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d_ piper
w. 달 월
http://www.instiz.net/writing/4441070(7편)
-전편이랑 같은 흐름이라 전편 링크 첨부 해 놓을게요!!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역시 브금은 필청! 꼭꼭 들어주세요 ㅎㅎ(바로 listen in browser 누르시면 됩니다용)
21.
"너 방금 누구랑 전화 한 거냐고. "
"... 별거 아니에요. 오빠, 그건 그렇구, "
"말 돌릴 생각하지 말고, 누구냐고. "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
아무것도 아니긴.
내가 들었는데. 방금 전 통화를 하던 세린이의 수화기 너머로 작지만 정확하게 ‘이여주 ‘라는 이름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대체 또 무슨 짓을 벌인 걸까. 태평하게 어떤 일도 없다는 듯 뻔뻔한 표정을 하는 세린이 기가 찼다. 사실 이 자리에 세린이를 불러낸 것도 다 누나 때문인데,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생겼구나, 하고 내 직감이 말을 한다. 아까 우연찮게 보았던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이제 나 못해. 걸렸어. '
딱 보기에도 수상쩍은 내용이었다. 그리곤 세린이는 이 문자를 받고는 자리를 피해 황급히 통화를 하러 갔으니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내 선에서 분명하게 했었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세린이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경험상으로 이런 아이들은 관심 주지 않고 가만히 두면 제풀에 지쳐 떠나가기 마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아리에서 알게 된 후배고, 공연까지 함께 하게 되어 그게 흐지부지하게 변하게 되었다. 나도 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이란걸. 그래서 늦게나마 선을 그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사달이 나게 된 거고.
이 모든 일들의 발단은 어제부터 시작된다. 수업을 마치고 인문관 안에 위치한 도서관을 가는 길에 누나를 보았다. 그 앞에는 세린이가 있었다. 인사를 하기에는 심각한 분위기였고, 전 날의 애매한 말다툼도 생각이 나서 기다렸다가 아는 척 하던가 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누나가 서 있는 곳의 반대쪽에 위치한 벤치에 앉았다. 절대로 엿들으려고 했던 의도는 아니었다.
"... 도와주시기로. 정국 오빠랑 저. "
예상치 못한 저 둘의 대화 속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도와주기로 했다고? 순간적으로 한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하던 강렬했던 입맞춤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입술을 꾹 물었다. 누나가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열이 오르는 느낌에 손부채질을 하며 돌아갔던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음을 이을 누나의 대답이 궁금해서.
"그거, 네가 일방적으로 말한 거지, 난 그러겠다고 한 적 없어. "
그럼 그렇지. 이렇게 김세린이 강요를 했던 것이 분명해졌다. 누나의 침착한 말투가 새삼 낯설었다. 어제 내게 보여줬던 모습보다도 더 차가운 느낌이다. 원래 내게 누나는 한없이 맑고 따뜻한 느낌의 사람인데. 어제 누나 모습과, 지금 세린이 앞에 서 있는 저 모습이 겹쳐 보여서 조금은 두려워졌다. 이제 내게도 저렇게 냉랭하게 대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었다. 인사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날이 선 세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 진짜 웃기네요. 그리고 언니, 전부터 느낀건데 행동 처신 똑바로 해요."
"뭐? "
"알잖아요, 언니 행동. 뭐하는 거에요. 어장이라도 치시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참다가 말씀 드리는 거에요. "
"... "
"노선 똑바로 해요. 태형 오빠랑 언니 잘 되가는 줄 알고 부탁한 거였죠, 저는. "
당사자인 사람으로서, 아니다. 저 이야기에 포함된 한 사람으로서, 하나도 맞지 않는 사실들에 화가 치밀었다. 물론, 태형이 형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 형이 어장을 당한다던가, 그럴 만한 작자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누나는 '어장'이란 말의 '어' 자에도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근데 왜 아무 말 못하고 서있는 거야. 바닥만 보고 있는 모습이 답답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니가 뭘 안다고 그딴식으로 말해.
한 발 늦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낮게 깔린 태형이 형의 목소리가 정적이 돌았던 둘의 공간을 매웠다. 저런 모습은 처음본다. 정확히는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딱딱하고 가시가 돋쳐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난데없는 형의 등장에 당황한 듯한 세린이가 자신의 말을 수습을 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누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바닥만 보고 있고. 자세히 보니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저렇게나 여리면서, 어제도 나한테 한 말을 두고두고 곱씹었을게 뻔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미안해했겠지. 뻔했다. 다가가서 그 여린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어장?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좋아해서 이러는 건데, 니가 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
와, 세다.
누나의 손을 잡고 뒤를 도는 형과 눈이 잠시 마주친 듯한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분명히 내게로 똑바로 향한 눈이었다. 아마 여기에 서있던 나를 발견한 듯하다. 그리고 저 말은 세린이가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겠지. 결국은 쐐기를 박았다. '좋아한다고. ' 사실 이 말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뒤 문장이었다. 누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냐는 말. 형과 누나 사이에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인 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나보다는 오래되고 두터운 사이라는 점은 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나가 형을 대하는 행동은 편안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서로를 잘 알터였고, 그에 비하면 내가 아는 누나의 모습은 새발의 피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누나의 모습이 극히 작은 부분이라 해도, 정말 여리고 맑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사실을. 아마 형은 그 작은 부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샘이 났다.
온전히 나만 알고 싶은 누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이 싫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다. 누나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형이 좋아한다 한들 흔들리지 않겠지 싶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라도 흔들릴 것 같아 조금은 초조해졌다. 내게 없는 자상함과 섬세함이 형한테는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젠 확실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행동이든 내 감정이든.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불안한 이유도, 태형이 형에게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도. 콕 집어 언제부터라고 정확히 말하라면 못하겠지만, 아마도 누나의 고백을 들었을 때부터 일 거다. 나와는 다르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누나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 확고한 눈동자를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의 설렘도. 아마 그때부터, 내가 확신이 생기고, 내 감정에 대해 더 알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누나는 늘 내게 거짓없이 다가와줬다. 나는 내 감정에 대한 확신을 운운하며 계속 피해만 왔는데, 그런 내 모습도 모두 알면서도 내 단점들이 자신을 아프게 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안아줬다. 이제는 그런 누나에게 내가 다가가는 것이 맞았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누나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거였다. 그날 밤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애매하기만 한 내 행동에 상처 받았을 거다. 오늘은 글렀고, 내일이나 빠른 시일 내에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번째 브금이에요 들어주시면 설렘이 더 가득해지는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요일. 유일하게 누나랑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개운하게 씻고, 어젯밤에 골라놓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잘 뿌리지도 않는 향수도 뿌렸다. 살짝 긴장이 된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지. 생각해보니, 대학에 들어와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적당한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던 나였으니까. 그래서 그들과 감정의 교류도 많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잘못할 일이나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누나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내가 내가 그어놓은 선을 지우고, 멀리에 있던 누나에게 다가간 거 일 수도 있고. 그동안 이런 식으로 헷갈려왔다. 그저 동경으로 인한 감정인지, 아니면 정말 사랑이란 감정인지. 이 두 감정의 차이란 한 장의 종이 같았다. 미묘하게 아주 살짝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동경하는 사람이라도 그 주변 사람에게 질투나 초조함을 느끼진 않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학교를 걸으면서도 곳곳에 서려있는 우리 둘의 기억에 간간이 웃음이 나는 이유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겠지. 지금 카페 앞을 지나면서도 누나가 좋아하던 음료가 생각이 난다. 자기가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녹차 프라푸치노라고. 그런데 비싸서 맨날 결국 아이스티를 먹는다며, 그날도 아이스티를 시켰다. 왜 이리 사소한 기억이 많은 건지. 일단, 이거라도 주면서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음료수를 사서 강의실로 올라갔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저 구석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는 엎드려있는 누나가 보였다. 반가움에 웃음이 나왔다. 이젠 엎드려있는 모습만 봐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이걸 줘야 하지. 긴장감에 음료를 들고 있던 손이 한층 더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머뭇거리며 누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무 소리 없이 다가온 탓인가, 여전히 움직임 없는 누나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자는 건가. 깨워야 하나?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하면 이상할 텐데. 그냥 인사할까. 그것도 이상한데. 발걸음을 멈추고 누나 앞에서 가만히 서있는 내 모습에 강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부담스러움에 일단 깨우고 보자, 하고 누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 행동에 놀란 듯,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토끼 같은 눈으로 멀뚱하게 책상 위에 놓인 음료와 나를 번갈아본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 뭐라고 말할지 생각 좀 하고 올 걸 그랬다.
"... 녹차 프라푸치노에요. "
기껏 꺼낸 말이 이거다. 내 말에 누가 그걸 모르냐는 듯 아무 말없이 고개만 갸웃거리며 그래서? 하고 묻는 누나의 표정이 여전히 딱딱하기만 하다. 멋쩍은 반응에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사과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입을 천천히 열었다.
"누나 이거 좋아하잖아요. 그냥, 생각나서. 미안한 것도 있고. "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웠던 일이었나. 민망함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두고 말을 했다. 곧, 푸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누나에게 돌리니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 웃음이 터진 누나가 보였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부끄러움에 빠르게 누나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누나가 웃긴 했지만 사과가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고는 끄적끄적 글씨를 쓰고는 작게 찢어서 반으로 접었다. 앞을 보니 내준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지 볼이 살짝 살짝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접어 놓았던 쪽지를 집어 들어 누나 쪽으로 내밀었다. 음료수가 화를 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라면서,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하느라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 줄도 모르겠다. 짐을 챙기고 있는 누나에게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고개짓을 해 보이곤 강의실을 나섰다. 어지럽게 흩어진 말들을 한 곳에 모으려 머리를 벽에 기댔다. 그러기도 잠시, 곧 헛기침을 하며 내게 다가오는 누나의 모습에 애써 모아두었던 말들이 무색하게 다시 흩어져버렸다. 그냥 내 진심을 담아서 얘기하는 수밖에 없나 보다.
기분 좀 풀렸어요?
여전히 알 수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누나에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지니 아니, 하고 차가운 대답이 돌아온다. 어쩐다. 당혹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 나를 보고는 장난이라며 이제 괜찮다는 말에 맥이 탁 풀린다. 어쩐지 내가 누나한테 말리는 느낌인데. 잠시 가만히 웃고 있는 모습을 관찰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웃을 때 보조개가 쏙 말려 들어간다. 볼에 보조개가 있었네. 새로운 발견에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웃을때 흔들리는 살짝 뻗친 머리칼도 애교스러웠다. 이젠 무얼 보아도 다 새로워 보이는 게 큰일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똘망똘망한 눈을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천천히 입을 뗀다.
"근데, 뭐 할 얘기 있어? "
"아니, 그냥. 그때 괜히 감정 상하게 해가지고, 미안해요. 누나가 그렇게 느꼈을 줄 몰랐어요. "
"아냐, 나도 그런 식으로 말했으면 안 됐어. 진짜 미안해. "
"이제 신경 쓸 일 없게 할게요. "
"됐어,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내가 너 좋아하는 게 단데, 뭐. "
누나의 마지막 말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무심히 툭 말을 뱉고 난 뒤 뒤도는 누나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서있었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한 번도 내가 표현 한 적이 없었으니.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밥은 자기가 사겠다며 당당하게 앞서 걸어가는 저 모습 뒤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마음이 쓰였다. 가만히 멀어져 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니 두려워졌다. 이렇게 언젠가 내게 뒷모습을 보이고 멀어져 갈까 봐.
"누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는. "
아마 누나는 못 들었겠지. 들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이 말은 누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예전처럼 같이 학식을 먹고, 깜깜해진 하늘 아래서 나란히 걸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내겐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 사이에 있는 공기가 낯설고 간지러웠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는데, 어느새 누나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아쉬웠다. 누나 또한 그런 듯 보였지만 손을 흔들어 보이곤 뒤도는 모습에 낮은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그, 아까 누나가 말했던 거 있잖아요. "
"응? "
"누나가 좋아하는 게 다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
"... 아. "
"나 신경 쓰여요. 신경 안 쓰려고도 해봤는데 그게 안돼.”
“...”
“누나 마음 상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이제 서로 감정 상하는 일 없게 할 거 에요. "
그리고 좋아해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차마 이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할지 몰라서. 대체 누나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낸 걸까. 새삼 누나가 대단해 보였다. 좋아한다는 말 대신 신경이 쓰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많은 뜻이 담긴 말이었지만, 누나에게 제대로 전해졌을지는 미지수다. 저 말에는 나도 이제 제대로 행동할 거고, 그러니까 누나도 태형이 형이랑 조금 거리를 두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있었고, 이젠 전과는 달라진 내 감정을 말하고 싶기도 했다. 저 다섯 글자에는 담기에 너무 많은 의미가 있어서 아마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걸 안다. 그래도 누나라면, 여주 누나라면 알아줄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내 말에 살짝 붉어진 볼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닫히는 문을 보고 나서야 뒤돌아섰다. 시간이 궁금해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했다. 7시 10분.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아래 뜨는 카톡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22기 김세린: 오빠 뭐해요? "
이제 징글징글하다. 이 정도 했으면 좀 알아채야하는데.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오늘 다 정리해버리자, 라는 생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도 가지 않아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오빠!!! 웬일이에요, 전화도 다하구. 뭐하고 있어요? "
"나 할 말 있는데 좀 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
"당연하죠! 어디로 갈까요? 지금 당장 갈게요. "
"학교 앞에 공원 알지. 거기 안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
이제 진짜 확실히 끊어 내야 했다. 더는 누나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 이상은 누나한테 상처 주지 말라고 말해야겠다. 그리고 네 마음 접으라고, 더 이상의 감정을 내게 소모하지 말라고. 아까와는 다르게 할 말들이 착착 정리가 되었다.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지막 브금이에요! 마지막까지 필청!!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딸랑, 하고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소리를 내었다. 나를 발견한 세린이가 밝게 웃으며 내 앞으로 와서 앉는다. 오래 기다렸냐며 애교스러운 말투에 조금,이라고 간단히 답하고는 입을 닫았다. 뛰어왔는지 살짝 가쁜 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고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마실 거 좀 사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반짝거리며 진동을 내는 세린이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 이영진: 돈 받았어. 한시간 반 정도 있다가 출발 할게. "
: 근데 오늘도 괜찮을 지 모르겠어.
: 이런 거 꼭 해야 하나. 일단 가긴 할 건데.
친구인가. 무슨 이야긴지 통 모르겠는 내용의 문자들이 화면 가득 떠있었다. 뭐, 알 바 아니지. 화면이 몇 번 정도 더 깜빡이다가 잠잠해질 때 즈음, 세린이가 커피를 들고는 자리에 앉는다. 조잘거리며 오늘 제 하루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에 그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언제 말해야 하려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그래서 오늘 교수님이 화가 나셨더라구요, 진짜 어이없지 않아요? "
"그러네, 근데 나 할말 있는데. "
"아직 안 끝났어요, 아 그리고 막 애들이 반응 안해주니까.... "
내게 반응까지 유도해가며 계속되는 이야기에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 얘랑은 만나면 힘이 빠져. 그렇게 세린이의 이야기는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커피는 또 얼마나 천천히 마시는지, 나는 이미 비우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반 이상이 남은 커피가 보였다. 이제 슬슬 이야기 소재가 줄었는지 처음보다는 조용해진 모습에 이제 나갈까, 하니 걸어 놓았던 옷을 입는다. 카페 밖으로 나오니 차가워진 바람이 몸을 떨게 만들었다. 아까 잠시 소나기가 내리더니 순식간에 추워진 모양이다. 소나기. 누나가 내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간다.
'넌 나한테 소나기 같은 사람 인 것 같아. 나도 너한테 그런 사람이면 좋을 텐데. '
언제쯤 이 말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아리송한 말이었다. 말없이 세린이와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제 핸드폰을 한참 보더니 표정이 싹 굳는다. 슬쩍 곁눈질로 화면을 보니 또 한 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이영진: 이제 나 못해. 걸렸어. '
제 핸드폰을 향한 내 눈길을 느꼈는지 급하게 아래로 내리고는 저 잠시 전화하고 올게요, 하고는 내게서 멀리 떨어진 분수대 쪽으로 향하는 세린이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다. 따라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뒤를 밟았다.
"뭐? 어쩌다가 걸렸는데. "
".... 이여주랑 ....... "
"너 진짜 답 없다. 돈 다시 보내. 일단 끊어봐 . "
무거운 한숨을 내뱉고는 발을 동동 구르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상대가 뭐라고 말한 지는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얼핏 누나의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어쩌다가 걸렸냐니. 싸한 느낌이 자꾸만 든다. 갑자기 강하게 부는 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있더니 뒤돌아서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입술을 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당황함은 싹 지우고 내게 걸어온다. 그 모습에 뒤에 있던 분수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살짝 물이 고여 축축했다.
"너 방금 누구랑 전화 한 거냐고. "
"... 별 거 아니에요. 오빠, 그건 그렇구, "
"말 돌릴 생각 하지말고, 누구냐고. "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
"나 다 듣고 물어보는거야. 한번 더 물을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
다 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확실했으니. 다 들었다는 말에 크게 당황하고는 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이 보인다. 통했다. 이제 조금만 더 부추기면 술술 이야기가 나올 터였다.
"그게... "
"알아, 여주한테 왜 그래. 어제도 그렇고. "
"저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너무 화가 나서... "
"걸릴 걸 알았으면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할까. 똑바로 상황 제대로 말해주면 해결 방법은 찾아줄 수 있을 거 같은데. "
"사실은... "
이야기를 마친 세린이가 기가 찼다. 기상천외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누나에게 자존심이 상한 세린이가 화가 나서 어제 누나 집 앞에 찾아갔다. 문을 두들겼지만 누나는 없었고, 잔뜩 화가 난 세린이는 화풀이 대상으로 누나가 내어 놓은 음식물 봉투를 터뜨려서 집 앞을 더럽히고 돌아왔다. 여기서 멈췄으면 다행인데, 제가 화풀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계속 그 행동을 했단다. 밤에 다시 가보니 누나가 깨끗이 치워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그 짓을 다시 행했고. 그런데 낮에 했을 때처럼 터뜨리기엔 소리가 많이 날 거 같아서 커터 칼을 가져다가 잘랐다고 덧붙였다. 사실은 음식물 쓰레기를 터뜨리는 게 목적이 아닌, 그 봉투들을 매만질때 나는 소리와 딸각이는 소리에 누나가 겁을 먹기를 바랐다고 한다. 자기도 자취를 할 때 문쪽에서 소리가 나면 무서웠던 경험을 살려서. 엽기적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자기가 또 거기에 가기엔 무서웠는지 자기 동기에게 돈을 주고는 그래달라고 부탁을 한 거였다. 그러다가 누나에게 걸린거고. 얼마나 놀랐을까. 세린이에게 뭐라 말할 가치조차 못 느껴 잠시 가만히 입을 꾹 물고 서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려고. 얼른 가서 사과해. 잘못 했잖아, "
"그렇긴 한데, 너무 하네요, 오빠는. 저도 제 나름대로 상처 많이 받아서 이런 짓까지 벌인 거라구요... "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제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어대는 세린이를 달래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도 무서웠던 일을 그렇게 악용을 하는 게 정상인가.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 않고 서있었다. 누나가 걱정되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가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세린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달래 달라는 듯이. 내게 다가온 그녀를 살짝 거칠게 밀어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
"잠깐만 안아 주면 안 돼요? 나 무서워. "
"내가 왜. 너 제발 이러지 좀 마. 나 너한테 감정 없다고 말했잖아. 나... "
"..."
"나, 여주 누나 좋아해. 제발 그만해. 이제 더 이상 무슨 일 만들면 가만히 안 있어. 그러니까 빨리 사과하고. "
처음으로 내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물론 그 처음이 세린이 앞이라는 게 아쉽지만. 울고 있는 세린이를 남겨두고 뒤돌아섰다. 그리곤 급하게 전화를 꺼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신호음이 울렸지만,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어쩌지. 찾아가야 하나. 그러기엔 누나가 놀랄 거 같기도 해서 이도 저도 못했다. 그저 핸드폰만 잡고 바보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내 숨이 만나 하얗게 입김이 번졌다. 날씨는 또 왜 이리 추워. 한참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누나, 어디에요?'
간단한 카톡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답을 기다렸지만 답이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한 방울 두 방울 소나기가 또 다시 쏟아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추워지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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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달 월 입니다!!
와!!! 빨리 들고왔죠!! 평소보다는 짧지만은 많은 게 담긴 화였어요 ㅎㅎ
정국이 시점에서 그려보았어요 ㅠㅠ 이제야 제 감정을 깨달았지만 살짝 늦은 감이 있죠?? 바로 뒤에 여주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전정국은 바보야!!!
아무래도 정국이 시점이어서 평소보다 짤을 많이 넣을 수가 없더라구요.. 글만 있어서 살짝 지루하셨을 수도 있을 거같아요...(무룩)
급하게 써서 흐름이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는데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좀 짧더라도 자주자주 도짜님들에게 찾아 오려고 합니다 매번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곧 다음 편도 빠르게 써서 들고 올게요
진짜 너무 추워졌어요 감기 다들 조심해야 해요.. 입김 나오는 거 보고 진짜 식겁했어요 ㅠㅠ
곧 다시 봐요 ㅎㅎ 오늘은 짧은 사족으로 인사드릴게요 금방 올 거니까!!
-맞춤법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 혹시 보고 싶으신 리퀘있다면 마구마구 던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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