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ène
; 세이렌, 마녀, 요부, (하반신이 물고기 꼬리를 연상시키는) 기형 동물, 인어체
01
김원식의 일상은 평범했다.
올해 스물 하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갓 신입생을 벗어난 김원식은 대부분의 대학생이 살듯 그렇게, 아주 평범한 하루하루를 흐르듯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조금은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 서너 시까지 수업을 듣고,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교 근처에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단 한 가지 김원식의 평범하지 않은 점이라고 한다면, 답잖게 수줍음이 많다는 점 정도.
그래서인지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김원식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었다.
아, 물론 따돌림이라거나 그런 종류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구내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고, 강의실을 함께 옮기고, 시간 많은 날 밤에 술 한잔 걸칠.
누구와 가장 친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 사람이요, 하고 대답할, 적적할 때 집에 불러들여 오징어 다리라도 뜯을.
…그런 친구가, 없다는 거였다.
자연스레 김원식은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예능프로그램을 킥킥대며 보다 어느 순간 잠들어버리는 게 당연해졌다.
그것에 대해 별 문제를 느끼고 있지 않던 김원식은, 그 생활을 일 년간 해 오고 있는 지금,
문득 외로워졌다.
겨울방학이었던 터라 김원식에게는 정말, 하루하루 똑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열 시쯤 일어나 하품을 하며 아침 겸 점심을 대충 라면으로 때워먹고, 샤워를 하고 아르바이트, 그리고 또 아르바이트. 집에 와서는 잠이 든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그런, 일탈의 욕망이 원식의 머릿속에 점점 차올랐다. 무료한 일상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거의 충동적으로, 원식은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무작정 여행 가방에 여행용품들을 쑤셔넣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과 식당에는 삼 일 정도 양해를 구했다. 텐트, 조리기구, 그리고 옷가지들을 챙겨넣은 원식은 그제서야 어디로 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순서가 뒤바뀐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건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으니.
바다, 산. 바다, 산. 아, 어디 가지.
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기는 했지만, 바다는 싫었다. 소금기도 싫었고, 특유의 눅눅한 공기 또한 싫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강?
강이 떠오른 원식이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와, 나 좀 똑똑한 듯.
물이 있는데다, 깊은 산 속일 테니 사람은 당연히 없을 거고. 공기도 물도 맑을 테니 답답한 가슴을 뻥 뚫는 데는 최고일 듯 싶었다.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스스로 감탄한 원식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곳의 강들이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중이었다.
문득 어릴 때, 그러니까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갔었던 산 속의 깊은 계곡이 머릿속에 넘실 떠올랐다.
상당히 환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때의 계곡은 아직도 뇌리에 박힌 채로 지워지지 않았던 듯했다. 부모님과의 가장 행복했던 나날.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반짝반짝 강물에 반사되어 부서지던 황금빛의 햇살과 후각을 자극하는 싱그럽고 차가웠던 그 공기만은 여전히 김원식을 들뜨게 했다.
거기로 가자.
굉장히 빠르게 목적지를 결정한 원식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연락 올 곳은 아무데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 메세지를 연락x 로 바꿔놓고 알람을 새벽 여섯 시로 맞춘 원식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아우 힘들어 죽겠네,
원식이 겨울임에도 뺨을 타고 흐르는 기분 나쁜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강 훔쳐냈다. 짐은 무거웠고, 생각보다 계곡은 깊은 곳에 있었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자그만 물소리에 원식은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는 끈덕지게 산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시계는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마침내 원식이 기분 좋은 탄성을 내뱉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로… 신비로웠다. 키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마치 비밀장소 같은 느낌도 풍겼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중앙에 가로로 흐르는 계곡은 폭이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깊이는 꽤 되어 보였다.
산의 푸르름과 해의 황금빛을 그대로 닮아 있는 듯 계곡물은 에메랄드 빛을 띄었다. 햇빛이 물 위에서 사르륵 부서졌다.
물살은 조금 빠른 편이었다. 잔잔히 귀를 자극하는 물 흐르는 소리, 피부를 스쳐지나가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싱그러운 풀내음.
원식이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히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찼다. 미소가 번졌다. 아, 기분 좋다.
계곡 옆에 있는 자갈밭에 원식이 짐을 내려놓았다. 텐트를 능숙하게 설치한 원식이 텐트 안에 가방을 옮기고 늦은 아침을 먹으려 가방 안을 뒤졌다.
햇반과 라면 한 봉지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에는 냄비를 든 원식이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폈다.
라면이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맛있게 끓어올랐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계곡 안을 가득 채웠다.
찰박,
원식이 순간 고개를 돌렸다.
물소리, 들린 것 같은데…. 원식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계곡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투명하고 깨끗했다. 원식이 자신의 귀에 이상이 있나 생각할 만큼.
다람쥐라도 지나간 거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원식이 다 끓은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올렸다.
-
밤하늘은 선명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새카만 물감에 담가 놓은 듯한 밤하늘이었다.
그 위에 휘영청 떠오른 은빛 달이 안개처럼 희뿌연 빛을 뿜는다. 텐트 안에 누워 머리만 바깥으로 빼고 하늘을 구경하던 원식의 입에서 절로 와,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도시에서는 구경할 수 없던 그런 절경이었다. 귓가엔 청량한 물 흐르는 소리, 눈 앞엔 은빛 수채화, 코 근처를 맴도는 물기 품은 흙냄새.
원식이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원식의 배에선 또다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즈음에 끓여먹은 라면과 햇반 하나가 전부였으니. 경치를 담는데 바빠 음식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가방 깊은 곳에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을 꺼낸 원식이 온 연락을 확인했다.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려고 꺼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연락에 원식이 그 문자를 들뜬 마음으로 열어보았다.
대출이 필요할 땐 김미영 팀…
원식이 휴대폰을 다시 가방 속으로 던져넣었다. 작게 욕설을 읊조리면서. 그럼 그렇지,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다시 원식을 덮쳤다.
고개를 휘휘 저은 원식이 삼겹살 팩과 불판을 끄집어냈다. 넉넉치 않은 주머니 사정에 조금밖에 사지 못한 삼겹살이라 원식은 삼겹살의 삼 분의 일만 꺼내곤 다시 팩을 넣었다.
치이익- 삼겹살에 불판이 올려지고, 기름이 구워지는 냄새가 원식을 자극했다.
몇 점 되지 않는 고기라 생각보다 금방 구워졌다. 나무 젓가락을 딱 쪼갠 원식이 고기 한 점을 집어올려 입에-
찰박,
-넣으려는 순간, 또 물장구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잘못 들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원식이 고개를 휙 돌렸다. 분명히, 분명히 강물에는 잔잔히 동심원이 피어나고 있다.
…누구 있어요?
대답을 바란 내가 병신이지. 산이니까 작은 동물이거나 그런 걸 거야.
사실은 조금 오싹해진 김원식은, 지금 깊은 산 속에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아니야, 아니야. 하고 몸을 툭툭 털었다.
젓가락 사이에 집힌 삼겹살을 입 안으로 집어넣은 김원식이 간신히 신경을 삼겹살에 쏟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거 맛있어?
……!
열심히 삼겹살을 으깨던 김원식의 입운동이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가 계곡을 향해 돌아갔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강물 위에 부딪혀 희미하게 부서진다.
부서진 상아빛이 은은하게 실루엣을 비춘다.
바스라질 것 같은 눈부시게 하얀 살결이 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비치는 몸선이 물결마냥 살랑거린다.
새하얀 피부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목에 달라붙어 차갑게 빛이 났다.
바위 뒤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을 감추고는 오른팔로 턱을 괴고, 원식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신비로운 그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뭘 그렇게 놀라?
물론, 물 밖에 있는 새하얀 상반신과는 다르게 하반신은 물 속에 잠겨진 채였다.
그리고 상아빛 강물 속에서 유유히 살랑이며 가끔씩 물 위로 살짝살짝 짓궂게 띄우기까지 하는 그 하반신은,
인어 처음 봐?
…붉은빛 지느러미였다.
-
안녕하세요, 돌쇠입니다아 :)
세이렌 1화를 들고 찾아왔어요!
늘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참, 원래 제목은 Sirène이 맞습니다! 불어라 제목에서 표기되지 않아서 Sirene으로 적은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