다 만 체육복을 다시 입는다. 그와 동시에 원래의 분위기를 찾아가는 교실은 가만 서있는 희진을 비참하게 할 요소가 될 뿐이었다. 이제 영민과 애인 사이도 아니니, 그들에게 희진은 단물 빠진 껌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학교의 모든 것들은 영민과 여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이유. 그런 건 없다. 예쁘고 착하고 학교 생활까지 착실하게 하는 애들 둘이 친하다는데, 이유가 필요했던가. 원래 사회란 그랬다.
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진 휴대폰을 줍고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가는 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주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여주의 무심함이 비춰지고 나서야 영민의 얼굴이 풀렸다. 영민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여주가 제 앞에서 웃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단지 울지만, 인상을 찌푸리지만 않았으면 하는 거였다. 둘의 사이는 거창하게 정의 내릴 것도 없었으니.
*
"영민아, 밥 먹으러 가자."
"응."
언제나 무언가를 권하는 건 실로 여주의 몫이었다. 도도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 같은 공주님처럼 굴 줄 알았는데 부탁할 줄도 알고, 먼저 다가갈 법도 알았다. 물론 웬만해서는 다 영민과 관련된 것에 한해서지만. 한결같이 친절한 영민은 여주에게만 예외였다. 친절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여주에 한해서만 기다림을 자처했다. 언뜻 보기엔 공주님 뒤꽁무늬나 따라다니는 개새끼 같지만 조금 다르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그렇다. 타종이 울려도 여주가 자리까지 다가서야 일어서는 것만 봐도.
"오늘은 급식 먹을 거지 여주야?"
"응. 근데 치즈볼강정 너무 느끼해."
"내가 먹을게."
"돼지처럼 살 찌면 어떡해 너? 그럼 너 안 볼래."
말도 안 되는 소리. 급식실로 가는 내내 둘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다 영양가 없는 내용. 어린 애처럼 굴기까지하는 김여주라니. 영민은 여주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여주의 귓가에 은은하게 들릴 뿐이었다. 단지 둘뿐처럼.
급식실로 들어선 둘은 시장 바닥 같던 급식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장안의 화제. 자리에 앉아있던 희진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체로 밥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고 주변 아이들은 낄낄대기 바빴다. 영민이 소리내어 웃는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여주의 심기를 건드린 죗값을 톡톡히 받고있다고 생각했기에.
"영민아."
"왜 그래 여주야."
"왜 박희진이랑 헤어졌어?"
"그게 왜 궁금해?"
"너 일은 내가 다 알아야 하니까."
무심한 눈길로 눈을 맞추던 여주가 이내 영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새끼 고양이 마냥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딱 봐도 영민이 이야기 해 줄 리가 없다고 여겼던 것들은 다 아양을 부려 얻어왔다. 무심한 눈을 내리깔은 여주의 손가락이 영민의 손등을 두드렸다. 아- 영민이 고개를 돌려 내려봤다. 영민의 눈이 차다.
"애교 부려?"
"응."
"안 알려줄 거야."
웬일로 단호한 영민의 말에 여주의 고개가 훽 돌아간다. 영민을 보는 눈초리가 매섭진 않았으나 무심함에 묵묵함을 더했다. 영민의 손등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이젠 체육복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매 안으로 여주의 손가락이 들어와 간질인다. 하하- 뱀 같은 기지배. 영민의 허탈한 웃음이 들리면 여주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영민이 말을 해줄 거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 6년 간의 친구란 그런 법이다. 모르는 게 없지.
너 때문에 헤어졌어. 왜 나 때문에 헤어졌는데? 몰라서 물어? 응, 우린 친군데 왜 나 때문에 헤어졌는지 모르겠어. 하하- 골 때린다 정말. 줄을 서며 귓속말을 하는 둘은 꼭 사랑놀음을 하는 연인과도 같았다. 둘은 늘 결백을 주장하며 우정이란 타이틀을 내놓았지만. 영민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곤 여주의 머리카락을 살살 잡아당겼다. 아- 단말마의 소음. 매서운 눈이 영민을 향한다. 자꾸 짜증나게 하지 마 여주야.
"애처럼 굴지 마 영민아."
"그러게 왜 그런 걸 물어."
"니가 혹시, 흑심을 품었나 싶어서."
흑심. 서로를 바라보고있는 눈길일지도 모르겠지만. 늘 여주는 그렇게 영민을 절벽으로 몰아세웠다. 고운 손으로 영민의 손을 잡고있었지만 언제나 벼랑 아래로 몰아세워 놓고선. 그렇게. 맑은 웃음으로 임영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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