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w. 워너워너
그런 사람이 있다. 이름만 봐도 설레는 어쩌다가 그 사람의 향기가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나는 그런 기분을 감히 사랑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그 정의는 옹성우와 딱 맞았다. 애석하게도 비록 성우를 만나게 된 건 10대의 끝물이였지만 나에게 너의 십대란 무엇이니, 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옹성우였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정도로 나의 모든 신경이 그 아이였고 나의 모든 걸 쏟아부은 내 인생 최초의 사랑이였다.
성우와 나는 둘 다 비오는 날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비오는 날 특유의 회색빛이 마음에 안 들어서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꼭 성우의 집이거나 우리 집이였다. 그 날도 우리 둘은 집에서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제집에서 눈을 떼고 창 밖을 보면 비가 몽글몽글하게 고여 있었다. 보는 건 참 좋은데.. 창 밖을 바라보던 나를 인식했는지 성우도 고개를 들어 같이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물어온다. 너 집중 안 되지? 응.... 성우는 공부를 잘 했다. 진짜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저 얼굴에 저 스펙에 공부까지 잘 하다니. 공부에 흥미가 전혀 없던 나는 성우를 만나면서 평소에 손에 들지도 않던 펜을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우와의 교제를 가장 좋아한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부모님이였다. 내 목표는 성우와 같은 대학교에 가서 씨씨를 하는 거 였다. 맨날 이 생각을 하며 각성한다. 딴 년한테 빼앗길 수 없어, 대학까지 붙어 다닐거야 성우는 멍한 내 얼굴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TV 리모컨을 손에 쥐고 전원을 켰다. 하나만 보고 하자, 그의 말에 나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좋은 생각이다, 하나로 안 끝날거 같기는 하지만 옹성우는 채널을 한 바퀴 돌리면서 볼 거 있으면 멈춰라고 말해, 라고 말했다. 나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때보다 열정적인 모습이였다. 야야야야 멈춰. 나는 성우의 손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성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리모콘을 돌려 영화 채널을 틀었다. 아오, 저 새끼가.. 오, 저런 근데 마침 성우가 막무가내로 튼 그 영화는 절정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 절정 말이다. 화면 가득 두 배우의 입술만, 아니 혀만 클로즈업 되있었다. 어머 남사스러워라.. 민망함으로 가득 차있을 옹성우 표정이 생각나서 벌써부터 웃기다. 성우는 헛기침을 하며 바쁘게 채널을 돌렸다. 너 딱 걸렸어 "아.. 옹... 변태야? 말하지 그랬어 보고싶다고.." "아니거든?" 고개를 돌려 성우를 쳐다보며 그를 놀렸다. TV를 보겠다고 불을 꺼서 그럴까 아니면 비가 와서 밖이 어두워서 그럴까. 시간은 아직 대낮인데도 거실에는 스탠드 2개와 TV 조명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눈이 마주쳤다. 그냥 평소에 눈을 마주보는 것처럼 그와 눈이 마주쳤고 평소처럼 그를 놀리고 있었는데. 아니, 놀리려고 했는데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그 뭐라고 해야하지, 뭔가 이상야릇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는 갑자기 주인공들도 모르게 만들어지더라. 나는 믿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글로 배워왔기 때문에. 근데 딱 그 날 알아차렸다. 이런 분위기는 진짜 갑작스럽구나.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시선을 피하면 되는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와, 나도 미쳤구나 우리 둘은 그렇게 정적을 유지했다. 우리가 이렇게 길게 아무 말도 안 한적이 있었나, 아니면 그냥 이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걸까 옹성우가 다가온다. 성우가 다가오는게 나노단위로 나뉘어서 보인다. 그의 바디워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의 향기에 취할 거 같았다. 성우와 나의 코 끝이 맞 닿을 만한 거리, 기분이 아찔한 순간, 민망하게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처음인거 같은데, 당황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성우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입을 맞췄다. 순식간이였다. 괜히 가만히 있던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난 후 감았던 눈을 뜨니 성우는 아직도 내 코 앞에 있었다, 그의 귀끝은 잔뜩 붉어진채로. 옹성우는 내 코 끝에 걸쳐있는 안경을 조심스럽게, 아주 문화재를 다루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거둬냈다. 그의 그런 행동이 좀 귀여서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우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자신이 웃긴지 픽,하고 웃는 성우다. 그러곤 우리는 아까보다는 더 긴, 조금은 더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공부하려고 온건데, 우리 엄마가 보면 아주 뒤집어질 상황이다. 성우가 내 손을 잡아왔고 그의 숨결이 내 안에 느껴졌다. 빗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 조금은 어색한 우리의 긴 입맞춤도 낭만적이였다.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미적분을 풀다가 첫 키스를 했다. 비오는 날은 너무 싫은데 내 옆에 있는 옹성우가 너무 좋아서 비오는 날이 좋아질 거 같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성우가 다니엘에게 보낸 카톡에 나는 마음이 아주 혼잡스러웠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다니엘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대학가는 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주점들의 네온사인과 전광판으로 낮보다 더 밝았다. 괜히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내딛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 하숙집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새벽을 그렇게 목적없이 빙빙 돌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종강파티를 한 그 호프집에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내 머리 위로 투둑, 툭 하며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진다. 제기랄, 뭐같은 일만 이렇게 가득 겹쳐서 일어나는지. 정말 신도 나에게 너무 자비 없으시다. 멍하니 차가운 빗방울을 맞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 닫은 가게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 쏴아, 기다렸단 듯이 소나기는 시원하게 내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을 손 끝으로 괜히 받아보았다. 차갑구나 빨리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그럼 목적지가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을텐데. 비가 오면 생각이 많아진다. 아, 그래서 내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나. 비가 그치기를 가만히 기다리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얼마나 쭈그려 앉아 있었는 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조금씩 튀기던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았고 누군가 내 앞에 서있다는 거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야, 여기서 뭐 하냐"
강다니엘이였다. 다니엘은 자신의 신발코로 내 신발을 툭툭 건드렸다. 그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검정 우산, 옹성우 우산. ".." "..어휴, 술냄새... 빨리 일어나, 너 지금 존나 추해" 다니엘의 말에 나는 코를 킁하고 마시면서 일어났다. 친구라는 놈이 허구한 날 팩폭이다. 개같은 새끼 "근데 물어볼게 있는데" 다니엘이 들고 있는 성우 우산 밑으로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이미 벌게진 눈가를 비볐다. 아까는 정말 소나기였는지 지금은 비가 겨우 한 두 방울씩만 내린다. 우산을 쓰고 있는게 민망할 정도로. 다니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뭔데.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내 걸걸한 목소리에 다니엘은 흠칫 놀라는 듯 보이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 둘 지금 뭐하는 거냐" ".." "싸운거냐, 아니면" ".." "헤어지는 중인거냐" 들려오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들었던 고개를 다시 밑으로 내리 깔았다. 지가 가면 되는 걸 왜 나한테 가라고 시키냐고, 옹성우가 뭐라는 지 알아? 너 하숙집까지 데려다주래. 미친새끼가 니가 내 여친이야 뭐야, 옹성우에게 나란 존재는 지금 무엇인 걸까. 자신의 마음 속에 죄책감을 한아름 안겨준 무거운 짐일까, 아니면 옛정이 남아있는 구여친일까. 그의 이런 행동이 나는 너무 헷갈리고, 또 심장 한 부근이 저리다. 다니엘의 속사포 한탄에 나는 그저 아무말 없이 듣다가 운을 뗐다. 옹성우가 말을 안 했으면 나라도 너한테는 말해야지. 야, 사실은.. "어? 김재환!"
또 그 망할 타이밍이다. 강다니엘 저 새끼는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적이 없는 거 같다. 나는 괜히 혼자 민망해져 마른 침을 삼켰다. 강다니엘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김재환을 보며 미친듯이 손을 흔든다. "어? 야, 여기서 뭐해!" 옆은 누구, 여자친구? 김재환은 다니엘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다가 옆에 서있는 나를 흘긋보더니 고갯짓으로 물어온다. 그의 물음에 다니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신명나게 내젓는다. 아니? 나도 얼굴봐. 강다니엘의 말에 나는 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찼다. 너 아니여도 기분 나쁠 일 충분히 많은데, 너 오늘 잘 만났다. 우리 둘의 모습을 보며 김재환은 픽, 하고 웃는다. 김재환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옹성우, 강다니엘과 같이 다니는 애라고는 들은 적이 있다. 셋이 친하다고 그러던데 "..아! ㅇㅇㅇ 힘만 무식하게 세가지고.. 아, 얘는 경영학과 김재환이야. 말한 적 있지? 우리랑 친한 애라고" 아, 맞다. 야 김재환 얘가 바로 옹성우 여친이야, 다니엘은 젖은 우산을 탈탈 털으며 김재환에게 말한다. 빗물 다 튄다고 강다니엘에게 한 마디 하려고 했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는 살짝 젖은 머리칼을 자신의 손으로 털어내며 고갯짓으로 나를 가르켰다. 아.. 성우? 우리 앞에 있던 김재환도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며 비가 안 오는걸 확인했다. "야" 나의 부름에 다니엘은 머리를 정리하며 뭐, 라고 답해온다. 내가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옹성우 다음으로 오래 본 사람이 강다니엘이다. 우리의 시작부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장본인이였다. "나 성우랑 헤어졌어" 긴 정적이 흘렀다. 내가 아는 다니엘은 지금 당장에 나에게 많은 걸 물어올거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뭐? 정적을 깬 다니엘의 첫 마디는 멍청하게도 다시 물어오는 것이였다. 나 헤어졌다고, 나의 확인 사살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앞에 있던 김재환도 의도치않게 나의 이별 소식을 들어버렸다. 김재환의 표정은 딱 그거였다. 산타가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열림 문 틈새로 엄마 아빠가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본 듯한 표정. 한 마디로 들어서는 안 될걸 들은 듯한 표정. 아주 안절부절 못해하는 것이 얼굴 표정에 다 티가 났다. 다니엘은 아직도 얼 빠진 표정이였다. 비가 온 직후라 그런지 바람이 꽤나 습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나 갈게, 나의 메마른 목소리에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아니, 아마 잡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한 새벽쯤에 톡을 엄청나게 보내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린다. 새벽이 지나가고 있는데 강다니엘은 나에게 전화한 통, 문자 한 통 없었다. 이 새끼 이게 뭔 일이래, 궁금하면 어떻게든 알려고 사족을 못 쓰던 새끼가. 방금 샤워를 하고와 젖은 머리칼을 대충 털며 침대 위에 엎드렸다. 아, 아까 너무 무리했나. 그렇게 씻었는데 아직도 알코올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침대에 엎어져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 꼼지락 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많은데 잠은 오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 다가오는게 두려워졌다. 내일은 또 무슨 방법으로 너를 지워야 할까, 내일 정도면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너 말이야, 옹성우. 쫙 폈던 손을 힘을 줘서 말아 쥐었다. 이별은 생각보다 더 좆같았다.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3:47 AM ' 휴대폰 홀드 버튼을 눌러 시간을 보니 딱 곤히 잠 자고 있어야 정상인 시간이였다. 아, 제기랄.. 잠 다 깼다.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다가 누워서 핸드폰을 들었다. 카톡이나 확인해야지, 카톡에 들어가니 대화창 맨 위에 '다녤' 이 떠있었다. 오늘 새벽에 보낸건가 싶어 대화창을 터치했다. 야아앙 내가 지금ㅇㄹ 누구랑 있눈ㄷ지 아로??? 성ㅇ우ㅜㅜ랑이찌렁 근ㄷㄴ데 내가 ㄴ너 부른ㄷ거ㅗ했눈ㄴ데 성우갈ㅇ너부르면ㄴㅅ 나 주겨ㅓㅗ버린대ㅜㅠㅠㅠ시바론ㄴ 오전 2:34 톡에서 술냄새가 났다. 이 미친놈은 헤어졌다고 한 거 분명 들었으면서 왜 저 자리에 나를 부르려는 걸까. 대화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 순간 다니엘의 취중 문자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야아ㅏ어 ㅇㅇ가야 너희는ㅇ 그럼 앙대자나 해어지면ㄴㅇ안ㄷㅇ대자나 어 읽어ㄸㄹ어 !!! 오전 3:50 너희는 헤어지면 안되잖아, 그의 톡에 마른 침을 삼켰다. 창 밖에 빗 소리처럼 나도 떨어질 거 같았다. 다니엘과의 대화창에서 한참을 나가지도, 답장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전화를 알리는 화면으로 전환되고 진동이 울렸다. 내가 삭제한 그 번호,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아직 삭제되지 않은 그 번호. 내가 그토록 부정해온 그 사람의 익숙한 번호. 옹성우였다.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어느새 전화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를 맞이하는 건 성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경영과 선배의 목소리였다. "어? ㅇㅇ야, 밤 늦게 미안하다. 다니엘이 너 깨있다고 해가지고.." "아, 아니에요. 무슨 일 있어요?" 성우와 내가 연인이였을 시절, 경영과 술자리에 적지않게 가봤기 때문에 알고있는 경영과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선배 중 한 명이였다. 다니엘도 몰랐던 우리의 이별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깨어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나에게 전화를 했겠지. .. 이럴때는 정말로 곤란하다. 이런 일은 내 이별에 대한 계획 안에 들어있지도 않던 사항이였다. 나는 그저 묵묵하게 경영과 선배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수화기 넘어로 들리는 주변은 새벽임을 잊어 먹은 건지 여전히 북적북적하고 소린스러웠다. "아 맞다! 아니 이리와서 옹성우 좀 데리고 가라. 이 새끼 아까 준영 선배 한 대 쳤어" 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어느 순간 부터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고 있었다. 평소에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던 성우라 동기 중 재수해서 한 살 많은 오빠에게도 혼자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유치하게도 주먹 다짐이라니. 진짜 ㅇㅇ야 새벽에 미안한데 제발 와줘라, 진짜 옹성우 미친 줄 알았다구.. 횡단보도 앞까지 애들 보낼까? 선배의 말에 나는 보이지도 않을 머리도 내저어가며 아니라고,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집업을 입었다. 전화를 끊고 집업 지퍼를 올리는데 책상 위에 곱게 접혀져 있는 옹성우의 무채색 집업이 눈에 들어왔다. 손 많이 가는 새끼, 괜히 그를 곱씹어 가며 집업을 손에 들었다. .. 이것도 다 돌려줘야 겠다. 빗 속을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 걸었다. 첫 번째로 평소와는 다른 옹성우의 주먹다짐 때문에, 두 번째로는 평소와는 다른 옹성우의 술자리 때문에, 세 번째로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아직 우리가 헤어진줄 모르는 사람들, 마지막으로는 적어도 우리는 헤어지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찡찡거리는 다니엘 때문에. 내가 성우가 있는 호프집까지 가야만 하는 이유를 억지로 나열하며 나의 바쁜 걸음을 합리화했다. 술에 취한 나를 데리러 매번 우리 과 술자리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너의 기분을 이제서야 조금이나마나 알 거 같았다. 긴 새벽을 전화 한 통 때문에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뛰어온 너의 기분을 이제와서 알 거 같다. 술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수없이 고민했다. 이 문을 열까, 아니면 그냥 다시 되돌아갈까.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문을 열었다. 덜컹, 호프집 문 위에 달려 있는 종에서 종소리가 났고 나는 젖은 우산을 대충 우산꽂이에 쑤셔 넣고 발을 옮겼다.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건 겨우 세 테이블이였다. 그 중 두 테이블은 경영과 였고. "어, ㅇㅇ야!" "아, 오빠. 저.. 옹성우는.." "아 성우랑 다니엘은 잠깐 저 편의점갔어.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다니엘은 보나마나 담배를 한 갑 사서 몇 개비를 태우고 올 것이고, 성우는 그 옆에서 사이다를 마시고 있겠지 "근데 아까 준영 선배랑은 왜.." "아- 근데 그건 내가 봐도 준영이가 잘못했어. 걔 존나 뇌로 필터링 안 하잖아.." "그니깐, 안준영 존나 왜 그러고 사는 지 이해가 안간다니까.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ㅇㅇ를 건들여. 성우 빡돌게.." 저, 저요? 나의 물음에 선배들은 말도 마라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중 나와 좀 친한 선배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해왔다. 그 안준영이 막 둘이 언제 깨지냐고, 안 지겹냐고..7년 사귄거면 둘이 갈때까지 이미 간 건 빼박이겠지 이러면서 별 생지랄을 다 했어. 더럽지? 그 새끼가 한 말 마음에 담아 두지마.. 성우도 그래서 순간 욱 했나봐.. 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선배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서 나도 나 자신에게 놀랐다. 성우가 앉았던 자리를 훑어 보며 그의 집업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얘 아직도 술 마실때 병 뚜껑 갖고 노는 거 못 고쳤구나, 그의 자리에 한 가득 쌓여져 있는 병 뚜껑들을 보며 생각했다. 너의 작은 습관들은 모두 스무살 처음 술을 마실때와 똑같은데 우리는 지금 그때와는 너무 다르구나. 성우가 꼬물거리면서 만들었을 병 뚜껑을 하나 집어들었다. 성우는 그 병 뚜껑을 하트 모양으로 구부려 놓았다. 성우야, 그거 알아? 이거 우리 집에 스무 개는 넘게 있을거다. 너 이제 이거 누구 손에 쥐어 줄거야, 우리 둘이 술을 마실 때면 내 손을 쫙 피고 정성스럽게 구부린 병 뚜껑을 내 손에 꽉 쥐어주던 그때가 참 좋았다. 저기 애들 온다, 호프집의 넓은 창문을 가르키며 선배가 말했다. 다니엘과 성우를 포함해 대략 5명 정도가 새벽 공기를 맡고 온 건지 저 멀리서 다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건장했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그 가운데에 있는 성우의 웃는 모습이.
옹성우가 웃고있다. 그것도 아주 해맑게. 평소와 똑같이. 아, 지금 이 기분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까 다행이다 싶은데 한편으로는 이 어둠을 가로질러서 너를 보려고 달려온 내가 너무 한심하다.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야, ㅇㅇ야! 성우 안 보고가?" 선배의 말에 대답도 하지않고 호프집 뒷 문으로 빠져나갔다. 익숙한 호프집이기 때문에 뒷문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오늘도 결국 도망가는 걸까? 근데 뭐 이미 헤어졌는데 도망 안가면 내가 뭐가 되냐. 만약 성우와 마주친다면 내가, 내가 너무 못나질거 같았다. 내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못할거 같았다. 성우가 웃으니까 괜찮아, 근데 나는 너랑 헤어지고 한 번도 웃지 못했는데. 너에게 나는 이렇게 쉽게 잊혀질만한 존재였을까 우산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거 아까랑 뭐가 달라. 아까 종강파티때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은 걸까, 이제서야 머리가 아파왔다. 호프집의 짧은 처마 밑은 다 큰 나를 가려줄 수 없었다. 아, 씻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비를 쫄딱 맞겠구나 자리에 쭈구려 앉아 얼굴을 파묻었다. 손에 무언가 쥐고있는 느낌이 뒤늦게 들어 손을 펴보니 옹성우가 구부렸을 하트 모양의 소주 병 뚜껑이였다. 빗 소리가 너무 구슬퍼서, 아니 빗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소리내서 울어도 아무도 듣지 못할거 같았다. 입술을 깨물으며 울음을 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내 노력과는 다르게 참을 수가 없었다. 울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새벽 감성에 젖어서 더 심한 거 같아, 병 뚜껑을 손으로 꽉 말아 쥐었다. 너무 세게 말아서 내 손이 찔리는 듯 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빗물은 나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고 이미 내 어깨 춤은 젖은 지 오래되었을 거다. 좆같아, 기분이 좆같아.. 나는 결국 새어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달싹이며 울었다. 그때, 내 머리 위로 무언가 덮어졌다. 누군가의 야구 모자였다. 그 누군가에게서는 알싸한 담배향이 났다. 강다니엘이 피는 담배 냄새는 아니였다. 그리고 내 어깨를 적시던 빗물도 멈췄다. 낯선 이의 야구모자는 내 추한 우는 얼굴을 가리기 충분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볼캡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아 젖은 머리칼을 넘기며 내 눈에 그 사람을 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은 상상치도 못한 경영 김재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