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깜박 잠이 들어버린 하연은 갑자기 불어오는 한기에 놀란듯 일어났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던 하연의 앞에는 무표정한 택운이 있었다. 푸석해진 얼굴로 하연을 쳐다보는 택운의 모습은 곧 죽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척했다. 택운의 분위기에 압도 당해 가만히 있던 하연이 택운에게 인사를 건냈다.
"..구면이죠, 우리. 스포츠서울 김하연 기자입니다."
하연의 말에도 택운은 아무 대꾸 없이 하연을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갔다. 하연은 그런 택운의 팔을 잡은 뒤 택운에게 말을했다.
"학연이, 이대로 냅둘꺼에요? 이렇게 죽어서도 욕 먹게 그냥 지켜볼꺼냐고요. 상혁씨한테 다 듣고 왔어요. 택운씨가 얘기만 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택운은 하연의 손을 쳐냈고, 하연은 다시 내려가려는 택운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아무리 열애설에 시달리고, 스케줄에 치여도 꿋꿋이 버티던 애가 당신하고 불화설 난 다음에 바로 연예계에서 매장을 당했어! 당신네 그 깡패같은 회사 때문에 차학연은 쓰레기 취급 받으면서, 집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고. 내가 그렇게 기사 써주겠다고, 사실 좀 말해달라고, 말도 안되는 일 아니냐고! 화를 내도 안된다고, 자기가 얘기하면 멤버들이 다칠거 아니냐고, 자기는 괜찮다면서 웃던 애야.. 씨발, 진짜 이제는..이제는 진실을 좀 말해야 되는거 아니야?"
하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학연을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났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학연은 늘 큰 짐을 혼자 메고 가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아파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택운에게 얘기를 하던 하연은 눈물을 닦으며 결국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도 차학연 그 바보같은 놈 때문에 미치겠는데,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근데, 내가 진실을 말하면 차학연이 그렇게 지키고 싶던 그 빅스라는 이름이 사라지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
택운 역시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말해, 어떻게 를 중얼거리던 택운은 하연의 팔을 붙잡고 작업실로 끌고 갔다. 택운의 작업실에는 굴러다니는 술병과 학연과 멤버들의 사진만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밖의 온도와 별반 차이 없는 택운의 작업실에 몸을 떨던 하연은 택운이 붙잡고 있는 손을 쳐댔다.
"뭐하는거야, 갑자기."
"밑에 기자들 왔어. 하, 진짜.. 씨발."
택운의 말에 얼른 커튼 틈으로 밖을 본 하연은 수십대의 카메라에 진이 빠진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업실은 또 언제 유출된거래.
"커텐 놓고 얼른 앉아. 몇 시간 후면 팀장 올꺼야. 팀장 오면 학연이 기사 못 쓸거고."
택운의 말에 하연은 놀란 듯 택운을 쳐다봤고, 택운은 쇼파에 기대어 앉아 하연을 재촉했다.
*
"택운아.."
연습실에서 나와 문 앞에서 담배를 피는 택운에게 학연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쉽게 탈퇴한다는 소리가 나오냐."
"화 많이 났어? 야, 너까지 화내면 어떡하냐. 나 믿어주는 사람은 너 밖에 없는데."
"아직 애들 아무도 몰라. 그리고 난 콘서트 끝날 때까지 모르게 할거야. 너가 탈퇴를 하든, 회사를 나가든 아무 상관 없어. 콘서트 때까지 팀에 폐만 끼치지마."
택운의 말에 학연은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택운은 화가 났다. 학연이 팀을 나간다는 소리를 학연의 입도 아닌 팀장님께 들었고, 5일 내내 자신에게 연락 한 통 없던 학연은 진심으로 웃으며 탈퇴를 바라고 있었다. 팀장님은 학연이 아예 예능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소속사를 이전 할 것이라는 소리를 하며 택운에게 앞으로 빅스의 리더가 택운이 될 것이라는 소리를 했다.
"차학연, 너 근데 진짜 돈 때문에 나가는거냐?"
택운의 말에 학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 우리 집 아버지 돌아가시고 상황 많이 안 좋아진거. 어차피 빅스 계약은 우리 콘서트 이후에 끝나고, 너네랑 무대도 같이 못 오르는 날이 더 많을텐데 그냥 나는 다시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MC쪽으로 나가보려고. 다른 소속사에서 계약도 들어왔고.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냐, 이해 좀 해주라."
제발 아니길 바랬다. 학연이 팀을 나가는 이유가 돈 때문 만은 아니길 바랬다. 몇년을 같이 봐온 학연의 얼굴이 그렇게 낯설 수 없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면서 돈 때문에 팀을 떠나겠다는 학연을 보자 택운은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그래."
택운은 학연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그 옆에서 가지 않고 지켜보는 학연의 눈이 왜 그렇게 빨갛고, 왜 그렇게 몸을 떨면서 택운을 쳐다본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된건 학연이 탈퇴 선언을 하고나서 한참 후의 일이었다.
[빅스 전 리더 N, 폭행 사건에 휘말려..]
[N, 어디까지 무너지나?]
[빅스를 배신하고 떠난 N, 관계자들이 말하는 N의 두 얼굴]
학연의 탈퇴 후,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재계약을 하면서 약간의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함께 살던 숙소생활에서 벗어나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멤버들은 서로에게 간간히 연락하며 그렇게 휴식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더 이상 학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택운이 받은 충격만큼이나 멤버들 역시 학연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마디 인사도 안하고 떠난 학연이 야속하기는 한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학연에 대한 얘기는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차학연 기사는 우리쪽에서 흘린대로 하고 이제 슬슬 빅스 활동 시작해야지. 좀 리스크가 있긴 했지만 차학연 덕분에 여론이 그렇게 몰려서 나머지 멤버들은 별 타격 없이 지나갔잖아."
택운은 새로운 앨범에 대한 콘티를 상의하러하기 위해 사장실 앞까지 섰지만, 들어 갈 수 없었다. 오랜만에 들어본 학연의 이름에 문을 열고 들어 갈 수 없었다.
"아주 그냥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폭행설 기자 뜨자마자 학연이한테 빅스 재계약 없던걸로 하자고 전화했더니 바로 달려와서 무릎 꿇고서는 그냥 자기는 괜찮으니까 나머지 멤버들이라도 재계약 해달라고.. 자기는 방송 그만해도 좋으니까 자기 이미지 팔아서 빅스 다시 살려달라고 난리였지. 야 멤버 왕따설 묻힐만한 큰 건수가 술 마시고 폭행밖에 더있냐?"
사장의 말에 택운은 떨리는 몸을 주체 할 수 없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싶었지만 사장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틀림없이 학연이었다.
"배신돌, 폭행, 관계자들 허위 인터뷰 좀 따서 언론에 풀었더니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던데. 차학연이 빅스 바람막이 든든히 하고 있는거지. 어어, 차학연 그 새끼 어디갔냐고? 뭐 몸이 안 좋다고 그랬나, 어디 아프다고 병원 들어갔어. 아 여튼 김기자. 빅스 멤버들이랑 배신 한 차학연이랑 비교해서 쓰는거 잊지말고. 나중에 내가 술 한 번 살게."
택운은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굴이 빨개져서 들어오는 택운을 보고 흠칫한 사장은 택운을 보고 웃으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학연이 지금 어딨습니까?"
"..무슨 소리야. 집에 있겠지, 그나저나 이번 컨셉 어떻게.."
"기자들 모아놓고 사장님 만행 다 불기 전에 얼른 학연이 있는데 말해요."
택운의 말에 사장은 얼굴을 굳히고 종이를 내밀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신촌연세병원 A동 2503호] 종이를 받자마자 택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하..씨발, 진짜 차학연 끝까지 사람 엿 먹이려고."
택운은 차를 타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학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학연은 늘 그랬다. 자신이 진 짐을 나누는 법을 몰랐다. 힘들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동갑인 택운에게 조차도 자신의 힘든일을 내색하는 법을 몰랐다. 빅스를 위해 팀을 나간 학연을 택운과 멤버들조차도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학연을 욕하는 기사를 보면서도 저정도 욕은 당연히 받아야 될 욕이라고 생각했었다.
'나 믿어주는건 너밖에 없잖아.'
학연의 말이 생각나 미친듯이 차선을 따라 병원에 도착했다. 여태까지 기사가 안난거보면 학연이 얼마나 병실을 숨키기 위해 노력했을지 눈에 선해서 택운도 모자를 꾹 눌러쓰고 조심스럽게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