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w. 워너워너
나에겐 아주 오래된 친구가 있다. 나의 부스러기 시절부터 어엿한 어른이 될 때까지 내 시간을, 내 기억을 그렇게 채워준 한 친구가 있다. 옹성우는 나에게 지랄맞고도 지랄맞은 새끼였다. 나는 중학생 코찔찔이 시절, 사춘기를 한참 겪고 있을 때 잠깐 방황했던 그런 시간이 있었다. 중 2병이라는 걸 몸소 겪어보았다 이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킥으로도 모자랄만큼 쪽팔린 기억이지만. 옹성우랑 같이 다니던 수학 학원은 물론이고 국어학원도 나가지 않았다. 학교 수행평가는 귀찮다는 이유로 손도 대지 않았고 학교에서 껌 좀 씹는다는 양아치 녀석들과 서서히 말을 트고 있었다. 그 양아치 애들은 내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건지 수업을 째고 pc방에 가자고 하루종일 제안해왔다. 그래서 학교도 몇 번 째고 벌점도 진탕 받아 교내 봉사 활동도 했다. 아, 정말 그때는 하루만 살고 내일은 생각도 안 했지.. 이런 내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건 엄마도, 아빠도 아닌 옹성우였다. 그때의 나는 겉 멋만 잔뜩 들어서 나를 따로 타박하지도 않았는데 그 한심한 눈동자에 괜히 혼자 찔려서 옹성우에게 성질을 부렸다. 왜, 뭐 그딴식으로 쳐다보냐. 너 왜이리 삐딱선 타냐 이게 한 달만에 들은 옹성우의 첫 마디였다. 옹성우는 교복 마이까지 딱 갖춰서 입고 있던 반면에 나는 흰 와이셔츠에 사복 티셔츠를 자랑하듯이 내밀고 있었다. 그땐 그런 옹성우의 똑바른 옷 차림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를 옹성우랑 서먹하게 지냈다. 다시 예전처럼 친해지고 싶었는데 나를 대하는 옹성우의 태도도 달라졌고 무엇보다 이 양아치 무리와 다 놀고나면 이미 늦은 밤이라 옹성우한테 말을 걸 틈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일탈을 하고 나면 우리 집에서 옹성우와 닌텐도나 했던 때가 그리웠다는 건 아직도 나만 아는 비밀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반에서 담배가 나온 거다. 물론 의심받는 애들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 양아치 무리, 거기에 억울하게도 포함된 나. 저 담배는 현식이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양아치 중 생 양아치인 현식이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현식이가 무심코 내던진 말, 그거 강다니엘꺼 아니냐. 내 이름이 한 번 언급되자 애들은 옳다구나 싶어서 미끼를 물었다. 맞아, 강다니엘 니 잖아. 억울했다. 담배의 담 자도 모르는 나였다. 저 양아치 새끼들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러 갈 때에도 나는 묵묵히 따라가지 않았다. 근데 그런 나에게 담배라니. 뭔 개소리야, 나 아니야! 발악했다. 너무 억울했기 때문에. 이렇게 공개적인 교실에서 반 아이들이 다 보고 있는데 의심받는 것도,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 무리 애들에게 몰이 당하는 것도, 나를 믿지 못하는 선생님의 눈동자도 하나같이 나를 역겹게 했다. 나, 나 아니야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거 강다니엘꺼 아니에요. 옹성우였다. 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는 옹성우는 담임 선생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자연스레 그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성우야?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옹성우는 카랑카랑하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강현식꺼에요. 강다니엘은 담배 안 펴요. 처음으로 옹성우에게 듬직함을 느꼈다. 맞벌이에 바쁘신 부모님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집을 비워두고 우리 집으로 쪼르르 와서 라면을 끓여주던 그의, 마트에서 과자는 꼭 원 플러스 원 인걸 사서 하나는 나에게 건네는 그 부스러기 시절 옹성우에게. 그렇게 담배 헤프닝은 담배의 주인을 찾고선 끝이 났다. 강현식은 한동안 옹성우를 매섭게 노려봤지만 감히 건들이지 못 했고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양아치 무리들은 몇 번 나를 건들였지만 이내 그 짓도 그만두고 지들끼리 여전히 알탈을 즐겼다. 옹성우는 나한테 그런 친구였다. 묵묵히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세상 그 무엇보다 큰 꾸지람을 느낄 수 있는, 혼자로 가득 채워질 뻔 했던 나의 모든 시간을 혼자가 아닌 둘로 꽉꽉 메워준. 지랄맞게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런 친구였다. 그래, 오글거리지만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그런 친구다. 그런 내 친구가 사랑에 빠진 건 정확히 17살 여름이였다. 어찌나 내 옆에서 옘병을 떨던지 기억이 안 날라야 안 날 수가 없다. 옹성우는 그렇게 한 사랑에 올인했고 용케도 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왔다. 그 시간동안 그 둘 사이에 낀 나는 정말 여러모로 수모를 많이 겪었다. 둘이 싸운 날에는 왜 내가 눈치를 봐야되고, 내가 왜 옹성우 말을 듣고 얘 여친을 데려다줘야 되는거고, 내가 왜 허구한 날 얘네 연애질에 끼어있어야 하는 건가. 사실 이 둘은 뭐 연애라는 거 따로 없었다. 그냥 얘네랑 나랑 만나면 한 오억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존나 재밌고 즐거웠다. 서로 헐뜯고 물어뜯고 별 꼴깝을 다 떨었지만 그때가 제일 재밌었다. 그리고 나는 저 두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나도 쟤네처럼 연애를 하고싶다. 나도 몇 번의 연애를 해봤지만 제일 오래간 건 한 200일 정도였다. 사랑이 변한 건 아니였는데,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변했는 거 일지도 모른다. 둘 중 한 사람이 틀어지기 시작한 순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걸 나는 서서히 깨우쳐갔다. 옹성우와 ㅇㅇㅇ는 크게 이벤트를 챙기지도, 무슨 특별한 데이트를 하난 것도 아니였다. 그냥 동네에서 만나서 동네에서 놀다가 동네에서 헤어졌다. 근데 그 둘은 뭐가 그리 좋은 지 시간이 지나도 같이 있었고,서로를 보면서 여전히 웃었다. 한 번은 소주를 까면서 옹성우한테 물어봤다. 야, 너는 ㅇㅇ가 여전히 좋냐 그때가 둘이 만난 지 한 5년 정도 되었을 거다. 옹성우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네 지금 몇 년이냐, 기억도 안 난다.. 막 서로 안 질려? 내 두 번째 질문에 옹성우는 니가 그래서 연애를 모르는 거야 애송아. 라고 답하면서 강냉이를 집어 먹었다. 이게 진짜 신기한게, 솔직히 처음 그 설레이는 그런 느낌은 아니란 말야? 특별한 날에만 술을 찾던 옹성우는 한 번 작정하고 마시면 이렇게 말이 많아질만큼 들이 붓는다. 이 새끼의 늘어진 말투를 들으면서 오늘도 귀갓길이 길겠구나 싶었다. 근데 여전히 좋아. 뭔가, 얘가 내 일상이 된 게 좋아. 얘가 커가는 걸 내가 계속 보고있는 게 좋아 아버지세요? 내 장난섞인 물음에 옹성우는 바람빠진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야 따라, 하이튼 나는 옹성우의 연애 덕분에 새로운 친구를 얻었다. 옹성우랑 ㅇㅇㅇ는 존나 징그러울만큼 투닥거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행복한 결말을 내렸다. 솔직히 아주 멋진 연인들이였다. 인정하기 자존심 상하지만. 내 연애도 아닌데 저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은 어느새 내 청춘이 되었다. 웃기게도 내 10대를 생각해본다면 내 연애사가 아닌 저 둘의 연애사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좀 억울하지만 그 정도로 나에게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한 두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나 옹성우랑 헤어졌어 ㅇㅇㅇ의 말을 믿지 않았다. 뭐? 내 얼빠진 표정은 꽤나 바보같을 거다. 하지만 그딴거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쩐지 술을 즐겨마시지 않는 옹성우가 요즘들어 자꾸 같이 한 잔 해달라고 찡찡거리기는 했다. 뭔 일있냐고 물으면 옹성우는 그냥 쓸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고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호프집으로 급하게 다시 들어가서 옹성우를 잡고 나왔다. 야, 너 이게 뭔 소리야. 헤어졌다니 옹성우는 멍하니 시선을 던져두다가 한참만에 운을 뗐다. 다니엘아 우리 2차 갈까? 옹성우의 2차 제안은 우리가 술을 마신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그래, 다른 건 다 그러려니 하는데 걔 하숙집 골목있잖아. 거기 존나 어둡잖아.. 얼마나 들이 마신 건지 옹성우의 발음은 잔뜩 뭉게졌지만 나는 그런 그의 입 속으로 알코올이 계속 들어가는 걸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골목 앞에 지나갈 때마다 진짜 미치겠어 나는 그 새벽 옹성우의 모든 울음을 다 받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이였다, 라는 결말을 기대한 건 어리석은 생각이였니. 너희가 헤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너희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잖아 너 씨발 그때 소개팅은 뭐냐 술이 들어가자 머리 속에 떠다니는 생각이 여과없이 흘러나왔다. 뭔 소개팅, 아 그 우리 옆 학교? 옹성우는 닭똥집을 헤치면서 입을 뗐다. 진짜 안 나간다고 그렇게 말 했는데 박상철 선배, 그 새끼가 옆에서 하도 지랄하길래.. 아니 뭐라는 지 아냐? 내가 안 나가면 ㅇㅇㅇ 소개팅 잡아줄 거라고 그러잖아.. 존나 조선시대도 이러지는 않았겠지.. 선배가 벼슬이냐? 옹성우는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진다. 저 작은 입에 저토록 많은 말들이 꽤나 오랫동안 혼자 썩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딱하다. 옹성우는 나는 여자친구 있다고 했다구.. 번호도 안 알려줬어.. 라고 계속 중얼거렸고 나는 그냥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가 옹성우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았다. 무엇이 이 새끼를 그렇게 이해가 안 가게 하는 걸까, ㅇㅇㅇ와의 헤어짐이? 이별통보가? 아니면 지금 자신의 감정이? 모든 뒷감당이 두려웠지만 그 전에 옹성우의 등짝이 오늘따라 작아보여서 안쓰러웠다. 항상 나보다 형같고 듬직했던 그가 처음으로 여려보였다. 오늘도 역시 술을 약하게 걸쳤다. 이제는 술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아직도 알코올의 힘이 필요한 새벽인지 나는 아직도 옹성우를 잘 모른다. 그저 옹성우 친구 역할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입 안에 남아있는 담배 맛에 빨리 가글이 하고 싶어졌다. 옹성우는 여전히 숙취 해소로 사이다를 마신다. ㅇㅇㅇ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꼭 손에 차가운 사이다를 쥐어주던 옹성우였다. 그의 이별을 알고 초반에는 습관처럼 사이다를 집는 옹성우를 제지했었다. 너 그 습관부터 하나하나 다 잊어야 돼. 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옹성우랑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2차는 김재환도 콜? 나는 옹성우의 팔을 툭하고 건들이며 물었고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옹성우를 보고 이내 바뀐 파란불에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하지만 나를 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얼빠진 얼굴로 건너편을 바라보는 옹성우가 보였다. 야, 뭐해 내 타박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건너편을 응시했고 나 또한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뭐를 보고 저러는 거야.. 나 또한 그저 시선을 멈춰 말 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빵, 하고 크게 경적을 울리는 차에 깜짝 놀라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어쩌면 옹성우의 잠 못 이루는 새벽의 원인인 ㅇㅇㅇ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활짝 웃고있는 내 친구이자 옹성우의 친구인 김재환이 있었고. ㅇㅇ야 내가 전에 너한테 말 했잖아. 너희가 그러면 안 된다고. 너희가 헤어지면 안 된다고, 근데 ㅇㅇ야 너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나는 지금 앞 뒤 내용 아무것도 모르지만, 너의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전혀 모르지만, 감히 너에게 한 마디하자면 너는 지금 너무 잔인하다. 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신호등 불이 바뀌고 큰 차가 이내 크게 경적을 울리고 내 시야를 막아왔다. 내 눈동자는 아마도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겠지, 여전히 지금 내 눈 앞에 일어난 모든 일에 입 안이 바싹 바싹 말라왔다. "ㅇㅇ야 괜찮아?" 내 넋이 나간 얼굴에 김재환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그런 그에게 대충 어, 어... 라고 얼버부리며 등을 돌렸다. 어디가, 여전히 방황하는 눈동자로 바쁘게 도망갈 궁리를 찾는 나의 손목을 잡으며 김재환이 말한다. 그를 올려다 보는 내 눈동자는 크게 일렁이고 있겠지. 김재환은 나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직 그의 표정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 아니다 나는 자신이 없다. 이때까지 애써 나를 쳐다보는 김재환의 그런 눈빛을 무시해왔다.
집에 가자. 김재환은 내 손목을 여전히 잡은 상태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 집을 알 리가 없는 김재환이 나를 이끌고 간 곳은 하숙집 골목 입구에 위치한 편의점이였다. 여기 하숙집들 모여있는 곳이니까 대충 여기 맞지? 그의 질문에 나는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라면?" 아니, 고개를 저으며 김재환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럼 도시락이라도 하나 먹어라, 너 저녁도 삼각김밥 달랑 하나 먹었겠지 뭐.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김재환은 계산대로 다가가 도시락과 물을 계산하고 자신의 담배를 한 곽 샀다. 내 일상에 다시금 세어 들어온 옹성우에, 다 잊은 줄 알았던 나의 기억에 여전히 변함없이 남아있는 그의 모든 것에 나는 허망함을 느꼈다. 자, 먹어. 김재환은 의자를 끌어 당겨 앉으면서 따뜻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건넸다. 고마워, 입맛이 없음에도 먹을 걸 거절하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해 도시락 뚜껑을 열어 입 안에 동그랑땡을 넣었다. 내가 입으로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 넣은 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김재환은 생수 병을 따서 나에게 건네며 말 한다. "나는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김재환의 목소리가 나를 감싸 돌았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 김재환을 바라보았다. 내 두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김재환인데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그의 말투에서 성우를 느꼈다. '너가 내 행복이니까 너가 행복해야 돼,' 언제 들었는 지도 까마득한 기억 속의 옹성우였다. 김재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고갯짓으로 마저 먹으라고 말한다. 응.. 나는 또 바보처럼 고개를 내리깔며 입 속에 밥을 들이 밀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 지 코로 들어갔는 지 잘 모르겠다. 도시락의 절반은 결국 내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오니 김재환은 내가 나오는 걸 흘긋 보고선 기타 가방을 자신의 등에 고쳐 멘다. 여기서 집까지 가까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앞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같이 있을게" 김재환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내 앞머리를 쓰다듬다가 제 혼자 흠칫 놀라 이내 손을 거뒀다. 그는 입술을 한 번 축이더니 다시금 빙긋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 웬만하면 연락 좀 해줘라. 라고 말하며 김재환은 나를 보면서 뒷 걸음질 쳐 걸었다. 그의 웃음에는 무언가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있어서 차마 같이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혼자 하숙집으로 걷는 거리는 정말 짧았다. 정말 짧은데, 매일 가던 이 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거울까. 괜히 신발코만 바라보면서 길을 걷다가 야, 라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다니엘이였다.
"..어? 너가 왜" 강다니엘은 집 앞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내가 고개를 들어 대답하자 이내 등을 떼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 새끼 담배 한 대 피웠구나, 그가 다가오는 공기 사이로 담배향이 같이 흘러 들어왔다. 꽤나 묵직한 강다니엘의 표정에 나도 따라서 무거워졌다. "너 김재환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강다니엘은 검정 색 셔츠를 입고 그 안에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다니엘의 까만 인영과 그의 차가운 목소리만이 나에게 보여지는 그의 전부였다. 고장난 가로등이 언제 고쳐지나 생각을 하다가 정적을 깨는 다니엘의 말에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너 뭔 소리가 하고 싶은거야" "..너 씨발, 하.. " 강다니엘에서 나오는 욕짓거리에 조금 흠칫했지만 나는 억울했다. 내가 왜, 왜 너한테 욕 먹어야 돼 ".. 너 나랑 옹성우랑 김재환이랑 친한 거 알아 몰라," 사실이다. 이미 알고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김재환의 눈빛을 외면하고 있잖아, 내가 뻔히 다 아는데, 그 눈빛은 내가 옹성우를 보고 옹성우가 나를 보던 눈빛이랑 비슷하다는 거 연애를 7년이나 해본 내가 뻔히 다 알고 있는 데. 잔인하게 내가 맨날 무시하잖아. 아는데, 나의 대답에 강다니엘은 자신의 머리를 헝크리다가 한숨을 쉰다. "그걸 아는 데, 김재환이랑 그러고 싶어?" "뭐?" "방금도 걔랑 같이 있다가 온 거지. 니네 둘, 그니까 옹성우랑 너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어. 알아?" "니가 뭔 상관이야. 우리 일이야." "우리? 우리는 너랑 옹성우야, 아니면 너랑 김재환이야?" 강다니엘은 작은 실소를 터트리면서 나에게 물어왔다. 이런 그의 모습은 처음이다. 맨날 욕하면서 같이 붙어 다녔지만 나에게 보이는 이런 모습은 정말로, 7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잔뜩 비꼬는 말투에 내 미간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너 지금 뭐가 말하고 싶은 거냐고" "적어도 전 남친 친구랑은 좀 아니지 않아? 너가 생각이 있다면 그건 아닌 게 맞잖아. 예의가 아니잖아 그건" "그런거 아니니까 니 앞가림이나 잘해." 더 있다가는 친구인 강다니엘마저 잃을 거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화를 삭히곤 하숙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옹성우가 요즘 애들한테 무슨 말 듣고 다니는 지 알아?"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내 목을 졸랐다. "친구한테 여친 뺏긴 새끼라는 말 들어." ".." "그나마 다행인 건 니네가 학교에서 사귀는 티를 안 내서 이만한 거지." "..야," 한참만에 입을 떼고 등을 돌려 강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너는 옹성우만 니 친구지?" "..뭐?" "나는, 나는 친구로 생각도 해 본 적 없지" 나의 말에 강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있었다. 너, 진짜 너무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 둘도 친구 잖아. 옹성우 때문이기는 해도 7년을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너 저번에 옹성우 소개팅 나갔을 때 기억나지" ".." "그때 난 애들한테 무슨 소리 들었는 지 알아? 내가 무슨 눈빛을 받았는 지 알기는 해?" 서운했다. 이 상황에 서운한 게 신기했지만 정말로 서운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내 속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성질을 내고 싶은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옹성우는 왜 소개팅 나간거래? 들었어? 너 성우랑은 존나 친구니까 들었겠네. 왜 나갔대, 내가 질려서? 내가 이제 쓸모 없으니까?" ..그런거 아니라고, 라며 작게 소리를 지르는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한 번 터진 나의 진심은, 나의 울분은, 나의 서러움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면 뭔데, 걔가 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 "넌 왜, 왜 나만 나쁜년 만들어?" 서러움이 입 천장을 달싹이게 만들었다.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울음을 삼키었다. "성우는 나를 좋아했어?" 나의 이 물음을 끝으로 그 골목길은 이내 적적해졌다. 강다니엘은 나의 질문에 꽤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너희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그의 나지막한 말에 나의 심장이 저릿해졌다.
"진심으로 묻는 거 아니지 그거" ".." "..지가 제일 잘 알면서" 강다니엘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 곽을 찾아 열더니 이내 빈 통인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며 손으로 짓이겼다. "옹성우 요즘 술 마셔" 그것도 존나, 강다니엘은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며 아까는 갑자기 화내서 미안했다며 사과를 하고는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저 새끼 이미 술 한잔 하고 왔구나, 강다니엘이 있다간 거리에는 알코올 냄새가 머물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강다니엘의 뒷 모습이 골목에서 사라지고도 한참동안 제자리에 서있었다. 바보같게도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아, 온몸이 뻐근하니 몸살이 올 거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삭신이 쑤시고 바위가 내 몸을 누르는 거처럼 무거웠다. 젠장. 하지만 일은 일이니까 찬 물에 샤워를 하고나선 알바 갈 준비를 했다. 내가 아프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헤어졌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 것 처럼. "ㅇㅇ씨!" 네! 나를 부르는 실장님의 목소리에 고개를 급하게 들었다. 실장님께서는 내게 몸이 안 좋은 거냐며 물어왔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 그냥 피곤해서 이런거라고 답했다. "다행이네, ㅇㅇ씨 월말평가 4시 시작이니까 보러오라고." 월말평가 진행이나 평가는 학원생들과 선생님들의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비로소, 드디어 해방이다. 기지개를 쫙 피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304호 연습실의 문이 열리고 기타를 들고 강당으로 가려는 듯한 김재환과 눈이 마주쳤다. 김재환은 나를 보며 실실 웃더니 자신의 이마를 가르킨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입 모양으로 뭐가, 라고 물었다. 김재환은 내 앞으로 다가와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쳤다. "자국 났다." 그의 말에 괜히 쪽팔려서 급하게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갈 길가.. 내 말에 이제는 카운터 안 쪽 데스크로 쪼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아닌 다른 알바생인 윤언니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는 김재환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왜 앉아? 내 질문에 김재환은 자신의 턱을 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냥, 내 이마에 선명하게 난 볼펜 자국을 보며 아직도 웃는다. 때릴까 "너 안가냐? 이제 곧 시작인데" "난 평가 대상이 아니잖아," 아, 그럴거면 왜 나가? 내 질문에 김재환은 음, 특별 공연? 이라면서 또 빙긋 웃는다. "너 방금 되게 재수 없었어" 내 말에 금방 입을 꾸욱 다물며 입을 손으로 막는 김재환에 약한 실소를 터트렸다. 참나, 지가 뭔 애야
월말 평가가 시작되었는 지 마이크 소리가 학원을 빵빵하게 채운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옆에 앉아있던 김재환은 생수병을 따 물을 마시며 자신은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하면서 강당으로 갔다. 데스크에 남아서 자리를 지킬까 싶어서 휴대폰을 하며 무료하게 앉아 있었는 데 금방 지루해졌다. 뭐가 그리 재밌는 지 강당은 웃음소리와 노래 소리, 밴드 소리로 가득했다. 아, 나도 한 번 들어가 볼까. 마침 강당에서 실장님이 나오시더니 아직도 안 들어가봤냐고 이제 곧 재환이한다고 말씀하셨다. 하하, 그래요? 나의 어색한 웃음에 실장님께서는 생수병을 두어개 들으시곤 나에게 몇 병 건네주시면서 같이 들어가자고 말씀하셨다. 재환이 노래하는 거 안 들어봤지? 엿듣는거 빼고. 실장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죠.. 강당문을 여니 흡사 고등학교때 제주도로 수학 여행에 온 거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돌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여자 애들이 진짜 걸그룹처럼 막 절정을 다다르고 있어 강당의 호응은 대단했다. 아가들, 할 수 있는 거라곤 언니 과자 없어요? 밖에 없는 줄 알았는 데 저렇게 끼쟁이들이라니. 괜히 기특해져서 마음이 찡해졌다. 렌즈 끼고 올 걸, 괜히 안경써서 불편하네. 아이들의 공연이 끝나자 나는 있는 힘껏 박수를 쳤다. 아이들이 다 내려가자 진행자를 맡은 민호는 마이크를 쥐고는 말을 이어간다. "와, 정말 레드벨벳이 온 줄 알았네요! 정수인 외 3명의 친구들의 열정넘치는 무대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오 민호, 역시 민호다. 학원 내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한 고 2 핏덩이 같은 최민호. "와.. 아니 이런 누추한 곳에 이렇게 귀하신 분이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민호의 말에 학원생들은 누군 지 아는 것 마냥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뭐야, 나만 모르는 거 같은데 "우리 학원에서 제일 노래 잘 하는 형, 김재환 군을 모십니다!" 강당의 열기는 다시금 뜨거워졌다. 아니, 얘 이렇게 인기 많아? 정말로 나 빼고 다 알았나보다. 얼떨결에 나도 급하게 박수를 쳤다. 무대 위에 올라온 김재환은 민망한 듯이 입을 가리고 허허, 웃더니 허리를 살짝 접어 인사를 한다. 환호성을 뒤로 하고 그는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조정하고 기타를 조율한다. 노래부르는 김재환을 드디어 영접하다니.. 오늘은 문 하나 사이에서 엿 듣는 게 아니라 탁 트인 곳에서 보니까 좀 새롭다.
김재환은 입을 한 번 축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강당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뒤에 밴드를 맡으신 피아노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 소리를 시작으로 그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피아노로 시작되는 도입부에 나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옘병, 이건 옹성우가 노래방에서 꼭 부른는 노래다. 고개를 흔들며 오로지 무대에만 집중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이건, 이건 김재환 무대야. 노래방도, 옹성우도 아니다. 김재환은 눈을 지긋이 감고 도입부를 부르더니 이내 눈을 떠 강당을 조심스레 훑어온다. 한번도 직접적으로 김재환에게 말 한 적은 없지만 그의 목소리가 참 좋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강당을 훑으며 노래를 부르는 김재환은 마치 한 명 한 명씩 눈을 맞춰주는 거 같았다. 이거 뭔 콘서트 온 거 같다. 나도 안경을 고쳐 올리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때, 강당을 한 번 씩 둘러보던 김재환이 나와 눈이 마주쳤고 슬픈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김재환은 더 이상 강당을 훑어보거나 눈을 감지 않았다. 단지 나와 눈을 계속해서 마주쳐 올 뿐이였다. 노래 부르는 김재환의 눈빛은 내가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제든 누군가 필요하다 느끼면 그냥 창문을 열어" "..." "널 향해 두 팔 벌린 한 사람이 여기"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의 노래를 끝으로 이내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다. "ㅇㅇ씨, 회식 가야지! 오늘 다 끝났는데!" 정말로 집에 가고 싶었다. 몸 상태도 너무 안 좋고 그래서 정말로 가고 싶었는 데 한껏 들뜬 실장님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끌려온 근처 삼겹살 집. "자자, 다들 너무 수고 많았고! 오늘 애들 너무 이쁘더라. 그치?" 원장님의 말씀에 윤언니와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당연하죠, 너무 이뻐요.. 원장님은 뿌듯하게 웃으시면서 술을 따르셨다. 자, 열심히 일한 자 마셔라! 라고 말씀하시며 "아니, ㅇㅇ씨 오늘 재환이 어땠어?" 부쩍 나를 놀리는 데에 취미를 두신 실장님은 나를 보며 물어오신다. 왜요, 둘이 뭐 있어요? 윤 언니의 말에 실장님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시면서 이거 말해도 되는 거냐고 괜히 물어오셨다.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오.. 물론 내 말은 가볍게 묵살당했다. "내 생각에는 둘이 뭐가 있는 거 같아!" "아닌데에.." "오늘 노래 부를 때도 잘 보니까 재환이가 ㅇㅇ만 보더라고!" 윤언니는 실장님의 말씀을 듣고 내 어깨를 치며 어머어머, 빼박이네. 라고 소리친다. 빼박은 무슨, 진짜 박히고 싶나.. 입이 또 거칠어진 걸 보니 술을 좀 마셔야 겠다. 잔을 들어 가득 찬 알코올을 입 안에 들이 부었다. 이런 내 모습에 원장님은 신나셔서 계속해서 잔을 채워주셨다. 맞아, ㅇㅇ씨가 주량이 그렇게 강하다면서! 원장님의 말씀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다 옛날 얘기죠.. 라고 말하며 웃었다. 주사가 뭐야 ㅇㅇ씨는, 한참 달아오른 분위기에 윤언니가 나에게 물어온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음.. 그냥 딱히 없어요. 라고 말했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술이 잘 맞지 않았다. 원래 소주 2병 정도는 말끔하게 끝내고 시작하는 데 오늘은 고작 1병도 채 끝내지 않았는 데 두통이 시작되었다. "재환이가 애가 괜찮아, 그 정도면 뭐 학벌 좋지. 노래 잘하지. 성격 좋지" "선생님, 얼굴도 잘 생겼어요. 여학생들이 거의 환장하잖아요!" "아, 맞아 맞아! 그래 이렇게 괜찮은 애가 누가봐도 ㅇㅇ씨한테 아주 들이대고 있는데 안 만날 이유는 또 뭐야!" 잘 어울려, 윤 언니와 실장님은 신이 나서 나와 김재환을 자꾸만 엮었다. 아 정말 곤란한 상황이지만 나는 대꾸할 힘도 없고 그래봤자 소용없을 것도 알기 때문에 그냥 묵묵히 술을 마셨다. 계속해서 말해라, 나는 마실테니. 그런데 그게 화근이였다. 대꾸할 힘이 없다고 그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셔서는 안 됐다. "ㅇㅇ씨 취했어..?" 테이블 위에 조용히 엎어져 있는 나를 흔들며 윤 언니가 나를 부른다. 내가 엎어져 있는 건 나도 인지하고 있고 고개를 들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 데 몸이 안 따라준다. 아, 무거워.. "아니요오.." 춰했네, 취했어. 윤언니와 실장님은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하는 나를 보고 확정 내렸다. ㅇㅇ씨 하숙한다고 했나? 그럼 부모님께 전화드려도 소용없고.. 윤 언니는 언제 가져갔는 지 내 휴대폰을 잡고 전화번호부를 돌리며 나를 집까지 데려갈 사람을 찾는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벌떡 일어나자마자 휘청거리는 내 모습에 실장님이 나를 부축한다. ㅇㅇ씨 안 되는 거 느꼈지? 네에.. 나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아 소주 병 뚜껑을 가지고 괜히 조물거렸다. 병 뚜껑 싫어, 이거 미워.. 괜히 성질을 부리면서 "어, 아! 재환이가 있네!" 윤 언니는 대단한 발견을 한 거 처럼 소리를 지르며 바로 김재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안돼요! 내 소리침은 이미 한 발 늦었고 수화기 넘어로 김재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너가 웬일이야! "재환아, 실장님인데 혹시 여기로 와 줄 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라고 말하곤 삼겹살 집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그에게는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는데.. 삼겹살 집 앞에 나와 옆 건물 계단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밤 바람이 나에게 불어왔다. 아, 머리 아파.. 김재환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제발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한테 여친 뺏긴 새끼라는 말 듣고 다녀, 이 순간 강다니엘이 어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헤어져도 힘들고, 사귈 때도 힘들고. 누가 김재환이랑 나랑 있는 걸 보고 그런 소문을 냈는 지는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소리를 들었을 옹성우가 안쓰러웠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크리고는 꼭 쥐어진 손을 펼쳤다. 엿 같게도 술 병 뚜껑이 내 손 안에 있었다. 성우가 없어서 아무런 모양이 없는 병 뚜껑. 술을 마시면 성우가 생각났다. 성우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서 우리 둘이 마신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나는 성우가 생각났다. 이건 헤어지기 전에도 헤어지고 나서도 성립되는 공식이였다. 고개를 젖혀 건물 벽에 머리를 박았다. 성우야, 내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되는 건가? 눈을 비볐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디선가 성우의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아직도 술을 마시면 성우 생각을 한다. 이게 나의 지독한 주사다. 목 끝이 따가웠다. 몸이 아프다는 걸 비로소 느꼈다. 아니, 근데 성우야. 나도 그때 쪽팔렸어. 너가 그 무용과애랑 나란히 학교를 나갈 때, 그때 나는 너무 창피했어. 내가. 그래서 애들이 막 니 욕하는 거 괜히 안 말리고 묵묵히 들었다, 나. 몇몇 애들은 나한테 미련한 년이라고, 눈 뜨고 코 베이냐고 지랄했고, 어떤 애들은 솔직히 ㅇㅇㅇ보다는 쟤랑 더 어울리지 않냐고 내 뒤에서 속닥거렸다. 그래, 그때 우리가 식었다는 거 인정해. 너가 그 날 밤 하숙집 앞에 찾아왔을 때 왜 왔는 지 사실은 다 알아. 자기 남자친구가 뻔히 다른 여자랑 있는데 태평스럽게 지 갈 길 가는 내가 어이없었겠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 쪽팔렸다고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사실은 그때 너의 표정에서 나는 느꼈다. 너의 눈 속에 세계가 조금은 무너진 거 같았다. 미안해, 이제와서 이런 생각해서. 너를 놓은 건 나였는데 맞지? 내가 지금 슬픈 이유는 술 마시고 잠깐 바람 쐬러 나갈 때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서 일거야. 그래서 내가 술 마시면 이렇게 니 생각도 나고, 옛 생각도 나고. 아, 니 생각이 옛 생각이지 지금 내 모습이 비참했다. 정말로 미련했다. 아까 성우의 애창곡이 흘러나왔을 때 흠칫 거린 것도, 김재환의 버릇이 옹성우랑 겹쳐 보이는 것도. 하지만 아까 김재환이 내 눈을 보면서 노래를 부를 때 나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옹성우가 아닌 김재환을 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눈을 피했다. 젖혀진 목이 뻐근하다고 느낄 때 쯤에 내 앞에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내 얼굴에 큰 셔츠가 감싸져 왔다. 이 냄새는 김재환 향수 냄새다. 허, 이제 한 달 쯤 그와 같이 다녔다고 냄새로 김재환을 인지하는 내 자신이 어이 없었다. 아까 김재환의 눈을 피한 내 자신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무언가 자존심도 상했다. 내 얼굴을 자신의 셔츠로 가린 김재환이 첫 날의 그와 겹쳤다. 물론 그때보다는 우리가 훨씬 친해졌고, 나는 그때처럼 그렇게 서럽지는 않지만. "야, 너 아픈 애가 술을 마시냐" 김재환은 숨을 몰아쉬면서 나에게 말한다. 나 아픈 거 어떻게 알았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힘이 없어서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너 술 마시면 이렇게 밖에 나와 있지마" 위험하잖아, 김재환은 여전히 숨을 가쁜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아, 실장님이 너 밖에 나갔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뛰어왔는데.."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로 축복받은 일이다. 나는 이제껏 그 축복을 받아왔고, 또 그 사실이 애틋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냥, 그냥 오랜 사랑을 했고 그 시간이 아픈 사람이다. 지금 당장에 나에게 김재환의 눈짓은 과분했다. 그럴 준비도 되지 않았고, "..옹성우야?" 결국 나는 나에게 직진하는 김재환에게 의도치않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술 취한 자아다. 내 정상적인 자아를 밀어내 자리를 잡는 꽐라가 된 술고래 자아. ..그래야만 한다. 내 알코올 가득한 물음에 김재환은 한참을 그렇게 대답없이 서 있었다. 몸살에 취기까지 라니, 아직도 내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다. 내 정신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고 온 거 같은 기분이다. 내 앞의 사람이 김재환이란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습관처럼 익숙한 이름을 불렀고, 내 힘든 마음을 김재환에게 떠넘겼다. 차라리 김재환이 아니라 진짜 옹성우라면 마음이 편할까 라는 생각도 하면서 내 지독한 주사, 내 지독한 술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김재환이 있나싶을 정도로 적적해졌다. 하지만 나는 김재환의 숨 헐떡거림이 이내 잦아지는 걸 느끼고 그의 존재를 느꼈다. 김재환은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나에게 들려주지 않은 목소리로 나에게 답해온다. 그의 굳은 듯한 표정도 가려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거 같다.
"아니" ".." "김재환이야" 나는 우회했지만 김재환은 오늘도 직진이였다.
더보기 |
크앙 ㅠㅠㅠㅠ 자까입니당 ㅠㅠㅠㅠㅠ 혐생이 덕질에 방해되는 나날들 ㅠㅠㅠㅠ 으앙 ㅠㅠㅠ 우리 독자님들은 잘 지내시고 행복만 하셨음 좋겟네여 ㅠㅠ,, 오늘도 분량 조절 실패!+주인공 안 나오는 글! 젠장! 하지만 다음 화에는 성우가 나올거에요! 나올거에여... 나올거라구여.... 나와... (선 떡밥 후 작성) 몰라 하튼 나와여...쒸익... 어떻게든 나오게 할구야... 하튼 재화니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셧기를 바랍니당 !! 오늘 번외는 다니엘로 준비했어요, 아마 재환이도 저렇게 번외가 나올거 같은데 하지만 성⭐️우⭐️(뒤늦은 남주 챙김) 는 감정씬이 많기 때문에 아예 글 하나를 통째로 써야할거같아요! 오늘도 새벽을 같이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레알루 정말루 사랑합니다ㅠㅠㅠㅠㅠㅠ 모든 댓글들 하나하나 마음에 담고 살아요ㅠㅠㅠㅠㅠㅠ 감동의 나날들 ㅠㅠㅠㅠㅠ이 누추한 곳에 이렇게 귀하신 분들이 ,,,,,, 레알루,,,, 좋아해요,,,,,, 제 글에서 냄새난다구ㅠㅠㅠㅠㅠㅠㅠㅠ 으앙 ㅠㅠㅠㅠㅠㅠ 문과세요? ㅠㅠㅠㅠㅠㅠ 말이 너무 시적여 ㅠㅜㅜㅜㅜㅠㅠ 크흡... 너무 고마워요ㅠㅠㅠㅠㅠㅠㅠㅠ 이 분 말고도 엄청 많은데ㅠㅠㅠㅠㅜㅜ 아 일일히 캡쳐 하지 못하는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 반성해,,, ㅠㅠㅠ 내 마음 속에 저장~❣️ 할게요! (뻔뻔) bgm; 김범수 _ 너의 집 앞에서 이 노래를 알게해준 성운아 구름아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