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KARD - Hola Hola
"뭐 시키지? 뭐 먹고 싶은데?"
"난 이-거! "
"꽃게 올라간 거야?"
"그렇대. 안 먹어봤어. 난 이거 먹을래."
"과ㅈ....아니, 오빠는요? 괜찮아요?"
과장님이 아닌 '오빠'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워낙 박지훈이 단호하게 꽃게가 올라간 피자를 시켜서 딱히 반대 의견을 낼 수 없기도 했다.
나는 점원을 불러 박지훈이 강력하게 주장한 꽃게 피자를 가리켰다. 물론 녀석이 좋아 죽는 콜라를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신나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 박지훈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좋아? 하니까 어. 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과장님은 그런 박지훈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웃으셨다. 웃겨서 웃는 것 같지는 않고, 아빠미소 같은 느낌...?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형님!"
"그래."
"근데 뭐... 어쩐 일이에요? 좋은 일 있어요?"
토요일에 워크숍에서 돌아온 후, 한참 비워놓은 집에는 박지훈이 있었다. 제 친구 진영이를 데려와서 한두 밤 같이 잤다고는 하지만 내심 심심했을 터.
방학에 누나 집에 오긴 왔어도 정작 누나는 없고,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 밖에서 밥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과장님과 휴가 간다는 것도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고, 이왕이면 이모와 엄마한테 '과장님과 함께'라는 말은 빼고 전달하라는 부탁도 해야겠고.
그래서 겸사겸사 데리고 나와서 저 좋아하는 피자를 사먹이고 있는 거였다. 물론 열린 지갑은 과장님의 것이었지만...
"누나 휴가야."
"휴가?"
"응. 사이판 가려고. 4박 5일."
"호오......"
호오, 하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둘이? 같이?
그 물음에 나는 과장님을 쳐다보고, 과장님은 나를 쳐다봤다. 눈짓으로 답을 맞추려 했지만 그 모션까지 박지훈에게 이미 읽혔을 터.
뭘 숨기려는 생각은 눈치 100단 박지훈 앞에서는 고이 접어두는 게 마음 편한 일이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같이. 했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지더니 이내 표정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곧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으음... 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좋겠다. 재밌겠네..."
분명 놀려대거나 이모나 엄마한테 이야기하겠다고 할 만한 게 박지훈의 성격인데, 오늘은 뭐랄까, 너무 빠르게 수긍하는 모습이 오히려 어색했다.
나는 얘가 왠일이래, 하는 생각으로 박지훈을 쳐다봤고, 박지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과장님을 쳐다봤다.
저희 누나 수영 진짜 잘해요. 아마 물 만난 물고기 한 마리 보실 거예요. 하하. 하면서 능글맞은 멘트도 붙이는데... 뭐지. 내가 알던 박지훈이 아닌 이 기분은.
피자의 힘인가? 역시 돈이 좋은 건가? 아니면 과장님이 계셔서 아무 소리 안 하는 건가? 이런저런 궁금증이 생겼는데 굳이 물어서 긁어부스럼을 내지는 않기로 했다.
"잠깐 화장실 좀."
과장님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과장님을 향해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휘적휘적, 워낙 다리가 길어서 몇 걸음 안 걸었는데도 저만치 가있다.
바라만 봐도 흐뭇한 내 남자의 뒷모습이다. 나도 몰래 입꼬리와 광대뼈가 올라가 있는 것을 느끼며 뒤늦게 억지로 끌어내리려 안감힘을 썼다.
박지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음란마귀가 가득 담긴 말투로 물어왔다.
"호텔은 더블룸 예약하심?"
"야."
"아니, 뭐. 커플이 각방은 아닐 거고. 그렇다고 침대 따로인 트윈도 이상하잖아."
"죽는다, 박지훈."
"아니, 내가 이런 것도 못 물어봐? 어?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그거 물어보는 의도가 뭔데. 이놈 자식이..."
아주 음란마귀가 가득 씌어서는....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지훈을 째려보니, 쩝, 입맛을 다시며 포크를 물었다 놓는다.
더블룸 예약한 건 사실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걸 자랑이랍시고 박지훈한테 떠벌일 일까지는 없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 자식이 누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어? 까불고 있어. 확 그냥 등짝 스매싱 맞을라고. 너, 오빠 앞에서는 조용히 해라.나름 협박조로 말했다.
"누나, 근데."
"응."
"저 형.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피자 사주면 괜찮은 사람이냐?"
"아니. 내 생각인데, 대학 때 만나던 시시껄렁한 놈들보다는 훨 낫다고."
쭈뼛거리며 말하는 모양이 좀 귀여웠다. 아무리 누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해도 혼날 만한 말이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어떤 모습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나 싶어 물으니, 모범생 스타일은 아닌데 그래서 더 좋단다.
"그냥 양아치 같다고 해. 나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양아치는 나쁜 거잖아. 형님은 나쁘지 않다고."
"형님? 이제 뭐 누나보다 형이 더 좋은가 보다?"
"누난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됐고. 그럼 나중에 엄마한테 말이나 잘 해줘.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사시킬 거야?"
묻는 말에 내가 되려 더 놀랐다. 나도 모르게 과장님을 부모님께 인사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건 분명 무의식의 작품이다. 아아, 뭐... 아직은... 이라 얼버무리긴 했지만 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하고 또 서로 많이 좋아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그쪽으로 가게 됐다.
굳이 뭐.... 결론을 얻고 싶어서 인사시킨다기 보다는 우리 이렇게 잘 만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의미로다가. 찾아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다.
"이모 좋아하실 것 같은데."
"엄마가? 그럴 것 같아?"
"응. 듬직하고 능력있고 잘생겼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뭐. 오히려 형님이 아깝다고 했으면 했지, 누나가 아깝다 하지는 않......"
"몇 대 맞을래, 진짜."
과장님이 사라지자마자 제 세상을 만난 듯 나를 놀려대는 박지훈이다. 몇 대 맞을 거냐고 물어도 결국엔 때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까부는 거다.
이러다 한 번 확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더 이상 본때를 보여준다고 해서 말을 잘 들을 나이는 훌쩍 지나버렸다는 게 서글펐다.
박지훈은 장난이야. 하면서 뒤늦은 수습을 해보였고, 나는 됐다, 됐어. 이러니까 키워놔봤자 다 소용 없다는 말이 나온다고. 하며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여간, 나는 찬성일세. 박지훈은 마무리를 짓듯 이야기했고, 나는 박지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박지후이. 엄마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하고 말했다.
그러지 뭐. 선심 쓰듯 웃어보인 박지훈이 다시 자리로 돌아온 과장님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저거, 저거.... 으유.
마침 나온 뜨끈뜨끈한 피자를 보며 박수를 치는 박지훈을 보며, 이따가 밤에 자고 있을 때 꿀밤 한 번 먹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두고보자, 박지후이.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마가 빨가면 내 작품인 줄 알아라, 인마.
-
"○사원, 수요일부터 휴가 맞아요?"
"네, 과장님!"
"응. 알겠어요."
부서원들의 휴가를 한꺼번에 정리하시던 옹과장님이 나를 향해 휴가 일정을 물었다. 수-목-금 쭉 이어지도록 휴가를 신청했기 때문에 맞다고 대답했다.
실은 신입사원이기도 그래서 휴가를 신청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워크숍이 전체 휴가를 대신한 거였단다.
그래서 전체 휴가가 없으니 휴가를 사용할 사람들은 신입이고 아니고 간에 휴가 장려기간에 사용하기를 권장한다고, 공지를 했던 게 지난 번 영업마케팅부서 전체회의 때.
그것 덕분에 그나마 자신 있게 휴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내게 여름휴가는 없었겠지.
하여간 프로젝트 끝나마자 눈치 안 보고 팀장님 앞에 휴가신청서 낸 내 뻔뻔함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과장님은 휴가 언제 가세요?"
"나는 이번 여름은 생각 없어요."
"아.... 그래도 좀 쉬면 좋을 텐데요.."
젠틀하게 웃어 보이며 이번 여름에는 휴가를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옹과장님.
프로젝트 전체를 이끌어 가시느라고 나보다 더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결코 안 힘들지는 않았을 과장님을 모르는 게 아니라 좀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또 많다고 해도... 사람이 조금 쉬엄쉬엄하고, 그래야 또 일도 잘할 수 있는 건데... 안 그래도 날도 더워서 일도 힘든 마당에 휴가도 없이 일하신다니..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상사는 휴가를 안 가는데 내가 가는 것도 죄송해서 조금 더 말을 붙였다.
"프로젝트 하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잖아요, 과장님..."
"고민 중인 계획이 있어서요.
나는 괜찮으니까 마음 편하게 다녀와요. 사무실은 내가 지킬게."
고민 중인 계획이라... 여름 휴가 안 쓰시고 추석 때 몰아서 쓰시려는 계획인가. 아니면 뭐 다른 사정이라도 있으신 건가..
이런저런 고민을 나 혼자서 해보다가, 괜찮다고 말씀까지 하셨는데 더 이상 휴가 다녀오시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관뒀다.
과장님은 걱정스러운 내 눈빛을 읽으셨는지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셨다. 웃음을 보기 전 보다야 마음이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죄송했다.
따지고 보면 사이판 항공권도 과장님이랑 달리기에서 우승해서 받은 거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녀와서 일 열심히 할게요. 과장님께는 들리지 않겠지만 혼잣속으로 이야기해봤다.
"잘 다녀와요. 이번 기회에 푹 좀 쉬었으면 좋겠다."
여운이 남는 미소를 보여준 과장님이었다. 저도 과장님이 좀 푹 쉬셨으면 좋겠는데...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생각만 계속 붙들고 있었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요일. 밤 10시 비행기였다.
캐리어는 출근할 때 과장님의 차에 실어둔 상태였고, 누구보다 빠르게 칼퇴를 성공한 우리는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몸을 던져 넣었다.
수요일 밤 비행기도 있긴 했으나, 휴가를 단 하루라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내 주장에 과장님은 져주셨다. 그래서 근무일에 비행기를 잡은 거였다.
어차피 잠은 비행기 안에서 자면 되고, 하루라도 더 사이판에 머물면서 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건 우리 둘의 똑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공항으로 향하는 차, 그 차를 운전하는 과장님을 보며 몸은 피곤해도 기분은 정말 좋았다.
"맞다, 과장님!"
"응?"
퇴근하기 전에 사내카페에 잠시 들러서 샌드위치를 사왔다. 혹시라도 운전하는 우리 과장님 배고프실까 봐서.
가방에 넣어둔 샌드위치를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핸들을 잡고 있느라 손을 쓰기 어려우니 내가 먹여드려야지. 과장님, 아- 했더니 함박웃음을 지어보인다.
와앙, 하고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모습이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 과장님 이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자꾸 귀여워지니 큰일이다.
천천히 씹어드세요- 했더니 우웅,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왜 엄마가 아기에게 자꾸 뭘 먹이고 싶은지 알 것 같다.
"한 번 더, 아-"
"아-"
나를 따라 아- 하며 입을 벌리는 과장님이다. 입가에 마요네즈가 살짝 묻어있어서,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훑어냈더니 사뭇 놀란 표정을 짓는다.
다 드시면 신호 보내요. 더 드릴게요. 아무렇지 않게 내가 말을 이어가도, 놀란 표정은 그대로다.
본인은 내게 훅, 훅, 잘도 들어오면서 내가 훅 들어오면 이렇게 놀라곤 한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또 훅 들어가는 거지만.
행복하다. 끊어지지 않는 웃음, 차 안의 공기,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차의 속도.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행복이란 감정을 만들어냈다.
아- 하고 이번에는 먼저 다가오는 과장님의 입에 남은 샌드위치를 넣어드렸다. 볼이 잔뜩 부풀어오른 모습이 귀여워서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에 과장님은 또 놀랐다. 놀라서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다. 나는 앞에, 앞에! 운전해야죠, 운전. 하면서 능글맞게 주의를 돌렸다.
"선수야, 선수."
"뭐, 그렇게 됐네요-"
허, 하고 짓는 헛웃음이 가볍다. 나를 향해 잔뜩 눈을 휘며 웃어오는 미소가 좋다.
포근히 내 손을 잡아오는 그의 큰 손. 오늘따라 따뜻하게 감싸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괜히 마음이 곰실거렸다.
-
"우와아-!!!"
과장님의 어깨에 기댄 채로 비행기 안에서 거의 5시간을 보내고 나니, 사이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안 되었다.
짐을 찾아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오니 또 훌쩍 5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 텐데도 정신은 말똥했다. 잔뜩 설레는 마음 때문인 걸까.
신발을 벗자마자 창문으로 달려가 풍경을 봤다. 밤이라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오션뷰라는 것 만큼은 똑똑히 보여서 탄성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와아, 과장님! 이거 봐요! 바다 봐요!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고, 과장님은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로 나를 바라봤다.
와아... 멋있다.... 테라스 문을 살짝 열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드디어 사이판에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과장님이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과장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과장님은 나를 내려다 보며 어깨를 감싸주었다.
"고마워요, 과장님."
"뭐가?"
"그냥, 다. 꿈 같아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게."
"......."
과장님이 손을 들어 내 볼을 감쌌다. 그 큰 손에 내 볼이 감싸질 때면 늘 사랑 받는 것 같아서 약간, 심장이 간지러웠다.
안 추워?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과장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조금 잠긴 걸 보니 과장님도 피곤한 모양이다.
으응. 들어가요, 우리. 하면서 테라스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제서야 뷰를 본다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 캐리어를 똑바로 세워놓은 손길은 과장님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또 한 번 심장이 간지러웠다.
"나 먼저 씻을까?"
"네. 저 짐 좀 정리하고 있을게요. 과장님 것도 같이 할까요?"
"응. 얼른 씻고 나올게."
과장님은 씻으러 들어가셨고, 나는 휴대폰으로 분위기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차근차근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도 꽤 넓고, 뷰도 내가 엄청 좋아하는 오션뷰인 데다가, 층도 적당히 높아서 조용하고... 이렇게 완벽해도 되는 걸까.
쏴아아, 하는 물 떨어지는 소리에 멍하니 샤워실 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과장님을 처음 만난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새벽이라 그런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괜히 지난 일들이 기억나고 그런다. 서로를 좋아함에도 일어난 오해들, 그리고 풀어낸 과정.
그 과정을 딛고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그와 함께 있다는 게 정말.... 감동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나, 둘 깔끔하게 접어둔 옷가지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이런저런 일 많았지만 그래도, 예쁘게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 다 씻었어."
어느샌가 하얀 샤워가운을 입고, 하얀색 수건으로 갈색 머리를 탈탈 털며 내 옆에 온 과장님이다. 낯설지만 향긋한 샴푸냄새가 코를 스쳤다.
정리할 거 많았어?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잠겨 있다. 따뜻한 물로 씻었으니 금방 피곤이 몰려온 모양이다. 퇴근 후에 운전까지 하고, 이래저래 피곤했을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많지는 않았어요. 나도 얼른 씻고 올게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카락이 젖은 채 나를 올려다 보는 눈빛이 강아지 같아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 발이 묶일 뻔 했다.
미지근한 물이 몸을 적시니, 쌓인 피곤이 훅 몰려오는 느낌이다. 과장님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잠겼는지 알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이판에 막 도착한 즐거움에 눈이 말똥말똥 했었는데, 물을 맞으니 확실히 노곤해지는 게 잠들기 딱 좋은 기분이다.
샴푸도, 바디워시도 서둘러 하고 얼른 물기를 닦아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는 피곤이 잔뜩 껴있다. 정말이지 곧 해가 뜰 것 같다.
비행기에서 좀 자긴 했지만 거의 꾸벅꾸벅 졸은 수준 정도여서, 말하자면 거의 밤을 새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잔뜩 노곤해진 몸으로 샤워가운을 입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
과장님이 룸 안의 불을 꺼둔 모양이다. 아까와는 달리 갑자기 어두워졌다. 침대 근처에만 어렴풋한 빛을 뿜는 스탠드가 켜져 있다.
나는 살살 머리카락을 털며 침대 근처로 갔다. 내 인기척을 느낀 과장님은 감고 있던 눈을 떠 내 손을 잡았다. 깜빡 잠드셨던 모양이다.
나는 금방 과장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과장님은 손을 뻗어 내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과장님 팔뚝 아플 텐데.. 했더니 괜찮아. 하며 씨익 웃는다.
같은 샴푸와 같은 바디워시를 썼기 때문인지 내 몸에서 나는 향이 과장님에게도 난다. 그게 좋아서 조금 더 과장님의 품에 파고들었다.
과장님은 낮게 웃으며 나를 당겨 안아주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가만, 가만, 쓰다듬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꿈 같다.. 자고 일어나면 출근해야 할 것 같아.
그런 거 아니겠죠?"
"아니야. 편하게 자. 회사 생각하지 말고."
자장가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온다. 따뜻하고 든든한 손길에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다.
아니, 사실은 이미 잠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고마워요, 과장님."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눈 앞에 있는 과장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과장님은 간지러운듯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과장님의 어깨를 안았다. 워낙 너른 어깨라 한 팔로 안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을 하고 손을 뻗었다.
"나도, 고마워. 잘 자."
그게 사이판 첫날 밤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너른 품, 바디워시 향이 가득한 몸, 내 머리를 받쳐주는 단단한 팔.
그렇게 그의 품에서 밤을 떠나보내고, 또 아침을 맞았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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