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w.워너워너
21살, 나의 새내기 생활은 다른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시작했다. 1년 동안 잠도 쪼개가며, 보고싶은 성우를 만나는 시간도 미뤄가며 공부를 한 끝에 마침내 최초합을 받아내었다. 1지망 학교는 우주 예비를 받고 떨어졌지만 2지망 학교는 최초합을 하여 세상 신나는 나날들을 보냈다. 아, 물론 그 학교가 옹성우가 다니는 학교이다. 옹성우는 공부를 잘 했다. 그 페이스에 지성까지 다 갖추다니. 내 남자친구지만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당연히 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공부에 매진하였다. 성우와 함께 대학을 다니려고. “헐.. 뭐? 소개팅?” “응.. 언니 매번 빠진다고 꼭 데리고 오래” 미안해,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소유를 토닥이고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새내기, 소개팅, 이런 단어에 물론 진한 설레임을 가지고 있는 나다. 하지만 나에겐 성우가 있기에 선배들의 눈치가 보여도 단칼에 거절해왔는데. 나의 뚝심있는 거절은 선배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고 결국 입학한지 세 달만에 반 강제적으로 소개팅에 나가게 되었다. 염병, 옹성우가 알면 지랄발광을 할텐데. 그런데 나도 웃긴건 그 순간 작년 옹성우가 나 몰래 소개팅에 나간 일이 생각이 났다는거다. 물론 다니엘 피셜 둘은 엉덩이만 붙였다가 바로 나왔다지만. 또한 당시에 나도 그 일에 딱히 동요되지 않았고. 아, 그때 성우가 나랑 같은 입장이였구나. 뒤늦게 그가 이해가 되어 이마를 짚었다. 인생은 역지사지라고.. 그래 성우야, 이건 쌤쌤이야..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기까지 꽤나 힘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성우야 미안해.. 나 오늘도 안 가면 핵아싸 보장에 족보도 평생 못 얻을거야.. 소개팅이 처음이라 술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술 마셔? 왜? 내 폭풍 질문에 소유는 귓속말로 말 했지. 언니, 소개팅은 요즘 다 술마시면서 해.. 그 곳은 그닥 재밌지도 썩 유쾌하지도 않았다. 나를 이 자리에 강제적으로 오게 한 수인 선배는 막상 내가 오자 살짝은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정확히 한 시간만 있다가 일어나야지 싶어 휴대폰을 꼭 붙잡고 있었다. 소개팅에 로망을 가지던 과거의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해주고싶다. 벌써부터 옹성우가 그리워.. 시간이 왜 이리도 안 가는지. 몇 번이고 홀드를 풀어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때 내 옆에 느껴지는 낯선 움직임. “ㅇㅇ라고 했나? 오빠는 이번에 복학했어.” 시발, 어쩌라는 거지? 안주만 주워 먹고 있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오는 복학생 선배의 행동에 살짝 당황한 나였다. “아, 네..” 껄끄러운 느낌에 그와 거리를 두고자 살짝 옆으로 빗겨 앉았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가는 복학생. “ㅇㅇ는 원래 말이 없는 편? 아니면 컨셉이야?”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흘려 들으며 손에 쥔 핸드폰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흘겨 문자를 확인했다. 그 문자는 다름아닌 강다니엘의 것. 그 내용은 나의 종말을 알리고 있었다. ㅇㅇㅇ 다 보인다~ 옹성우한테 말도 안 하고 소개팅~~ 오 이 새끼 핵 빡침 ㅅㄱ 오후 8:38 좆됐다. 설마 애들끼리 술 마신다고 한게 오늘인가? 왜 우리 학교 주변엔 술집이 존나 적은거지? 벌써부터 이 일을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지 바쁘게 생각하고 있는 그때, 내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얜 또 뭐야. “ㅇㅇ야, 오빠는 너가 마음에 드는데 폰 말고 나랑 얘기 하자-“ 이런 시발.. 욱해진 감정에 허리를 감싼 복학생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니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보는 얼굴에 더 화가 났다. “이거 성추행이에요. 왜 만져요” “ㅇㅇ야, 뭔 소리야. 목소리 낮춰..” “불쾌하니까 명령하지 마세요.” 내 허리를 감쌀수 있는 사람은 옹성우밖에 없다고. 살면서 누구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기에 나는 오목조목 복학생 선배에게 잘못을 물었고 기어코 사과를 받아내었다. 그리고 덕분에 감사하게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날 기회가 생겼기에 아직까지도 제 분이 풀리지 않은 척하며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후배들 부려먹는 거 양아치같아요!’ 라고 외치고 싶은 내 속 마음을 감추고는 수인 선배에게 먼저 가겠다고 인사를 하고선 술집을 나왔다. 아 기분 더러워. 나는 내 허리 춤을 탈탈 털며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듯한 낯설고 불쾌한 느낌을 잊으려고 애썼다. 나오자마자 한 행동은 성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음성은 ‘전화기가 꺼져있어..’ . 뭐지. 나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갈아만든 배를 한 캔 사서 뜯어마시며 이번엔 강다니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단아 니네 어디야” “어, ㅇㅇ야! 우리 이제 나왔지” “..성우는” “성우가 넌 어디냐고 물어보래” “그 직진하면 보이는 지에스” “어? 어 야 성우가 거기 있으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다니엘은 전화를 끊었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 꺼진 전화기만 내려다 보았다. 이 새끼가 지 할 말만 다 하고 끊네? 그렇게 한 캔을 다 마시고 다니엘과 성우의 음료까지 구매한 후에야 저 멀리서 익숙한 두 명의 형체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편의점 문을 활짝 열고 밖에 나가 둘을 재촉하였다. 야 빨리 와 다니엘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와 옆에서 종알거렸고 나는 그런 그에게 음료수 캔 하나를 쥐어주었다. “야 너 아까 진짜 큰일날뻔 한 거 알지? 그 선배 진짜 쓰레기라고 소문남” 다니엘은 자기가 더 흥분하며 화를 내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는 처음 듣는데 내가 잘 처리해서 괜찮아, 내 말에 다니엘은 크게 웃더니 말을 이어나간다. “아 그니까 사이다! 그때 옹성우 존나 빡쳐서 그 쪽으로 가려는데 니가 딱 한 마디 해가지고” 야야 근데 더 웃긴거 뭔지 아냐? 다니엘의 어깨 너머로 성우의 터덜터덜한 발걸음이 보였고 다니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밀더니 제 말을 이었다. “그 선배 얼굴에 옹성우가 맥주 쏟고 옴. 그래놓고 기립성 빈혈 때문에 그랬다고” 존나 웃기지, 개 찌질해. 강다니엘은 옹성우가 뒤에 온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선 계속 웃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답했다. “아니? 귀여운데?” “야 너 이제 집 가.” 내 옆으로 온 성우는 다니엘을 향해 짜증내며 말 했고 다니엘은 잔뜩 시무룩해져 자신의 기숙사를 향해 투덜투덜 걸어갔다. 그리고선 남겨진 우리 둘. 어떡하지, 먼저 사과해야 겠지. 말 안 하고 간건 내 잘못 맞잖아. 혼자 눈치를 보며 넌지시 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성우야” “괜찮아?” “응?” “괜찮냐고. 놀랐을 거 아니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데, 성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살펴온다. 성우는 지금 내가 소개팅을 나갔다는 사실보다 내 기분을 우선시해주는 거다.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그래서 더욱더 성우에게 사과를 하고싶어졌다. “미안해 성우야” “왜? 소개팅에 맘에 드는 애 있었어?” 나의 사과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곤 엉뚱한 말을 하는 성우가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뭔 말고 안 되는 소리야. “엉? 그럼 왜?”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소개팅해서” “맞아, 그거 진짜 나빴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애가 탔는 지 알아? 성우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고 나는 씹덕사로 죽음에 이를뻔 했다. “아까 화냈다며” “당연하지. 근데 너가 강하게 말 해줘서 고마워.” “뭐가 고마워 난 미안하다니까. 근데 나 진짜 수인 선배가 고나리해서 억지로 나간거야. 알지?” 알지. 내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애가 눈에 들어오겠어, 그치? 내 어깨를 감싸오는 익숙한 손길에, 그리고 그 능청스러운 말투에 참고있던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연한 소리를.킹갓옹성우를 옆에 두고 그 어떤 누구가 한 눈을 팔 수 있단 말인가. “맞는 말이긴 한데 니 입으로 말 하니까 재수없다.” 장난스러운 나의 반응에 성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어깨를 움켜진 제 손에 힘을 실었다. 성우의 등장으로 인해 아까의 불쾌하던 그 기분은 사라진지 오래. 나를 이토록 줏대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너가 참 신기하다. 신기할 뿐이겠어, 너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너의 존재에 감동을 받는다 성우야.
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방학이 끝났고 개강한 지 어엿 몇 주가 지났다. 내가 알바를 한 학원의 선생님들은 시간 날 때 놀라오라며 눈물을 머금고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대학생 생활을 다시 몸소 체험 중이다. 오늘은 주현이, 효주와 함께 학교 근처 파스타집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ㅇㅇ야! 소개팅 나갈래?” 푸욱, 느끼한 까르보나라를 중화시키기 위해 급하게 들이킨 사이다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소개팅? 뭔.. 뜬금없는 제안에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주현이를 바라보았고, 주현이는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응? 하자아- “ “안돼, 나 바빠” “아이고, 바쁘면 평생 연애 못 하겠네요-“ “야, 나 말고 얘 데리고 가!” “효주? 얜 남친 있잖아!” “야 나도 있,” 아뿔싸,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쏟아져 나올 뻔한 말을 다시 집어 넣었지만 이미 주현이는 내 말을 들어버렸다. “있어? 누구?” “.. 아, 아니야. 없어 없어. 헤어졌어” “아, 그때 헤어졌다는 남자친구? 야, 그게 몇 달 전이야. 벌써 다섯 달 전이다.” 벌써 그렇게 됐나. 나도 참 바쁘게 살았구나. 시간 감각이 없어진 건지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설마, 전 남친 때문에 새로운 애를 못 만난다거나 그런거는 아니지..” “...” “..어머, 이 년 맞네..” 주현이는 사이다를 마시는 나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효주와 함께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에 대해 토론하더니.. “야, 내가 한 달이면 안 데려가. 나도 인간인데.. 그런데 다섯 달은 뭔...” “애가 순해서 그래” “그니까,”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그래야 사람이 좀 영악해지지..” “전 남친이랑 오래 만났지?” “얘 장난 아니지.. 내가 그 사이에 애인이 두 번 바뀜..” 그렇게 한참을 둘이 이야기 하다가 결심했다는 듯이 나를 돌아 보았다. “야, 나가자.” “그래 너 주현이랑 갔다와. 그냥 시간 보낸다는 생각으로 앉아만 있다가 와.” 염병, 그래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 옹성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소개팅에 안 나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라 이 말이다. 아, 물론 이때까지는 그 이유가 맞았다. 근데 지금은 그냥 낯선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 뿐이다. 내가 이 말을 하자 효주는 그게 옹성우 때문인 거라고 말했다. 효주는 수척해진 나를 걱정했다. 아직도 옹성우를 잊지 못해 살아가는 것 같다며 나에게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용기를 냈다. 나도 걔 없이도 잘 살아! 나 자신을 향한 발악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송주현이고 얘는 강도연, 얘는 ㅇㅇㅇ가에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건너편 빈 자리를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저기는 왜 빈자리지? 아, 그냥 나도 나오지 말걸. 그럼 이 빈 자리랑 나랑 사이좋게 없어서 2:2 딱 맞는데... “아! 이 자리 애는 지금 오고 있어요!” 내 눈짓을 느낀 건지 대각선에 앉은 남자는 급하게 대답하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마침 전화가 왔네요, 실례 좀..’ 이라며 전화를 받는다. “야! 왜 안 와...” ‘야! 나 안 간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목청이 좋은 건지 수화기 건너편의 남자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아주 잘 들렸고, 그에 당황한 소개팅 주선자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이 상황이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구나.. 애초에 소개팅에 관심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처박고 손톱을 뜯었다. 아, 그냥 얘도 안 오고 그래서 파투났으면. 남 모르게 염불 외우면서 빌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이 녀석도 같이 왔어요-“ 염병, 내 바람과는 다르게 서글서글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인생 되는 일이 하나 없구나. 두 남자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내 앞 의자에 누군가 앉는 느낌이 났다. 뜯던 손톱을 마저 다 뜯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내가 말 했지, 2차는 절대 안 가고 1차에서만 멈춘다고. 고개를 들자 내 눈 앞에는 익숙한 인물이 앉아있는게 아닌가. “..김재환?”
내 목소리에 김재환으로 추정되는 정수리는 휴대폰을 보던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김재환의 두 눈이 커지며 누가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둘이 뭐야 아는 사이에요?” 이게 얼마만이냐. 이런 자리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근데 김재환은 아닌가보다. 그는 나를 향해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그저 살짝 웃기만 할 뿐이다. 뭐지, 이 낯선 기류는. 한 한 시간정도 지났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자며 온갖 주류와 안주를 주문하더니 서로의 호구조사가 끝난 뒤 술병을 땄다. 뭔가 이 분위기에 못 어울리는 건 나밖에 없는 거 같아 그냥 혼자 묵묵히 눈 앞에 놓인 술잔만 비워냈다. “술게임이나 하자!” 내 눈치를 봤는 지 주현이는 술게임을 제안했고 그에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나와 김재환만이 묵묵부답이었지만. “나부터 한다. 1,2,3!” “4,5!” 새내기때 많이 하던 31게임이다. 너무 많이해 아주 유치하고 형편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나는 끝 순이였기에 아이들의 흐름을 살피며 지루함을 느꼈다. “29,30!” 근데 염병할. 내 옆에 앉은 도연이가 신나게 숫자를 외쳤고 남은 숫자라고는 31뿐이라니. 하하, 또 나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 앞에 있는 폭탄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내 손을 막는 큰 손길 하나.
“이거 흑기사 되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손길을 쳐다보았고 김재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 손에 있던 잔을 뺏어 자신의 입에 털었다. 주변에서는 오- 김재환 이라며 온통 바람잡는 소리로 가득 찼다. 얘 왜이래. “그리고 얘랑 나랑 먼저 갈게” 그러더니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한 손에는 내 코트와 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내 팔을 쥔 김재환에 이끌려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술집을 나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이 어색해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찌푸려진 내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잡고 있는 김재환의 손길에 그를 툭툭치며 눈치를 주자 그는 아, 하며 급하게 손을 놓는다. “춥다 이거부터 입어” 김재환은 나에게 코트를 건네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까지 건네 준 그는 이제 가자며 고갯짓으로 말했다.
겨울 바람이 차가웠다. 어두운 공원 속 오로지 가로등과 달빛만이 그와 나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난다, 그치? 김재환의 물음에 나는 짧게 긍정했고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이런 곳에서 보니까 뭔가 기분이..” 안 좋다, 김재환은 자신의 뒷 목을 쓸더니 꽤나 어둡게 말을 건넸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가 나를 향한 마음이 어떤지 다 아는데 이런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이제야 생각났다. 개강 후 몇 주동안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연락 한 번 하지 않다가.. 내가 너무 잔인한가, 인류애가 아주 바닥인가? 나는 나름 선을 긋는다고 한 행동인데 이 아이에겐 상처가 되었겠지?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미안해졌다. 나같은 사람에게 호의의 감정을 느끼는 너에게 미안해졌다. 난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로. “..나도 그닥 안 나오고 싶었어” 소심하게 툭하고 말을 내뱉자 그 말을 들은 김재환은 이제야 웃음을 픽하고 터트린다. 그래, 우리 둘다 억지로 나왔네. 그의 말에 난 얕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내기때 어쩌다 한 번 소개팅 한 이후로 오늘 처음해본건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최악이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이제 뭐할래?” “..뭘 해야 돼?” “아, 집 갈래빼고 다 말해도 돼.”
급박하게 내뱉는 김재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랑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너무 많아서 답하기 어렵다고 답한다. 뭘 또 이렇게까지 솔직하냐 민망하게. “이 시간에 뭘 해” “음.. 우리 저거 볼래?” 뭐? 그의 손짓을 따라 돌아간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소극장. 대학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연극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연극을 안 본지도 거의 1년은 넘은 거 같네. 한 번만, 응? 나 집에 가면 할 거 없단 말야.. 아! 그리고 우리 진짜 오랜만에 보잖아! 그리고 너 그때 나 바람맞췄잖... 헉, 옹성우의 생일 날 김재환을 길거리에 남겨두고 도망가듯 사라진 그때의 기억이 다시 스멀스멀 떠올라 김재환에게 괜시리 미안해졌다. 야.. 그때는 진짜 미안해.. 기어 들어가듯이 소심한 사과를 건네자 김재환은 그저 여느때처럼 허허 웃어보일 뿐이다. 그럼 가는 거지?
오늘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확실하다. 지금 김재환과 나란히 이 소극장에 앉아 있는 모습이란. 장르는 로맨틱 스릴러, 작년 여름이었나 성우랑 둘이 연극을 보러 왔던 바로 그 소극장이다. 그래서 그런가 기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혼자 많은 생각을 하는동안 막이 올랐고 어두웠던 무대는 조명으로 환해졌다. 관객이 참여하는 연극이라 극 중간 중간에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관객석으로 고개를 돌려 참여를 구했다. “어, 거기 앞 자리 두 분!” “..네?” 그때 나와 정통으로 마주친 여배우의 눈빛에 흠칫 놀라며 두리번거렸지만 그녀의 손짓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옆에 분이랑 커플이세요?” “네? 아니요, 친구…” “에이- 그러지말고 남자친구 분 일어나보세요!” 뭐지 시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워 눈동자만 굴리고있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는 김재환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뭔, “남자친구분, 여자친구랑 며칠 됐어요?” “아..” 배우의 질문에 김재환은 나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가 그 특유의 털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답한다. “그게,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저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거에요.” “여자분은 마음이 없으신 건가요?” “..아, 얘는 없고. 그니까 저한테만 물어보세요,” “오, 많이 좋아하시나봐- 자, 그럼 앞으로 나와주세요!” 김재환은 오히려 자신이 더 눈치를 보며 황급히 대답했다. 김재환이 앞에 나가서 무얼 하는지 나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스쳐 지나가 그의 자리에는 김재환 특유의 향수 냄새가 가득했고 그 향 때문인지 , 아니면 작년의 상황과 겹쳐보여서인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두 분은 며 칠정도 만나셨나요? 아, 저희는 6년 만났습니다. 6년? 와 조만간 결혼하셔야겠네, 네, 그래서 준비 중입니다. 능청스러운 성우의 대답에 관객석에 앉아 있는 많은 관객들은 기분 좋게 웃었고, 그에 따라 나도 자연스레 웃음이 났었다. 배우도, 연극 내용도, 그리고 여기 앉아있는 관객들까지 그때와 똑같은게 전혀 없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달랐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지만. 일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구나싶어 입 안이 꽤나 쓰다. “남자 사람 친구분이 아주 멋있으시네, 금방 뺏기기 전에 조심해요-“ 언제 끝난건지 김재환은 걷어 올린 소매를 내리며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 앉았고, 배우는 나에게 눈짓을 하며 말을 건넸다. 남자사람친구 라는 언어를 유독 강조하며 말을 하는 거 같은건 내 착각일까. “내가 한 거 봤어?”
김재환은 뿌듯해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너를 못 봤어. 날카로운 진실을 말하며 너에게 상처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넌 정말로 멋진 사람이니까. 미련 가득한 내 모습도 못 미더웠으니까. 로맨틱 스릴러 장르에 걸맞게 막판에는 여배우가 무섭게 분장을 하며 관객을 놀라게 했다. 덕분에 예상치도 못 하게 공격을 받아 내 심신이 불안정해졌지만. 그거 말고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내 커다란 움찔거림에 옆에서 큭큭거리며 비웃던 김재환만 빼면. “무서웠어?” “전혀.” “아까 엄청 쫄던데, 너?” “잘못 본듯.” 알았다 알았어, 김재환은 자기가 봐주겠다는 투의 어조로 내 뒷통수를 푹 하고 누르더니 제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나참, 어이가 없어서. “야, 너가 오해하는거 같은데 나 컨져링도 혼자 봐.” 사실 개구라다. “그래? 그럼 다음에 같이 보러가면 되겠다.” “아니,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 “김재환 한 두번 겪어 보시나“ 김재환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고 나는 그런 그의 반응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극을 하나 보고와서 그런가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져 아예 새까만 하늘이 시야에 가득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 아예 밤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걷던 그 공원은 낯설 정도였으니까. “야” 낯선 공원에 드리워진 어둠을 먼저 깬 건 나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투박한 음성으로 김재환을 부르는 내 자신이 얼마나 낯설던지. “아까 그 자리에서 같이 나와줘서 고맙다.” “뭐, 소개팅? 뭘 그런걸로 고마워하냐.” “진짜 핵 노잼이었는데 당연히 고맙지.” “다음부터는 소개팅하지말고 나를 만나라니까” 움찔, 돌아온 대답에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방금 본 연극에 나온 귀신분장을 봤을 때 보다는 덜 티나게 움츠렸겠지? 내심 걱정되었다. 김재환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소심하고 부끄러워할거 혼자 다 하다가 갑자기, 준비할 틈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그래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있지, 이거 되게 무례한 질문인데. 해도 돼?” “뭔데? 해봐” “넌 내가 왜 좋아?” “어?” “아니, 그렇잖아!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막 대하는데,“ “아, 그니까 너가 나를 맨날 까는데도 왜 좋아하냐고?” “..굳이 해석할 필요 없어” 아, 괜히 말 꺼냈나 싶어 혼자 마음 속으로 절망의 비명을 지르며 신발코만 바라보고 걷다가 들려오는 김재환의 목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나 왜 그럴까” “...”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야. 애매한 김재환의 대답에, 그리고 물 밀려오듯이 몰아치는 후회감에 마음 속으로 이불킥을 오억번하고 있었는데. “ㅇㅇ야, 어쩌면 난 너한테 큰 짐일 수도 있겠다. 아주 이해가 안 되기도 하겠고” “...” “밉기도 할 거같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답을 알아내서 알려주고 싶은데” “...” “나 진짜로 잘 모르겠다.”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김재환을 차마 올려다 볼 자신이 없었다. 너를 마주하고 대답을 재촉할 자신도, 단호하게 거리를 둘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난 오늘도 누군가에게 잔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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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작가 고개 숙이고 입장합니다..... ㅎㅎ..... 저기 구석가서 머리 박고있을게요,, 혐생에 치이는 동안 시간날때마다 끄적인 8화가 드디어 완성되었다니....?..... 하이튼 저를 욕하고 계세요... ㅎㅎㅎ 너무 늦게와서 미안해요ㅠㅠㅠ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고 이 하찮은 글들을 좋아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고마워요 너무ㅜㅠㅠㅠㅠㅠㅠㅠ 하 ㅠㅠㅠㅠㅠ 저는 저를 다 잊었을까봐 겁났는데 아직까지 응원을 받고있다니 마음이 놓입니다ㅠㅠㅠㅠ 벌써 18년이고 우리 분쏘단은 어른이..되었.... 하,, 이거 아니에요 루머에요.ㅎ^^ 독자님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 워너원과 넘치는 추억을 담아봐요!? 당신들의 행복을 간절히 바랄게요! 오늘도 고맙습니다. 늦은 시간 글잡을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7년옹은 정상 연재합니다. 그동안 오래 기다리게해 죄송하고 독자님들의 그 마음에 저는 또 감개무량합니다...☺️??? bgm; 백예린 - 아주 오래된 기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