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점심시간에 잠깐 볼 수 있을까? 미술실에서 기다릴게'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결국 1교시에 수학선생에게 지적을 받고 문제를 푼 뒤 나는 2,3교시를 모두 말아먹어버렸다. 여전히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찬열에게 연락이라도 왔을까 휴대폰을 들었다가 나는 얼떨결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응?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다시 크게 떴다. 연지의 연락이었다. 진짜 연지인가?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런 장난을 칠 인물이 딱히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지, 진짜 연지? 나는 간만의, 또 갑작스러운 연지의 연락에 당황 반 설렘 반이었다. 연지와 사이를 되돌리려 애썼던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지와 멀어져 버렸는데, 갑자기 연지가 연락이 와서는 볼 수 있냐고 묻는다. 연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간만의 연락에 나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하지? 연지의 연락 한 통 위엔 내 많은 노력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노력의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길게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래, 하고 짧게 답을 보냈다. 얼마만이지, 거의 2개월일까? 나는 내가 꽤나 무감각하게 지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찬열이 때문일까. 사실상 연지밖에 없던 일상에서 조금씩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찬열이 어느새 내 일상의 중심이 돼 있었기에 나는 연지가 없는 일상에서도 그럭저럭 잘, 아니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 그랬다. 나는 새삼스레 망각했던 것이 머릿속에 되새겨졌다. 원래는 찬열이 아닌 연지였다. 내 일상인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연지와 보냈던 그 길고도 진했던 사이가 한 순간 끊어져 버린 것은 분명 찬열의 탓도 있음은 분명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찬열을 향한 연지의 마음 탓이 있었다. 무엇이 어찌 됐든 그래서 연지와 나는 멀어졌고, 한 층 더 찬열과 가까워졌다. 생각할 수록 난 찬열이 신기하다고 느꼈다. 오래 되고, 오랜 시간 좋아했고 또 그만큼 친했던 연지와 멀어졌었다. 그런데도 난 2개월동안 큰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확실하게 찬열의 역할이 있었다. 연지의 빈자리 역할. 나는 어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었다. 찬열이와 만난지는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혀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현재였다. 나는 연지의 문자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연지는 내 풋사랑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덜 아물고 풋풋하기만한 그런 사랑. 파고 들어가보자면 찬열도 조금 비슷했지만, 나는 뭔가 더 많은 것이 다르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연지를 좋아했을 땐 이정돈 아니었는데. 적어도 밤에 잠도 못자고 그럴 정도는…. 아무튼 나는 연지를 좋아했던 마음과 찬열을 좋아하는 마음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
"오랜만이다"
연지가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띠었다. 으응, 나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내가 미술실 청소담당이거든. 그래서 여기 있어도 괜찮아. 그것때문에 어색한 것은 아니었는데, 연지가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나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2개월 간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연락도 한 번 안닿은 연지와 무슨 큰 할 말이 있을까 싶어 찬열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잠시 미술실로 내려온 것이었다. 무슨 용건이 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는지 연지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왜 불렀어?"
"아, 그건.."
"내가 보낸 건... 다 씹더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드러났다. 그래, 지난 일이긴 해도 조금은 섭섭한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때 부터 친했고 의지했던 친구였고, 또 일상의 전부였고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계속 그랬었는데. 그랬었는데 연지는 너무나도 쉽게 내게 등을 돌렸다. 찬열이때문에. 연지가 살짝 마른 웃음을 흘렸다.
"미안해"
연지의 그 얼굴에 대고 나는 정말이야? 하고 물을 뻔 했다. 연지의 표정이 미안함을 담고 있는 것이 맞는지 나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아서였다.
"잘 지내더라, 너네"
"..."
"더 잘 지내더라"
나와 찬열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꼭 잘 지내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처럼 말하는 연지에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난 연지를 좋아했고, 연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찬열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날 받아줄 수 없다고 했었고. 그럼 그 말에 당연히 내가 찬열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걸까? 고작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나는 금세 연지에게 실망한 기분이었다. 무심한 얼굴에 영혼없는 말투. 원래 연지가 이런 아이였던가, 여태껏 내가 콩깍지라도 씌였던 걸까? 의문이 생길만큼 나는 지금의 연지가 낯설었다.
"아직도 나 좋아해?"
연지가 또 무심하게 말을 뱉어냈다. 아니. 나는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연지가 작게 웃음지었다. 그리고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말이 없었다. 내가 없는 연지 또한 멀쩡했다. 마치 새 학기에 처음 말을 나누는 어색한 사이에 감도는 공기처럼 낯선 분위기에 절실히 느꼈다. 2개월 간 잊고 지낸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연락을 피한 건 다름 아닌 연지였으니. 생각할 수록 실망스러워졌다. 뭐, 우리 고작 이 정도였었나 싶기도 했다.
"다행이네 그래도"
"..."
"너 나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정말 오랫동안"
처음엔 괜찮았는데, 점점 힘들더라. 동성도 아니고 이성사이에 제일 친하다고 있는 친구가 날 좋아하고, 근데 난 다른 애를 좋아하니까. 지금 네가 날 안좋아한다고 말하니까 솔직하게 말하는거야. 미안, 화나는 말일지도 모르겠네. 사실 내가 나쁜 게 맞긴 하니까.
나는 쉴새없이 귓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연지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너 참 나쁘다. 진짜로. 난 네가 날 좋아하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혼자 판단하고, 혼자 멀어지고.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연지가 계속 말을 잇다가 내 눈과 시선이 맞닿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이 좀 샜네"
"..."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놀랐지"
"..응"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냥"
마지막으로. 끝을 결정짓는 그 말에 나는 조금 심장이 욱신거렸다.
"우리 사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잖아"
"..알아"
"미안해, 좀 많이"
이번엔 제법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시계를 힐끔거렸다. 연지도 내 시선을 알아차린 듯 했다.
"자, 이제 가도 돼"
"..."
"그냥 흐지부지하게 돼 버리기엔 너무 마음에 걸렸거든 나"
우리, 진짜 오래 된 친구였잖아. 꽤 슬픈 과거형이었다. 그래, 갈게. 나는 조금 미련이 남는 발걸음을 남기고 미술실 문을 열었다. 망설여졌지만 이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잘 지내 백현아"
..그리고 찬열이도. 잘 지내라고 해줘. 등 뒤로 연지의 음성에 옅게 먹먹함이 묻어났다. ...응. 나는 짧게 대답하고 미술실을 나섰다. 왠지 나까지 마음이 먹먹했다. 너도, 꼭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지만 사실 난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친했던 변백현과 배연지는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나는 새삼스럽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여서 걸었다. 마지막이다. 사실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크게 와닿았다.
잘 지내, 연지야.
너도.
-
"어디 가"
찬열의 반으로 가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다가 그만 복도에서 마주친 찬열에게 손목을 붙들려 버렸다. 찬열은 여지껏 날 찾고 있던 듯 했다. 아. 나는 고개를 들기가 민망해서 계속 푹 숙인 채 입술을 말아올렸다. 너한테 가려고, 그럴려고 가고 있었는데…. 백현의 기어들어가는 말에 찬열이 너 반에도 없던데. 하고 말했다. 백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살며시 고개를 들어 축 처진 눈으로 찬열을 마주할 뿐이었다.
".. 울었어?"
"..."
찬열의 미간이 셀로판지 구겨지듯 좁혀졌다. 펑펑 눈물이 난 건 아니고, 그냥 눈물 몇 방울이 뚝뚝 흘렀다. 그래서 약간 눈이 빨개지고 물기 어렸을 뿐인데 찬열은 보자 마자 그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운 것은 사실이기에 나는 또 할 말이 없었다. 체감상 꽤 오래된 일이고, 또 2개월동안 나는 딱히 연지가 없어서 슬프지도, 사무치게 그립지도 않았지만 마지막을 알리는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암묵적으로 멀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다가온 끝맺음이란 게 그랬다. 연지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런 풋사랑상대라던가 그런 것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단지 내겐 그런 식의 이별이 익숙치 않아서였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연지 만났어"
"..."
"미안하대 나한테"
"하, 왜.."
찬열은 왜 제게 말을 안했냐고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 말 안했어. 별 말을 안했는데 왜 울었냐고 물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다행히 묻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이별이 슬퍼서 마음이 아렸다. 상대는 게다가 몇 년을 같이 했던 오랜 친구였고. 그래서 나는 잠시 먹먹한 기분일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정말로.
"잘 지내래"
"배연지가?"
"응, 나한테.. 그리고 너도"
그렇게 미술실을 나서는데 나는 왜 중학교 2학년 초가을에 마지막으로 교정을 나서는 종인의 뒷모습과 겹쳐보였던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서 조금 울컥한 것 뿐이었다. 찬열이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찬열도 사실 연지와 내가 멀어진 것은 자연스레 알게 됐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진 않았다. 내가 연지를 좋아했고, 또 연지의 고백을 받은 찬열이지만 연지가 내게 했던 말들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찬열은 별로 연지가 탐탁치 않은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제 중요한 것은 연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운거야?"
"..."
"..으이구, 이렇게 맘 약해서 어떡해 우리 백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날 보고 찬열이 쓰게 웃음 짓더니 이내 볼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미안…. 나는 조금 작게 소리내어 그에게 미안함을 표현했다. 찬열이 내 머리를 헝클더니 곧 손을 잡고 이끌었다. 됐어, 가자 이제. 배도 안고파? 짐짓 태연하게 하는 말에 나도 따라 조금 미소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
"앞으론 그런 것때문에 울지 마"
좀 싫다. 찬열이 낮게 덧붙이며 느리게 걸음을 늦추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걸을 뿐이었다. 그에겐 싫은 일일 수도 있는 것이 맞았다. 나는 연지를 좋아했었지만 그건 과거였고, 현재는 찬열을 좋아하는데 그의 앞에서 연지때문에 운 것을 들킨 꼴이니 그럴만도 했다. 찬열이 살짝 나를 돌아보고는 올곧게 응시했다.
"다음에 이런 모습 보이면 그 자리에서 확 뽀뽀해버릴거야"
"..어?"
"어제보다 더 찐하게"
찬열이 금세 표정을 풀고 장난스레 말하며 웃어보였다. 어제. 나는 금세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어제의 기억들에 당연하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찬열이 자꾸만 눈을 맞춰왔다. 나 농담 아니다. 찬열이 웃던 얼굴을 부러 싹 지우고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에 결국 나도 실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좋아. 너무 좋다. 이렇게 내가 쳐져있을 때 먼저 내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 찬열의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찬열의 끈질긴 시선에 도르륵 눈을 굴리던 내가 마침내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알았어"
"진짜로?"
"응"
이제 절대 이런 모습 안보일테니까 괜찮아. 내 말에 찬열이 피식 웃었다. 급식소를 향해 걷는 발걸음이 어쩐지 가벼워졌다.
* *
갑작스러운 연지의 등장.. 그리고 빠른 퇴장ㅋㅋㅋㅋ
이번 화 내용이 그닥 없는 것 같네요..ㅠㅠ죄송죄송
다음화로 완.결.. 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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