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무런 일정도 없는 하루가 주어졌다. 매니저형에게 갖은 애교를 부려 따낸 외출증으로 쇼핑을 나간 멤버들도 있었고, 자진하여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소속사 사옥으로 향한 멤버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칩거를 선택한 멤버들도 있었는데, 경수와 준면은 그에 속했다. 식탁에 앞에 앉아 신문의 별자리운세 코너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준면은 경수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형, 밥 다 됐다구요."
"어어."
경수는 된장찌개를 식탁 중앙에 올려 놓고는 준면의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여전히 별자리 운세에 두 눈을 고정시킨채 젓가락을 거꾸로 집어든 준면에 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 젓가락…"
"나 오늘 재물이 빠져나가기 쉬운 날이래.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에 한푼 두푼 빠져 나간다? 쇼핑간 멤버들 내 카드 들고갔어?!"
아마도. 경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 앞에서 감독:김준면 주연:김준면의 분노에 찬 노모드라마가 펼쳐졌다. 경수가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밥먹기에 열중하자 정신줄을 잡은 준면이 내던진 신문을 다시 주워와 입을 열었다.
"경수 너 염소자리 맞지?"
"네."
"어디보자… 골키퍼 같은 당신. 이제는 다가오는 사랑을 막기만 하지 마시고 마음을 열어보세요, 라는데?"
경수는 진지한 주면의 말에 국을 떠먹다 말고 설핏 웃었다. 막을 사랑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준면은 신문을 옆에 접어두고 밥 한술을 크게 뜨며 경수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염소자리의 운세는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방관하라.' 였다. 무신경한 경수를 두고 완전히 자신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한 준면은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경수야."
"네?"
"…여,여장 말인데."
종대의 어머님이 손수 만드신 오징어포를 입에 집어넣던 경수가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삽시간에 굳어버리는 표정에 준면이 오한을 느끼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하기 싫은거 알아. 네 성격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유독 너한테 장난 심한 백현이랑 하게 되서 좀 그렇지."
"…네."
"그런데 이왕 하게된 거 잘 해 보자. 백현이가 장난 심한 건 맞지만 너도 백현이를 너무 밀어내고만 있지 않나 싶어. 네 별자리 운세처럼.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
"백현이가 나쁜 애 아니라는 건 알지? 오늘부터 백현이를 잘 살펴보고 좋은 면들만 찾아 봐."
단호한 준면의 앞에서 경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모래알 처럼 까끌거리는 밥알을 입안에서 굴리며 경수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부터 백현은 남들에게 한번 칠 장난을 경수에게는 세번을 치며 기어코 잠자는 경수의 성질을 건들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체벌을 가해도, 험한 욕을 퍼부어도 변함없는 웃는 낯에, 결국 마음 한켠에 가득 쌓여버린 분노는 제 형태를 '미움'으로 변질시켰다. 요 근래 백현의 '백'자만 나와도 날을 세우던 제 자신을, 경수는 끝내 인정했다.
"배고파."
칭얼 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현이 앉아있는 경수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갑작스레 뒷통수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경수가 고개를 획 쳐들자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백현이 웃으며 경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면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자신의 밥그릇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경수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백현의 명치를 강타할 타이밍이었다.
"……."
"……."
"밥 줄게. 비켜."
"어? 어…."
왠일로 고분고분한 반응에 백현이 의아한 얼굴로 경수에게서 떨어졌다. 백현이 준면에게 왜 그러냐는 듯한 눈짓을 날렸지만, 고개를 돌려 밥을푸는 동그란 뒷모습을 한 번 바라 본 준면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드디어 우리 숙소에도 평화가!
백도를 아십니까? 中
W.다올
"잠깐 쉬었다 하자."
안무가의 말에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 연습실 바닥에 바람빠진 풍선마냥 몸을 늘어뜨렸다. 매일같이 맞춰보는 타이틀곡 무대에 콘서트를 위한 무대들 까지 더해지자 연습량은 배가 되었다. 경수는 소파에 기대어 팔로 눈을 가린 채 바닥에 누워있는 백현을 바라보았다. 오늘로써 변백현 관찰기가 5일째에 접어들었다. 아까부터 발목쪽이 불편한 듯 절뚝 거리던 백현은 몇차례 작은 실수들까지 범했다. 하지만 연습생 시절부터 아픈것은 숨기는데 더욱 익숙했기에, 그의 부상은 전지적 변백현 관찰자 시점에서만 알아챌 수 있던 사실이었다. 미련한 자식. 경수는 혀를차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백현을 관찰하며 얼마 안가 알게 된 사실은, 백현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백현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생색내지 않았다. 남자다운 면모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갈줄도 알았으며 타고난 애교성과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상대방을 적당히 구슬릴 줄도 알았다. 하지만, 적정선을 아는 백현이 왜 자신에게는 그렇게 미친개처럼 굴었는지 경수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리고 양손에 잔뜩 무언가를 들고있는 매니저가 들어왔다.
"백현아, 일어나 봐. 다쳤다고 해서 파스같은 것 좀 사왔어."
밭은숨을 내쉬던 백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주위에 있던 멤버들이 하나 둘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매니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발을 쥐고 두어번 돌리자 백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형."
"어?"
"나 다친거 어떻게 알았어?"
"경수가 문자 해 줬어."
아, 경수가 문자 해 줬구나. …경수? 도경수?!! 백현이 급하게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턱을 괴고 응시하던 경수와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둘 중 누구하나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통에, 결국에 백현은 졌다는 듯 먼저 웃어보였다. 그동안 경수가 익히 봐오던 짓궃은 웃음이 아닌, 진심이 담긴 예쁜 웃음으로. 오히려 당황한 것은 경수 쪽이었다. 경수는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빨갛게 물든 귀 끝을 바라보며, 백현은 발목의 욱씸거림을 뒤덮는 따듯한 감정의 홍수에 몸서리쳤다.
거실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경수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위로 올리자, 다른때와는 조금 다른 기색의 백현이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할 말 있어?"
"아깐 고마웠다고."
"됐어. 지금은 좀 괜찮아?"
"응. 덕분에."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기를 털어내는데 박차를 가했다. 늦게까지 이어진 연습에,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지만 서두른다면 받아놓은 테니스의 왕자 극장판의 뒷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프닝곡을 흥얼거리는 경수(22.오덕)의 옆에서 백현은 괜히 목 언저리를 긁으며 서 있었다. 어느정도 마른 머리를 빗으로 정리한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까지도 백현은 홀린 듯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더 할말 있어?"
어느새 가까워진 얼굴에 백현은 뒤로 두발자국 물러섰다. 어서 빨리 PMP 속 푸른 테니스 구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경수는 오늘따라 이상한 백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앙대..! 구려지는 경수의 얼굴을 보던 백현이 속으로 절규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주 금요일에 일정 없지?"
"어. 그거 하나 물어보려고 지금까지 기다린거야?"
"아니!!"
우,우리 유서깊은 변씨 집안은 대대로 은혜를 입으면 그 즉시 갚으라고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부터 말씀을 하셨…
"용건."
"…밥 사줄게."
"밥? 고작 매니저 형 불러준걸로?"
"아니 그게…싫음 말어라. 야 박찬열!!!! 김종대!!!"
"누가 싫대?"
토라진 얼굴에 경수가 피식 웃었다. 자신을 놀리던 백현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어쩐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았지만 백현에게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백현은 밝게 웃으며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까무라치며 손을 쳐냈을 경수였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이같은 얼굴이 왠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은 경수 또한 묘하게 들뜨는 기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출출한 배를 움켜쥐며 방에서 나오던 준면은 거실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생명체를 보고는 굶주림도 잊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아무래도, 침대 맡에 가져다 놓은 십자가가 이제서야 제 능력을 발휘하는 듯 했다. 드디어 우리 숙소에도 진정한 평화가…!
*
백현이 제 방 달력에 친히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고대하던 금요일이 되었다. 신발장에서부터 백현은 비장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경수의 방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30초가 흐르고, 애간장이 타들어가다 못해 없어질 지경이 되자 준비를 마친 경수가 방 문을 열고 나왔다. 검은 스냅백을 대충 머리에 얹으며 걸어 나오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심장의 무리가 오는것을 느꼈다. 얼빠진 얼굴에 다가온 경수가 작은 손을 흔들어보이자, 그제서야 백현은 흐물흐물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해."
"경수오빠 오늘 간지폭발."
"뭐래. 앞장서."
도도하게 저를 지나치는 작은 뒷모습을 보며 백현은 바람빠지는 미소를 흘렸다. 도경수, 이 요물!
_
뭘죠 이 병맛같은 텍은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함다ㅠㅠ
다음편은 조금 더 빨리 가져올 수 있기를!
항상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마이엔젤들ㅠㅠㅠ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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