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관계
으쌰두부
아, 졸려. 나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이불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앉아있는 여주의 허리를 세운이 끌어안는다. 이리와. 잠긴 목소리가 세운의 목소리를 더욱 낮게 만들었다. 여주는 그런 세운에 잠시 끌려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세운의 팔을 걷어낸다. 안 돼, 나 씻을 거야. 세운은 여주의 말에 감았던 눈을 느리게 뜬다. 어디 가, 누구 만나? 응, 남자친구. 세운은 여주의 말에 얼굴을 구긴다. 그리고서 여주의 몸을 잡아당겨 제 옆에 눕힌 후 얼굴에 입을 맞춘다. 쪽, 적나라하게 들리는 소리에 여주는 인상을 찌푸린다. 자고 일어나서 무슨 뽀뽀야, 아 침 묻잖아 정세운! 여주의 장난 섞인 짜증에 세운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을 맞춘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 밥 해 줘? "
" 아니~ 만나서 먹을 거지롱. "
" 아, 예. 그러시든가요. "
후헤헤. 여주의 장난스러운 웃음에도 세운은 무표정했다. 여주는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우당탕 뛰어갔다. 뛰지 말라니까- 세운의 잔소리에도 여주의 행동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주가 샤워할 동안 세운은 냉장고에서 냉동 딸기와 우유를 꺼내서 믹서기에 갈았다. 거기에 꿀까지 넣어서 달달한 딸기 스무디를 만든 후 제 컵에 반 여주의 컵에 반 부었다.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주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나와 세운이 만든 딸기 스무디를 마셨다. 달콤하고 시원한 스무디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에 여주는 살짝 몸서리쳤다. 그런 여주를 지켜보던 세운은 그제서야 화장실로 향한다. 스무디를 마시던 여주는 화장실로 또, 우당탕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티셔츠를 벗으려던 몸짓을 멈추고 느릿하게 여주를 쳐다보는 세운이었다. 화장실 문 벌컥 열지 말라고 했- 세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주는 어디 가? 하고 말했다. 여자친구 만나러. 세운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문을 닫았다.
머리카락에 물기만 대충 날리고서 선풍기를 켠 여주는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하면서 어떤 옷을 입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말이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을 많이 드러내야 시원하겠지? 음, 그리고 통풍 잘 되는 옷. 화장을 마친 뒤 옷장을 뒤적거리다 전에 언제였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세운이 사 준 원피스를 입고 나가기로 했다. 음, 괜찮네. 시원하고 좋다. 준비를 마친 여주는 가방까지 챙겨 들고서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둘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뽀뽀까지 하는 사이인데 정작 둘은 각자 여자친구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둘은 무슨 관계일까. 정답은- 동거를 하던 전 애인 사이이다. ……? 여기에서 더더욱 의문이 들겠지. 전 애인인데, 왜…? 음, 둘의 관계는 굉장히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세운과 여주는 20살에 만나서 연애를 시작해 24살 봄에 헤어졌다. 이별의 이유는 간단했다. 참을 수 없는 권태 때문이었다. 여주의 성향을 본다면 그만큼의 시간을 사귄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뭔가를 오래 하지 못 하고 산만하고 정신없는 성격. 아무튼, 둘은 세운이 군대에서 제대한 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동거를 시작했다. 둘의 돈으로 얻은 방은 원룸이었고 둘은 같은 침대를 쓰게 되었다. 불면증을 겪던 여주는 세운의 품 속에서 자니 포근해서 그런지 불면증 증세도 많이 완화되었고 나름 만족스러운 동거였다. 정신 산만한 여주에 세운은 매일 잔소리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니 여주는 권태를 느꼈다. 세운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여주가 겪은 권태는 꽤나 컸다. 오랜 기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탓인지 권태의 크기도 어마어마 했다. 그렇게 둘은 권태기를 이기지 못 하고 헤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 동거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헤어진 직후 바로 방을 뺀다거나 한 명이 나간다거나 하겠지만 웃기게도 둘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손해보는 일은 안 하는 사람들이었다. 방 계약 기간은 아직 몇 개월 남았고 둘은 이미 돈을 냈으니, 그 집은 다 자신들의 집이 아닌가. 그래서 둘은 헤어지고 나서도 같은 집에 살기로 한 거였다. 한동안은 한 명은 침대에서 한 명은 바닥에서 자며 따로 잤지만 세운과 함께 자지 않으니 여주의 불면증 증세가 다시 악화되어서 여주의 요구로 둘은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동거는 계속 되어 여주와 영민이 사귀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였다.
영민은 여주가 아르바이트 중인 카페의 사장님이었다. 나이는 26살. 여주는 처음 영민을 보았을 때 영민이 사장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경력 높은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이가 26살일 줄은 몰랐다. 동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여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특유의 백치미를 뽐냈다. 다행스럽게 주문 받은 음료를 만들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영민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그런 면을 많이 보였다. 영민은 그런 여주를 보면서 자연스럽게도 사랑에 빠졌고 여주는 그런 영민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사귀게 되었다. 여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운에게 영민의 존재를 밝혔다. 주말에 평소답지 않게 일찍 일어난 여주를 보며 세운은 어디 가냐고 물었고 여주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답했고 세운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여주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에 세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고 여주도 얼마 뒤 알게 되었다. 음, 사실 여주는 세운의 여자친구가 있든 말든 별 관심 없었다. 세운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
그리하여, 여주는 제 남자친구 영민을 만나러 영화관에 왔다. 여주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영화를 영민이 이미 예매해 두었고 여주가 좋아하는 카라멜 팝콘도 이미 사둔 뒤였다. 여주가 팝콘을 가져가서 들려고 하자 불안한 눈빛으로 보던 영민은 영화표를 건넸다. 이거 들고 있어, 영민의 말에 여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사실 영민은 영화표를 준 것도 불안했다. 잃어버리진 않겠지, 속으로 생각하던 영민은 영화표를 잃어버리기 전에 바로 상영관으로 향했다. 영화표를 손에 쥐고 있는 여주는 팝콘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영민의 입에 팝콘을 하나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아기새처럼 받아먹는 영민이 귀여워서 여주는 팝콘을 물고 있는 영민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영민이 물고 있던 팝콘을 물어와 제가 먹었다. 그런 여주의 행동에 영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여주를 바라보던 영민이 여주에게 다시 입을 맞추려고 하자 상영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직원의 말이 들려왔고 여주는 쌩하니 들어가버렸다. 그에 영민은 뒤에서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
영화광인 둘은 영화를 볼 때 굉장히 집중해서 본다. 실은, 영화에 푹 빠져서 보는 여주의 영향이 컸다. 영화를 볼 때는 누가 건드리면 예민미를 한껏 발산하는 여주는, 누가 자신을 건드는 것을 안 좋아했다. 그런 여주를 잘 아는 영민은 영화를 보는 중에는 여주에게 손끝도 대지 않았다. 가끔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했지만- 여주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하니까. 아무튼, 그래서 오늘도 둘은 영화 보는 내내 아무런 스킨십 없이 있다가 영화를 다 본 뒤에야 손을 잡았다. 여주가 카라멜 팝콘만 골라먹은 탓에 밑에 일반 팝콘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밥 먹으러 갈 거니까 남은 건 버리고- 영화관을 나서는 둘이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 술 한 잔 하고 주말 데이트를 알차게 즐긴 영민과 여주는 이제 집에 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영민이 여주의 집에 데려다 주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영민의 차를 타고 다녔겠지만 오늘은 술을 마신 터라 걸어서. 여름이라 습도가 높았지만 바람이 꽤 불어서 그리 덥지는 않았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여주는 평소보다 하이텐션이 되어 영민에게 조잘대며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영민은 그런 여주를 향해 사랑스러운 눈빛을 쏘고. 집 앞에서 한참이나 애정행각을 하고 있었다. 영민의 품에 안겨서 애교를 부리는 여주, 그리고- 그런 여주를 지나치다 영민과 꽤나 세게 부딪친 사람은 세운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세운이 영민에게 느리게 말했고 영민은 그런 세운을 빤히 쳐다보다 네,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세운은 영민과 여주를 지나쳐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여주는 그런 세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영민에게 안겨 있었다. 아, 영민아아-
" 김여주. "
" 응? "
" … 언제까지 속일 셈인데, 너. "
" 무슨 소리야? "
" 너, 저 새끼랑 같이 사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았어? "
영민이 여주에게서 한발짝 떨어졌다. 영민의 말에 여주는 동그란 눈을 꿈뻑였다.
" 난 속인 적 없는데. 그냥 말을 안 했던 것 뿐이야. "
" 그게 속인 거라고. "
" 아, 그런가……. 그렇구나. "
" ……. "
" 그래서, 나랑 헤어지고 싶어? "
여주의 말에 영민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씨발, 욕설을 속으로 삼켜낸 영민은 천천히 여주를 내려다본다. 그게 맞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건데 나는 왜 그게 안 될까 병신같이. ……아니. 영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여주는 살짝 웃으며, 영민에게 입을 맞춘다. 나 들어갈게. 조심해서 가. 영민은 그런 여주가 엘레베이터에 타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세운과 같은 층에 멈춰선 엘레베이터, 그게 영민을 미치게 한다.
아, 좆같다.
여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침대에 확 누워버렸다. 아아, 정세운이 잔소리할 텐데. 침대에서 몸을 스르르 내린 여주는 양말과 옷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했다. 데이트를 하면서 밖에 많이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땀이 꽤 나서. 아무튼, 샤워를 하고 나오니 세운이 이미 침대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을 끄고 스탠드를 켜고서 책을 읽던 세운은 여주가 오자 책을 덮었다.
" 운아. "
" 응. "
" 세운아아. "
" 응. "
" 너 얼굴 여기 빨갛다. "
세운의 오른쪽 뺨이 부어있었다. 세운은 여주의 말에 제 뺨을 한 번 쓸었다. 그러자 여주도 세운의 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여주의 손이 닿았음에도 세운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자친구가 때리던데- 아, 이제는 전 여자친구. 응? 헤어졌어? 응. 헤어졌냐는 여주의 말에 세운은 대담하게도 대답했다.
" 너 때문에. "
" 으응? 왜 나 때문에. "
" 너랑 같이 사는 게 싫대. "
" 그래? 음, 내 남자친구도 그러던데. "
" 그래서 헤어졌어? "
" 아니. 헤어지긴 싫다던데. "
세운은 여주의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아, 그렇구나. 여주는 그런 세운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든다. 입술 깨물지 말라구- 세운은 여주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야. 여주의 짧은 비명에도 세운은 놓아주지 않았다. 세운은 여주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몸 가까이로 당긴 후에야 여주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 여주는 해사하게 웃었다. 순수하고 해맑은 여주 특유의 웃음. 그 웃음에 세운은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 우리 결혼하자. "
" 뭐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
" 너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나랑 결혼하자. 걔랑 결혼할 거야? "
" 으음, 그건 모르겠어. "
" 너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 나밖에 없을걸. 네 남자친구는 너 감당 못 해. 남자친구 두고 전 남자친구랑 같이 사는 거. "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
현 남자친구 임영민 vs 전 남자친구 정세운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소재입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